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336화 (336/350)

제11편 한 편의 극(劇)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대공자 연소현의 어깨에 걸린 검 은 혹잠사 외투가 펄럭였다.

“본가의 미래에 조금이라도 도움 이 되게끔 하기 위해서. 당시 역모 (逆謀)를 밝혀낸 김에, 그대의 사형 제들을 전부.”

대공자 연소현이 들어 올린 손이 허공을 스윽 하고 그어 보였다.

“내가 손수 처리했던 것이 아닌

가, 하는 점이지.”

대연회장에 모인 이들은.

질식할 듯한 침묵 속에서, 문득 비릿한 피 냄새를 물씬 맡을 수 있 었다.

“•••그 말씀은. 십여 년 전.”

공동파(性 III 同派)의 대사부(大師

父)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대공자께서 그 혈사를 직접 일 으키셨다는 소문이 사실이라고 하 시는 겁니까?”

그 질문에 모두의 이목이 대공자 연소현에게로 집중되었다.

이때까지.

단 한 번도 공식적이든 비공식적 이든.

연소현은 혈사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입장을 밝힌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의 연소현은 달랐다.

“그렇네.”

그 대답에.

숨죽이고 있던 좌중에서 둑이 터 지듯 술렁임이 터져 나왔다.

“역시, 대공자께서...?!”

“하지만. 그때 대공자는 고작해 야 열 살도 되지 않은 꼬맹이였단 말일세…!”

적잖이 넓은 대연회장 안에서.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이리 치고 저리 친 이후에, 대공자가 입을 열 었다.

“조금. 정확히 하자면….”

오늘의 대공자는.

어째서인지, 평소와는 다르게.

당시의 일올 조곤조곤 제 입으로 늘어놓았다.

“정확히 하자면. 내가 혈사를 일 으킨 것이 먼저가 아니라. 당시 반 역자들이 역적모의를 꾸민 것이 먼 저였다.”

연소현이 가볍게.

“그때, 내가 한 일은. 이 가문의 대공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행한 것뿐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둣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에 굳이, 혈사라는 거창한 이름이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에 좌중이 질린 듯한 표정 을 지었다.

대공자 본인은 아무렇지 않게 말 하고 있지만.

그 혈사를.

그 쟁쟁하던.

수많은 권력자가 겨우 며칠 만에 전부 쓸려나갔던 그 일을.

별것 아니라고 할 수 없다는 것 을, 대공자 본인이 더 잘 알고 있 을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실종되거나 갑작스럽게 낙향(落鄕)한 이들이.”

“사실은 대부분이 역모죄로 처형 당하거나 투옥당했다는 소문이 있 었는데. 그것이 사실이었습니까?”

“지금도. 위치가 알려지지 않은

본가의 지하 뇌옥(地下申獄)에 그 들 중 일부가 갇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도?”

지난, 십여 년간.

태상가주가 쓰러진 일에 이어서.

낙양검가에서 가장 소문이 무성 하던 혈사라는 비사(秘史).

그 숨겨진 이야기를 장본인에게 서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였으니.

“검마(劍魔) 어르신이 우화등선 (거거化登仙)을 하신 것이 아니라. 사 실 그 역모에 연관되어 처형당하셨 다는 이야기는…?!”

“당시에 전부 처리되지 않았던

반역자들이, 결국 태상가주님께 위 해를 끼치게 되었다는 소문도 사실 입니까?!”

좌중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밀치 며.

“그, 그럼…! 그 당시, 태상가주 께서 비밀리에 본가를 비우고 있었 다는 이야기도…?!”

미친 듯이 달려드는 것도 당연지 사(當然之事) 였다.

“당시. 본가의 너무 많은 권력자 가 역모에 관여를 하고 있었기에, 본가의 동요를 억제하기 위해서. 그들의 행방을 감출 수밖에 없었

네.”

오늘의 연소현은 질문 하나하나 마다.

“분명. 당시 지하뇌옥에 투옥된 이들도 있었네. 그들이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지만.”

조곤조곤 답변을 해주었다.

“검마 어르신은, 역모에 가담하 신 것이 아니라. 우연히 비슷한 시 기에 병마(病魔)에 의해 돌아가셨 다.”

그것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귀한 이야기였다.

“당시, 역모 세력은 전부 뿌리를 뽑았소. 태상가주…, 그러니까 아버 지께서 병상에 누우신 것과 그들은 관련이 없소.”

연소현이 마지막 질문에 답했다.

“당시, 아버지께서 부재중이셨던 것은 사실이오.”

그 이외에도 질문들이 쏟아졌지 만.

지나치게 민감한 질문이나, 터무 니없는 소문에 의한 질문이 대부분 이었다.

한바탕.

질문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가자.

좌중의 시선이 최종적으로, 아무 런 말도 없이 못 박힌 둣 그 자리 에 서 있는 인물을 향했다.

종남(線南)의 문주(門主)였다.

“… 대공자께서.”

그가 입을 열자.

격앙된 감정에 의해, 갈라져 버 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 사형제들을 전부 제거하셨 다고요?”

그 묵직한 질문에.

후열(後列)에 서 있다가 밀린 탓 에 뭔가 질문이 남아 있어 마려운 표정을 짓던 이들마저도.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입들을 굳게 다물기를 택했다.

좌증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대공 자에게로 넘어갔다.

대공자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하지만.

“그렇소.”

대공자의 입에서는 의외로, 빠르 고, 가볍게.

대답이 흘러나왔다.

“내가 직접. 그대의 사형제들을 잡아들이라 명했고. 또한, 그들을 처형할 것을 명했소이다.”

더 굳어질 수 없을 정도로 굳어 있던 종남파 문주의 얼굴이.

한층 더 싸늘하게 식었다.

오싹.

좌중이 갑작스러운 오한에 반사 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 그래도 여름이라고는 믿어지 지가 않을 정도로 시원하던 원각정 에.

마치 갑작스럽게 한겨울 한파(寒 波)가 밀어닥친 것 같았다.

천천히.

종남파 문주의 얼굴에 씁쓸한 미 소가 걸렸다.

“그들은…, 나의 사형제들은. 대

공자의 말씀처럼. 모든 면에서 수 준 미달인 자들이었소.”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의 기세는 여전했기에.

듣는 이들은 긴장을 늦출 수 없 었다.

“도사(道士)라고 스스로 칭하면 서도 허구한 날 주색(酒色)잡기에 여념이 없었고. 무인(武人)이라고 스스로 칭하면서도 무공은 언제나 뒷전이었지….”

그의 입가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 자들이, 심지어 역모에까 지 가담했다니….”

올려다본 원각정의 밤하늘은.

무심(無心)하게도 높았고, 무한 (無限)하게 아득했다.

그 밤하늘이 보기에는.

분명.

사실은 지금의 자신 또한.

‘…나 또한 나의 사형제들과 그 리 다를 바 없으리라.’

지금의 중원국에서는.

자본과 권력이 없이는 어떤 기치 (旗觸)도 들어 올릴 수 없었고.

낙양검가를 그 필두(筆頭)로.

오랜 세월.

자본과 권력을 축적해온 세가(世 家)들의 시대가 열렸으니.

도문(道門)의 가치(價値)를 지키 기 위해, 시작했던 선대(先代) 문주 들의 노력은.

지금에 와서는 역으로.

오히려 자본과 권력의 마력(魔 方)에 잡아먹혔다.

‘…나 또한 다를 바가 없구나.’

늙은 도사는 지난봄을 떠올렸다.

용봉지회 경기장 건설 부지에서 있었던 소요사태에서 들었던 목소 리들.

“약속했던 식량을 배급해 주십시 오!”

“제발! 임금을 지급해 주세요!”

“가족들이 굶고 있습니다!”

“제발…!”

그 간곡한 목소리들을 외면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 또한 전혀.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구나….’

자신도 모르게, 입술이 달싹였다.

“…원시천존(元始天尊)이시여.”

그 얼마나 오랜만에 외워 보이는 도문의 진언(眞言)인지.

원시천존의 이름이 낯설기까지 했다.

문득, 결심한 듯.

그는 단숨에 늙어버린 얼굴로.

“죄송합니다.”

털썩.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대공자님.”

그가 전신(全身)을 바닥에 던지 다시피 했다.

오체투지 (五體投地) 였다.

“지금이라도 종남을 대표하여, 이렇게 사죄를 올립니다.”

그가 표출했던 분노는 자신에 대 한 분노였으며.

“그리고. 감사합니다.”

한없이 부끄러운 자신의 문파에 대한 자책(自責)이었다.

“종남에서 해야 했을 일을. 대공 자께서 대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공자는 그런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소.”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내가 당시에 종남의 새 문주를 잘 뽑은 것 같군.”

시원한 바람이 한차례 불어와.

진한 꽃향기가 좌중을 감돌았다.

좌중의 몇몇 이들은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으며.

몇몇 이들은 눈시울이 붉어진 것 을 들키지 않으려, 원각정에 흩날 리는 꽃잎들로 시선을 돌렸고.

몇몇 이들은 담담히 휘영청 떠오 른 달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것으로 납득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 봐야, 대공자의 일방적 인 주장에 불과하지 않은가…?”

삼공자 측.

신 무림맹 소속 중에서도, 일부 수장들이.

“…아무래도, 그렇소.”

멀찍이 후열에서 자신들끼리 소 곤거리고 있었다.

“이때다 싶어서. 오랜 소문을 활 용해 자기 자신을 신격화(神格化) 하는 것인가…?”

그런 그들의 면면(面面)을 면밀 히 살피는 자가 있었으니.

이미, 지난봄에 특유의 생존력과

탁월한 감각으로 용봉지회 현장에 서 탈출하여.

대공자의 손을 잡았었던 점창의 전 장문인이 가만히 살피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불신하는 자들은 얼 마 없군.’

혈사(血史).

십여 년 전에 있었던 일을.

지금 뒷받침할 이를 찾기도 쉽지 않다.

누군가를 내세워봐야, 오히려 그 중인의 신뢰도에 공격이 집중되어.

역으로 증인이 의심을 살 가능성

이 높았다.

“억지 주장에 불과하군.”

“선동(偏動)이지. 대공자의 공작 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연회장에서 그런 소리에 귀 를 기울이는 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대다수는.

“•••어렸을 때부터, 격이 다르다 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려.”

“…그렇다면. 어렸을 때부터 가 주님의 일을 도와, 가문을 다스렸

다는 소문도 사실일까요?”

“…저 대공자라면. 당연히 그랬 을지도 모르겠소이다.”

같은 말을 나누며, 감탄하기에 바쁠 뿐.

‘대공자는 분명. 오늘 어떤 증명 도 하지 않았다.’

시선을 대공자로 향한, 점창 전 장문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저, 대공자는

칩거를 끝낸 이후.

대공자는 계속해서 충격에 충격 을 더하는 행보만을 보여주었고.

오늘 장로원에서부터 시작했던 그 모든 행적이 더해져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행할지 라도. 그저 대다수가 믿고 신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을 뿐.’

과연.

대공자가 의도적으로.

그나마 쓸 만한 인재만을 남겨 종남의 문주가 되게 만들었던 것일 까.

아니면.

현 문주가 그나마 쓸 만한 인재 였기에, 역모 따위에 가담하지 않

아서 살아남았던 것일까.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노릇이지.’

“바닥이 차갑소. 이제 일어나시 오, 문주.”

“아닙니다, 대공자님…! 저는…!”

자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대공 자를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어디까지가 가짜이고 어디까 지가 진짜인지, 감히 구분을 할 수 조차 없구나.’

자신은 본능적으로, 분명.

약 선녀를 닮은 대공자의 저 자 애로워 보이는 얼굴 가죽 밑에.

인두겁을 뒤집어쓰고 있는 미중 유(未會有)의 마물(魔物)이 도사리 고 있다는 것올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얼굴이 과연 가짜라고 할 수 있을까.

‘•••상관없지.’

이미 돌은 던져졌다.

삼공자 측 신 무림맹 소속 조직 의 수장들에게 현 상황을 주지시키 고.

그들에게 혈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크게 동요(動播)시켰을 때처 럼.

‘나는 이 한 편의 연극에서 맡겨 진 역할을 수행할 뿐.’

그가 앞으로 나서며.

“뒤늦었지만…!”

짐짓 격앙된 어조와 함께 큰 소 리로 외쳤다.

“이 점창의 장문은 지금에라도 깨달았소이다!”

좌중의 시선이 단숨에 모이자. 그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자신의

검을 풀어, 높이 쳐들어 보였다.

“이 점창의 검을 바칠 상대는, 이 가문의 정명한 후계자인 대공자 님밖에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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