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편 인고(忍苦)의 시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가 지났을까.
벚꽃 잎이 눈처럼 하늘하늘 아련 하게 떨어지던 어느 봄날에.
그 아이를 처음 만났었다.
“소현아•. 이 아이가 네 약흔자란 다.”
아버지를 따라온 그 아이는 낯가 림도 없는지.
포근한 봄 햇살을 닮은 눈망울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소녀, 모용운 정(慕容雲情)이라 하옵니다.”
그 소녀는 복숭아꽃을 닮은 발그 레한 뺨에.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침착한 미 소를 가진 아이였다.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 는 구릉지에 서서.
대공자 연소현은 평소처럼 뒷짐 을 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낙양 북부의 산맥을 지나는 여름 의 구름이 이리 찢기고 저리 갈라 져, 조각조각 나누어지더니.
이내, 한데 뭉쳐 산맥과 닮은 형 상으로 하늘 높이 피어올랐다.
적란운(積亂雲)이었다.
“가가(롱f호).”
어느 날.
칩거 중이던 나를 찾아온 그녀.
모용운정은 싱그럽게 부쩍 자랐 었지만.
북방의 차가운 바람 탓인지.
어릴 적 그 복숭아꽃을 닮은 불 그스레한 뺨만은, 그대로였다.
“연주가 듣고 싶습니다. ”
아버지가 쓰러졌고.
가문은 혼란 속에서 거무튀튀한 야망을 드러낸 이들의 악의(惡意) 속에서.
하루하루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
었다.
그럼에도.
피리(苗)를 연주하는 나의 손길 은 그날의 벚꽃 잎처럼 가뿐히 춤 을 추었고.
가늘어,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 는 호흡은 어찌도 그리 편안하게도 이어지는지.
모든 것에서 동떨어진 원각정의 풍광(風光) 속에서, 음(音)은 너무
나 유려하게 춤을 추었으니.
문득.
그 연주가 너무나 쉬이 나오는 것 같아, 슬퍼졌다.
“…가가. 괜찮습니다.
어머니의 피리를 쥐고, 눈물을 흘리는 내게.
운정은 그리 말했었다.
“지금은 괜찮지 않아도. 이윽고, 전부. 괜찮아질 것이옵니다.”
뭣이 괜찮고.
뭣이 괜찮아질 것이란 말인지.
나의 운명(運命)에 대해 무엇 하 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을, 무엇 하 나 제대로 보지도 못하면서.
뭘 아는 척을 하는 것인지.
하지만.
“•••그렇구나.”
그 아이가 괜찮다고 하니.
괜찮아질 것이라고 하니.
마음 한구석이, 잔잔한 연못처럼 묘하게 평온해지고.
졸졸 흐르는 냇물처럼 평화로워 져, 그만 안도(安휴)하는 내 모습이 있었다.
쿠르릉.
나직한 뇌성(雷聲)과 함께.
결국, 빗방울이 하늘을 올려다보 는 연소현의 눈에 떨어졌다.
적란운이 소나기를 내리기 시작 한 탓이었다.
하늘은 거짓말처럼 어둑해지고.
비구름이 드리운 고원(高原)이 금방 촉촉하게 젖어 들어가기 시작 하며.
풀과 흙의 향이 실린 비 내음이 아득히 퍼져갔다.
굵어지는 빗줄기를 맞는 연소현
O
그 자세, 그대로.
못이라도 박힌 듯이.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 다.
아버지께서 큰아들을 위해 남겨 준 안배로.
본격적으로 후계 다툼에서 비롯 된 피바람이 몰아칠 낙양을 피해서.
모용가에서 데릴사위로 살 수 있 게 되었지만.
북방의 겨울은.
혹독했다.
“•••부인.
등잔불 아래 앉아서.
괜히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책장 을 이리저리 넘기다가.
나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었다.
“이곳, 북부 땅의 상황이 더욱 안 좋아지고 있다고 들었소. ”
잠시, 다시금 망설이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내가 나서는 편이. ”
늦은 밤에 들려온 소식에.
출정을 위해 갑주를 걸치던 운정 이 뒤를 돌아보길래, 나는 급히 말 을 이었다.
“데릴사위에 불과한 내가 나서 면. 가주인 부인에게 손가락질올 할 이들이 있을 터이니. 내가 몰래 뒤에서 부인에게 조언(助言)만 한
다면….
그리 주저리 말을 늘어놓으면서 도.
나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조언?
좋지.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는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 니.
천살성 (天殺星).
본가의 혈사(血史) 이후.
어머니의 목숨을 대가로 한 봉인 (封印)은 급격히 약해졌고.
가늘게 유지되고 있던 그 봉인 은, 조언으로 시작될 피바람에 찢 겨 형체도 없이 박살 나고 마리라.
그리고 그렇게 되면.
어머니의 뚯도.
아버지의 마음도.
모두 저버리는 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가가.”
나를 향해 돌아선 그녀는.
그 차가운 갑주를 입은 채로, 어 찌도 그리 부드러운 미소를 띨 수 있었는지.
“괜찮습니다.
결혼 이후, 사정을 전부 알게 된 그녀는.
평소처럼, 의연하고 늠름하게 내 게 말했었다.
“전부 괜찮아질 것입니다.
운정은 쇠 비린내가 나는 장갑을 벗고.
내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꼬옥 쥐었었다.
평소에는.
무기를 다루며 거칠어진 그녀의
손에 비해, 책장만 넘기며 한없이 부드럽기만 한 내 손이 부끄러웠지 만.
그 순간에는, 얼마나 그 거친 손 이 따스하기만 했던지.
“제가 전부 괜찮게 만들 것입니 다.”
그리고, 내 손은 차갑기만 했던 지.
“가가께선, 제가 돌아오면. 평소
처럼 연주를 들려주십시오.
나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빗줄기가 거세어졌다.
산맥 사이를 꿰#으며 비명을 지 르는 비바람에.
보통 사람이라면 눈을 뜨기도 힘
들 지경이었다.
연소현의 어깨에 걸친 흑잠사 외 투 자락이 찢어질 듯이 펄럭였지만.
그는 여전히.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검은 구름이 꾸 물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 다.
‘이 시대로 돌아오고 가장 먼 저...’
운정, 그대에게 가고 싶었다.
오밤중에 보고서를 읽고 있는 그 녀의 곁에 함께 앉아서.
주전부리를 나눠 먹으며 서책을 읽던 그 밤들이.
군주(君主)로서, 기울어 가는 가 문을 온몸으로 붙들고 버티면서도.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던 그녀와 함께.
술잔에 차오르는 달을 담아 나누 고, 피리를 연주하던.
그 나날들을.
‘나는 기억의 가장 작은 부분도
잊지 않았다.’
연소현의 비정상적인 기억력은 모두,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연소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 었다.
자신이 아무런 대비도 없이 낙양 검가를 비워버렸다면.
과거와 같은 결말이 기다리고 있 을 터이니.
연소현은, 검가의 대공자로서.
기울어가는 가문을 재생시키기 위한 마지막 불꽃을 살리고.
죽어가는 낙양의 빈민들을 위해 서 할 수 있는 노력들을 기울여야 만 했던 것이다.
“그저, 놀랄 뿐입니다.”
“주군께서는 실로 어마어마한 속 도로 세력을 확보하고 계십니다. ”
“중원국 역사상 그 누구도. 오랜 시간의 칩거 이후에, 이리도
빠르게 자리를 잡지 못했을 것입니 다.”
주변에서는 칩거 이후 자신의 행 보를 그렇게 평했지만.
여전히 연소현에게는.
그 모든 것이.
‘느렸다.’
그는 휘몰아치는 비바람에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모두가 경악을 거듭했었던 그 모 든 위업(障業)조차도.
‘부족했다.’
그것은, 연소현에게. 영겁(永幼)처럼 길고, 긴.
인고의 시간이었다.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연소현 의 눈앞에, 칩거 이후의 그 모든 시간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가슴은 어머니의 자애심(自愛心) 처럼, 타오르둣 뜨겁게.
머리는 아버지의 검 끝(劍鐘)처 럼 시리도록 차갑게.
반드시, 필요한 일만을 행하고.
조금이라도 해서는 안 될 일은 행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빈틈없이.
신속하게, 하지만 실수 없이.
소중한 것들을 지켰다.
그리고, 드디어.
“대공자 연소현은, 북방 영토의
혼란과 무질서를 바로잡고! 모든 우환(憂患)을 제거하여, 제국의 위 엄(威嚴)과 기강(紀網)을 바로 세우 도록 하라!”
때가, 도래(到來)했다.
멀리서, 산맥과 구릉을 타고.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 다.
비바람 소리에 파묻혀 제대로 들 리지는 않았지만.
드디어 연소현의 머리가 움직여, 멀리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낙양검가의 문양이 뚜렷하게 찍 힌, 장갑마차 행렬이었다.
그들은 급작스럽게 악화된 기상 상황 속에서, 다들 마차에서 내려 악전고투(惡戰苦H)를 벌이고 있었 다.
“•••왔군.”
기다리던 이들이 도착했으니.
그가 완전히 젖어버린 자신 품속 에 손을 넣었다.
“안 됩니다!”
장갑마차의 문이 열리자, 거센 비바람이 안으로 몰아닥쳤다.
“이 노면(路面) 상태에서는 장갑 마차가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안 그래도 거친 산길이 심지어 퍼붓는 소나기로 진창이 되었다.
“이미, 몇 대가 바퀴가 진창에 빠진 상태입니다!”
뒤집어쓴 우의(雨衣)도 소용없이, 수하는 물에 빠진 쥐의 모습을 하 고 있었다.
그 뒤로는 진창에 빠진 마차들을 끌어내느라, 비바람 속에서 수십
명의 인원이 뭐라 소리를 치는 것 이 엿보였다.
“•••알겠다.”
비바람에 젖혀진 장갑마차의 문 을 수하가 내공까지 동원해서 힘겹 게 닫아걸자.
“제길.”
함께 타고 있던 삼공자 측 군사 부의 군사 하나가.
잠깐 사이에 흠뻑 젖은 얼굴을 닦으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거, 완전히 발이 묶여 버렸습 니다.”
그 모습을 보며.
행렬의 주인.
제갈 대군사가 짧게 혀를 찼다.
“원래부터 이 지역은 지대가 높 아, 예로부터 날씨가 변덕스러운 곳이다.”
그가 자신의 백우선(白께)을 한차례 부쳐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어차피. 대공자 또한 이 기상 상태면 우리와 마찬가지로, 발이 묶였을 것이야.”
그의 말에, 군사들이 비를 피해 치워 놓았던 지도를 다시 폈다.
“마지막 보고에 따르면, 대공자 의 마차는 산맥의 이 지점을 통과 했다고 합니다.”
군사들이 이리저리 손으로 지도 를 짚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쯤에 작은 촌락(村 落)이 있으니. 비바람이 그칠 때까 지 머무를 가능성이 높겠군요.”
“후발대와의 합류 또한, 이곳에 서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군사들이 동의를 구하듯 제갈 대 군사를 바라보았다.
“그래.”
제갈 대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자의 후발대(後發隊)가 그 와 합류하기 전까지의 그 짧은 시 간이, 우리에겐 유일한 기회다.”
그 말에 군사들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행한 고수(高手)들의 준비 는 충분합니다.”
“대공자의 경지가 높다지만. 이 정도의 숫자는 절대로 당해내지 못 할 것입니다.”
애초에.
얌전히 대공자를 북방까지 뒤따 를 생각이라고는.
처음부터 없었던 제갈 대군사였 다.
“대공자의 소재가 명확해지는 즉 시, 작전을 결행(決行)한다.”
마차 내부의 분위기가 한층 더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제갈 대군사님.”
신중한 군사 하나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대공자가 실종(失腺)당하면, 아 무리 흉수를 찾아내지 못한다 해도.
그 여파가 엄청날 것입니다. 후의 상황은 예측 불가능해지는 것은 물 론이구요.”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직은 우리가 충분히 유리합니 다. 굳이, 이 상황에서 극단적인 방 법을 취하는 것은….”
눈치를 살피던 다른 군사 하나도 끼어들었다.
“적어도, 최소한 사마 대군사께 상의를-.”
“아니.”
제갈 대군사가 단호히 고개를 저 었다.
“대공자는 반드시 여기서 끊어내 야만 한다.”
그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대공자가 이렇게 홀로 떨어진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 이다.”
그의 시선이 군사들을 향했다.
“작전 개시를 준비하도록.”
제갈 대군사의 의사가 확고한 것 을 확인한 군사들은, 자리에서 일 어나 마차 밖으로 향했다.
그들이 전부 밖으로 나가고.
마차의 문이 탕하고 닫히자.
“•••지략은 인간의 머리에서 짜낼 수 있지만, 운은 하늘에서 내려주 는 것.”
모두, 대공자의 위험성을 과소평 가하고 있다.
미쳤다고 해도 좋다.
오직 자신만이, 지금 그 전부 드 러나지 않은 수면 아래의 위험성을 제대로 느끼고 있었으니.
“•.•기회가 주어졌을 때.”
제갈 대군사가 머리를 뒤로 젖혀 기대며,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
다.
“잡아야만 하는 법이지.”
그리고, 그의 귓가에.
아무도 없어야 할 마차 내부에서 부터, 답변이 들려왔다.
“옳은 말일세, 제갈 대군사.”
“..?!”
소스라치게 놀란 제갈 대군사의 귓가에 그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성급했군.”
제갈 대군사가 굳어진 머리를 천 천히 내리자, 맞은 좌석에 앉아 있 는 인물의 그림자가 보였다.
번쩍.
번개가 친 짧은 순간, 제갈 대군 사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 었다.
“•••대공자?”
어둠 속에서 흠뻑 젖은 대공자 연소현이 물을 뚝뚝 홀리며, 그에 게 미소 지었다.
“급한 마음에, 이 기회가 그대만 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간과 했구나.”
근처에 낙뢰(落雷)가 요란한 소 리와 함께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