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329화 (329/350)

제4편 벽(壁) 부수기

아주 조금 전.

“고모님.”

원각정 앞 거리에서, 서성거리는 옛 스승에게.

낙양검가의 이공녀이자 천의무봉 이라 불리는 연서린이 석양(夕陽) 빛을 둥지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소현이를 직접 만나는 것이 무서우십니까?”

“무섭다니…?!”

너무나도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연서린의 표현에.

호위각주가 석양보다 얼굴을 붉 히며 벌컥 성을 냈다.

“내가 놈에게 두려울 것이 있겠 느냐?!”

“그럼, 대체….”

연서린이 짐짓 한숨을 내쉬어 보 였다.

“여기까지 와서, 정작 원각정에 는 안 들어가시고 거리에서 시간을 끄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그건…!”

정곡을 찌르는 옛 제자의 말에 당황한 호위각주가 말을 더듬었을 때.

“저건…!”

“대공자님이시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그 쪽으로 향했다.

“이 대공자 연소현이 그대의 도 전을 받아 주겠다.”

대공자가 벗어서 위로 던졌던 하 얀 가면이 노을빛을 반사했다.

하늘로 높이 올랐던 가면은 바람 을 받아 회전하면서 아래로 떨어지 기 시작했고.

한 번.

두 번.

회전할 때마다 붉디붉은 석양빛 을 번쩍이듯 반사하며 춤을 추었다.

그리고.

그 가면이 지면에 닿는 그 순간.

“•••검가검법(劍家劍法), 검심검명 (劍心劍鳴)

비무(比武)라는 형식에 맞추어 초식을 알리는 팽 장로의 목소리와 함께.

“발검세(拔劍勢) 오의(與義)!”

온몸을 꼬아 비틀어 가공할 기운 을 응축했던 팽 장로의 신체가 폭 발하듯 움직였다.

“-파란(波滿)!”

비록.

무언가 부족하여.

벽을 넘어서지는 못했었지만, 평 생을 쌓아온 팽 장로의 검력(劍方) 은 결코 누구도 무시할 수준이 아 니었다.

그리고.

그걸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검심검명, 발검세.”

대공자의 입술도 거의 동시에 달 싹였다.

“오의, 파란.”

대공자의 입에서 동일한 초식명 이 나오고.

그의 오른손이 검결지(劍諫指)의 형태를 취했다 싶었던 순간.

째맹-.

빛살이 스쳐 지나갔던 것인가.

분명, 팽 장로 자신의 검이 먼저 발검 (拔劍) 되었고.

심지어 같은 초식이었건만.

닿은 것은 대공자의 검결지가 먼 저였다.

“오오..?!”

“보이지 않았다…!”

“저것이 소문 속의 그 검결지인 가?!”

파란이라는 초식명처럼.

대공자의 검술은 좌중에게 파란 을 일으켰다.

“크혹..?!”

팽 장로의 입에서 신음이 튀어나 왔다.

대공자의 보이지도 않는 검결지

가 자신의 검을 때린 탓에.

손목이 순간 뒤틀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분명.

팽 장로의 주름진 입가에 떠오른 것은 미소였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

검밖에 몰랐던 시절의 젊은 팽씨 가문 출신 무사의 미소이기도 했다.

“격검세(擊劍勢), 오의(與義)!”

우렁찬 팽 장로의 외침.

튕겨났던 팽 장로의 검과 몸이 그 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고.

한 바퀴를 돌며 길게 내뻗은 앞 다리가 바닥을 긁으며 흙먼지를 튀 겼다.

“삭풍(期風)!”

대공자의 가공할 검격(劍擊)에서 받은 반탄력(反彈;b)을 그대로 실 어낸 일격(一擊).

시큰거리는 오른 손목 따윈 왼손 으로 틀어쥐어 보완한다!

“흐아압-!”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기합성이 터져 나온 팽 장로의 귓가에.

“격검세, 오의.”

대공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삭풍.”

살을 저미는 듯한 겨울 북풍(北 風)이 이러할까.

대공자의 검결지 끝에서 매서운 폭풍이 몰아닥쳤다.

“…크흡!”

분명, 대공자도 팽 장로 자신과 마찬가지로 일검이었건만.

어째서인지, 전신의 살갗이 전부 찢어져 버리는 것 같은 격통이 치 달았다.

‘내 검은-?’

자신의 일검은 그 매서운 삭풍 속에서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듯 먹 혀 버렸다.

하지만.

“아직이오-!”

삭풍을 온몸으로 받아 내면서도.

“-아직이란 말이오, 대공자!”

팽 장로의 다리는 앞으로 한 발 내디디는 데 성공했으며.

그 몸은 대공자와 한 걸음 더 가 까워졌고.

“속검세(速劍勢), 오의(與義)!” 그 입에서는 이제 비명인지 기합

인지 모를 기성(奇聲)이 터져 나오 니.

그 기백이 귀신(鬼神)과도 같아.

U

“..!”

순간적으로 위압당한 좌중이 자 신도 모르게 한 발짝씩 물러나고야 말았다.

“흉참요란(凶慘提亂)!”

그 저릿한 기백이 경지를 초월해 대공자의 마음에 닿았는가.

드디어 연소현의 입가에도 미소 가 걸렸다.

“오의, 흉참요란.”

두 사람을 중심으로.

철(鐵)의 폭풍이 몰아쳤다.

“호오…?”

은연중에 감탄하는 연서린의 목 소리와는 달리.

반대로 호위각주는 인상을 찌푸

렸다.

검과 검결지가 연달아 맞부딪치 는 소리가 좌중의 귀를 찢어버릴 듯이 울려 퍼지고.

사방(四方)에서 연소현의 검결지 와 격돌하는 팽 장로의 검 끝이 석 양빛을 어지럽게 반사하는 광경은.

마치, 팽 장로의 남은 목숨을 불 태우는 모습처럼 보였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하군.”

호위각주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디까지나, 이 비무는.

연소현이 선공을 계속해서 양보 하고 있으며.

심지어 추격타마저 넣지 않고 있 기 때문에 성립되는 것뿐.

벽을 넘은 그녀에게 있어서, 팽 장로의 혼신(薄身)의 공세(攻勢)는.

어디까지나 기술적으로 부족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소현이 놈도 짓궂구나.”

호위각주가 혀를 찼다.

“자신의 무공을 대중에게 공개하 고 싶었다면, 좀 더 적절한 상대가

있었을 터인데.”

“과연…, 소현이가.”

그 말에 자신의 옛 제자인 연서 린이 의뭉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런 의도일까요?”

호위각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냐?”

연서린은 시작부터.

두 사람의 비무를 바라보며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로 호위각 주에게 말했다.

“소현이 녀석의 심중을 그 누가 정확히 알겠습니까? 하지만….”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적어도. 그렇게 뻔한 이유로 이 비무를 하고 있지는 않을 것 같습 니다.”

“그렇다면-.”

뭔가 말을 이으려는 호위각주의 목소리는, 팽 장로의 기합에 묻혔 다.

“으오오오오--!”

팽 장로는 쥐어 짜내듯.

마지막 한 줌의 내공까지 짜내어 난격(亂擊)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 검의 폭풍은 조금도 그 기세

가 줄어들고 있지는 않았지만.

기합과 근성으로, 영원히 검격을 유지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쿨럭-!”

드디어 쥐어짜는 것도 한계에 도 달한 것인가.

팽 장로가 입에서 검게 죽은 피 를 뿜었다.

“•••글렀군.”

그렇게 느낀 것은 호위각주만이 아니었는지.

요란한 검격 소리만이 울려 퍼지 는 가운데, 다들 말 한마디 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을 사랑했다.

팽가에서 태어나 처음 쥔 것은 묵직한 도(刀)였지만.

자신이 결국 선택한 것은 한 자 루의 검(劍)이었다.

“검을 쥐겠다고?!”

“팽가의 일원으로 부끄럽지도 않 은 것이냐?!”

“그것도 직계가?!”

가족과 친족들의 모진 말들을 둥 에 맞으며, 가문을 떠났다.

“너는 더 이상 우리 팽가의 일원 이 아니다!”

고통과 번민으로 가득했지만.

검을 쥐는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낙양검가를 선택했다.

“오성(倍性)이 뛰어나군. 근골도 우수하고, 감각도 훌륭해. 하지만. ”

검가에 무사로 들어온 그에게 검 술 스승이 말했었다.

“벽을 넘을 정도의 천재는 아니 다.”

그 말에 반항이라도 하듯이.

눈이 오는 날에도, 비바람이 몰 아치는 날에도.

태양이 작열하는 낮에도, 서리가 내려앉는 밤에도 검을 휘둘렀다.

“대단하군.”

하지만.

그런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무사로서가 아니라.

“이대로 행정 쪽으로 나가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어째서인지.

그리 공을 들이지도 않았던 방향 으로의 인정이었다.

“장로 위(位)에 오른 것을 축하 -. 아니, 경하(慶賀)드립니다!”

“이제부터 팽 장로님이라 불러 드려야겠습니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자신은 장로

가 되어 있었다.

“팽 장로. 부탁드리오. ”

“우리 하북팽가의 이름을 그대가 빛내고 있소이다. ”

과거, 자신을 경멸하던 팽가의 사람들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고.

심지어, 자신을 내쳤던 아버지마 저도.

“너는 우리 팽가의 자랑이다!”

돌아가실 때까지, 어떻게든 자신 과 한 번이라도 더 만나고 싶어 했 었다.

하지만.

“허허, 팽 장로님께서는 아침부 터 검을 휘두르는 것입니까?”

어느새 머리가 하얗게 새어.

하북 파벌의 수장이 된 자신과는 달리.

“적절한 운동은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지요. 저도 팽 장로님 께 배워야겠습니다. ”

무사로서의 자신은, 여전히 벽 앞에서 맴돌고 있었다.

어느 순간 벽을 넘었다 싶은 것 같다가도, 벽은 여전히 앞을 가로 막고 있었으며.

어느 순간 벽을 지났다 싶은 것 같다가도, 벽은 마치 늪처럼 자신 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어떻게든 안 되겠는가?”

자신의 간절한 물음에.

“아무래도….”

몰래 초청했던 출중한 실력의 고 수가 말끝을 흐렸다.

“연세가 연세이시기에. 아무래도 지금에 이르러 벽을 넘는다는 것은 좀….”

“•••그런가.”

손때 묻은 검을 만지작거렸지만,

검이 답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가-. ”

이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시점이었 다.

평생.

검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짝사랑이었다.

“쿨럭…!”

팽 장로는 각혈했다.

한계까지 늙은 신체를 밀어붙이 자, 혈맥(血脈)이 버티질 못하는 것 이다.

난격을 자아내던 검은 무거워졌

고.

온몸에 추를 매단 것처럼 처져만 갔다.

‘여기까지인가….’

장로원에서 대공자의 일검을 보 고.

그 젊은 날의 심장이 다시 뛰었 었지만.

아무래도, 늙어버린 육신은.

자신의 부족한 재능은 의욕을 따 라올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공기가 부족한 허파가 헐떡이고.

쥐어짜인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고.

이제는 눈앞마저 흐려져 왔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팽 장로의 검을 쥔 손에서 힘이 빠지던 그 찰나.

“아직이오.”

검격이 자아낸 검풍 속에서.

모든 것이, 뿌옇게 흐려지던 그 상황 속에서.

대공자의 목소리만은 너무도 선 명하게 팽 장로의 귓가에 다가왔다.

“아직이라오, 팽 장로.”

그 말과 동시에.

그때까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던 대공자의 검결지가 쑤욱하고.

그 찰나를 꿰뚫으며 불쑥 짓쳐들 어왔다.

“흡-!”

어딘가 여력이 남아 있었던 것일 까.

어떻게 그 검결지를 본 것일까.

팽 장로의 늙은 팔과 낡은 검이 그 검결지를 반사적으로 쳐냈다.

“..!"

자신이 하고도 놀란 표정을 짓던 팽 장로가, 문득 자신도 모르게 만 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마지막엔 조금은 닿았나 보구나….’

흐}지만.

대공자의 속삭임은 끝나지 않았 다.

“뭘, 혼자서 만족해 버리고 웃고 있소?”

그 말과 동시에 대공자의 검격이 한충 더 빨라졌다.

“흐업…!”

손도, 발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 는 가운데에서도.

팽 장로는 반사적으로 그 검격의 폭풍을 쳐내기 시작했다.

“아직이오.”

대공자의 검격이 다시 한층 빨라 졌다.

‘이건 너무 빠르-.’

“아직이라니까!”

대공자의 입에서 일갈(一陽)이 터져 나왔다.

“크홉…!”

심장은 입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 았고.

호흡 조절은 이미 불가능했고.

전신의 기혈(氣血)은 불타는 둣 이 들끓고 있었으며.

팔다리는 어디 있는지도 잊었다.

“으오오아아아아아아아아-!”

우렁찬 기합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팽 장로는 그 기합이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 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 빠르게!”

이제, 대공자의 검결지에서는 팽 장로도 모르는 검결(劍談)이 치닫 기 시작했다.

검심검명 비오의(秘a義).

극오난마(極语亂麻).

“더 강하게!”

대공자의 일갈에 호응하듯.

“더 정교하게!”

대공자의 검결에 호응하듯.

“그우어어어어어어어어어-!”

무아(無我).

자신조차 잊은 팽 장로의 검극은 석양을 분쇄(粉碎)하듯, 붉디붉은

검광(劍光)을 휘날렸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벽(壁)을 넘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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