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화 (1/415)

1화. 그 용이 아니라 이 용인데

* * *

눈이 내렸다.

"…하아. 하악."

한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이어졌다.

추위와 쏟아지는 눈에 벌벌 떨면서도 남자는 손에 든 무언가를 소중히 품에 안으며 산에 올라갔다.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빨리.'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쳐가며 남자는 정상을 바라보았다.

고작 몇 걸음.

'…어서!'

눈에 맞을수록, 앞으로 나아갈수록 남자의 몸이 마치 돌이 되듯 점점 뻣뻣하게 굳어져 갔다.

한 걸음.

두 걸음.

남자는 정상에서 무릎을 꿇다시피 쓰러져서는 얼굴을 가렸던 가면을 벗었다.

추위로 새빨개진 소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소년은 정상에서 그 무엇보다 아름다웠을 바다를 내려보며 잠깐 깊은숨을 토해냈다.

"…하."

물이 오염된 이 세계에서 바다는 이제 가장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이제는 달라.'

무엇이 다르다는 건지, 소년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희망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다르다고!'

소년은 품에 간직했던 물건을 내려놓았다.

병이었다.

병에 담긴 무언가는 고고한 빛을 내며 마치 남자를 보듬듯 따뜻한 빛을 내보였다.

소년은 손을 감쌌던 장갑을 벗었다.

장갑을 따라 팔찌에 달린 작은 랜턴이 흔들렸다.

맨살이 드러난 그의 피부는 돌같이 굳고,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눈에 닿자 그 범위가 손등 전체로 순식간에 번져갔지만, 소년은 꼭 눈을 처음 느껴보는 사람처럼 차가운 그 촉감에 깜짝 놀랐다.

―머나먼 정상에서 바다가 보이는 장소에 서거라.

소년은 그자가 알려준 목소리를 떠올리며 병을 열었다.

―그 높이는 모든 걸 우러러보시던 왕의 시선이며 왕을 향한 그대의 존중이라네.

병 속에서 고고한 빛이 흘러나오자 소년의 손등에 물들었던 푸른색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염이 사라졌어.'

믿을 수가 없었다.

정화제를 바른 것도 아니고, 먹은 것도 아닌데 물의 저주가 사라지다니.

물이 오염된 이 땅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기적이나 마찬가지인 힘.

'이게 왕의 힘인가. 이 힘이라면 정말로 세상을, 내 가족들을 구할 수 있는 건가.'

소년은 고고한 빛을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가장 위대하신 왕이시여."

아직 미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간절한 말을 따라 고고한 빛이 덩달아 흔들렸다.

자신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은 것처럼.

"저 하벨 티에라가 이 미천한 몸을 당신께 바치나이다."

하벨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모든 건 자신의 소중한 것을 위해서였다.

자신은 할 수 없었고, 저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일.

그 일을 위해서는 기꺼이 자신의 몸을 바칠 수 있었다.

"…부디, 제게 깃드소서."

하벨은 고고한 빛을 바라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세상의 수호자이신 용들의 왕이시여……."

아주 활짝.

팔찌에 달린, 작은 랜턴이 따뜻한 빛을 뿜어져 나왔다.

* * *

쾅!

중년의 남자는 화를 더는 참지 못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소리인가?"

기사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한겨울이 몰려온 듯 싸늘했다.

기사들은 깊은 죄책감으로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대들이 한 말에 따르자면 일반인에 불과한 하벨이 그대들의 시선을 따돌리고 이곳을 벗어났다는 건가?"

자신이 꺼낸 말이 퍽 우스운지 중년 남자의 입꼬리에 비웃음이 살짝 어렸다.

하벨이 기사들을 따돌려?

"물의 내성이 없는 내 아들이, 오염된 물로 내리는 그 눈을 맞으며 산에 올라갈 동안 네놈들은 따뜻한 밥을 먹고, 따뜻한 잠자리에 들었단 말인가?"

살짝 올라갔던 언성이 오히려 저음이 되어 더 살벌하게 들려왔다.

짙은 살기에 기사들은 몸을 떨었다.

정령사가 분노하면 자연이 일렁인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제야 이해했다.

공기가 정말로 가라앉아 온몸을 압박했고 숨까지 막혔다.

"내 오늘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정령사로 이루어진 왕국을 제외하면 유일한 정령사 가문.

그 티에라를 이끄는 가주인 룬델 티에라의 말은 정령사의 희소성만큼이나 묵직했다.

"이놈들 전부를 가둬라."

룬델은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기에 고갯짓으로 저들을 가리켰다.

"가, 가주님!"

"살려주십시오, 가주님!"

그들의 시끄러움은 얼마 가지 않았다.

"…하아."

룬델은 모두가 나간 제 집무실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고작 이틀.

그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룬델은 자신의 주변에서 키득거리는 정령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내가 분명 하벨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알려달라고 말했을 텐데?"

하필 첫째도, 둘째도 잠깐 자리를 비운 상태라 자신까지 비워도 될지 말지 고민했었는데.

'가지 말아야 했다. 가지 말았어야 했어. 왕의 탄생일이 뭐라고.'

룬델의 시선은 새의 형상을 한 정령에게로 향했다.

찻잔에 앉아 차를 빤히 보고 있던 정령은 그 시선에 투덜거렸다.

[난 분명히 싫다고 했어. 그건 우리 모두의 생각이기도 하고.]

정령은 부리를 딱딱 마주쳤다.

"내가 부탁했잖아, 세렌.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내게 알려달라고."

룬델의 언성이 살짝 올라갔다.

[그래도 싫은 건 싫어. 걔는 우리도 보지 못하는데? 아니, 그걸 떠나서 걔가 싫어.]

세렌의 눈초리가 살짝 매서워졌다.

[룬델, 알잖아? 너라서 내가 이런 말을 들어주는 거라는 걸. 나는 네가 마음에 들거든. 그리고 우리한테 네가 필요하니까.]

"하벨은 내 아들이야. 죽을 뻔했다고."

한껏 사나워진 룬델의 목소리에도 세렌은 피식 웃었다.

[그건 나나 우리한테 있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고 있잖아? 우리한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야.]

세렌의 저 오만한 말에도 룬델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정령들에게 현재 중요한 건 오염된 물의 정화였으니.

* * *

"…괜찮으십니까?"

누군가의 걱정이 담긴 말이 귀에 닿자 스르르 눈을 뜬 소년은 눈살을 찌푸렸다.

몸이 왜 이렇게 무거운지.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아…….'

천천히 생각이 났다.

자신은 죽었다.

―푸욱.

몸을 꿰뚫는 차가운 날붙이의 수많은 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었고, 아직도 배와 가슴이 뜨거웠다.

'날 죽인 건…….'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귀를 찌르는 낯선 소리에 소년은 눈을 깜박거렸다.

'도련… 님?'

난생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아니, 웃기지도 않을 소리였다. 도련님이라니. 자신은 도련님이 아니었다.

용왕.

모든 바다와 물의 지배자였던 자신이 도련님이라니.

"아직 많이 불편하십니까? 곧 헤레스 씨를 불러오겠습니다."

'헤레스는 또 누구야?'

소년은 그대로 경직이 된 채 자신을 바라보는, 아니, 바라보는 게 맞는지조차 의심이 될 정도로 눈을 감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

당황스러움에 목소리가 갑자기 나왔다.

'……?'

소년은 그대로 멈췄다.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떻게 목소리를 잊어버릴까.

소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곧 깜짝 놀라며 당장 몸을 일으켜 손을 바라보았다.

부들부들 떨려왔다.

이렇게 작고 여린 손은 자신의 손이 아니었다.

"카샬……!"

자신의 입에서 낯선 소리가 튀어나왔다. 상당히 가볍고, 장난기가 살짝 섞인 목소리.

"예, 도련님."

저 남자, 카샬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집사, 카샬 메르흔.

저 남자의 이름이 기억이 났다. 분명 집사임에도 옆에 검을 차고 있었다.

"내가, 누구야?"

분명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라는 말을 꺼내려 했지만, 입밖에 튀어나온 말은 여전히 가벼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

카샬은 당황했다.

방금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가.

"아니, 여기 뭐야."

소년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천장에는 전등이. 자신이 누운 침대 옆에 '스탠드'라고 알고 있는 전등이 있질 않은가. 남자가 입은 복식은 정장 차림이지만, 뭔가 현대식과 달랐다.

방의 풍경까지.

꼭 박물관을 들렀다가 어쩌다가 보게 된 '중세풍' 느낌도 났고.

뭔가 현대와 뒤섞인 것처럼 참 자연스럽다 싶었다.

보글보글.

자신의 왼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소년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이거 무슨… 기계야?"

왼팔에 고정되다시피 한 작은 기계가 보였다. 대체 왜 물보라가 일어나고 있는 건지.

"정화… 장치입니다. 아시잖습니까.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카샬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정화 장치……?"

자신은 이상하게도 저 말을 알고 있었다.

머릿속에 지식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물이 오염된 세상에 오염된 물을 견딜 내성이 이 몸에는 있지 않았다.

오염된 물로 몸에 불순물 같은 여러 가지가 생겨나 몸을 괴롭히는, '물의 저주'라고 불리는 병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치료하기 위한 장치였다.

이곳 티에라 가문에서만 만들 수 있는 장치이기도 했다.

'…티에라 가문?'

왜인지 그 이름이 익숙했다.

"설마,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으신다는 건 아니겠죠?"

카샬이 머뭇거리며 소년을 보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동이 없었다.

"하벨 티에라. 도련님의 이름입니다."

'하벨… 티에라.'

하벨은 기억의 단편이 찬찬히 떠올랐다.

―저 하벨 티에라가 이 미천한 몸을 당신께 바치나이다.

분명 하벨 티에라가 자신한테 그렇게 말을 꺼냈다.

'몸을 바쳤다고? 나한테? 대체 어디에서?'

하벨은 자신의 손이 되어버린 낯선 손을 바라보며 다시금 부들부들 떨었다.

"거……."

가슴이 답답하게 뛰었다.

"거울 좀……."

무엇이든 당장 확인하고 싶었다.

'이런 일은 생각도 못 했는데. 나는… 죽었다.'

죽음 뒤에 무엇이 있든 이제 편해질 거라 생각한 것과 별개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카샬은 하벨의 상태에 참을 수 없는 당황스러움을 느끼며 방에 있는 전신 거울을 끌고 왔다.

탁.

하벨 앞에 놓자마자 그는 입을 벌렸다.

마치 자신의 얼굴을 처음 보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게 뭐야.'

하벨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이건 자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난생처음 보는 얼굴.

푸른빛이 도는 은발에 에메랄드빛을 띠는 눈동자. 얼빠진 듯 자신을 쳐다보는 소년은 대체 누구인지.

하벨은 손가락을 움직여 얼굴을 만졌다. 자신이 직접 거울 속에 비치는 저 소년을 만지고 있었다.

'내가… 빙의가 됐다고?'

하벨은 거울을 옆에 내려놓았다.

하벨 티에라가 용왕인 자신을 이 몸으로 빙의시켰다.

한낱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영혼을 옮겼는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하벨은 이 사태를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카샬."

"예, 도련님."

"나는 하벨 티에라가 아니야."

카샬은 그 말에 그대로 굳어졌다.

"나는 모든 물과 바다의 지배인 용왕이야."

여전히 가벼운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하벨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내 말투가 아니다.'

아마도 빙의 부작용이라 하벨은 생각했다. 육체는 원래 계속하던 걸 유지하려는 경황이 강했으니까.

제아무리 자신이 용왕이라 할지라도 오늘 막 빙의한 육체를 완전히 지배하는 건 어려웠다. 특히나 영혼과 육체가 맞지 않아 적응하는 데 더 걸릴지도 몰랐다.

'그러면 내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하벨은 의문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자신은 죽었다. 그래서 그때 어떻게 됐는가. 아니, 애초에 왜 죽었는가.

"도… 련님?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헤레스 씨를 불러오겠습니다."

조금 전에는 몰랐지만, 그녀는 하벨 티에라의 주치의였다.

'이 육체의 기억이 조금씩 떠오르는데 왜 내 기억만 나지 않는 거지?'

하벨의 미간에 주름이 더욱 짙어졌다.

"…룬델 티에라."

하벨은 찬찬히 기억을 더듬어 그 이름을 언급했다.

하벨 티에라의 아버지, 룬델 티에라.

"아니. 나는 지금부터 그자를 봐야겠어."

하벨이 침대에서 다리를 아래로 내린 순간, 무언가가 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르르륵.

하벨 티에라의 팔찌에 달린 랜턴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스탠드의 빛에 가려졌던 어두운 벽면에서 반짝거리는 검이 튀어나왔다.

"도련님!"

카샬이 옆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감히!'

하벨은 그 공격을 눈치챘다.

자신이 가진 물의 힘을 끌어올렸다.

하벨의 눈동자가 파랗게 변하며 손아귀에 거대한 물살이 감도는 느낌이 맴돌았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물방울이 맺혀갔다.

자신은 용왕이었다. 이 정도쯤은 껌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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