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335화 (335/350)

제10편 자증지란(自中之亂)

낙양검가, 원각정(原各庭).

“아니, 대공자님을 좀 뵙자는데. 그것이 그리도 어렵나?!”

삼공자 측, 신(新) 무림맹 소속의 수장들이 원각정의 시녀에게 목소 리를 높이고 있었다.

“대공자께선 이 연회의 주인이 아니신가?!”

“당연히 주인 된 도리로 객들의

인사라도 받아 주셔야 할 것이 아 닌가!”

하지만.

“죄송합니다, 장로님들.”

세쌍둥이 시녀, 이령은.

하나도 죄송하지 않은 얼굴로.

“주인님께선, 지금 내부 인원들 을 대상으로 긴급한 회의를 주최 중이시기에.”

그들의 말에 고개를 단호하게 저 어 보였다.

“내빈 여러분을 직접 웅대하지 못하는 점에 대해 사죄의 뜻을 밝

히셨습니다.”

“아니…!”

삼공자 측 신 무림맹의 수장들이 제 가슴팍들을 두드렸다.

“그렇다면, 전쟁부와 검림의 인 원들은 무엇인가?!”

“그들은 왜 대공자님이 계신 그 회의에 참석하고 있냔 말이야!”

세쌍둥이 시녀, 이령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주인님께서 결정하신 일. 제게 그렇게 말씀해 보셔도….”

“에잉!”

그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대공자께서 벽을 넘 겨주었다는 팽 장로라도…!”

“그라도 만나게 해주게!”

“ 예?”

이령이 깜짝 놀란 척.

“지금 팽 장로께서는, 조용한 곳 에서 홀로 깨달음을 갈무리하고 계 십니다.”

그녀가 입가를 소매로 가리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중요한 순간에, 들이닥치시

려는 겁니까?”

“아, 아니.”

“그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대공자님이라도….”

어떻게든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 고 싶었던 그들이었지만.

“앞서 여러 차례, 말씀드렸다시 피. 주인님께서는 내부 회의로 바 쁘십니다.”

갓 수확한 햅쌀로 밥을 지어, 윤 기가 자르르 흐를 때까지 뜸을 들 이는 것처럼.

대중의 궁금증을 극한까지 끌어

낼 의도일까.

대공자는 이미, 그들의 접근을 철저히 막아놓은 뒤였다.

“으음…!”

그들은 불편한 기색을 팍팍 드러 냈지만.

“크홈!”

싱글거리며 웃는 시녀를 상대로 목에 핏대를 세워봤자, 아무 소용 이 없는 것은 당연지사.

“•••일단 기다려 봅세.”

“허, 참.”

그들은 결국, 발걸음을 돌려 얌

전히 대연회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음후후!’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령이 콧대를 세웠다.

‘지금의 주인님은, 아무리 본가의 장로라 한들. 만나고 싶다 하여 만 날 수 있는 분이 아니랍니다.’

격세지감(隔世之感) 이라.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귀한 손님이라고는 거의 찾질 않 았던 원각정이었지만.

지금은, 장로 위에 오른 이들조

차도 어떻게든 대공자를 만나려 발 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제, 이것으로. 우리, 세쌍둥이 시녀들 또한. 본가 아랫사람들의 우상(偶像)이 될 것입니다!’

한껏 높아진 코를 더욱 높이 쳐 들고.

‘음효효효효!’

그렇게.

속으로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이 령에게 벼락같은 전음이 날아들었 다.

[이령!]

“히익?!”

이령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뭣하고 있느냐?!]

그것은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시녀장 정아의 전음이었다.

[일이 끝났다면, 당장 회의장으로 복귀하도록 하거라!]

금안(金眼)의 힘으로.

원각정 전체를 물 샐 틈 없이 살 피는 정아에게는 사각(死角) 따윈 없었다.

“예, 옙! 지금 갑니다요, 시녀장 님!”

“대공자가 소문처럼. 정말로 벽 (壁)에 부딪힌 무인의 등을 밀어 서….”

삼공자 측, 신(新) 무림맹 소속의 우두머리들이 대연회장 한쪽에서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벽을 넘겨 고수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신묘(神妙)한 재주가 있다

면.”

“엄청난 일이지. 엄청난 일이야.”

대공자 계파에 대한 축하 자리인 만큼.

어차피 삼공자 측 인물들인 그들 에게 관심을 두는 이도 없었고.

관심이 있더라도 굳이, 지금.

이곳에서까지 말을 거는 이도 없 었다.

“•••그렇다면.”

구(舊) 무림맹에 몸담았던 이들 인 만큼.

정치적 후각(텨覺) 하나는 비할

바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이들이었 다.

“•••으음.”

과거.

거듭된 사업 확장의 실패로 거액 의 빚을 지고, 낙양검가에 흡수되 길 택했던 종남파(線南派)의 새 문 주(門主)도.

“…호흐 ”

과거, 무림맹 해체 이후.

내부 갈등으로 인해 한차례 문파 가 와해(瓦解)되다시피 했다가, 낙 양검가 아래서 재건을 노리는 공동 파(峰|||同派)의 대사부(大師父)도.

“그러니까, 그것이….”

“•••쩝.”

그들뿐만 아니라.

대공자의 소식을 듣고,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왔던 모든 신 무림맹 소속 우두머리들이.

다들 서로 눈치만 살피면서.

애꿎은 술만 마시고, 음식을 휘 적거리면서.

결정적인 말은 꺼내지를 않고 있 었다.

“헹.”

한 차례.

거하게 코웃음을 치면서.

“이 자리까지 참석해 놓고서. 지 금에 와서 좌우(左右) 대군사와 남 궁세가가 두려워졌소이까?”

뒤늦게 그들 무리에 합류한 점창 파(點蒼派)의 전 장문인이었다.

“말이 심하시오, 장문인…!”

“약주(藥酒)를 너무 거하게 하신 것 아니오…?!”

대번에 눈썹에 쌍심지를 켠 이들 의 비난이 날아들었지만.

이미.

과거 혈사(血史) 때, 대공자의 두 려움을 깨닫고.

“가족을 배반하라는 말보다는, 저희와 함께 살아갈 길을 도모한다, 저는 그렇게 표현하고 싶군요. ”

연소현을 대리하여 찾아왔던 유 각풍문 연하응의 말에, 점창파의 전 장문인은 이렇게 답했었다.

[•••앞으로 대공자께 잘 부탁드린

다고 전해 드리게.]

그렇게.

이미 비밀리에 대공자 측과 손을 잡고 있었던 점창파의 전 장문인은.

“잘들 들어보게.”

지금, 삼공자 측을 향해서.

뱀의 혓바닥을 놀리기 시작했다.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 시원하 게 정리를 해드리지.”

거나하게 술을 마신 상태에서도.

“과거, 무림맹 해체 이후.”

점창파 전 장문인의 눈빛은 취기 (醉氣)가 가득할지언정 흔들림이 없었고.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였던 소림(少林)은 봉문(封門)했고. 화려 한 재기를 노리던 화산(華山)의 검 은 검악파산 염 장로에게 꺾였으 며.”

그 혀(舌)는 날카로운 검 끝에 비해도 예리함에 부족함이 없었다.

“무당파(武當派)는 외산(外山)과 내산(內山)으로 찢어졌소. 존경받던 구파(九派)는 몰락한 지 오래지. 특 히….”

그의 눈이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의 면면(面面)을 훑었다.

“특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자본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다가, 결국 검가에게 굴복한 문파들의 수 장들이지.”

그들 사이에서는.

가히 금기(禁忌)라 해도 좋을 이 야기를, 태연하게 내뱉는 점창의 전 장문인에게 노성(怒聲)들이 쏟 아졌다.

“장문인…!”

“ 입조심하시오…!”

모인 이들이 모인 이들인 만큼.

그들의 노기(怒氣)가 자아내는 압력은 내공 한 점 없이도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지만.

“장문인은 개뿔.”

점창 전 장문인의 표정은, 마치.

팔다리가 잘린 것도 모자라 사슬 에 단단히 묶이기까지 한 짐승들을 바라보는 표정이었다.

“장문인이니, 문주니, 대사부니. 신 무림맹이니. 다 개소리지.”

점창 전 장문인은 벌컥벌컥 들고 있던 술병을 들이켜고는.

“꺼억, 술맛 죽이는구먼!”

입가에 홀러내린 술을 닦지도 않 고, 좌중을 향해 말했다.

“우리끼리 부둥켜안고 상처를 핥 으면서 그렇게 떠들어봐야. 그저 소꿉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을.”

쯧쯧, 하고.

점창 전 장문인이 불쌍하다는 둣 이 혀를 차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게 아등바등해봐야. 이미 이 시대는 자본 권력을 독식한 세 가(世家)들의 것임을 모르는 것은 아닐 테고.”

점창 전 장문인의 말이 길어질수 록.

“허울 좋은 장문인 소리나 들으 면서. 검가가 던져준 장로 자리 하 나, 그저 꿰차고 있는 것이 전부라 는 것 또한 모르는 바가 아닐 테 고.”

삼공자 측 신 무림맹 우두머리들 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렇기에, 다들.”

그런 그들에게.

점창 전 장문인이 쐐기를 박듯이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대공자 의 소식을 듣고 뛰어온 것이 아닌 가?”

그의 입가 한쪽이 비죽하고 치켜 올라가며.

“지금이라도 대공자의 편에 서 면.”

조소를 만들어 보였다.

“무림맹 시절, 그 영광의 시대를. 어떻게든 재현(再現)해 볼 수 있을 지 모른다고. 애써 그렇게 생각하 면서 말이지.”

점창 전 장문인이 떠들어 댈 때 는, 그의 입을 막으려 했던 그들이.

정작.

그의 말이 끝났음에도.

별달리 입을 여는 자가 누구 하 나 없었다.

오히려.

“•••그렇지.”

“점창 전 장문인이 옳은 말을 했 어.”

“애써 피한다고 해서, 사실이. 사 실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지.”

대연회장에서 벌어진 삼공자 측 의 촌극을 감상하던 내빈(來賓)들 이 속닥거리는 소리만이 요란했다.

“검가의 속파(廣派)가 된 문파들 의 영향력은 강하긴 해도.”

“그렇다 한들. 과거, 각지(各地) 의 패자(W者)로 군림하던 시절과 는 비교할 수가 없으니 말일세.”

수군거리는 소리가 커져갈수록.

삼공자 측 신 무림맹 소속 우두 머리들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너무 정곡들을 찔리셨나?”

점창 전 장문인이 킬킬거리면서.

“다들 아무 할 말이 없소?”

좌중을 두리번거리며 이죽거렸 다.

“•••삼공자님께서.”

문파 수장 하나가 쥐어짠 목소리 로 입을 열자.

그에게 시선들이 모였다.

“이 검가의 소가주(小家主)가 되 시고. 훗날 가주(家主)로 우뚝 서신

다면…!”

그가 주먹을 쥐어 보이며 억지로 목소리에 힘을 줬다.

“우리 또한, 이 검가에서 주류(主 流)가-!”

“-꿈도 크시구려.”

하지만.

점창 전 장문인의 목소리가 힘겹 게 쥐어 짜낸 그의 말을.

그대로 짓뭉개 버렸다.

“삼공자가 가주가 된다 한들. 우 리 처지가 무엇 하나 지금과 달라 질 것 같소?”

그는 특별히 목소리를 높일 이유 가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장로 위(位)를 차지하고 있다 뿐이겠지.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 먹어야 하 는 처지도 여전할 것이고.”

내용만으로도, 그들의 뼛속까지 시리게 만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 었다.

“훗날의 우리와 지금의 전쟁부 늙은이들을 비교했을 때. 그때 우 리가 뭐 그리 나은 처지일 것 같 소?”

그것을 몰랐으면.

누구도 이 대공자의 연회에 참석 하지 않았으리라.

그렇기에, 그들은.

주변의 수군거리는 소리들을 피 하며 애써 시선을 돌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어홈!”

보다 못한 종남파의 문주가.

“장문인.”

슬쩍, 내공까지 실어서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보는 눈들도 있는데, 이쯤 해두 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종남 문주.”

점창 전 장문인이 안타깝다는 듯 이 혀를 찼다.

“자네야말로 아직도 눈치를 못 챘다고 할 참은 아니겠지?”

“•••무엇을 말입니까?”

“ 혈사(血史)

그 한 단어에.

삼공자 측 신 무림맹의 수장들은 입을 다물었고.

“그러고 보니…!”

대연회장의 좌중 전체가 술렁였 다.

“예전에는 그 혈사의 뒤에 대공 자가 있다는 말을 헛소문이라고 비 웃었을 뿐이었지만.”

“…지금의 대공자가 보여주는 능 력을 보면. 마냥 헛소문이 아니었 을지도 모르겠소.”

그 술렁임 속에서.

점창 전 장문인의 목소리가 또렷 이 울려 퍼졌다.

“종남의 전대 문주는 혈사 때 쥐 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사라졌지. 그뿐만이 아니라, 사형제들이 전부 끌려간 탓에….”

그가 들어 올린 손가락이 종남의 현 문주를 향했다.

“…사형제들 중에 홀로 남은 자 네가 문주가 되었지. 그런데 그거 아나?”

점창 전 장문인이 흘흘 하고 바 람 빠지는 소리로 웃으며 물었다.

“그나마 자네가 문주가 된 것이

다행이었네. 자네 사형들은 전부 자질이 부족한 쓰레기였거든.”

“••장문인.”

종남 문주의 목소리가 사뭇 음산 하게 내리깔렸다.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이 하고 싶은 것입니까?”

점창 전 장문인이 웃음기를 거두 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지만.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의 말은.

반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의 해 끊어졌다.

“본가의 미래에 조금이라도 도움 이 되게끔 하기 위해서.”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점창 전 장문인은.

잠자코 고개를 숙이며 한 걸음 물러났다.

“당시 역모(逆謀)를 밝혀낸 김에, 그대의 사형제들을 전부.”

시녀들의 보좌를 받으며, 그 자 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대공자 연소현이었다.

“내가 손수 처리했던 것이 아닌 가, 하는 점이지.”

“••••..I”

그 넓은 대연회장이.

비명 없는 경악 속에서 침묵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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