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326화 (326/350)

제1편 파급(波及)

“이거, 이거….”

경비를 서던 무사들이 혼비백산 한가운데.

장로원 밖에서 대기하던 탈명귀 검(奪命鬼劍)이 한차례 웃음을 터 트렸다.

“깔끔하게 끝내셨나 보구먼.”

갈라진 장로원의 외벽에 손을 대 자.

그 절단면(切斷面)에서마저.

당장에라도 살을 엘 듯한 예기 (銳氣)가 오싹하게 느껴졌다.

황홀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검격 에.

무사로서 느낄 수밖에 없는 호승 심(好勝心)과 고양감(高揚感)에 탈 명귀검이 자신의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내가 주군 하나는 잘 골랐다 니까.”

“이 검가는.”

장로원에서도 그 중추(中極)인 대회당(大會堂)에서의 선언.

“이 대공자, 연소현의 것이다.”

만일.

저 선언이 조금 전.

투표 결과가 발표된 직후에 대공 자의 입에서 나왔다면.

적대적인 장로들은 코웃음을 쳤

을 것이고.

대공자 측 장로들 또한 난색을 표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 적확(的確)하고, 또 절묘 하여.

장로 중 누구 하나도.

감히, 입 한 번 뻥긋하지를 못했 다.

“앞으로.”

대공자의 시퍼런 시선이 좌중을 훑듯이 스쳐 지나갔다.

....

....

그저, 시선일 뿐이건만.

장로들에겐 그 시선이, 마치 날 이 시퍼런 검날에 베인 것처럼 느 껴졌다.

“기억하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장로들의 뇌 리에 박아 넣고.

대공자는 검은 외투를 휘날리며 대회당을 나섰다.

“•••후우.”

누가 처음 내쉰 한숨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한숨을 듣고 나서야.

“…하아.”

“•••흐음.”

모두, 자신들이 숨을 쉬는 것조 차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잊었던 숨을 내쉬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콜록, 콜록.”

갈라진 천장 틈에서 떨어진 흙먼 지를 뒤집어쓴 장로들이, 그때야 자리를 옮기는 와중에.

“자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움직인 것은.

“대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다름 아닌, 대공자 계파의 부원 주, 함 장로였다.

“오늘 저녁, 계파의 발족(發足)을 축하하는 의미로. 원각정에서 만찬

(晩<)이 있을 것이라 하셨으니. 다 들 잊지 말도록 하시오.”

“오오…!”

그 말에.

덩달아 얼이 빠져 있던 대공자 측 계파 장로들의 얼굴에 대번에 화색이 돌았다.

“대공자께서 원각정을 드디어 개 방하시는 것이오?”

“말로만 듣던 원각정의 비경(秘 境)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겠구 먼…!”

계파가 발족하면.

동료 장로들에게 비웃음을 사거 나.

손가락질을 받는 정도는, 각오하 고 있던 그들이었던 만큼.

대공자의 일검(一劍)에 의해, 더 할 나위 없이 성공적으로.

“원각정 내엔 특상(特上) 품질의 온천도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이 오?”

아니, 성공을 넘어 대(大)성공적 으로 계파의 발족을 알렸다는 사실 이.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허허. 그걸, 이제 우리가 직접 확인해야 하는 것 아니겠소…!”

“하하, 그렇구려…!”

온갖, 향락과 사치에 익숙한 대 낙양검가의 장로들이 고작, 만찬 따위에 들뜨겠는가.

“오늘은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셔들 봅시다!”

“당연하오!”

그들은 그저 그렇게라도.

한 발짝 늦게 찾아온 오싹할 정 도의 즐거운 전율을, 호들갑이라도 떨어서 표현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

그들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대회당의 출입구를 흘긋거렸다.

‘•••저분이.’

그 출입구는 방금, 대공자 연소 현이 나갔던 그 출입구였다.

‘나의....’

‘우리들의, 수장(首長)이시다…!’

이공자 연자청의 이름이 얼마나 공포의 이름이었나를 감안하더라도.

사실 실질적으로, 이공자 계파의 수장은 이공자가 아닌.

그의 어머니이자 낙양검가의 안 주인 중 하나인 구양 태상부인이었 다.

그리고 삼공자 연적광이 무슨 깜 짝 발표를 준비하고 있는지는 몰라 도.

결국, 삼공자 계파의 수장은.

가장 큰 후원자인 남궁혁천 장로 와 과거 무림맹의 주축이었던 이들 이었다.

‘하지만.’

자신들.

대공자 계파의 수장은, 그 어떤

다른 누가 아니라.

대공자 자신이었으며.

그는 단 일검(一劍)으로, 자신이 누구보다도 낙양검가의 우두머리에 어울리는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했 다.

“자자, 오늘은 우리 계파 내부에 서도 그 발족을 알리는 기쁜 날이 지만….”

부원주 함 장로가 같은 대공자 계파의 장로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대회당에 있던 장로들 전체에게 말했다.

“우리 모두 같은 검가의 가족들

이니. 누구든 찾아와 축하를 해준 다면. 오늘만은 가족의 예로서 환 영할 것이오!”

그 발언 또한.

대공자가 태상가주의 일검을 선 보이기 전이었다면, 하느니 못한 말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러니.”

부원주 함 장로가 자신의 금니를

드러내어 웃으며 손을 펼쳐 보였다.

“부담들은 가지지 마시고. 다들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들 오셔서, 한껏 만찬을 즐겨 주시길 바라오!”

그러고는.

무슨 반웅이 채 나오기도 전에.

“자, 우리는 가 봅시다.”

대공자 계파의 장로들은 우르르

장내를 빠져나가 버렸다.

“하…!”

“저자들이…!”

대공자에게 적대적인 삼공자 측 장로들이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해

봐야.

이미 대공자 측 장로들은 전부

빠져나가 버린 다음이었다.

다음으로 아무 말 없이 퇴장한 것은, 연씨 혈족 장로들이었다.

양분(兩分)되어 사망한 혈족 장 로의 시신을 챙길 생각도 하지 못 하고.

‘사자(死者)들의 행렬이 따로 없 군.’

‘그 위세등등하던 연씨 혈족이

한순간에 저런 처지가 될 줄이야

죽은 생선 눈으로 사색(死色)이 되어 줄줄이 장내를 빠져나가는 그 들을 붙잡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그들이 전부 빠져나가고 나자.

•••허.

장로들의 입이 열렸다.

“•••대단하구먼.”

“…내 인생에서 손꼽힐 만한 계 파 발족이었소.”

누군가 고개를 절레절레 혼들었

다.

“•••대공자가 무공을 숨기고 있다 는 소리를 들었었지만.”

“…저 나이에 벽을 넘었다니.”

“벽을 넘은 것이 확실하오?”

“다른 무공도 아니고, 태상가주 님의 무공이란 말이오.”

“벽을 넘지 않고서는, 흉내도 내 지 못하는 무공이라오.”

“그런….”

비여h)무사 출신이 많은 장로들 사이에서는 그 이야기가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설마, 태상가주께서 직접 전 수하셨던 것일까요?”

“허어. 만약, 그렇다면….”

그리고.

여기저기서 시작된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은.

마른 가을 들판에 불이 옮겨 붙 듯이, 금방 대회당 전체로 번져 갔 다.

“•••우리 파벌의 장로들께선 어쩌 실 생각이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는 척하지 마시오. 오늘 저

녁 원각정의 만찬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소.”

“으음….”

서로 눈치를 살피던 장로들이 분 위기가 썩 나쁘지 않자, 슬금슬금 본심을 꺼내 들었다.

“조금, 꺼림칙하긴 한데….”

“계파에 들라는 것도 아니지 않

소?”

“그저, 축하를 해 주는 것뿐이 고.”

“하긴….”

“얼마나 아름답기에 그 이름이

그렇게 자자한지. 원각정의 내부가 궁금한 것도 있고….”

뭔가.

점차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장내 분위기에, 삼공자 측 장로들 이 당혹감을 드러냈다.

“설마! 혹여라도!”

성질 급한 삼공자 측 중년(中年) 장로가 웅성거리는 좌증을 향해 목 소리를 높였다.

“저딴 소리에 혹해서. 혹여나 이 중에 오늘 저녁 원각정에 기웃거리 려는 분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

“생각들 해 보시오!”

그를 돕듯이 다른 삼공자 측 장 로가 끼어들었다.

“안 그래도 저렇게 오만한 대공 자가, 여기서 영향력이 더 커지면 어떻게 되겠소이까?!”

그들은 묘해지는 분위기를 다시 바꾸기 위해서 목에 핏대를 세웠다.

“아직까지 대공자가 확보한 세력 은 삼(三) 할에 불과하오!”

“나머지 우리가 똘똘 뭉치면 칠 (七) 할!”

“앞으로 대공자가 이 장로원에서

뭘 원하든, 우리가 압도할 수 있다 는 말이오!”

하지만.

정작, 그 말에도 장로들의 반웅 은 시큰둥했고.

“아니, 무슨. 우리가 대공자 계파 에 들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축하 인사나 한번 하러 가 보는 게 어떤가 했을 뿐인데.”

투덜거리듯이 말하는 이들의 눈 길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계파나 파벌이 새로 발족하면, 축하하는 것도 일종의 관례이고 말 이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 아 니오?”

그 말에 애써 분위기를 돌리려 던, 삼공자 측 중년 장로들이 발끈 했다.

“뭣이…?!”

“그럼. 장로원에 흙발로 들어와 이 난장판을 벌이고, 우리에게 수 모를 준 대공자 놈을…!”

“이젠 축하하러 가기까지 한다는 것인가?!”

“다들 제정신이오?!”

타앙!

삼공자 측 중년 장로가 책상을 내리쳤다.

“자존심은 다들 어디에 팔아먹었 소?!”

그가 책상을 내리친 손을 들어 대공자의 일검으로 갈라진 틈새 사 이로 보이는 밖을 가리켰다.

“밖에서 우리 장로원을 보며 무 슨 소리들을 하겠소?!”

안 그래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파가 부지기수로 모여 있던 상황.

장로원의 패배는.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였던 대공 자의 일검과 함께.

이 소문은 일파만파 번져나갈 것 이 뻔했다.

“패배한 개들이 이제는 대공자 놈에게 꼬리 친다는 소리까지 들을 것인가?!”

그렇게 노골적이고 상스러운 표 현까지 나오기 시작하자.

“어허…! 이 사람이?!”

“그거 말이 과한 것 아닌가?!”

아무 말이 없이 상황을 주시하던 장로들마저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났다.

“애초에 삼공자 측이 설치고 다 니는 바람에 일이 더 커진 것이 아 닌가?!”

“그리고 은근슬쩍 우리를 왜 자 신들의 편에 끼워 넣는 것이오?!”

“우리가 대공자에게 한 방 먹었 다고, 삼공자 쪽으로 조르르 달려 갈 것 같은가?!”

“우리는 애초부터 본가의 후계자 문제에서는 중립이었다는 것을 잊 었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반발이 크게 돌아오자.

“아, 아니. 그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디까지나…!”

삼공자 측 중년 장로들이 당황했 다.

오전에 있었던 대공자의 노골적 이고 공개적인 도발로 인해, 그들 이 한 몸처럼 뭉친 둣 보였지만.

그들의 말처럼.

그들은 결코 하나였던 적이 없는 이들이었으니.

“아니긴 뭐가 아니오?!”

“후계자 계파 주제에. 제대로 대 공자에 대한 견제도 하지도 못해서.

일을 이 지경까지 망쳐 놓고는…!”

난장판이 되어 가던 대회당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솔한 발언은.”

과열되듯 삼공자 측을 질타하던 이들이 한둘씩 입을 다물었다.

“우리, 삼공자 측 계파를 대표해 이 노부〈老夫)가 장로 동지 여러분 께 사과를 드리겠소이다.”

사과하는 목소리의 주인이 다름 아닌.

삼공자 계파의 이인자(三人者)0] 자, 과거 무림맹의 부맹주(副盟主) 였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허홈.”

“홈홈.”

묵직한 발언권을 가진 이가 그렇 게 솔직하게 사과하자.

굳이 홍분했던 장로들도 더 이상 이 상황에 쓸데없이 기력(氣;h)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사과를 받아준 것으로 알고. 우리는 먼저들 일어나겠소.”

그의 말에 따라, 아직 자리에 앉 아 있던 삼공자 측 장로들이 우르 르 일어났다.

“물론, 우리 삼공자 측 또한 관

례로, 과거 발족에 따라 축하를 받 았던 만큼.”

전대(前代)의 노고수(老高手)는 온화하고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로들께서 대공자 측 계파의 발족 만찬에 참여하는 것 또한 손 가락질하지 않을 것이라오. 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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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진심으로 다른 장로들을 걱 정하는 말투로 당부하듯 말했다.

“우리가 안에서 서로 손가락질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밖에서 다른 이들이 어떻게 볼지는.”

그가 가는 눈으로 사위를 둘러보

며 말을 이었다.

“장로 동지 여러분께서 더 잘 알 것이라, 생각하고 있소이다.”

그는 그 말을 남기고.

계파의 인원들을 이끌고, 장내를 떠났다.

그렇게 떠나던 노고수의 가는 눈 이.

마지막으로 대공자 연소현이 남 긴 흔적에 한 번 더 머물렀던 것 O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잠시, 침묵에 잠겼던 대회당은 곧.

“•••어흠.”

“본인은 그만 일어나 보겠소.”

“그러면 같이 늦은 점심이나 하 러 갑시다.”

“다들 고생하셨소.”

우르르 너나없이 대회당을 떠나 는 장로들이 만든 소음으로 가득 찼다.

“•••원주님.”

진행을 맡았던 황목 장로가 떠나 는 장로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까부터 아무 말도 없던 장로원 주에게 물었다.

“저들 중 얼마나 대공자님의 만 찬에 참석할까요?”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장로원주는 무엇에라도 홀린 것 처럼.

연소현이 남긴 상흔에서 눈을 떼 지 못하고 있었다.

“원주님?”

그때야 정신을 차린, 장로원주가 황목 장로에게 답해 주었다.

“•••저들 중 얼마나 참석하게 될 지는, 지켜봐야 알겠지. 하지만.”

그가 무릎을 꿇고.

대공자가 남긴 진각(震脚)의 흔 적을 조심스럽게.

“방금 그 순간부터.”

심지어, 경건하기까지 한 태도로 만지며 말을 이었다.

“본가의 질서가 새로 세워지고 있다는 점은 틀림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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