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330화 (330/350)

제5편 검심검명(劍心劍鳴)

검을 쥔 손은.

더 이상 검을 쥘 여력 따윈 없었 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애병은 자신의 손바닥에 달라붙은 것처럼.

마땅히 그 자리가 자신이 있을 자리라는 것처럼 꽉 쥐어져 있었 고.

“하아, 하아….”

기수식(起手式)을 취한 신체는.

더 이상 자세를 취할 수 있을 여 유 따윈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의 늙은 몸은 대 지에 뿌리를 내린 천년(千年)의 고 목(古木)처럼 굳건히 버티고 있었 으며.

“후우-. 후우-.”

금방이라도 멎어도 이상할 것 없 을 정도로 뛰던 심장은.

지평선 끝까지 뛸 수 있을 것처 럼 힘차게 박동했고.

“후우우우우-.”

분명 파열되고 뒤틀렸던 기혈(氣

穴)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지 말단(四膜末端)의 가는 혈 맥(血脈)에서부터, 백회혈(百合穴)-정수리까지 시원스레 뚫려.

상단전(上丹田)이 활짝 열려 그 기운이 천공(天空)과 합일(合一)을 이루는 둣했고.

“후우우우우-.”

긴 호흡 한두 번에, 냄비의 끓는 물처럼 들끓던 진기(眞氣)가 깊은 바다처럼 가라앉았으며.

“후우우우우-.”

다음 긴 호홉에는 의지와 함께 그 진기가 천인만장(千例M丈)으로

치달았다.

그 심오(深M)하고 묘(妙)한 조화 (造化)를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겠 는가.

그 이치(理致)를 넘어서 직관(直 觀)으로 세상 만물(世上M物)의 진 리(眞理)를 엿보는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넘어도 넘을 수 없었던.

부딪혀도 뚫을 수 없었던.

그 벽은 더 이상 어디에도 존재 하지 않았다.

펼쳐진 것은.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로 아득하 게 펼쳐진 우주(字W)니.

그저.

깊은 감격과 깨달음에 젖어버린 팽 장로의 주름진 눈가만이.

아침 이슬을 흘린 어린 풀잎 한 줄기처럼, 파르르 떨 뿐이라.

예로부터 무인(武人)들은 그 순 간을 돈오(頓倍).

즉, 각성〈覺罷)의 때라 불렀다.

수백 명의 사람이 몰려 있었지 만.

낙양검가에 들어와 갓 검을 쥐었

던 새파랗게 어린 무사(武士)부터.

낙양검가에서 평생을 검과 함께 살았던 머리가 하얀 늙은 무사들까 지.

붓을 쥐는 문사(文士)부터.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들, 식재료 를 확인하던 하녀, 그저 축제 기분 을 즐기러 왔던 할 일 없던 이들까 지도.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경이로운 광경 속에서, 모두 에게 가득 느껴지는 것은 팽 장로 가 쥔 검의 마음.

검심 (劍心).

지이이이이잉-.

그 경외로 가득한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팽 장로의 손에 쥐어진 그 검이 청아(淸雅)하게 우는 소리.

검명 (劍鳴).

그렇기에 낙양검가의 검법(劍法) 을 ‘검심검명(劍心劍鳴)’이라 불렀 다.

검에 평생을 바쳤고.

검을 평생 사랑했으며.

기어코, 벽을 넘어서고야 만 이 를 낙양검가에서는 어떻게 맞이하 는가.

차앙-.

가장 먼저 자신의 검을 뽑아 든 것은.

다름 아닌 호위각주(護衛閣主)였 다.

연소현과 연서린의 고모이자, 여 전히 자신의 남동생인 태상가주에 대한 애중(愛僧)을 정리하지 못했 던 그녀였지만.

그녀 또한 검가의 무사요, 무인 이니.

그녀는 잡념 하나 없이.

순수하게 경의만을 담은 표정으

로.

자신의 검을 얼굴 앞에 곧게 세 워, 벽을 넘어선 무사에게 존경을 표했다.

차차창-.

그 뒤를 이어, 천의무봉(天衣無 繼) 연서린이.

아버지, 태상가주에게 물려받았 던 고검(古劍)을 뽑아 들었으며.

그 뒤를 이어, 나이 든 무사들이.

자신들의 손때가 가득한 검을 뽑 았고.

그들을 좇듯이 어린 무사들이.

매일같이 갈고닦았던 검을 뽑아 곧게 세워 들었으며.

하녀와 하인들은 경건한 태도로 무릎을 꿇었고.

문사들은 고개를 깊이 숙여 자신 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것은.

검가 내의 복잡한 이해관계(利害 關係)와 엄격한 신분 차이를 포함 한.

모든 것을 초월해서.

검가(劍家)의 사람으로서, 일원으 로서 표하는 존경의 의미였다.

검(劍)의 가문(家門) 사람들이기 에, 검을 쥐지 않는 자들조차도 알 수 있는.

그 살을 찢고 뼈를 깎는 고통 속

에서.

가느다랗게 잡힐 듯, 잡히지 않 는 경지(境地)를 추구하며.

헤아리기 힘든 세월을 무한한 인 내로 버텨온 무사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었다.

그 엄숙한 광경 속에서는.

검가의 문화 따위를 잘 알지 못 하는 외부인들마저도.

입을 다물고 존경을 표하게 되는 것이다.

만감(M感)이 깃든, 한 줄기 눈물 과 함께.

천천히 두 눈을 뜬 팽 장로에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미소를 짓고 있는 대공자 연소현 이었다.

파앙-.

하는 파공성과 함께.

절도(節度) 가득한 동작으로 소 매를 한 차례 털어, 홁먼지 따위를 털어내고는.

한없이 정중한 태도로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했다.

“좋은 비무(比武)였소.”

그 말에.

팽 장로의 눈에서 둑이 터진 듯 눈물이 터져 흘렀다.

그는 넘치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서.

이제야 떨려오는 두 손을 모아,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중한 예 로, 대공자에게 인사를 올렸다.

“•••크게 배웠습니다.”

그것은.

원래라면, 일상적인 비무의 끝에 서로 나누는 상투적인 인사말에 불 과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보는 모든 이들의 가슴을 깊이 울리는 말이었다.

“축하하오, 팽 장로.”

짧지만, 스며드는 듯한 대공자의 축하에 팽 장로가 눈물을 후두둑 홀리며 고개를 깊이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대공자님!”

그러고는 즉시.

그 바닥에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서는.

“이제…!”

평생의 흔적으로 가득한 애병의 손잡이를 대공자에게 내밀었다.

“저의 검은 대공자님의 것입니 다…!”

검을 사사(師事)하고.

검을 바치다.

이 검가에서 그보다 더 낭만적인 광경이 또 어디 있겠는가.

좌중에서 요란한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낙양검가, 어느 저택.

하북 파벌 장로들의 석찬 모임.

쨍그랑.

바닥에 떨어진 찻잔이 요란한 소 리와 함께 박살 났다.

그 자리에는 수 명의 장로들이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 누구도 깨진 찻잔 따위 에 신경을 쓰는 이는 없었다.

“•••지금 뭐라고 했소?”

방금 소식을 들고 들어온 동료 장로가 당혹감을 감추지도 못한 얼 굴로 다시 외쳤다.

“우리 파벌의 수장인 팽 장로께 서, 대공자께 검을 바쳤다니까!”

그 장면은.

그 현장에 있었던 이들에게는,

검가의 오랜 낭만을 그대로 구현한 듯한 광경이었지만.

“뭐라고?!”

“난데없이 대체 그게 무슨 소리 요‘?!’’

현실을 살아가고 있던 그들에게 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 었다.

“팽 장로가 대체 왜?!”

“어째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듣기로는

소식을 가져온 장로는.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답했 다.

“팽 장로께서 대공자와의 비무에 서 가르침을 받고서는, 그 자리에 서 벽■을 넘었다고 들었소!”

순간.

“..

의혹으로 가득한 침묵이 실내에 가득 찼다.

“•••벽을 넘었다고?”

“…가르침을 받아서?”

얼떨떨한 표정으로 장로들의 입 에서 연달아 의문이 새어 나왔다.

“…그것도 한 번의 비무로?”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들 할 말 을 찾지 못하다가.

“그런 말도 안 되는….”

결국, 장로 하나가 실소하며 손 을 내저었다.

“어디서 헛소문을 듣고 온 모양 이구려.”

그러자.

다른 장로 하나도 자리에 다시 털썩 앉으면서 웃어 보였다.

“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실 없는 농이나 하고 말이지.”

그 말에 다른 이들도 자리에 털 썩털썩 다시 앉으며 고개를 내저었 다.

“•••그러게 말이오.”

“아니, 무슨.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런 터무니없는 소문을 정보라 고 가져와서 자리를 발칵 뒤집어 놓는 거요?”

성을 내는 이도 있었다.

“늦게 참석했으면, 얌전히 사과 나 할 것이지…!”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자신 또한 익히 예상했던 바.

소식을 가져온 장로는 쏟아지는 질타 속에서도 꿋꿋이 할 말을 이 었다.

“…지금. 본가의 전쟁부(戰爭部) 가 발칵 뒤집혔소.”

“늙은이고 젊은이고 가릴 것 없 이 전쟁부의 무사들이 다들 원각정 으로 뛰어가고 있단 말이오!”

농으로 치부하고 넘기려던 장로 들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그 엉덩이 무거운 자들이 움 직였다고?”

소식을 가져왔던 장로가 답답하 다는 듯이 제 가슴을 두드렸다.

“게다가 검림(劍林) 소속의 무사 들마저 원각정으로 모여들고 있다 는 정보도 있소이다!”

“검림이…?!”

검림 (劍林).

검림은 검가 내의 비공식 단체 로.

검에 살고 검에 죽는 검귀(劍鬼) 들이, 공식적인 소속이나 출신 따 위를 막론하고 모인 집단이었다.

“그 광인(狂人)들이 원각정으로

향하고 있다고‘?”

“대체 무슨…?”

장로들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오!”

소식을 가져온 장로가 숨을 쉬지 도 않고 이어 외쳤다.

“삼공자 측의 신(新)무림맹(武林 盟) 장로들마저 원각정을 방문하기 위해 출발했다고 하오!”

신무림맹은.

과거 무림맹 소속이었던, 문파(門 派)나 무가(武家)들이 삼공자를 주 축으로 모인 세력을 일컫는 용어였

다.

“그들은 삼공자 측 사람들인 데…?”

“그들이 대공자 측의 축하 만찬 으로 향하고 있단 말이오?”

“계파 내에서 난처한 상황에 처 하게 될 터인데…?”

탕, 하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소?!”

소식을 가져왔던 장로가 커다란 원형 식탁을 내리쳤다.

“대공자가 비무 한 번에, 이미 신체적 전성기가 지나도 한참 지난

노인의 등을 밀어 벽을 넘겨주었단 말이오…!”

그가 악을 쓰듯이 외쳤다.

그리고 그때야.

너무나 황당한 소식에.

제대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 던 장로들의 안색이 돌변했다.

“……!’

오늘 오후.

대공자가 자신의 계파를 기습적 으로 공개하고.

대공자가 태상가주의 일검(一劍) 으로 하늘을 갈라놓았을 때만 해도.

더 이상 오늘 대공자 때문에 놀 랄 일은 없으리라 여겼던 그들이었 다.

하지만.

대공자는 그런 자신들을 비웃듯 이, 태연히 상상을 초월하는 짓을 벌인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은, 계파나 파벌 따위의 문제가 아니오!”

소식을 가져왔던 장로가 외쳤다.

“이건, 이 검가의 정치적 지형이

근본부터 싹 바뀔지도 모를 대(大) 사건이오!”

중진 장로 중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의자는 뒤로 나뒹굴고.

그의 앞에 놓여 있던 음식들이 엎어졌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다들 자리를 박차고 나갔기에, 누구도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어서들 원각정으로 갑시다…!”

원각정의 정문 앞에서.

대공자 연소현이 모두에게 외쳤 다.

“연회는 이제 시작이다!”

그의 얼굴에는 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모두, 축제를 즐기도록 하라!”

그 말이 끝나자마자.

환호성과 함께.

원각정의 인원들이 쏘아 올린 폭 죽들이 어두워진 하늘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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