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편 위정(爲政)
원각정의 정문 밖은.
아직 채 식지 않은 여름의 열기 로 끈적하게 땀이 홀러나오는 날씨 였건만.
그 안으로 들어서서, 숲길에 발 을 디디는 순간.
오싹할 정도로 쾌적한 바람이 불 어와 흘러내린 땀을 단번에 식혀주 었다.
“•••호오.”
전쟁부의 노장들이며, 검밖에 모 르는 검림의 무사들이며 누구라 할 것 없이.
“•••흐음.”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감탄을 터트렸다.
[•••과연.]
감히 인간 따위가 수령(樹齡)을 헤아리기도 어려운 거목들이 빽빽 이 들어차 있었고.
[•••이곳이 바로 그 원각정인가.]
울창한 숲의 천장 사이로 보이는 장대한 은하수(銀河水)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살아서 용트림을 하 여, 당장이라도 별의 홍수를 일으 켜 쏟아질 것처럼 무수히 반짝이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비경(秘境)이었으며.
선경(仙境)이라 할 만했다.
그리고 그 아래서.
유유자적 뒷짐을 지고, 앞서서 걷고 있는 대공자 연소현의 모습을 보는 것은.
탈속(脫俗)하여 선계(仙界)에 속
한 존재를 감히 엿보는 듯한 느낌 이었으니.
전쟁터와 싸움터에서 잔뼈가 굵 은 백전연마(百戰鍊磨)의 무사들마 저.
주눅 들게 하는 묘한 위엄이 있 었다.
그런 와중에.
“•••헛홈.”
반골(反骨) 성향을 가진 무사.
검림의 차석(次席) 검귀혼이 헛
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대공자. 이 검귀흔이 원각정까 지 온 까닭은-.”
하지만 그가 주변의 시선을 받으 며 힘겹게 꺼내려던 말은.
“검림 차석.”
연소현에 의해 끊어지고 말았다.
“그대는 평생을 바쳐 상승무학을 궁구하며 살아왔소.”
“•••그렇습니다만, 그것이-.”
“그렇기에, 그대는.”
아직 그의 발언을 허가하지 않았 다는듯.
다시 한번.
연소현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 행동은 어떻게 봐도 다분히 고의적이었기에.
원각정의 풍경을 감상하느라 정 신이 팔렸었던 이들마저도.
묘한 긴장감을 느끼며, 그들에게 주목했다.
“순수하게 무(武)를 숭상하지 않 고. 더러운 정치권력 따위에 한 발 을 담근 전쟁부의 모습이 못마땅하
겠지.”
대공자 연소현이 어깨를 으쓱이 며 슬쩍 뒤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 다.
“매년. 재능이 우수한 자들을 쓸 어가다시피 하는 그런 전쟁부가….”
연소현의 시린 듯 투명한 시선을 받은 전쟁부의 노장들이 순간적으 로 홈칫거렸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어가는 줄 모르고, 장로원 복귀를 위해 정 치놀음 따위에 빠져 있으니 말일 세.”
자신의 말을 끊었던 것치고는.
의외로 검림(劍林)의 입장을 헤 아리는 듯한 대공자의 발언에.
검림의 차석, 검귀혼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졌고.
“ 어홈.”
“크흠.”
전쟁부 노장들은 얼굴올 붉히며, 시선을 돌리고 괜한 헛기침을 해댔 다.
“그렇소이다, 대공자!”
대번에 의기양양해진 독안(獨眼) 의 노(老)고수가 외쳤다.
“그것이 바로 본 차석의 주장이
며! 동시에 검림이 전쟁부를 지탄 (指彈)하며 흡수 병합을 주장하는 이유이기드가.”
“허나.”
연소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소규모의 전투밖에 모르는 무사 들이, 어찌 전쟁을 책임질 능력이 있겠는가?”
“아니오, 대공자!”
검림 차석 검귀흔이 즉각 반론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 전쟁의 승패란. 전투들의 크
고 작은 승패가 모여 결정되는 것 이고. 결국, 그 전투들은 현장의 무 사들이 치러내는 것이오!”
싸움터에서 싸움터로 이어지는 삶을 살아온 이들다운 주장이었다.
“그리고 싸움의 승패는 무가 뛰 어난 자에게 유리하게 결판 지어지 는 법이니!”
평소에도, 검림에 소속된 무사들 이, 그 스스로 무수히 되뇌어온 질 문이기에.
말주변이 어두운 검귀흔이라도 당당히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니, 싸움을 담당하는 무사
들은 무예에만 충실하고. 문사(文 士)들이 그런 무사들을 충실히 보 조하기만 하면 될 것이오!”
“무와 문. 각자의 역할에만 충실 하면 된다?”
짐짓, 되묻는 연소현이었다.
“그렇소이다!”
대공자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가 사뭇.
어린아이의 투정을 바라보는 어 른의 것과 닮아있었기에.
검귀혼의 얼굴에는 노골적인 불
만의 기색과 불쾌함이 걸렸다.
“그대는.”
대공자가 물었다.
“싸움을 모르는 문사가 최선을 다한다 하여. 제대로 된 지원 역할 을 할 수 있다고 보는가?”
“책사(策士)와 군사(軍師) 따위의 문사들이 있지 않습니까?”
검귀혼이 고집스럽게 고개를 흔 들었다.
“그런 이들이 보조의 책임을 맡 으면 될 것이오!”
“그런가? 그렇다면….”
연소현의 말이 이어졌다.
“책사들과 군사들은 현장에는 익 숙할지 몰라도, 그만큼 중앙(中夫) 에서의 정치에는 무지하고 무력하 지.”
대공자의 말에, 전쟁부 소속의 참모들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들이 중앙에서 적절한 수준의 지원을 끌어올 수 있겠는 가?”
“•••그렇다면.”
수세(守勢)에 몰린 검귀혼의 말 이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것 같았
다.
“중앙에서도 그만큼 핵심적인 자 리에 전쟁을 아는 문사들을 배치하 면 될 것이 아니오…?”
“그런가? 하지만.”
연소현이 즉각 입을 열었다.
“그대의 말처럼, 결국. 현장에서 싸우고 공을 세우는 것은 무사들이 아닌가?”
“그, 그건….”
자신의 논리가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오자, 검귀혼의 하나뿐인 눈이 혼들렸다.
“그런 그들보다도. 지원 역할에 지나지 않는 문사들이 중앙에서 책 임자의 위치에 오른다는 것은, 어 떨까?”
그 흔들리는 눈을 지긋이 직시하 며, 연소현이 물음에 물음을 더했 다.
“현장에서는 마땅히 공을 인정받 아야 할 무사들의 사기가 참담히 바닥에 떨어질 것이고.”
연소현은 눈으로는 시선을 피하 는 검귀흔의 시선을 집요하게 따라 붙으며.
입으로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나
갔다.
“중앙에서는 공이 부족한 이가 책임자에 올랐으니 그 권위를 의심 받지 않겠는가?”
“•••그, 그렇다면!”
정론(正論)에 정론.
괴변 한 마디 없이.
단순하면서도 물샐틈없는대 공자의 압박에 검귀흔이 발악하듯 외쳤다.
“공을 인정받은 무사를 중앙의 책임자 자리에 올리면 될 것이 아 니오?!”
“그것이, 바로. 전쟁부의 검가무 장들이 아닌가?”
정곡(正韻).
검귀흔이 입을 멍하니 벌렸고.
“...!”
뒤따라 걸으며 가만히 귀를 기울 여 듣고 있던 이들 또한, 검귀혼의 반웅과 크게 다른 바가 없었다.
“•••그, 그렇지만!”
고개를 거칠게 혼든, 검귀흔이 다시 어떻게든 숭기를 되돌려 오려
외쳐 보았다.
“전쟁부의 검가무장들은 결국 거 의 모두가 장로원에서 쫓겨났지 않 소?! 대공자의 그 주장은 현실에서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오?!”
논쟁(論爭)의 원점 회귀.
“그리고 저 전쟁부의 늙은이들은 결국 전쟁은커녕, 다시 장로원에 복귀한 것에만 몰두하고 있지 않 소?!”
검밖에 모르는 검림의 무사치고 는 썩 그럴싸한 논법(論法)이었지 만.
상대는 그 연소현이었으니.
“그것은 문제는 전쟁부의 문제가 아닌. 전쟁부의 장수들을 정계(政 界)에서 밀려나게 둔 ‘위’의 잘못이 지.”
그 ‘위’에 속한 인물인 대공자가 스스로 그렇게 말하니.
검귀흔에겐 더 이상 할 말이 없 었다.
“무릇, 전쟁(戰爭)이란.”
대공자 연소현이 뒤를 돌아보고, 검귀혼뿐 아니라.
“정치 공학의 최종적 형태 중 하
나이며 최후의 수단이지.”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경제와 행정 그리고 정치에 대 해 무지(無知)한 자는. 제대로 전쟁 을 치를 수도 없을뿐더러. 감히 전 쟁을 준비할 수조차 없다.”
검귀혼이 거칠게 고개를 돌리고, 검림의 무사들이 입술을 깨물자.
[통쾌하구먼…!]
[역시, 대공자. 소문처럼 그 언변 에서 따를 자가 없는 듯하군.]
전쟁부의 노장들이 근접 전음을 통해 히죽거리면서, 웃음기 가득한 즐거움을 나누었다.
[검림 놈들. 꼴이 우스워졌으니.]
[당분간은 좀 조용해지겠지.]
노장 중 하나가 살짝 고개를 끄 덕였다.
[지금 본 것처럼. 대공자는 우리 전쟁부에 호의적인 듯하니-.]
“그렇다고 나는 지금의 전쟁부가 잘하고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 니오.”
마치, 그것은.
벽을 넘은 고수들이 펼친 근접 전음을 엿들은 듯이.
그들이 전음으로 나눈 대화를 정 면으로 반박하는 발언이었다.
‘장거리도 아니고, 근접 전음을 도청했다고?!’
‘설마. 우연이겠지!?’
하지만.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듯이.
연소현의 시선은 ‘대공자가 전쟁 부에게 호의적’이라고 했던 노장에
게 정면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전쟁부가 장로원에서 밀려나는 것올 막아주지 못한 것은, 그보다 위의 책임이지만.”
가만히 듣고 있던 전쟁부주가 조 용히 입을 열었다.
“북부 전쟁이 끝난 지 단 몇 년 만에 이렇게까지 허무할 정도로 쉽 게 장로원에서 밀려난 것은 저희가 부족한 탓이며.”
그는 전적으로 자신들의 부족함 을 통감하고 있었고.
“그 전후(前後)로 염 장로를 제 외하고 어떤 새로운 인물도 장로원
에 올리지 못한 것도.”
그의 어조에는 그런 책임 의식이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
“장로원에 입성(入城)할 만한 인 재를 발굴하지 못한 것도 저희의 책임입니다.”
“그렇소.”
전쟁부주가 직접 나서서 책임을 인정하고, 즉시 이어서 대공자가 공인하듯 그 책임에 대해 인정한 것은.
의기양양하게 펴지던 전쟁부 노 장들의 허리를 단숨에 구부정하게 만들었다.
“그대들의 미진한 대웅은, 검림 의 전쟁부에 대한 반발에서 볼 수 있듯. 본가의 최상충 부로 하여금. 전쟁부의 존재 의의에 대해 근본적 인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소.”
그 대공자의 어조는.
대중의 앞에서 축제 재개(再開) 를 외치며 전쟁부와 검림의 체면을 세워줄 때와는 다르게.
“그 결과. 최고운영회의로부터
이렇다 할 지원을 계속 받지 못하 고, 전쟁부는 본분(本分)을 소홀히 한 채 정치적으로 표류할 수밖에 없었지.”
사정없이 묵직했고, 또 칼날처럼 예리한 지적이었다.
“전쟁부주.”
“예, 대공자님.”
대공자의 냉엄한 시선이 전쟁부 주를 향했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쫓는 것은 필시 어려운 일이나. 그것이 전쟁 부의 목표였고, 그대들은 실패했 소.”
“죄송합니다, 대공자님.”
전쟁부주는 마치.
태상가주를 대하듯, 대공자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면목이 없습니다.”
이후, 뭐라 더 대공자의 질책이 이어질 줄 알았지만.
“하지만, 앞서 말했듯.”
대공자 연소현은 선을 긋듯 반듯 하게.
책임 소재를 분명히 드러냈다.
“본가 최상층의 책임 또한 분명 한바.”
대공자의 발걸음이 멈추자.
뒤를 따르던 무사들의 발걸음이 소속을 막론하고 우르르 멈춰 섰다.
“주인님, 오셨사옵니까.”
시녀장 정아가 고개를 숙여 대공 자를 맞이했다.
어느새.
원각정의 본 회의장 건물에 도착 한 것이었다.
“본인은 그 최상층의 일원이자, 방관하기만 했던, 일인으로서.”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세쌍 둥이 시녀들이 공손하게 대 회의장
의 문을 개방했다.
“어떤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 해 나갈지. 직접 보여주겠소.”
문이 활짝 열리자.
안쪽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확 하고 둑이 터 진 것처럼 홀러나왔다.
“겨우, 그런 미봉책(彈維策)으로 낙양의 빈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 결 가능할 것 같소?!”
사공자 측 문사가 목에 핏대를 세웠고.
“미봉책?! 낙양의 인구가 근 천 만(千萬)이오! 급진적인 해결책은 상상하지 못한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오?!”
대공자의 행정동에 투신했던, 황 도 출신 재야인사(在野人士)가 삿 대질을 했으며.
“웃기는 소리! 그 천만에서 당장 죽어가는 이들이 몇 명이나 되는 지 아십니까?!”
“구제책(救濟策)이란, 그 부작용 (副作用)을 감수하고서라도 관철 (貫微)해야 하는 법입니다!”
자애원의 지부장들이 입에서 침
을 튀겨가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 으니.
“그래서, 그 예산은 어디서 끌어 오잔 말인가?!”
“투자요! 외부에서 투자를 끌어 오는 수밖에 방법이 없잖나?!”
심지어.
그 격렬한 토의에는 대공자 계파 의 장로들마저도 예외가 아니었다.
술이고 주전부리고, 음식이고 할 것 없이 전부 뒷전이었다.
칼과 피가 난무하지 않는다뿐이
지, 대 회의장은 전쟁터와 다름이 없었다.
그 광경에 모두가 아연실색(0亞然 失色) 했고.
전쟁부의 노장들 중 하나가 자신 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계파 발족을 축하하는 자리가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그 말에 연소현이 뒤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하지만 그 만찬 연회(宴會)는. 우리가 아닌, 외부의 방문객들이나 아랫사람들을 위한 것.”
홍겹고 즐거운 대(大) 연회 대신.
대(大) 토의 난장을 주최한 연소 현이 손을 활짝 펼쳐 보였다.
“원각정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