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도전자(桃戰者)
땅거미가 길게 내려앉은 저녁 무 렵.
원각정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 는 이는.
다름 아닌 하북 파벌의 수장이 자, 하북팽가(河北彭家) 출신의 팽 장로였다.
‘결국, 와버렸다….’
장신구는 전부 빼버리고, 빌려온
허름한 무복(武服)을 걸친 후에.
흙 한 줌을 얼굴에 문지르고, 대 충 털어내자, 영락없이.
출세와는 거리가 먼 노년 무사 꼴이 되었다.
하지만, 나름 완벽한 분장에 만 족스러움도 잠시.
“하아….”
자신이 하고 있는 짓을 자각하 자, 한숨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 다.
‘그렇다고. 아예, 참석도 하지 않 을 수는 없지 않은가…?’
충성을 증명하는 자리도 아니고.
겨우, 계파의 발족을 축하하는 자리다.
별것 아니었지만.
그 별것 아닌 자리에 참석조차 하지 않는 것은, 큰 오해를 불러일 으킬 수 있었다.
‘•••얼굴조차 보이지를 않으면, 삼 공자 측에 동조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팽 장로 자신뿐만 아니라.
장로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중립
장로들 모두에게 마찬가지로 적용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설마. 파벌의 막내 장로를 그렇 게 뻬앗겼는데, 그 수장께서 축하 자리에 참석하시지는 않겠지요?”
팽 장로 자신과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중립 장로들도 오늘.
구성원을 뜬눈으로 떼앗기는 경 험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석해야만 하는 것이다.
참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대낙양검가의 장로 위(位) 에 오르고 나서. 이렇게까지. 난처 한 상황에 몰려 본 것은 처음이구 나...!’
난처함과 곤란함 속에서.
팽 장로는 상황 해결을 위한 타 협점으로, 일반 무사인 척 분장까 지 해야 했다.
그는 손때 묻은 자신의 애병(愛 兵)을 만지작거렸다.
‘어떻게든 슬쩍 뒤섞여 방문해서.
어떻게든 대공자에게 축하 인사를 해주고, 어떻게든 얼른 나오는 수 밖에….’
‘어떻게든’의 삼박자.
모두에게 자신이 참석했다는 것 을 알릴 수는 없어도.
적어도.
대공자에게는 자신과 하북 파벌 이 ‘적(敵)’。] 아니라는 것은 명백 하게 해야만 했다.
그야말로, 주먹구구라고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의 계획에.
‘그나마, 다행인 점은. 눈에 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인
가....’
팽 장로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주 변올 둘러보았다.
“자네, 대공자님의 그 일검(一劍) 에 대해 들었는가?”
“듣기만 했겠는가? 그 하늘에 새 겨진 상혼을 직접 보기까지 했네.”
“그렇지. 그게 아니면 이렇게 많 은 이들이 모여들지도 않았겠지.”
팽 장로 근처에서 수군거리는 무 사들의 대화처럼.
원각정 앞 대로는.
검을 차고, 괜히 어슬렁거리는
낙양검가의 무사들과.
“대공자님을 뵐 수 있을까? 내 아주 중요한 투자 건수를 가져왔는 데-.”
“허. 자네 정도의 상인이 대공자 님을 뵈려면, 한 달은 이곳에서 줄 을 서서 기다려야 할 걸세.”
혹여나 우연히라도 대공자를 만 날 수 있을까 모여든.
비단옷을 입은 상인들.
“•••무슨 절차가 이리도 오래 걸 리느냐? 내 이름을 대고도 부족한 것이야?!”
“아이고, 주인 어르신. 출입 절차
는 이미 끝냈지만. 위명 자자한 가 문들의 마차들이 줄을 서서 출입을 기다리는 중입니다요.”
“에잉, 쯧쯧.”
대로의 저편까지 줄에 줄을 이은 마차들의 행렬.
그 행렬을 이룬 마차들은, 어느 하나.
이름값이 부족하거나, 빠지는 구 석이라고는 없는 가문들의 소유였 다.
“대공자님 계파의 탄생을 이 폭 죽(爆竹)으로 축하해 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맛있습니다! 맛있어요! 둘이 먹 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
“축하 화환(花環)을 미처 준비하 지 못한 분들은 보십시오!”
대박 냄새를 맡고 모여든 온갖 잡상인들과.
“약 선녀님의 은혜에 감사하 고...”
“대공자님의 앞길에 약 선녀님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먼발치에서라도 대공자의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모여든 이들.
그리고 그저, 소문난 잔치에 기
웃거리려는 구경꾼들까지 합치면.
그 대공자의 일검(一劍)이 얼마 나 거대한 한 수였으며.
그 일검이 일으킨 반향(反響)이 얼마나 큰지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문전성시(門前成市) 가 아닌가?”
불쑥.
난데없이 자신에게 걸어온 말에, 팽 장로의 몸이 굳어버렸다.
....
갑자기, 변장을 한 자신에게 누
군가가 말을 건네 왔기 때문이 아 니었다.
“몇 달 전만 해도. 낡아빠진 창 고들과 하인들만이 어슬렁거리던 원각정 앞이었건만. 이젠 이렇게 변하다니.”
자신에게 말을 건 인물의 정체 때문이었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자면. 참으 로 감개(感-I旣)가 무량(無量)하다 네.”
하핫, 하고 청량한 소리로 웃는.
평범한 서생(書生) 차림의 소년
O
장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하 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이 목소리는…!’
주변인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 고 있었지만.
오늘.
머릿속 가장 깊은 곳에, 그 모습 과 목소리를 각인당하다시피 했던 팽 장로는.
‘대공자…!’
그를 몰라보려 해도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대공자의 존재를 자각(自覺)한
것만으로도.
전신의 털이 모두 곤두서는 듯했 다.
“•••그렇습니까.”
팽 장로는 바짝 말라오는 입술을 느끼며, 긴장에 잠겨버린 목소리로.
애써 담담한 척 말을 이었다.
“이 늙은 무사는 그저. 대공자님 의 앞날에 복이 가득하길 기원하려 찾아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팽 장로는 눈치 빠르게.
이 상황에서 대공자에게 큰 소리 로 인사를 올려, 이목을 끌어모으
는 짓 따윈 하지 않고.
자신의 용건을 밝혔다.
“자네가 그렇게 빌어주니, 틀림 없이 대공자께서도 깊이 감사하실 걸세.”
“•••그렇군요.”
이로써, 가장 중요한 용무는 마 쳤다.
원래라면.
이제 물러가면 될 시점이었건만.
“그런데….”
팽 장로는 자신도 모르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행사에서 가장 바쁘실 분께서. 이런 곳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그 말에 대공자는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자네같이 상황이 난처한 이들이 많아서 말일세.”
대공자가 손을 들어 원각정의 입 구를 가리켰다.
“다들 입구를 통과하질 못해서 말이야.”
아무리 원각정이 행사 동안 개방 되었다지만.
아무나, 아무렇게나 출입시킬 수
는 없는 법.
원각정의 정문 앞에서는 꼼꼼한 출입 확인 절차가 이루어지는 중이 었다.
“다음 분.”
“다음, 오도록 하세욧!”
눈에 확 띄는 화려한 궁장 차림 의 소녀들이 손떅을 치자, 기다리 던 다음 순서의 하객(賀客) 하나가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아이고, 이거 검가의 삼•사공녀 님들이 아니십니까?”
그랬다.
그녀들은 다름 아닌.
연소현의 누이동생들인 삼공녀 연다은과 사공녀 연다혜였다.
그녀들이 직접 나서서, 혼잡한 정문에서 벌어질 수 있는 소란을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공자님의 계파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것을 축하드립니다요!”
그가 방명록에 이름을 쓰며 그렇 게 축하 인사를 건네자.
“오호호호! 고마워요!”
삼공녀 연다은이 거만한 표정으 로 과장될 정도로 간드러진 웃음을
터트렸고.
“앞으로도 그 마음, 변치 않도록 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사공녀 연다혜가 슬쩍 특유의 날 카로운 시선을 보내자.
“무, 물론입지요.”
하객은 당황한 기색으로 얼른 안 으로 향했다.
“다음 분.”
“다음, 오도록 하세욧!”
대공자 계파의 출범을 알리고 축 하하는 행사였지만.
어째, 자신들이 더 의기양양해진
그녀들이 었다.
“…아무튼, 그래서.”
그 모습을 보며 가면 아래에서 미소를 짓던 대공자가 어깨를 으쓱 이며 팽 장로를 돌아보았다.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이 몸이 직접 몰래 만나주고 다니는 중이라 네.”
팽 장로가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역시나.
자신과 마찬가지 처지인 장로들 이 변장을 하고 원각정 근처를 어
슬렁거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을 만드신 장본 인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아 무래도 좀….”
자신이 말을 해놓고도.
어딘가 투정을 부리는 듯한 자신 의 말투에.
속으로 놀란 팽 장로였다.
“그런가?”
대공자는 하핫 하고, 그저 속 편 히 웃어 보였다.
어째서일까.
나이 차이로 따지면 조손(祖孫) 이라 해도 무방한 관계임에도.
자신과 대공자의 태도가 나이와 는 거꾸로 된 것 같은 느낌이.
그리 썩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 았다.
‘…이것이 그릇의 차이인가.’
옛말에 백문(百聞)이 불여일견 (不如一見)이라 했던가.
오늘 그가 장로원에서 느낀 패도 (W 道).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직접 느낀 대공자의 넓은 그릇.
자신이 만나 왔던 그 어떤 누구 와도 결이 다른 인물이었다.
그렇게.
과거, 무검자라 불리며 무시당하 던 소년에게 무심코 감탄하고 마는 팽 장로였다.
“…저희 하북 파벌은.”
그리고 그래서일까.
“여러 가지 입장상. 대공자님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는 못하지만.”
팽 장로는 좀 더 마음 편하게.
깊은 곳에서 나온 말을 할 수 있 었다.
“앞으로도 대공자님과는 좋은 관 계를 계속 유지해 나갈 것을 깊이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팽 장로는 잠시 망설이다가.
기왕 하기 시작한 말을 끝맺음 짓기로 했다.
“…개인적으로도, 언젠가는. 대공 자께서 꼭 소가주가 되시는 모습을 보고 싶군요.”
그것은 정치적인 역학 관계를 떠 난, 순수한 호의의 표현.
팽 장로 본인이 느끼기에도 노회
한 정치인답지 않은 말이었다.
“그런가….”
하지만.
순수한 호의에는 호의로.
연소현은 그런 그의 마음을 들여 다보기라도 하듯.
혼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감사합니다.”
정확히, 무엇을 향한 감사 인사 인지는 스스로도 몰랐지만.
그렇게 감사를 표한 팽 장로가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런 그의 뒷덜미를 잡듯.
“용건은 그것뿐인가?”
연소현의 말이 그의 발을 멈춰 세웠다.
“•••무슨 말씀이신지?”
고개를 돌려 묻는 팽 장로에게 연소현이 다시 물었다.
“자네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그 것뿐인가 물었네.”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대답에 가면 구멍으로 보이는 연소현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자네의 출신 가문인 하북팽가는 과거로부터 도(刀)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가(名家)이지.”
“그렇습니다만….”
연소현이 손을 들어 팽 장로의 허리춤에 묶인 검을 가리켰다.
손때 묻은 그 검은 팽 장로 본인 의 애병이었다.
“그런데 자네는 팽가의 직계(直 系)이면서도 이 검가(劍家)에 몸을 담고, 검을 차고 다니고 있지.”
그 말에, 팽 장로는 습관처럼 자 신의 애병을 만지작거렸다.
침묵을 지키는 팽 장로에게 연소 현이 말을 이었다.
“직접 찾아오기는 꺼려졌던 많은 장로들은 대리인을 보내기를 택했 다네.”
그것이 일반적인 선택이었다.
원각정의 담을 넘어 몰래 숨어들 방법은 사실상 없었고.
원각정 내부 인원을 매수하여 몰 래 방문하는 것도 불가능했으니.
“하지만 자네는 직접. 내게 찾아 왔지.”
“이대로 돌아가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네.”
침묵하던 팽 장로가 결국.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듣기로는. 대공자께서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멋쩍은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것이 사실인지도 모르겠습니 다.”
무언가 결심을 한 것일까.
그는 허리춤에 묶여 있던 검을 풀어 들고는 두 손을 모아 연소현 에게 포권(拘쏘)을 해 보였다.
그 모습은 그 어떤 무인보다도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무명(無名)의 무사, 팽 아무개가 감히 본가의 대공자께 한 수 가르 침을 청합니다.”
하북팽가 출신의 정치인이자.
한 파벌의 수장 이전에.
팽씨 성을 가졌으나.
가문의 도(刀) 대신 검(劍)에 매
혹되어 검가에 투신했던 젊은이.
거친 세파(世波)와 늪 같은 정계 (政界) 속에서 늙고 녹슬었던 무인 (武人)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 고 있었다.
“좋아…!”
만족한 듯이, 웃음을 터트린 연 소현이 자신의 가면을 벗어 하늘로 던졌다.
“그래야, 검가의 무사(武士)지.”
주변에서, 그를 알아본 이들이 탄성을 질렀다.
“저건…!”
“대공자님이시다…!”
뒷짐을 지고, 손을 앞으로 내민 대공자 연소현의 얼굴에 오만한 미 소가 걸렸다.
“이 대공자 연소현이 그대의 도 전을 받아 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