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350화 (350/350)

제25편 상석(上席)

낙양 북부.

고원지대 (高原地帶).

쿠르릉.

장마철이 선뜻 가까워졌는지.

억수 같은 장대비가 퍼부어지고 있었다.

농민들에게는 생명수와 같은 비 였지만.

“현장의 손상이 너무 심합니 다…!”

현장에 파견된 삼공자 측의 인물 들에게는 중오스럽기 짝이 없는 빗 줄기 였다.

“또한, 산사태의 위험도 커지고 있습니다…!”

군사부의 현장 조사 책임자가 기 능을 상실한 지 오래인 우의(雨衣) 아래서 외쳤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의 증거 수집은 무의미합니다! 증거고 뭐고, 이미 다 씻겨나가 버린 지 오래란 말입니다!”

하지만.

쏟아지는 장대비를 그대로 맞고 있는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노인.

“대군사님…!”

사마 대군사는 그 자리에서 꿈쩍 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에 는, 장갑 마차의 잔해가 있었다.

“대군사님! 우산이라도…!”

군사 하나가 어떻게든 사마 대군 사에게 우산을 씌워주려 했지만, 굳은 표정의 사마 대군사는 그를

밀어내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시신은 아직도 못 찾았 나‘?”

그 쉬어 버린 목소리가.

누구의 시신을 말하는 것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명명백백(明 明 白 白)했다.

“•••죄, 죄송합니다.”

현장 조사 책임자가 면목이 없다 는 듯이 고개를 조아렸지만.

사마 대군사는 그에게 시선도 주 지 않았다.

“… 대군사님.”

보다 못한 상급 군사 하나가 나 섰다.

“아시다시피. 제갈 대군사님과 관련된 혼적이라고는 아무것도 발 견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빗줄기를 뚫고 목에 힘을 주어, 사마 대군사를 설득하려 했 다.

“그런 상황에서, 그분이 돌아가 셨다고 확신하는 것은-.”

“ 헛소리.”

사마 대군사의 쉰 목소리가 그의 말을 대번에 끊어버렸다.

“제갈세가의 마지막 수단까지 작 동되어 마차가 파괴되고 불탔다.”

상급 군사를 돌아보는 노인의 시 선에는.

오직, 번들거리는 살기(殺氣)와 광기(狂氣)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호위를 하던 모든 병력 이 참살당했는데, 제갈 형제가 살 아있을 수 있다고?”

“•••죄, 죄송합니다.”

감히,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 는가.

상급 군사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쿠르르릉.

진동과 함께.

저 멀리, 능선에서.

쏟아지는 폭우에 산사태가 일어 나며 토사(土砂)에 휘말려 나무들 이 쓰러져 홀러내리기 시작했다.

“사, 산사태가…?!”

“이쪽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어 서 피해야…?!”

아무리 내공을 가진 무인(武人) 이라 할지라도 대자연의 앞에서는 무력 (無 方)하다.

주변의 인물들이 허둥대는 가운 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은 명백하다.”

홀로.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는 채로, 사마 대군사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제갈 형제는 기회를 잡았고, 그 기회는, 대공자의 함정이었다.”

현장 조사 인원들이 철수 준비를

서두르는 사이를 뚫고, 사마 대군 사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제갈 형제는….”

감히, 대군사를 두고 움직일 수 없었던 군사부의 군사들은.

그저 사마 대군사를 바라보는 것 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 다.

“그 아이는“.”

사마 대군사의 세월의 혼적이 가 득한 손이 마차의 뼈대를 쓰다듬었

다.

“이런 곳에서, 이렇게 죽어서 될 아이가 아니었다.”

노인의 손이 닿은 검게 탄 마차 의 뼈대가.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 아이는. 장차, 이 늙은이 대 신 중원국을 움직이고 조율해야 할 아이였어….”

노인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것은 빗물인가.

미래를 맡기기 위한 후계자(後繼 者)이자, 지음(知音)이라 할 친우 (親友)를 잃은 노인의 비통함이.

“이런 외진 곳에서 비명횡사여h 命橫死)해서는 안 될 아이였단 말 이다….”

그 쉬어빠진 목소리 한 마디, 한 마디에서 흘러넘치고 있었다.

“대군사님!”

외곽 경계 책임자가 달려오며 외 쳤다.

“산사태의 범위가 걷잡을 수 없 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철수를 해야만 합니다!”

“ 나는.”

사마 대군사는 그 말을 무시하고

군사들에게 말했다.

“이대로 북방으로 향하겠다.”

“대군사님?!”

“그 무슨••?!”

그 말에 군사들이 기함했다.

“말도 안 됩니다! 지금 대군사께 서 자리를 비우시면, 본가에서의 상황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현재.

전쟁부를 비롯한 대공자의 본대 (本隊) 출발 절차를 지연시키고 있 는 것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사마 대군사

의 역량(方量)이었다.

그런 그가 낙양에서 빠진다면.

더 이상 효과적인 지연책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제갈 대군사님을 잃은 그 슬픔 과 분노는 저희가 감히 짐작할 수 도 없지만, 지금 대군사께서 북방 으로 향하는 것은-!”

“대공자가 결국 북벌에 성공하고 본가로 돌아오면, 어떻게 될 것 같 은가?”

갑자기 던져진 커다란 질문에, 군사들이 쉬이 답하지 못하고 침묵 했다.

“어쩌면. 이전의 나는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야.”

결국, 다시 입을 연 것은 사마 대군사였다.

“이공자 측은 대공자와 유혈 사 태까지 벌이고도, 그 핵심 인물들 은 대부분이 생존했지.”

이공자는 갇혔고.

그의 어머니인 구양 태상부인은 유폐되었다.

장로 대부분이 책임을 지고 있었 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법 절 차의 테두리 안의 이야기였다.

“지금까지의 대공자의 행보는 강 경책(強硬策)이라기보다는, 본가의 세력을 끌어모으기 위한 유화책(W 和策)에 가까웠었다.”

그래서 방심했고.

대공자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제 갈 대군사의 말에도,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의 대공자는 다 르다.”

군사들의 시선이 사마 대군사를

따라, 장갑 마차의 잔해를 향했다.

“그가 북벌에 성공하고 돌아온 다음에는?”

증거랄 것들은 많이 손상되었지 만.

여전히 남아있는 흔적들만 보아 도.

이곳에서 얼마나 큰 참상이 벌어 졌는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저 광경이, 우리의 미래다.”

군사들의 머리에 공통적으로 한 단어가 떠올랐다.

숙청 (肅淸).

사마 대군사가 말했다.

“대공자는 지금, 바로 지금 막아 야만 한다.”

그가 몸을 돌렸다.

“이번이 우리의 마지막 기회일 세.”

그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대 기하고 있던 마차를 향해 걸었다.

“본가에서의 뒷일은 남궁혁천 장 로께 맡기겠다 전해라.”

중원국 북부 최전방.

대장군부(大將軍部).

“회의 준비는 마쳤지만….” 모용운정의 동생, 모용호가 말끝

을 흐리더니 연소현에게 물었다.

“대공자께선 여독을 풀지 않으셔 도 괜찮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배려를 한 그의 말 이었지만.

“지금 태양이 중천(中天)이고, 상 황은 좋지 않으니.”

옷도 갈아입지 않은 연소현은 단 호했다.

“내 여독 따위는 문제가 아닐세. 안내하게.”

모용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알겠습니다, 대공자님.”

그의 첫 등장이 범상찮긴 했지 만.

그 태생이 귀공자(貴公子)에다가, 심지어 황제 폐하의 위임장까지 받 은 인물이었기에 ‘높으신 분들’처럼 대해야 하는가 싶었지만.

“앞으로도, 쓸데없는 배려는 필 요 없네.”

그 말에 뒤를 따르던 자신의 누 이가 말없이 미소를 짓는다.

“명심하겠습니다.”

과연.

소문으로 듣던 것 이상으로.

이 대공자는 보통 사람이 아닌 듯했다.

“낙양검가의 대공자님과 북부 대 장군 대행께서 납시오!”

앞서 회의장의 문을 연 모용호가 그렇게 외치자.

장군들과 행정 책임자들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일사불란하게 자리 에서 일어나, 대공자와 대장군 대 행을 맞이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직후에 발생했 다.

“•••어, 음.”

대공자를 자리로 안내하려던 모 용호가 멈칫거렸다.

당연히.

상석(上席)은 하나였고.

그 자리는 본래, 북부 대장군을 위한 자리라.

지금까지는 북부 대장군의 대행 인 모용운정이 앉았던 자리였던 것 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자리가 아니라.

지금부터 앞으로.

이 북부 대장군 진영에서 누가 최종 지휘관인지 결정하는 것과 같 은 일이었다.

“대공자께선 이쪽으로 앉으시지 요.”

“음. 고맙소.”

하지만, 그 순간.

앞으로 나선 모용운정이 자연스 럽게 대공자를 상석으로 안내했고.

대공자 또한 자연스럽게 그녀의 안내를 받아 상석에 자리했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 가.

모두가 모용운정의 뜻을 헤아려 보려던 사이, 그녀가 먼저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대공자께서는 단지, 낙양검가의 대공자로서 이곳에 계신 것이 아니 다.”

혹시 모를 분란과 미묘한 알력이 생기기도 전에 그녀는 칼같이 선을 명확히 그어 보였다.

“대공자께서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드시어, 그분의 대리인(代理人)으 로 임관(任官)하신 것과 같으니.”

그녀가 반론은 허용치 않는 태도 로, 좌중을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명백히, 이 북부 대장군부의 최 종 결정권자는 대공자님이시다.”

그 말에 모용호는 남들이 눈치채 지 못하게, 멋쩍은 듯이 자신의 턱 수염을 긁었다.

‘오랜만에 만난 정인(情人)처럼, 내실에서 두 분이 시간을 보내시나 했더니….’

두 사람은 내실에서 사전에 이런 일들의 조율을 모두 마친 것이 분 명했다.

“그러니 앞으로 대공자님의 명을 어기는 자가 발생할 시에는. 내 직 접 그 죄를 군법(軍法)으로 엄히 다스릴 것이야.”

“충(忠)!”

그 추상같은 명에, 어떤 이가 토 를 달겠는가.

아버지인 북부 대장군을 닮은, 그녀의 공명정대(公明正大)함은 모 르는 이가 없었지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녀가 이렇 게 공언한 이상.

누구도 감히 선처(善處)를 구하 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말과 같았다.

물론.

그녀가 선을 그어 보여준 것과 별개로.

상석에 앉은 연소현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는.

아직, 십 대(十代)에 불과한 청년 을 향한.

불신과 의문이 그대로 남아있었 다.

‘대공자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소 문은 익히 들었지만….’

‘•••무공은 뛰어났지만 말이지.’ 사라락.

연소현이 제 앞에 놓인 서류를 넘겨보는 사이에, 좌중의 인물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아무리 황제 폐하의 명을 받은 전권대리인이라 할지라도….’

‘군권을 통째로 넘기는 것은-.’

“문서 처리가 엉망이군.”

불쑥.

튀어나온 대공자의 말에.

좌중의 인물들이 속으로 혀를 찼 다.

‘아이고.’

‘책(責)부터 잡아내서, 기강을 잡 을 생각인가?’

새로 부임한 책임자가 흔히 하는 수법을 모를 수가 없는지라.

“문장이 장황하고, 일목요연하지 가 않군. 효율만을 추구해야 할 군 부에 아직도 이런 허례허식(虛禮虛 飾)이 남아있단 말인가.”

대공자의 말이 이어지자, 문서를 책임지는 담당자의 얼굴이 눈에 띄 게 나빠졌다.

“죄, 죄송합-.”

“ 됐다.”

하지만.

대공자의 행동은 예상을 깨는 것 이었으니.

“이것을 받아라.”

그는 품 안에서 서류를 하나 꺼 내 담당자에게 넘겼다.

“이, 이것은…?”

“나의 행정동에서 실제로 사용하 는 보고서다. 앞으로는 그 보고서 를 참고하여, 내게 올라오는 모든 서류를 작성할 수 있도록 하라.”

이제 나는 죽었구나, 하고.

사색이 되어있던 담당자가 말을 더듬었다.

“그, 그 말씀은…?”

서류의 너머에서 연소현의 시선 이 그를 향했다.

“내가 어렵게 말했나?”

그 시선이 얼마나 섬뜩하던지.

이 험한 최전선에서 구르던 담당 자가 반사적으로 허리를 펴고 우렁 차게 답할 정도였다.

“아닙니다!”

“좋아. 다음.”

순간적으로.

이해를 하지 못한 이들이 멍한 얼굴로 대공자를 바라보았다.

“•••대공자님. 다음이라니요?”

대공자가 나직하게 혀를 차더니, 파악이 끝난 서류들을 덮어버리며 말했다.

“내가 다음이라고 하면, 다음 의 제로 넘어가면 된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좌중을 향 해 말했다.

“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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