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편 성명절기(成名絶技)
천의무봉(天衣無維)은 검을 닦고 있었다.
“•••듣고 있는 것이냐?”
천의무봉, 연서린.
연소현의 둘째 누나는 대충 고개 를 끄덕였다.
“예, 예.”
그 성의 없는 대답에, 그녀의 스
승이었던 호위각주가 입술을 깨물 었다.
예전이었다면, 여기서 불호령이 라도 내렸겠지만.
지금은 터무니없는 일.
아쉬운 것은 자신 쪽이었으니.
“그래서….”
방금, 연소현이 재투표의 연속으 로 장로원을 뒤흔들고 있다는 소식 을 들은 참이었다.
“이 고모는 서린이 너와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이 검가의 가장 높은
곳을 향해 보고 싶다, 그렇게 말하 는 것이야.”
듣지 않고 있는 연서린을 위해 서.
“너와 나라면 할 수 있다.”
다시 한번 진지하게 말을 늘어놓 아 보았다.
“지난 일은 모두 이 고모가 사과 하겠다. 네 아비에 관한 일로 너를 속였던 것도. 그 일로 너를 속박하 여 내 마음대로 너를 다루려 했던 것도.”
검가의 태상가주이자, 자신의 동 생.
그리고 자신이 단 한 번도 넘지 못했던 벽(壁).
그 벽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자존 심을 굽히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서린아, 그러니….”
하지만.
“----y
큰맘 먹고 오랜만에 만난 자신의 옛 제자는, 듣는 둥 마는 둥.
길거리에서 귀동냥으로 들었던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제 아비의 검을 닦고 있었다.
지난 수개월의 무사 수행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부스스한 머리 꼴에, 낡아 빠지 고더러운 무복(武服)까지.
연서린의 꼴은 야인(野人)이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자신의 눈에 비친. 그런 연서린의 모습은.
“---->”
너무나 자유로워 보였다.
그래서일까.
오랜만에 본가로 돌아온 천의무 봉 연서린을 설득할 준비를 단단히 해 왔던, 자신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다른 말이 흘러나 왔다.
“•••너는 어떻게 그리도 쉬이 자 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이더냐?”
M 99
••••••
연서린의 노랫가락이 멈췄다.
“ 평생.”
그녀는 손질을 마친 제 아비의 검을 들어 확인하며 말했다.
“좇고 싶었던 검이 있었습니다.”
고색창연(古色蒼然)한 검을 보며, 호위각주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비의 검 말이더냐?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 검은 모든 무사들에게-.”
“아뇨.”
연서린이 가볍게 부정했다.
“제가 좇던 검은 아버지의 검이 아니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연서린의 말에,
호위각주가 당황했다.
“그 검을 처음 본 것은, 제가 어 릴 때였습니다.”
연서린은 담담히, 그동안 다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냈다.
“소현이가 처음 검을 잡았던 날. 저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 연소현…?”
난생처음 듣는 비사(秘史)에, 호 위각주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그놈이 검을 잡았었다고?”
몇달전.
칩거를 끝낸 이후 연소현이 죄악 계곡에서 처음으로 공개했던 무공 실력은.
그가 그 오랜 시간 동안 시달렸 던 무검자(無劍者)라는 치욕적인 이름을 불식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연소현이 검을 쥐었 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찌 그 모습이. 처음 검을 잡 아 보는 아이의 검세(劍勢)라 할 수 있을까요.”
연서린은 담담한 목소리로, 본인
의 기억 속에 가장 선명하게 박혔 던 그 모습을.
입 밖으로 꺼냈다.
“어찌 그 모습을. 단 한 번도 사 람을 상처 입혀 본 적도 없는 아이 의 살기(殺氣)라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검으로 일가(一家)를 이 룬 자. 즉, 검호(劍豪)의 모습이었 습니다.”
연서린이 단언했다.
“그 아이는, 소현이는. 처음부터. 완성된 무사(武士)이자, 완벽한 무 인(武人)이었습니다.”
만일.
이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면, 호위각주는 코웃음을 쳤 올 것이다.
“그 직후. 그 광경을 발견한 아 버지가 사색(死色)이 되어 검을 빼 앗았고. 그 후로 소현이가 다시 검 을 쥔 적은 없었지만….”
하지만,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저는 그 검을,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검가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무재 (武才)로 칭송받는 자신의 옛 제자, 천의무봉이었다.
“•••어릴 때의 일이 아니더냐?”
전부를 그대로 믿기는 어려운 이 야기였기에, 호위각주가 조심스럽게 의구심을 드러냈다.
“기억이란 불완전하고 오묘한 구 석이 있어, 사실과 다르게. 과장되 어 기억될 때가 있다. 그러니-.”
“ 아뇨.”
애써 부정하는 호위각주를 향해 연서린이 미소를 지었다.
“저는 몇 달 전. 그 검을 다시 보았습니다.”
“•••뭐라고?”
“몇 달 전. 제가 원각정에 다녀 온 날을 기억하십니까?”
다선랑이 낙양검가에 도착했었 고, 아미파를 연서린이 쫓아냈다고 들었던 날.
“그야, 기억하고 있지만-.”
“부재한 아버지와 언니 대신. 이 거대한 가문의 모든 미래를 짊어져 야 했던, 저에게.”
그 무거운 책임감을 짊어지게 했 던 당사자인 호위각주는 입을 다물 어야 했다.
“잠을 설쳐 원각정의 정원을 거 닐던 저를 찾아온 소현이는 아무런 말도, 아무런 설득도 하지 않았습 니다.”
연서린이 미소 지었다.
“대신. 소현이 녀석은 검결지로 펼친, 단 일검(一劍)만을 보여 주었 을 뿐.”
“…그 일검은 무엇이었더냐?”
“그 검은-.”
그 순간.
오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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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각주 또한 벽을 넘은 고수.
공기가 아려 오는 듯한 싸늘한
감각이 피부를 타고 치닫자, 호위
각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건-?!’
그 감각의 출처는.
저 멀리.
장로원이 있는 방향이었다.
‘이 감각은-?!’
마치, 공간을 베어 내는 듯한.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감각이었 으니.
일평생 자신의 벽으로, 자신의 삶을 지배해 왔던 동생.
태상가주의 독문무공이자 성명절 기.
“그래요.”
아연한 표정의 호위각주 곁으로 다가온 연서린이, 같은 방향을 바 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저 일검(一劍)….”
장로원의 방향에서 시작된 그 일
검은.
외벽을 뚫고 나와.
가느다랗지만, 너무나도 선명한 한 줄기 검광(劍光)을.
여름 창공(蒼空)에 아로새기듯.
까마득하게, 그 상흔(傷浪)을 남 기고 있었다.
“…아버지의 성명절기, 절명(絶 命).”
그 경이로운 감각을 다시 한번 되새기듯.
“저 검이 바로, 그날 밤. 원각정 에서 소현이 녀석이 보여 주었던
그 일검이자….”
연서린은 눈부신 것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 모든 구속을 끊어내 준 검입 니다.”
안쪽 정원으로 뛰쳐나온 남궁혁 천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남궁 장로…!”
“저, 저것 보았소…?!”
“저건 태상가주님의…!”
삼공자 측 장로들이 외치는 소리 가 멀게만 들렸다.
고오오오오-.
거대한 여름의 적란운(積亂雲)과 도 비견될 정도로 기다란 검광(劍 光).
창공에 상흔을 남기는 경이로운 일검.
그것은.
당대의 남궁세가(南宮世家) 사람 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악몽과도 같 은 광경이었다.
중원국이 개국하기 이전부터.
본디, 이 땅에서 최고(最高)의 검 은 남궁세가의 제왕검형(帝王劍形) 이었으며.
남궁세가의 창궁무애검법(蒼W無 渡劍法)이야말로, 중원국을 대표하 는 검법이었으니.
남궁세가야말로, 진정한 검가(劍
家) 였으며.
남궁세가의 지존(至尊)은 검왕 (劍王)이라 불렸다.
아니.
불렸었다.
그날.
강남〈江南)으로 향하고자 하던 낙양검가의 본대(本隊)를, 남궁세가 가 막아섰던 날.
“저자가 바로 검가의 가주인가?”
“아직 젊구먼. ”
창궁(蒼W)처럼 넓고 멀어 끝이 없던(無海) 남궁의 검법(劍法)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남았 고.
제왕(帝王)이라 칭송받던 검형 (劍形)은 땅에 처박혔으니.
“말도 안 되는?!”
“저자는 사람인가?!”
그 이후로.
검가(劍家)라는 이름은 낙양검가 만을 칭하는 이름이 되었으며.
당시 검가의 가주를 사람들이 칭
하길.
천하제일검 (天下第一劍)이라.
그것이 연소현의 아버지이자.
낙양검가의 태상가주.
연검운(溫劍鶴)이었다.
“태상가주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신 것인가…?!”
“뭐라고…?!”
“태상가주께서…?!”
아연한 표정의 삼공자 측 장로들 에게, 남궁혁천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아니.”
그 목소리는, 분노로, 좌절로, 고 통으로 떨려 오고 있었다.
“저것은….”
그는 최대한 자신을 다스리려 했 지만, 목소리가 떨려 오는 것을 막 지는 못했다.
“•••대공자의 검이오.”
....
«...I方
모두가 아연하여, 입을 쩍 벌렸 고.
남궁혁천은 주먹을 꽈악 말아 쥐
었다.
“그 말을 하는 동안, 그대들은 이미 한발더뒤처졌소.”
그의 머릿속에 내원총관과 나누 었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그대는. 그대들은 아직도 상황 파악을 잘 못하고 있소. ”
내원총관은 깡마르고 주름진 손 을 들어, 남궁혁천을 가리켰다.
“그대들. 남궁의 피를 이은 이들 에게 최악(最惡)의 적은, 사패천도 아니고, 사천당가도 아니며. 지금 누워 계신 가주님도 아닌.”
내원총관이 손을 들어 밖, 장로
원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있는 대공자라오. ”
장로원, 대회당(大會堂).
흐 드 드 드
천장에서 떨어진 홁먼지가. 반으로 나뉘어 처박힌 연씨 혈족
장로의 시체에 떨어지고 있었다.
얼마나, 그 일검의 예기(銳氣)가 경이로웠는지.
깔끔하게 일자(一字)로 갈라진 절단면(切斷面)을 따라서 시체를 붙이면.
시체가 다시 살아서 숨을 쉬며 일어날 것만 같았다.
장로들은 밖을 나가 보지 않고도 알고 있었다.
대회당의 벽면을 갈라 버린 저 일검이, 하늘에 길게 상흔을 남겼 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기에 그들은 연소현이 입을 열 때까지, 숨을 쉬는 것도 잊고 있었다.
“주제를 모르는 놈들.”
전대 가주의 불호령이 떨어졌을
때 이러했을까.
....
그와 시선이 마주친 장로들은 화 들짝 놀라, 대공자의 시선을 피했 고.
그 귀기(鬼氣)가 시퍼런 눈빛을 마주한 연씨 혈족 장로들은, 온몸 이 싸늘하게 식어 버리는 감각을 느꼈다.
“이 검가의 마지막 동전(銅錢) 하나도 너희 따위의 재산이 아니 며.”
맨몸으로 북방 너머 설국(雪國) 의 동토(凍土)에 떨어지면 이러할
까.
“이 검가의 마지막 날붙이 하나 도 너희 따위의 검이 아니고.”
황하(黃河)의 누런 강물에 처박 혀 허파가 물로 가득 차오르면 이 러할까.
“이 검가의 마지막 곡식 한 톨도 너희 따위의 식량이 아니고.”
죽어서 지옥의 판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면 이러할까.
“이 검가의 어느 것 하나. 마지 막 하나도, 너희 따위의 것이 아니 다.”
그때야 장로들은 깨달았다.
대공자.
연소현의 진면목(眞面目)은.
모두의 허(虛)를 찌르고 방 안에 앉아 천리(千里)를 내다보는 혜안 (포眼)도 아니고.
신산(神算)이라 불리는 지략으로, 천하를 손에 들고 뒤흔드는 것도 아니었다.
“너희 모두는 앞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야.”
그것은 패도(W道).
사방팔방에 풍겨 대는 시체의 피 냄새보다도.
대공자의 몸에서 비롯된 살기(殺 氣)의 선연한 비린내가, 비강(鼻睦) 을 찌르고 뇌리에 박혀 들었다.
“이 검가는.”
모두를 압도하는 오연한 시선과 함께 대공자가 선포했다.
“이 대공자 연소현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