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편 상무정신(尙武精神)
낙양검가.
원각정의 정문 앞.
방금까지.
전쟁부주에게 얻어맞은 정강이가 어떻다는 둥.
대공자 연소현의 무공을 빨리 직
접 겪어 보고 싶다는 둥.
호들갑을 떨기도 하고, 기대감에 괜히 과장된 행동을 보이던 검가무 장(劍家武將)들의 입이 일자(一字) 로 꾸욱 하고 다물어졌다.
그들도.
아니, 그들이기에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건.”
떨떠름한 어조로 나이 든 무장 하나가 입을 열자.
[대공자의 거처가 아니라….]
원각정의 내부에서부터 느껴지는 기운들에.
피부가 저릿저릿하고 머리끝이 쭈뼛거릴 정도였다.
[•••마치, 전쟁터로 돌아온 느낌이 로구나.]
당장에라도 새벽 시간을 틈탄 적 군(敵軍)의 기습이 시작될 듯, 뒷덜 미의 털이 바짝 곤두서고.
적의 포위진(包圍陣) 안으로 어 쩔 수 없이 돌격해 들어가던 순간 처럼, 심장이 죄여오며.
대회전(大會戰)이 시작되기 직전, 양 진영의 군사들이 자아내는 긴장 감에, 손이 땀으로 흠뻑 젖었던.
그 날들처럼.
[공기가 바짝 타오르는 것 같군.]
노장(老將)들의 신체가 반사적으 로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니, 이건.”
그랬기에 그들은.
“전쟁부의 정치꾼들이 아니신 가?”
반대편에서 다가온 검림(劍林)의
인원들을 정문에서 마주쳤을 때, 딱히 놀라지 않았다.
검가무장들이 침묵을 지키자.
그 노장(老將)들만큼이나 나이 많은 외눈의 무사가 한 걸음 앞으 로 나오며 말을 이었다.
“정치꾼들은 정치꾼답게. 평소처 럼 어떻게든 더러운 장로원으로 돌 아갈 고민이나 하시고 계시지.”
외눈의 무사가 사납게 이를 드러 내며.
짐승이 으르렁거리듯이 이죽거렸 다.
“어찌 그 무거운 엉덩이들을 움 직여 여기까지 오셨소?”
전쟁부와 검림.
두 단체의 성격이 유사하여, 기 본적으로 잘 맞을 것 같았지만.
사실, 그들은 견원지간(犬債之間) 이었다.
“검림 차석(次席), 검귀혼(劍鬼 浪)….”
“만나자마자, 시비부터 거는 것 인가?”
검림의 무사라고 하면, 일단 누 구든 시비를 피하고 봤겠지만.
지금 그의 앞에 있는 것은, 전쟁 부의 노장들이었다.
“그 하나 남은 눈알을 뽑아줄 까‘?”
“더 이상 앞을 못 보게 될 터이 니. 지금이라도 세상 구경을 많이 해두는 것이 어떻겠나?”
대번에.
검의 손잡이들을 쥐어 보이며 검 가무장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시비라니?”
그 광포한 살기 속에서.
검귀흔이라 불린, 외눈의 무사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본좌(本座)는 사실만을 말하고 있을뿐.”
태연한 기색과는 달리, 그는 이 미 검 자루를 쥐고 슬그머니 자세 를 낮춰 디딤발을 확보하고 있었다.
“장로니, 뭐니. 옛날부터 정치놀 음에 심취하고. 권력에 취하고, 부 귀영화에 취해, 검가의 무사로서 본질을 잊은 너희 늙은이 따위들 이…!”
화약(火藥)에 불이 붙은 것처럼.
검귀혼의 서슬 퍼런 기백(氣陳) 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무슨 낯짝으로 오롯이 외길만을 걸어온 우리 검림에게, 감히 시비 운운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 일갈과 동시에.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검림의 무 사들이.
처처척.
대화 따윈 더 필요 없다는 듯이 앞으로 나서면서 검들을 쥐는 소리
가 울려 퍼졌다.
“하…!”
화약과 같은 성질을 가진 것은.
검림의 무사들뿐만이 아니다.
하늘을 향해, 크게 웃어 보인 노 장들의 허연 머리가 하늘로 치솟고.
“전장도 제대로 모르는 애송이들 이니”
“지금 우리 앞에서 감히, 검을 쥐어 보여?!”
그들의 수염이 바람도 없이 줄기 줄기 흩날렸다.
“네놈들-!”
순간적으로 고수들의 기운이 허 공에서 부딪치며 일대에 광포한 바 람이 휘날렸고.
그 단단한 대로의 포석이 사방으 로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흙먼지가 튀었다.
“피, 피해라!”
또 구경거리인가 싶어서.
별생각 없이 원각정의 정문을 기 웃거리던 구경꾼들이 대경(大M)하 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말려든다…!”
“꺄아악!”
검림과 전쟁부의 충돌.
그것은.
술에 취한 일반 무사들이 휘청거 리며 검을 겨루는 것과는 격이 다 른 문제였으니.
와장창-.
여기저기서 혼비백산한 이들의 비명과 함께 좌판이 엎어지고, 음 식들이 공중에 홀날렸으며.
밀려 나자빠진 이들로 인해 순식 간에 원각정 앞 거리가 아수라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여기서 전부 토막을 쳐주
일촉즉발(一 觸卽發).
차차창-!
누가 먼저인지, 누구랄 것 없이, 그들이 반쯤 검을 뽑아 들었던 그 순간.
“그-만-!”
그 살기 가득한 외침을 끊어버리 며, 전쟁부주의 입에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쩌렁쩌렁한 소리가 고막을 울리
고, 땅을 진동시키며.
각자가 꼬나 쥐고 있던 검의 시 퍼런 날들이 울부짖을 정도였으니.
모두가 끌어올렸던 내력(內方)을.
날뛰는 자신들의 검을 다스리는 데 황급히 동원해야만 했다.
“..I”
피아(被我)를 가리지 않고. 모골이 송연하게 만드는 일갈에.
좌중 모두가 행동을 멈췄다.
“다들….”
그런 그들의 면면을 한 명씩 둘 러보며 전쟁부주가 묵직한 내공을 담아 말했다.
“여기가 어딘지. 잊고 있는 것이 아닌가?”
머리에 순간적으로 쏠렸던 피가 빠지자.
모두가 즉각 자신들을 둘러싼 상 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느새.
그들의 주변으로는.
대피한 구경꾼들 대신.
원각정의 수비 병력이 모여들어, 그들을 반쯤 포위하다시피 하고 있 었다.
그들 모두가.
어딘가 하나씩 신체에 결여(缺 如)가 있었지만.
그들 한 명, 한 명이 모두 벽을 넘은 자들.
그 신체적 결여 따위는.
부족함이나 모자람으로 느껴지지 도 않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운을 슬며시 홀리고 있는 그들을.
“…본가의 특임대(特任隊)인가.”
검림의 무사들과 전쟁부의 노장 들이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이곳이 원각정이라는 것을 잠 시 잊고 있었군.”
하지만 그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잠시 검림의 무사들과 전쟁부의 노장들이 침음을 흘리는 사이에.
시퍼런 검과 함께 매서운 살기를 뽑아 든 원각정 하녀단의 모습이 특임대원들의 뒤로 더해졌고.
“하하, 이거. 개판이로군.”
섬뜩한 목소리와 함께.
“큰 잔치에는 큰 소란이 일기 마 련이라더니.”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섯 자루의 검이 몸 주변을 둘러싼 사내.
즉각, 그 사내를 알아본 이들이, 그 날것 그대로의 광포한 살기에 눈썹이 치켜 올랐다.
“•••탈명귀검 (奪命鬼劍)
차르릉.
그 옆에는.
사슬들이 탁하고 진득한 소리와 함께 땅에 끌리는 소리.
그 사슬의 끝에는 두 자루 낫(雙 嫌)이 흉흉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 으며.
그 쌍겸을 쥔 중년인은 한 마디, 말도 없었지만.
그 삭막한 얼굴 아래에서는 명백 한 노기(怒氣)가 느껴지고 있었다.
“…저 쌍겸.”
“•••저자가 바로 그, 차마고도(茶 馬古道)의 수급수집가(首級苑集家) 라 불린다는 당백인가.”
그리고 당백과 함께 모습을 드러 낸 것은, 한 명의 사람이라기보다 는.
마치 거대한 산맥(山脈)의 형상 과 닮은 일기당천(一驗當千)의 장 수였으니.
“…검악파산(劍括破山).”
“염곽추...”
상황이 더 험악해지기 전에.
전쟁부주가 앞으로 나섰다.
“염 장로.”
두 손을 모아 인사를 하려는 전 쟁부주에게, 염 장로가 먼저 손을 들어 보였다.
“사죄는 제가 아니라. 이 원각정 의 주인께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 다.”
그러면서.
염 장로가 한 걸음 물러나자.
“ 다들.”
그곳에서 염 장로의 뒤를 따라왔 던 이의 모습이 드러났다.
“축제들은 즐기고 있소?”
그 호전적이던 검림의 무사들도.
그들과 비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 을 정도로 호기롭던 전쟁부의 노장 들도.
감히.
모습을 드러낸 대공자 연소현의 앞에서는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객(客) 주제에 잔치에 찬물을 끼 얹었다는 난처한 상황 때문일까.
아니면.
내력 한 점 끌어올리지 않았건
만, 분명히 느껴지는.
불가사의한 존재감 때문인가.
모두가 그렇게 굳어 있던 사이.
그나마 전쟁부주와 검림차석 검 귀흔이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나 섰다.
“본가의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본가의 대공자님을 뵙소이다.”
그리고 이어서 곧바로 사죄의 뚯 을 표하려는 전쟁부주에게.
“대공자님. 저희가 소란을 피운 죄-.”
“되었소이다, 전쟁부주.”
대공자 연소현이 손을 들어 보였 다.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가벼 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혈기가 왕성한 본가의 무사들이 검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소?”
그가 좌중을 둘러보며 미소를 지 었다.
“아버지께서 정정하시던 때엔.
본회의(本會議)에서도 종종 의견이 맞지 않는 이들의 칼부림이 일곤 했었지.”
해봐야, 겨우.
십여 년 전의 이야기.
“어느 날은, 회의는커녕. 아침부 터 저녁까지 칼부림만 벌이다가 끝 난 적도 있었지 않소이까.”
대공자가 껄껄, 시원하게 웃어보 였다.
하지만.
연소현의 시원한 웃음소리와는 달리.
그가 입에 담은 그 이야기가.
그들에게는 너무 머나먼 옛이야 기처럼 느껴졌기에.
“•••그랬었지요.”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은 연소현 을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그대들의 마음은.”
문득 연소현이, 그런 그들을 향 해 푸근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잘 알고 있소.”
그 미소와 한 마디 짧은 말에는.
시대와 상황에서 내쳐진 무사들 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무언가가 있 었다.
“… 대공자님.”
무어라 전쟁부주가 말을 꺼내려 했을 때.
“잠시 기다리시오.”
그렇게 대화를 중단시킨 대공자 가 훌쩍하고 허공을 딛고서.
단 한달음에 원각정의 정문 위로 뛰어올랐다.
그 고절한 신법에 다들 아연한 사이, 연소현이 거리를 향해 외쳤 다.
“다들 축제는 즐기고 있는가?”
하지만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답 변은 없었다.
대공자의 등장으로 소란은 단숨 에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원각정의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 고, 거리에서 축제를 즐기던 이들
이.
감히 대공자에게 나서서 대답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런….”
대공자가 안타까워하는 기색으로 나직하게 혀를 차는 소리가.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한 적 이 있지. 축제가 불만족스러운 것 은....”
마치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술과 고기가 부족해서라고…!”
그 말과 동시에.
미리 준비하고 있던 하녀들이 우 르르 정문을 나서서 술과 음식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이 음식들과 술들은, 원각정 내 에 방문한 손님들을 위한 것이나. 내, 이 축제의 주인으로서. 작은 소 란에 대한 사과의 뜻을 담아 모두 에게 대접하는 것이다.”
그가 두 손을 펼쳐 호탕하게 웃 어 보였다.
“자아, 축제는 계속된다!”
신호를 받은 악사들이 악기를 연 주하기 시작하고, 다시 화약장인들
이 터트린 폭죽들이 사방에서 요란 스럽게 터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모두. 동이 틀 때까지, 마음껏 즐기도록 하라!”
거리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