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324화 (324/350)

제24편 최악(最惡)의 적(敵)

낙양검가, 내원(內院).

안쪽 정원(庭園)에 위치한 정자 停子).

“냉차(冷茶)라도 한 잔 더 어떠 십니까?”

내원 의전비서(儀典秘書)의 물음 에도.

삼공자 계파.

그 계파 내에서도 우두머리인 남 궁 장로, 남궁혁천은 유난히 굳은 표정으로 묵묵부답 不答)이었 다.

대신.

남궁혁천의 측근 장로 중의 하나 가, 손을 내저어 보였다.

“••되었소.”

그러고는 입을 꾹 다무는 그들이 었다.

평소의 그들이었다면.

우아하고 아름다운 내원 시녀들 이 오가는 것을 보며 눈요기라도 했겠건만.

패배가 사실상 확정된 상황에서.

남궁 장로를 위시하여 일찍 장로 원을 떠난 그들의 심기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연소현.’

자신들의 영역이나 마찬가지이던 장로원에서, 대공자에게 불의의 일 격을 허용하고야 말았으니.

‘그 어린놈의 자식이….’

지금의 그들에게 아랫것들 따위 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 드려서 정 말 죄송합니다.”

의전비서는 자로 잰 듯이 정중한 태도를 취했지만.

그것이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사 과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들 장로들이 눈치채지 못할 리 가 없었다.

“됐소.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온 본 장로들의 잘못이지.”

괜히 남궁혁천의 측근 장로 중

하나가 그렇게.

은근슬쩍 자신들이 장로라는 것 을 들먹여 보아도.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될 것입 니다.”

육계(7느階).

즉, 허리께에 여섯 가닥의 금술 을 늘어뜨린 노부인.

의전비서는 황송한 척도 하지 않 았으니.

장로들의 얼굴에 아니꼬운 기색 이 스쳐 지나갔다.

“•••덥군.”

“여름이니까요.”

노부인, 의전비서는 과거 대공자 를 맞이했을 때와는 다르게.

냉기가 풀풀 풍기는 표정으로 답 했다.

“쯧쯧.”

“내원은 여름 정원 관리에 부실 한 듯하군.”

“매시간 물이라도 뿌려 두는 것 이 어떻겠소?”

“방금 뿌렸습니다.”

심사가 뒤틀린 장로들이 은근히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 봐야.

노부인에겐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았다.

여기서 더 해 봐야 본전도 찾지 못할 것이, 불 보듯 뻔했으니.

“되었소.”

장로 하나가 끼어들어 소모적인 대화를 끊었다.

“아까 말했던, 냉차나 더 가져다 주시오.”

“그러지요.”

노부인이 모습을 감추자, 측근 장로들은 다들 속으로 혀를 차며 남궁혁천의 눈치를 살폈다.

남궁혁천.

남궁세가의 직계 혈족이자.

동시에 낙양검가의 장로이며.

삼공자의 가장 큰 후원자면서.

그를 지지하는 거대 계파의 수장 인 정계의 거인(巨人).

그런 그는 중원국 전체를 통틀어 서도, 손에 꼽힐 만한 권력자였다.

“저런, 장로님들….”

하지만.

낙양검가 가주의 수족(手足)이나 마찬가지인 내원의 최고위층에게는.

별 의미도 없었으니.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돌아온 의전비서는 별로 미안하 지도 않은 얼굴로 그들에게 말했다.

“날이 더워, 그만. 냉차가 다 떨 어졌다더군요.”

그러면서, 노부인이 따라온 내원 시녀들에게 우아하게 손짓했다.

“대신이라기엔 뭣하지만.”

노부인이 주름진 얼굴에 사람 좋 은 미소를 띠었다.

“이번에 운남(雲南)에서 귀한 찻 잎이 새로 들어왔으니. 이거라도 즐기시지요.”

그러면서 장로들의 앞에 놓이는 찻잔들.

내원 시녀들이 그 찻잔들의 뚜껑 을 열자, 김이 펄펄 올라왔다.

다른 이들도 아니고.

낙양검가의 장로들이 그 행위에 담긴 노골적인 의사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의전비서…!”

“감히…!”

노기충천(怒氣衝天)한 장로들이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

“그만.”

묵직한 남궁혁천의 목소리가 좌 중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남궁 장로….”

분기를 애써 다스리며 그의 측근 장로 중 하나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자.

남궁혁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쪽도 볼일이 다 끝난 것 같 군.”

그의 시선을 따라 측근 장로들의

시선이 향한, 저 멀리에는.

“이따, 저녁 늦게 다시 한번 들 르겠네.”

일을 마치고 채비를 갖춘 약왕의 모습과.

“그럼 그때도 잘 부탁드립니다, 약왕 어르신.”

남궁혁천과 그의 측근 장로들이 기다리던, 낙양검가의 노괴(老怪).

내원총관의 모습이 있었다.

“•••홈홈.”

대충 옷자락을 털어, 매무시를 고친 장로 하나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들어들 가시지 요.”

“죄송하지만….”

하지만.

의전비서가 그런 그들의 앞을 막 아섰다.

‘‘뭐요r

“또 뭐가 남았소?”

퉁명스럽게 묻는 그들에게 앞을 막은 의전비서가 단호한 어조로 말 했다.

“총관께서 만나시겠다고 하신 것

은, 여기 남궁 장로님뿐입니다.”

....

흥분한 측근 장로들이 뭐라 입을 열기 전에, 남궁혁천이 앞으로 나 섰다.

“안내해 주시게.”

내원총관 집무실.

딸깍, 딸깍.

흑요석 가위를 든 내원총관은 주 름진 손으로 섬세하게 분재를 다듬 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장로원에 난리가 있었다고 들었지.”

노인은 혼잣말처럼.

시선을 주지도 않고, 등 뒤에서 묵묵히 앉아 있는 남궁혁천에게 말 했다.

“결과가 나오기 전에, 미리 장로 원을 떠났다더니.”

딸깍, 딸각.

“수습은 않고. 밖을 쏘다닐 여유 가 다 있나 보구려.”

날이 선 말에도, 남궁혁천의 표 정은 바뀌지 않았다.

심지어는 기어코 자신의 앞에 놓 인 펄펄 끓는 차를 한 모금 즐긴 후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총관께선 알고 계셨소?”

“무엇을 말하는 게요?”

딸각, 딸각.

가위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 데, 남궁혁천이 다시 물었다.

“대공자가 장로원을 흔들어 놓으 리라는 것 말이오.”

찻잔을 조금, 거칠게 내려놓은 남궁혁천이 노인의 굽은 등을 매섭 게 바라보았다.

“총관께서 미리 그 속셈을 알고 있었다고 가정하면.”

그의 음성이 한충 묵직해졌다.

“굳이 총관께서 오늘 장로원에 아예 얼굴조차 비치지 않았던 것도 설명되오만.”

가위 소리가 잠시 멈췄다.

“•••몰랐지.”

“그렇다면 어째서-.”

내원총관이 다시 물으려는 남궁 혁천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검가전장을 방문했던 대 공자가 장로원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다오.”

딸깍, 딸깍.

내원총관의 목소리와 함께, 다시 가위 소리가 시작되었다.

“이 노부는 굳이, 패배를 즐기는 취미는 없는지라. 굳이 장로원에 가는 대신 바쁜 일을 처리하기로

했을 뿐이라오.”

“그 말은….”

남궁혁천의 반백(半白)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공자가 장로원에 발을 디딘 순간, 이미 우리가 질 것을 알고 있으셨단 말이시오?”

가위 소리가 멈추더니, 내원총관 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공자 측이 그렇게 당하는 것 을 보고. 그러고 오늘 자신의 영역 이나 마찬가지이던 장로원에서 그 렇게 당하고도….”

내원총관은 머리를 돌려 남궁혁

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도, 대공자를 모르겠소?”

남궁혁천이 즉답했다.

“대공자의 지혜가 신산(神算)이 라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음을, 이 제 본인도 알고 있소이다.”

내원총관이 다시 물었다.

“남궁장로가 장로원을 떠난 직 후, 대공자의 계파가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알고 있소?”

“전부 보고받았소. 하지만.”

남궁혁천이 즉각 수긍을 표한 이 후에, 고개를 저었다.

“그래 봐야. 대부분 신입이나, 장 로원에서도 겉돌던 이들뿐.”

그가 명단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 다.

“부원주나 염 장로를 제외하면. 그 면면(面面)들을 살펴보아도 딱 히 대단한 이들은 없었소이다.”

그는 그 짧은 사이에 추가적으로 얻은 정보와 판단력을 기반으로.

냉철하게 상황을 진단했다.

“본가의 장로원에 제 한 몸 바쳐 개혁을 울부짖을 이상주의자가 삼 (三) 할이나 된다고?”

그의 얼굴에 피식, 하고.

조소가 어렸다.

“그럴 리가 없지 않소이까?”

“•••그건 그렇지.”

적어도, 그 부분만은.

내원총관 또한 인정했다.

만일 그런 이들이 삼 할이나 되 었다면, 낙양검가가 이렇게 망가질 일도 없었을 터이니.

“하지만.”

내원총관이 가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남궁 장로. 아무리 어중이떠중 이라 한들, 그들의 표 또한. 우리와 같은 한 표라오.”

“상관없소이다.”

그 떠보는 둣한 말투에, 남궁혁 천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한 줌밖에 되지 않을 이상주의 자들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대공자 에게 떨어지는 떡고물이라도 받아 먹고 본인의 찬밥 신세를 면해 보 려는 자들이지. 그러니….”

그는 굳은살이 가득한 손을 들어 허공에 그어 보였다.

“대공자에게서는 떡고물은커녕,

그 부스러기 하나조차 얻어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내원총관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자들 전부가 떨어져 나갈 것 이다?”

“그렇소이다.”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남궁 혁천을 향해, 내원총관이 다시 입 을 열어 그의 말을 정리했다.

“어차피 지금의 대공자가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은. 당장이 아니라. 달콤한 미래에 대한 약속밖에 없으

내원총관은 자신의 앞에 놓인 냉

차를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것이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게 하면 된다?”

“그렇소.”

“그러니. 이 노부와 힘을 합쳐, 함께 대공자의 목을 조르자는 것이 오?”

“정확하오.”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큭, 큭큭.”

“총관...?”

“흐흐흐흐.”

내원총관이 몸을 들썩이며 웃음 을 홀리는 모습에, 남궁혁천이 처 음으로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걸 보시오/

내원총관은 즉답하는 대신.

서류 하나를 꺼내 탁자에 놓았 다.

“이건....”

잠시, 그 서류를 살핀 남궁혁천 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내 원총관에게 물었다.

“대공자 계파의 장로들 명단이 아니오? 내가 확보한 것과 똑같은

명단이오만?”

내원총관은 서류를 길게 짚어 보 였다.

“이들은, 아시다시피 운남성에 기반을 둔 장로들이지.”

“그렇소만, 그것이 무슨-.”

내원총관이 그의 말을 잘라버리 며 답을 주었다.

“대공자는 이미 그들에게 운남의 패자(춰者)인 대리단가(大理段家)의 사업에 동참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고 하오.”

“떡고물 따위가 아니라 떡을 입 에 밀어 넣어 준 격이지.”

“어떻게-?”

“그리고 그들뿐만이 아니오.”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이 명단들 을 주욱 가리켰다.

“운남에서 시작해 사천(四川)을 거쳐, 중경(重慶), 호북(湖北), 호남 (湖南)을 지나 상해(上海)까지.”

눈을 들어, 남궁혁천을 바라보는 내원총관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대공자는 이미, 이 지역들을 기 반으로 하는 자기 장로들에게 충분

한 이득을 주었다고 하오.”

심지어 내원총관이 언급했던 지 역 중 일부는 사패천의 영역.

칩거를 끝낸 지, 얼마 되지도 않 은 대공자에게.

그것이 가능한 이야기란 말인가?

“듣기로는, 검가건축과도 관련이 있는 모양이던데. 노부도 자세한 사항은 아직이라오.”

“검가건축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던 남궁혁 천이 고개를 내저으며, 황급히 명 단의 나머지를 짚었다.

“그, 그럼 이들이 아직 남지 않 았소? 이들은 낙양이나 황도(皇都) 를 기반으로 삼은 이들이고-.”

“대공자가 차기 낙양지사의 결정 권한을 쥐었다더군.”

“그리고 황도에서는 이미 차고 넘칠 만큼의 사업을 따내 주었다고 하오.”

순간.

말문이 막힌 남궁혁천에게 내원 총관이 하나씩 손을 꼽아 가며 되 짚었다.

“운남 그리고 광범위한 강남 지 역. 검가건축. 차기 낙양지사의 결 정 권한. 그리고 황도.”

내원총관이 남궁혁천의 눈을 들 여다보며 다그치듯 물었다.

“아직도 모르겠소?”

그 모든 사항을 꿰뚫는 것은 무 엇인가.

잠시.

지진이라도 난 듯이 혼들리던 남 궁혁천의 동공의 움직임이 멎어 들 었다.

“•••설마. 장강 수로 확장 정비

사업?”

그는 깨달았다.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없소.”

하지만 즉시 고개를 저어 부정했 다.

“이 정도로 이권들을 뿌리려면, 사업의 중재자 노릇을 한 것으로는 부족하오!”

“그렇소.”

“그렇다면, 그 말은 설마…‘?!”

나올 수밖에 없는 터무니 없는 결론에.

“•••설마.”

남궁혁천의 눈가 주름이, 자신도 모르게 떨려왔다.

“그 사업에서, 대공자의 뒤에 황 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황제의 뒤에 대공자가 있었던 것이라오.”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남궁혁천 의 머릿속을 지나갔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입 밖으로 정 리되어 나오는 것이 없었다.

그의 혼란으로 가득한 눈에서 시

선을 뗀 내원총관이 천천히 등을 의자에 기대며, 불쑥 딴 이야기를 꺼냈다.

“그대들. 삼공자 계파의 노림수 는 가을의 용봉지회(龍鳳之會)겠 지‘?”

“•••무슨 말씀인지.”

그 당혹스러운 상황에서도, 속내 를 감추는 남궁혁천.

그런 그에게 내원총관이 다 알고 있다는 투로 말했다.

“삼공자가 얼마 전, 벽을 넘어 경지에 다다랐다 들었소.”

남궁혁천은 대답 대신 입을 다물

기를 택했다.

“불과 십육(十大) 세에 고수(高 手)라니. 그것은 천재로 이름 높았 던, 둘째 아가씨. 천의무봉(天衣無 經)에게도 불가능했던 일.”

내원총관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틀림없이, 가을의 용봉지회에서 첫 선을 보인다면. 본가를 넘어서, 중원국 전체를 뒤혼들 충격이 되었 겠지.”

“그런데….”

입을 일자(一字)로 굳게 다문 남 궁혁천을 보며, 내원총관이 물었다.

“그대들이 대공자에 대해 가지는 경계심 수준이나, 대비하는 정도를 보아하니.”

내원총관의 깊은 눈에 조롱의 빛 이 스쳤다.

“가을까지, 채 버티질 못할 것처 럼 보이는구려.”

노인이 나직하게 혀를 찼다.

우드득.

이를 가는 남궁혁천의 눈에 불똥 이 튀었다.

“지금이라도-.”

“그 말을 하는 동안, 그대들은 이미 한 발 더 뒤처졌소.”

내원총관이 이 만남 직전에 받았 던 쪽지를 남궁혁천에게 넘겨주었 다.

“조금 전. 대공자가, 장로원에서 가주님의 성명절기인 ‘절명(絶命)’ 올 선보였다고 하오.”

“……H”

어찌 남궁세가 직계 출신이 그 악몽과도 같은 초식을 모르겠는가.

“가주님의 독문무공은, 본가의

그 어떤 고수도 구현하지 못했던 비기(秘技) 중의 비기.”

찢어질 듯 커진 남궁혁천의 는을 들여다보며, 내원총관이 후벼 파듯 이 쐐기를 박았다.

“삼공자가 가을에 일으켰어야 할 충격은, 이미 대공자가 가져간 것 같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