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349화 (349/350)

제24편 재회(再會)

“오랜만이오, 운정.”

천장에서 검은 벼락처럼 떨어져.

공왕(恐王)의 사자(使者)를 그대 로 짓뭉개어 버린 이가, 외투 자락 을 절도 있는 동작으로 털자.

촤악.

하며, 그의 몸에 묻었던 핏방울 들이 바닥에 튀었으니.

뚫린 천장에서 내려오는 햇살을 받는 그의 하얀 얼굴에 튄 피가 선

연하고.

그 얼굴에 걸린 오만한 미소는 사뭇 요요했다.

“•••운정이라니?”

감히 천하의 누가 있어.

대장군부의 삼엄한 경계를 쉽게 뚫어 버리고.

공왕의 사자를 짓뭉개버리고.

북부 대장군 대행의 이름을 함부 로 부르는가.

아연해하는 이들의 사이에서, 모 용운정의 동생인 모용호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님께서 아시는 분입니까?”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의 모습은 누구보다 총명하지만.

누구보다 여리던 아이였다.

이른 새벽녘, 풀잎 위에 살포시 놓인 이슬 한 방울과도 같은 아이 였다.

금방이라도 아침 햇살에 증발해 버려, 어딘가로 사라져버릴 것같이 덧없던 분위기의 아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찌.

모용운정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 겠는가.

“•••그분이다.”

“그분이라니-?”

“감히…!”

모용호의 되물음을 끊은 것은.

“공왕의 사자를 해하다니…!”

너무나도 황망하여 순간적으로 넋을 잃었던 사신단 소속의 인물들 이었다.

촤차차차창!

그들이 일제히 칼들을 뽑아 들 자.

반사적으로, 대장군부의 인원들 도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갑자기 등장한 정체불명의 인물 은 공왕의 사신단 한가운데 떨어졌 기에.

그들이 먼저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네놈은 누구냐?!”

과연.

전투와 약탈을 업으로 삼아 살아 가며 싸움터에서 뼈가 굵은 이들답

게.

칼로 벽을 만들 듯, 사방을 둘러 싼 그 기세가 사나웠지만.

칼에 에워싸인 와중에서도, 울려 퍼지는 코웃음 소리는.

여유롭기가 짝이 없었으니.

“•••놈!”

그에 분노한 사신단 호위대장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지는 순간.

정체불명의 인물로부터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나는.”

목소리가 시작된 것이 먼저인가.

아니면.

그의 소맷자락이 나비의 날갯짓 처럼 펄럭이더니.

그 하얗고 가는 손끝이, 자신을 둘러싼 칼날 중의 하나에 닿은 것 이 먼저인가.

“약사여래(藥師如來)의 현현(顯 現)이신 약 선녀(仙女), 약소유의 하나뿐인 아들이며.”

살포시.

바람에 흩날리던 풀잎 하나가 연 못 위에 떨어지듯, 그 손이 가볍게 칼날을 밀었지만.

“-크혹?!”

그 가벼운 손끝에서 발한 것은 미증유(未曾有)의 내력이라.

그 칼을 쥔 전사의 손목이 대번 에 뒤틀리고.

팔꿈치가 돌아가며, 어깨가 빠져 버렸는데.

그것은 조화의 시작에 불과했다.

“천하(天下)에 그 위명이 자자한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의 맏아들 이라.”

그가 처음 밀쳤던 시퍼런 칼날 이.

그 옆의 동료가 쥔 칼을 밀치고, 또 그 칼날이 그 옆의 칼날을 밀어 내며.

결국, 칼날로 이루어진 벽이.

마치 남해의 거친 풍랑(風浪)에 휩쓸린 조각배들처럼 휘청거리며 말려 나가니.

창차차차창!

서로 맞부딪치는 칼날들에서 울 려 퍼지는 것은, 모두의 귀청을 먹 먹하게 하는 요란한 금속음이고.

합(合)이라도 맞춘 것마냥.

한쪽으로 밀려 나가는 검날들이 반사하는 햇빛이, 모두의 눈을 어 지럽혔다.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냐?!”

그 사이에서.

풍랑을 뚫고 전진하는 범선처럼.

쩌렁쩌렁한 고함과 함께, 사신단 호위대장의 칼날이 불쑥 튀어나왔 다.

그야말로 파도를 찢고, 바람을 가르는 참격(朝擊).

하지만.

“무슨 소리냐니?”

터억.

그의 칼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내가 누군지 소개하고 있지 않 으냐?”

태연한 목소리와 함께, 소매에서 튀어나온 물건에 의해 막혀버렸다.

“•••두루마리?”

그 물건이 무엇인지.

좌중의 인물들이 제대로 분간을 하기도 전에.

“이익—!”

이미, 첫수로 상대의 높은 무위 를 알고 있던 호위대장은 재빨리 부무장을 뽑아 찌르고 있었다.

“아니면.”

허나.

그 또한, 상대가 손에 쥔 두루마 리의 기이한 움직임에 그대로 막혀 버리니.

“(너희들의 언어로 말해줘야 알 아듣겠는가.)”

자신의 칼과 단검을 모두 막아낸 두루마리 너머로.

“(북부의 오랑캐여).”

상대의 하얀 얼굴에 떠오른 조소 (廟笑)가 뚜렷하게 엿보였다.

으드득!

누런 이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호위대장이 그 두루마리를 손으 로 단단히 잡아채는 순간.

“(이 오만방자한 중원국의 애송 이가-!)”

“(시체를 갈아서 말먹이로 삼아 주마!)”

한차례 우수수 밀려났던 사신단 의 전사들이 그 틈을 타고, 손도끼 를 쥐어 들고 달려들었다.

“(나는 낙양을 지배하고, 화북을 통치하는 연씨 혈족의 적통(婚統) 이며-.)”

그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붙들 린 두루마리가 뭍으로 올라온 대어 (大魚)처럼 펄떡였고.

“으읍-!”

당황한 호위대장의 손이, 두루마 리 대신 다시 상대의 손목을 낚아 챔과 동시에.

부무장을 놓은 반대 손으로 상대

의 빈손의 경혈을 짚어 제압하려 했지만.

“(대 낙양검가의 대공자이고-.)”

기기묘묘(奇奇妙妙)한 상대의 금 나수(擔韋手)에, 손이 금방 어지러 워져.

반대로 순식간에 턱을 얻어맞고, 무릎을 차이고, 복부를 두 차례나 두들겨 맞았다.

“크홉-!”

입에서 내장 조각이 섞인 피거품 을 뿜으며, 호위대장이 물러나는 사이.

기성(奇聲)과 함께 손도끼들이 직전까지 다가왔던 그 순간.

“흡!”

나지막한 기합성과 함께.

카카카캉!

상대가 두르고 있던 혹잠사(黑B 絲) 외투가 제자리에서 거칠게 회 전하여 손도끼들을 튕겨내며.

사방으로 사납게 불똥을 튀겼다.

“(지금이다!)”

그사이에.

이선(三線)에서 아군의 둥 뒤에 숨어 틈을 노리던 전사들이 일제히 갈고리를 던졌지만.

외투와 함께 회전하던 상대의 손 에 쥐어있던 두루마리가 주욱-하 고, 펼쳐지더니 갈고리들마저 튕겨 냈다.

“저건?!”

몸을 감싸듯이 펼쳐진, 그 두루 마리의 정체를 알아본 대장군부의 누군가가 눈을 부릅떴다.

“황제 폐하의 교지(敎旨)-?!”

“(그리고 또한 나는-.)”

한 호홉도 흐트러트리지 않은 채.

낭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가장 먼저 분리된 것은.

호위대장의 머리였고.

“(북방(北方)을 토벌(討伐)하여 징치(懲治)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 으니-.)”

이어서.

땡그랑!

무기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와 함께.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며.

그를 포위하고 있던 전사들의 몸 이 일제히 토막 나며,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차라라락!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황제의 교 지가 빨려들듯이 다시 회수되고 나 서야.

....

....

사신단의 전사들을 단숨에 토막 내어 버린 것이.

바로, 그 교지였다는 것을.

교지가 펼쳐지는 그 순간이, 바 로 발검(拔劍)의 순간이었다는 것 을

좌중의 인물들은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토막 난 시체들과 피바다의 한가 운데 서서.

떨어지는 햇살을 받으며 그가 미 소 지었다.

“(내가 바로 연소현이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그를 모르던 모두에 게.

연소현, 그 이름 석 자가.

다시없을 만큼 인상적으로 새겨 졌다.

“저분이 바로….”

“그래.”

모용호의 말에, 모용운정이 그 차갑던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분이시다.”

모용호를 비롯한 누군가가 이어

서 입을 열기 전에.

모용운정의 추상과도 같은 명이 떨어졌다.

“저들의 목을 전부 베어 진영의 밖에 걸고, 저들의 몸만 수레에 실 어 돌려보내라!”

내실 (內室).

“공왕의 사자가 말했던 것처럼, 낙양검가의 삼공자 측이 공왕과 동 맹을 맺었다면….”

“우리 또한 이제 대공자가 있으 니….”

밖의 회의장에서 장수들이 주고 받는 이야기가 희미하게 들려왔지 만.

모용운정은 적어도.

“•••대공자께선.”

이 순간만큼은.

밖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매우 헌앙해지셨습니다.”

투구를 벗어들고, 탁자 앞에 앉 은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낼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그 렇게 말문을 열었다.

“그만, 못 알아볼 뻔했답니다.”

어린 시절.

규중(M中)에서 배웠었던 말투가 낯•설어, 유독 어색하게 느껴졌고.

항상 손수 손질하여 자랑스럽게 입고 다니던, 자신의 갑주건만.

어째서인지 손때 가득한 갑주(甲 胃)는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그렇소?”

연소현은 손수 우려낸 찻잔을 그 녀 앞에 두고는.

“그런 것치곤, 눈을’ 마주치자마 자 즉각 알아본 것 같더니.”

맞은편에 앉아 편히 미소를 지었 다.

그 미소를 마주하기가 어려워 시 선을 피하며 그녀가 붉어진 얼굴로 우물거렸다.

“•••그, 그건.”

그 서슬 퍼렇던 북부 대장군 대 행이 이런 모습을 보이리라고는 누

구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그녀의 동생이자 부관인 모용호 가 이런 광경을 봤다면, 기절할 만 큼 놀랐을 것이다.

“크홈.”

뭐라, 답변을 해야 하는지.

한참을 헤매던 그녀의 시선은 마 지막으로 연소현의 얼굴로 향했다.

차분히 긴 속눈썹을 감고.

차의 향을 음미04味)하는 그의 모습에.

어느샌가.

자신의 마음 또한.

내실에 가득한 다향(茶香)처럼 부드럽고 평화롭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렇구나.’

어린 시절.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 다.

그녀가 어떤 모습이든.

특별한 대화 없이도.

그저 편안하고, 아늑한 기분.

차가운 북풍이 부는 겨울에 뜨뜻 한 난롯가에 앉아 이불에 파묻혀 꾸벅꾸벅 졸 때의 안락하고 푸근한 기분.

그와 함께 충분히 차의 향을 음 미하자, 자연스럽게 자신의 입이 열렸다.

“•••겉모습보다는, 마음이 많이 바뀌신 것 같습니다.”

“…마음이라.”

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그 녀는 자연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을 했다.

“어릴 때는, 그저 겁 많고. 온순

한 토끼 같아. 세상 모든 것을 하 나하나 근심하고 걱정하는 모습이 시더니.”

그에 반해 지금 그의 모습은 어 떠한가.

그가 방금, 보여 주었던 전투는.

그녀의 상상 속의 연소현과는 너 무도 거리가 먼 것이었으니.

“하하. 그렇소?”

시원하게 웃어버리는 모습 또한 그러했다.

“어찌하여 대공자께선 마음을 달 리하시어, 칩거를 끝내셨던 것입니 까?”

자신이 한 말이, 의도와는 다르 게.

‘어째서 칩거를 깨서, 데릴사위가 되기로 했던 혼약을 거스르는 행동 을 했는가.’라는.

그를 향한 질책이나 원망처럼 느 껴질 수 있다고 느낀 그녀였지만.

그녀는 작게 입술을 깨물고. 연소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째서라.”

그녀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

는지.

가만히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연 소현이 입을 열었다.

“전부 괜찮아질 것이오. ”

“•••예?”

뜬금없는 그의 대답에 그녀의 눈 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운정. 그대가 내게 습관처럼 해 주던 말이었지.”

“•••그렇습니까?”

“그렇소.”

연소현의 말에 모용운정이 작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은 연소현만큼, 뛰어난 기억 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잊은 것이라 여겼다.

그 말이.

회귀 전, 부부 관계였던 그녀 자 신이 연소현에게 해주던 말이라고 는 당연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제, 내가 전부 괜찮게 만들 것이오.”

연소현은.

또박또박.

“그대에게 평소처럼 연주를 들려

주기 위해서라오.”

“가가께선, 제가 돌아오면. 평소 처럼 연주를 들려주십시오:”

그녀가 과거 자신에게 해주었던 그 말을.

간직했던 그 말을, 그녀에게 돌 려주었다.

“이 말을 그대에게 해주기 위해 서. 칩거를 끝냈다오.”

연소현이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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