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327화 (327/350)

제2편 모여드는 이들

장로원 앞 다루(茶樓).

“•••뭐랄까.”

다루 이 충 창가에 기대선 청년 이 자신의 짧은 턱수염을 쓰다듬으 며 떨떠름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저 오늘은, 낙양 본가(本家)의 분위기를 살피고. 대공자의 평을 현지에서 살피는 정도가 목표였는 데 말이지….”

북적이던 다루는 이젠 텅 비어 있었고, 손님이라고는 그와 그의 호위로 보이는 중년인뿐이었다.

연씨 혈족들이 썰물처럼 빠져나 가 버렸던 탓이었다.

“대공자가 그 기세등등하던 낙양 본가의 연씨 혈족을 풍비박산 내버 리고, 그 유명한 장로원마저 농락 해버릴 줄이야.”

비록 이곳에는 정보원 따윈 없는 그들이었지만.

현장에서 펼쳐지는 광경들과 들 려오는 소문들 덕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려 해도 모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발 없는 소문(所聞)이 천(千) 리 를 간다 했던가.

‘…아니. 그게 아니야.’

그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군중들의 대화를 통해, 생생히 듣게 되었던 장로원 내부의 이야기들은.

단지 입을 타고 전해지는 소문이 라기엔, 많은 부분에서 괴리(乘離) 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위화감에.

짧은 턱수염 청년의 눈가가 꿈틀 거렸다.

‘처음에 장로원으로 그 많은 군 중을 단시간에 모이게 했던 소문 또한. 마찬가지로 이상한 점이 있 었다.’

그러고 보면 이상하지 않은가.

‘오늘 장로원 내부에서 있었던 일들은….’

장로들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사 람들의 입에 오르는 것을 피하고 싶은 이야기였을 터인데.

‘…그런데 어째서인지. 모두가 당 연하다는 듯이 그 이야기들을 떠들

고 있다니.’

그가 자신의 짧은 턱수염을 쓰다 듬었다.

‘대공자가 장로원을 방문한다는 오전의 소문부터. 지금 돌고 있는 소문까지....’

설마.

‘•♦•같은 전문가의 작품인가?’

짧은 턱수염 청년은.

정보 계통의 전문가라고 부를 수 있을 사람은 아니었지만.

‘궁(宮)’에서 기거하다 보면.

평범했던 사람마저도 정보기관의

요원 흉내는 낼 수 있게 되는 법이 었다.

“•••뭐,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인 가.”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목표는 초과 달성했으니 말이지.”

대공자를 만나기 전에 그에 대해 서 파악하고 싶었던 목표는.

오늘의 상상도 못 했던 우연찮은 체험에 의해, 목표를 까마득히 초 과할 정도로 생생히 느낄 수 있었 다.

“안 그런가?”

짧은 턱수염의 청년은 동의를 구 하듯이 자신의 호위를 바라보았지 만.

중년 호위는 대답도 없이 여전 히.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하늘을 끊임없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제는 시간의 경과와 함께 사그 라든, 창공(蒼空)을 갈랐던 그 검광 (劍光)을 쫓기라도 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아까부터 군중들이 흩어진 장로

원 앞에도.

낙양검가의 무사로 보이는 이들 이, 자신의 호위와 같은 표정으로 대공자가 남긴 장로원 외벽의 흔적 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 무사들에게는 공통점이 있 었으니.

“대공자가 태상가주님의 그 일검 을 사용했다고?!”

처음엔 부리나케 뛰어와서는.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부정하다가.

“이건….”

흔적을 보며, 뭔가를 중얼거리다 가.

중간부터는 아무런 말이 없어지 고는 그저, 계속해서 그 흔적만을 뚫어져라 살피게 되는 것이다.

장로원 앞에는.

그렇게 모여든 무사들만 해도, 이미 수십을 넘어가고 있었다.

처음엔 그 광경이 웃기기도 했었 지만.

그 시간이 길어지자, 역시.

무언가 오싹한 것을 느끼지 못할 수 없는 광경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나 무인으로서 인상적 인가. 대공자의 무공은?”

“아…”

어깨를 툭 치자, 중년 무인이 정 신을 차렸다.

“글쎄요”.”

“글쎄요, 라니.”

그 대답에, 짧은 턱수염의 청년 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겨우 그런 감상 때문에, 그렇게 나 빠져 있었단 말인가? 그런-.”

“그런 말이 아닙니다.”

중년 무인은 장로원의 외벽에 선 명하게 남은 혼적을 바라보며 말했 다.

“대공자가 벽을 넘은 것은 확실 히 알겠지만. 저 일검(一劍)에 담긴 그 수법(手法)도. 그 원리(原理)도.”

중년 무인이 자신도 모르게 움켜 쥔 창틀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일 그러졌다.

“하나를 파악할 것 같으면, 다른 것이 드러나고. 그것을 좇으면, 또 다른 무언가가 드러나니….”

맹인모상(盲人II象)이라 했던가.

일부를 보면, 전체를 보지 못하 고.

전체를 보려 하면, 하나하나를 살필 수가 없었으니.

그는 어린 시절 처음으로 느꼈던 상승 무공의 요원(潘遠)함과 불가 해(不可解)를.

지금에 이르러서 다시금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결국. 무엇 하나 채 결론을 낼 수 있는 바가 없습니다.”

짧은 턱수염의 청년은 마른침을 삼켰다.

다른 평범한 무인이 그렇게 말했 다면, 짧은 턱수염의 청년도 그러 려니 했을 터였다.

하지만.

“•••황궁(皇宮)의 고수인 자네가,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하겠다고?”

전대 왕조로부터, 지금의 중원국 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무공에 관련된 기록이 존재하는 황궁무학서고(皇宮武學書 庫)에 출입 가능한 권한올 지닌 고 수가.

“… 예.”

지금,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다.

“전혀.”

중년 무인의 시선이, 할 말을 잃 은 짧은 턱수염의 청년에게서 떨어 져.

장로원 앞에 모인 무사들에게 향 했다.

“저들과 제 경지가 다르고. 저들 사이에서도 경지가 다른 이들이 있 겠지만. 저는 장담할 수 있습니다.”

중년 무인이 단언했다.

“저들도 저와 마찬가지로. 지금, 무엇 하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저렇게 홀린 둣이.

풀릴 듯이, 결코 풀리지 않는 답 을 찾아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 (述路) 자체에 매혹되어 헤매고 있 는 것이다.

잠시 충격에 빠져 있던 짧은 턱 수염의 청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럴 수도 있지."

마냥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에 저 항하듯, 애써 변명하기라도 하듯이.

“그도 그럴 것이. 천하제일검(天 下第一劍)이라 불리던, 태상가주의 무공이 아니던가?”

짧은 턱수염의 청년이 말을 이었

다.

“그 독보적인 무학의 이치를 단 박에 꿰뚫어 본다면. 그것이 오히 려 이상하지 않겠는가?”

그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손 을 내저었다.

“그러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 고-.”

“하지만.”

중년 무인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 천하제일검의 무공을 사용한 것은 바로 대공자입니다.”

“……!”

무공을 이해하지 못한 자가 그 무공을 사용할 수 있는가.

그 무공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자가, 그 일검(一劍)을 구현할 수 있는가.

“•••어쩌면.”

밖을 바라보던 중년 무인의 눈이 한층 더 가늘어졌다.

“벽을 넘은 곳에, 새로운 벽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무학자들의 이 야기가. 마냥 허황된 소리만은 아 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문득, 짧은 턱수염의 청년의 머 릿속에.

발이 닿지도.

햇볕이 미치지도, 그래서 바닥이 보이지도 않는 깊이의 바다의 광경 이 떠오르고.

그 심해(深海)를 지나가는 거대 한 이형(異形)의 무언가를 엿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경이(호異)인가.

아니면, 근원적인 공포에서 비롯 되는 외경(브:敬)인가.

“어서 오십시오!”

아래충에서 들려오는 다루 점원 의 목소리에, 짧은 턱수염 청년이 정신을 차렸다.

“•••어쨌든.”

그가 헛기침을 한두 번 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황상(皇上)께서는. 북방 (北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상 의 인재를 선택하셨단 말인가?”

그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찌….”

그의 눈가에 의문이 깊게 깃들었

다.

“황실 내에서 그동안 은둔하다시 피 하시던 황제 폐하께서. 검가의 대공자를 아시고 정확히 지목하실 수 있었던-.”

“ 쉿.”

중년인이 손을 들어, 청년의 말 을 막았다.

“이거, 이거.”

무음(無音)에 가까운 발걸음과 함께, 위층으로 올라오던 이가 부 끄럽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역시 무리였나요?”

인상이 부드럽긴 했지만.

사람 좋게 웃는 얼굴의 깊은 곳 에, 시퍼런 날을 숨기고 있을 법한 남자라고.

짧은 턱수염의 청년은 그렇게 첫 인상을 느꼈다.

“제 짧은 무공 실력으로는, 황실 (皇室)에서도 이름 높은 금문휘(金 雲鍾) 장군(將軍)님의 귀를 속일 수는 없었군요.”

“•••으음.”

그 말에 중년 무인이 침음했고, 짧은 턱수염의 청년은 쓴웃음을 지 었다.

“…의심을 살 수는 있어도. 그렇 게 단번에 정체가 들통날 줄은 몰 랐군.”

“하하. 그렇습니까?”

그 자리의 모두가.

청년의 하대(下代)를 당연한 듯 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허리에 찬 짧은 검을 만지작거리 는 금문휘의 경계심올 억누르듯.

“저는 이 검가에서 외원의 고문 직을 수행하고 있는 연하웅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저를 일컬어 ‘다

리 달린 소문(有脚風聞)’이라고도 하지요. 그리고….”

상대, 연하응은 은근슬쩍 친근감 있는 태도로 다가와, 가장 결정적 인 부분을 말했다.

“저는 대공자님의 사람이기도 합 니다.”

“그런가?”

하지만 짧은 턱수염의 청년은 호 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대가 대공자의 사람이라는 것 과 내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군.”

슬쩍 떠보는 말에 넘어가지 않는 그 모습이 오히려 마음에 든 것일

까.

연하응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 했다.

“부마도위(射馬都府)께서는 황제 폐하의 명으로. 원래 이틀 후에 대 공자님과 만나기 위한 약속을 잡으 셨지 않습니까?”

그 말에, 짧은 턱수염의 청년.

부마도위.

황제의 여동생, 영화공주(榮華公 主)의 남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 다.

“…그 약속은, 당사자인 황제 폐 하와 대공자밖에 모르는 사항이지.

자네, 적어도 대공자가 보낸 사람 은 맞나 보군.”

“그래서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드 렸지 않습니까?”

미소를 지어 보인 연하응이 계단 을 향해 손을 펼쳐 보였다.

“그럼, 대공자께서 기다리고 계 시니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부마도위에게는 해결해야 하는 의문점이 있었다.

“대체, 자네는 어떻게 나를 찾은

것인가? 이틀 뒤에 약속을 잡았던 내가 오늘 여기 있을 줄은 대체 어 떻게 알았던 것이고?”

“사실 정확히는….”

연하응은 조금 부끄럽다는 듯이, 자신의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는 그저 대공자님께서 말씀하 신 대로 움직인 것뿐이라”.”

또, 대공자다.

황제의 밀명(密命)에 따라 그를 만나기 전에.

대공자에 대해서 파악하기 위해 서 미리 낙양검가를 찾았던 부마도 위였지만.

어째서인지.

그 자신의 모든 행동이, 대공자 의 손바닥 위에서 춤추고 있었던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대공자는 어떻게 황제 폐하와 아는 사이가 된 것인가?”

한번 터져 나오자.

“대체, 황제 폐하와 검가의 대공 자는 어떤 관계인 것인가?”

그동안 부마도위가 품고 있던 의 문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왔 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황제 폐하의 의지인가. 아니면 대공자의 의지인가?!”

연하응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 은 채.

그저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부 마도위의 순간적인 흥분이 가라앉 길 기다렸다.

“•••미안하군. 흥분했네.”

“괜찮습니다.”

그 대웅만 보아도.

연하웅이 어째서 검가 외원의 고

문인지.

얼마나 능수능란한 수완가인지 부마도위는 알 수 있었다.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은. 저 따 위보다는 대공자님께 직접 들으시 는 것이 좋겠지요. 저는 유난히 오 늘 할 일이 많아서-.”

“다리 달린 소문.”

그리고 부마도위는 그 순간 깨달 았다.

“ 예‘?”

“자네였군.”

“무엇이 말입니까?”

능청을 떠는 연하응에게 부마도 위가 말했다.

“오늘 이 모든 기이한 소문들의 근원 말이야. 자네가 이 정보 공작 의 장본인이었어.”

대답 대신.

유각풍문 연하응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특유의 가벼운 미 소를 지어 보였다.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시각.

“설마. 파벌의 막내 장로를 그렇 게 떼앗겼는데, 그 수장께서 축하 자리에 참석하시지는 않겠지요?”

하북 파벌의 수장.

팽 장로는 타 파벌의 수장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었다.

“물론!”

그는 확언했다.

“이 팽 모가 아무리 얼굴이 두껍 다 해도. 한 파벌의 수장인데. 어

찌, 그런 부끄러운 짓을 하겠소이 까‘?”

그렇게 말했었다.

“팽 장로. 우리 파벌은 어떻게 해야 하겠소이까?”

“참석하자니, 부끄러운 짓이

고….”

면전에서 자신들의 파벌을 떠나 대공자의 계파에 들어가 버렸던 막 내 장로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 않자니, 삼공자 측에 동조 하는 것 같고….”

고민하는 하북 파벌의 장로들에 게 팽 장로가 고개를 저어 보였 다.

“우리 파벌은 참여하지 않겠소!”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어, 어흠.”

수수한 무복(武服)을 입고 정체 를 숨긴 팽 장로는 원각정의 근처 에서 괜히 헛기침을 했다.

‘나는, 하북 파벌의 수장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한 명의 무인으로서, 그 일검〈一劍)에 관심을 가진 것뿐

이야...!’

애써.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켜 보려 는 팽 장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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