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편 발검(拔劍)
대공자 연소현의 계파, 최초의 삼(三) 할이 드러나고.
그들과 사십(四十) 보(步) 떨어진 거리.
“큰일이오…!”
연씨 혈족 장로 중 하나가 허겁 지겁 뒤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숨은 거칠고, 얼굴은 충혈된 꼴 이 대단히 급하게 달려온 모양이었
지만.
“큰일은 큰일이지….”
“…하필 이 시점에 대공자의 계 파라니.”
연씨 혈족 장로들은 당혹감을 채 감추지도 못하고 있었다.
“부전장장은 압송되었으니, 호법 원주나 감찰부주도 우리와 손을 놓 아 버릴 것이고….”
냉수를 들이켜 봐야, 체한 것처 럼 속이 갑갑하기만 했다.
“게다가 저 대공자가 이미 장로 원 내부에 세력을 저렇게 구축한 이상, 장로원 선에서 어떻게 해 볼
여지도
목깃을 느슨하게 풀어 보아도, 숨통이 조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로 군….’’
그렇게 대공자의 계파가 충격적 인 등장을 한 상황에서.
늦게 온 장로에게 다른 연씨 혈 족 장로들은 관심을 줄 여유가 없 었다.
“나는 그저, 그대들에게 약간의 용기만을 불어 넣어 주었을 뿐.”
“아닙니다, 대공자님…!”
맞은편에 보이는 대공자 계파가 노골적으로 과시하듯 보여 주는 화 기애애함에.
연씨 혈족의 장로들이 이를 부득 부득 갈았다.
“눈꼴사나운 짓들을….”
“장로라고 하기도 모자란 것들 이, 아주 꼴값 떨고 있어.”
“누가 보면 초대 가주(初代家主) 라도 만난 줄 알겠군.”
“칭송도 작작 해야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나?”
그들 중 하나가,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혀를 차 봤지만.
“그리고 그렇게 무효표가 삼 할 이 모이자…!”
“대공자께서 ‘정치적 거래’를 통 해 확보해 두셨던, 일 할의 인원들 이 숭산을 보게 되었고…!”
“이어진 재투표에서 추가로 일 할의 무효표를 더하게 되었지요 •••!”
대공자 계파의 장로들은, 들은 척도 하질 않았다.
“•••망할.”
하지만.
그렇게 뒤를린 심사에 흉을 보는 것도, 최소한의 여유가 있는 이들 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알들.
누군가는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손톱을 물어뜯어 대고 있었고.
누군가는 책상이 떨릴 만큼 다리 를 떨어 대고 있었다.
••쭛
슬쩍 그 모습을 살폈던 연씨 혈 족 장로 하나가 혀를 찼다.
저들은 같은 연씨 혈족의 장로들 중에서도.
부전장장과 노골적으로 엮인 이 들.
이번 일의 결과에 의해, 당장에 직격탄(直擊彈)을 맞을 수밖에 없 는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익히 짐작할 수 있으니, 저들의 행태 또한, 마냥 이해하지 못할 노릇도 아니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유감이지 만….”
하나둘씩, 충혈된 눈들이 자신을 향하자.
그는 시선을 피하면서 제 할 말 을 이었다.
“우리는 힘이 닿는 데까지 도왔 으니. 그대들 또한 차후에 있을 수 사 과정에서 우리에게까지 피해가 없도록 신경들 좀 써 주게나.”
‘우리’와 ‘그대’.
일이 틀어지자마자, 노골적으로 선을 그어 버리는 표현.
“……!”
아군에게 뒤통수를 맞은 연씨 혈 족의 장로들이 부릅뜬 눈으로, 온
몸을 떨며 자신의 방향을 바라보자.
“자네들의 마음은 이해하네만….”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해야 할 말은 해야겠지….”
다른 연씨 혈족의 장로들도, 처 음 선을 그었던 이처럼.
“이 일로 인해, 우리 연씨 혈족 전체가 몰락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나.”
“지금은 각자도생(各自®生)의
때라는 것이지.”
“장로원 밖의 혈족들도 마찬가지 결론을 내렸을 것이네.”
그렇게.
다들 시선은 피하면서도, 해야 할 말은 했다.
“…자네들!”
한순간 그렇게 버려진 연씨 혈족 의 장로가 벌떡 일어나자.
“뭘 그렇게 우리에게 화를 내 나‘?”
시선을 피하던 장로 하나가, 그 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자네들도 우리 상황이 되었다 면. 지금 우리와 똑같이 행동했을 것 아닌가?”
....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지만, 너무나 정곡을 찌르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
아니면, 말문까지 막혔기에.
더욱 분노가 치밀어 오른 것일 까.
“그래도, 부전장장. 그자 또한 가 족을 생각하면 쉽게 입을 털지 못 할 것이니.”
“끝이라고 생각은 하지들 말고.”
“우리도 가능한 만큼은 필요한 조치를 해 주도록 하겠소.”
병 주고, 약을 주는 것인가.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는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하는 형편이 라.
“•••부탁드리겠-.”
굴욕을 참으며 고개라도 숙여 보 려 했던 그때.
“이미 늦었소.”
연씨 혈족 장로들이 그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내, 큰일이 있다 하지 않았소이 까.”
늦게 와서 호들갑을 떨던 이가
힘이 쭉 빠진 채로 의자에 털썩 앉 으며 말했다.
“체포된 부전장장에게 비밀 장부 가 있었고. 호법원에서 그 장부를 입수했다고 하오.”
마지막.
썩은 동아줄마저 끊어져 버렸다.
“검가전장의 전장장 불신임에 대 한 삼차(三次) 투표 결과. 불신임 찬성 스무 표. 무효 열 표. 반대 팔 십 표. 따라서…!”
멀리서 들려오는 회의 진행 담 당, 황목 장로의 목소리.
“따라서 전장장에 대한 불신임안 은, 최종적으로 부결(否決)되었습니 다…!”
그 결과를 알리는 목소리와 함 께.
“듣기로는 그 또한 대공자 놈의 솜씨가 들어간 것 같더군. 안됐지 만….”
정보를 가져오느라 뒤늦게 합류 한 연씨 혈족의 장로의 목소리가 겹쳤다.
“•••그대들은 이제 끝났소.”
그 순간, 이성의 끈 또한 끊어졌 다.
삼십(三十) 보(步).
장로원에서 뼈아픈 패배를 겪은
이가 괴성(怪聲)을 지르는 일 따위 는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실력 행사라는 말도 안 되는 일 이 벌어지는 상황을 눈치챈 것은.
“네놈이이이---!”
이미, 연씨 혈족의 장로 증 하나 가 대공자와의 거리를 삼십(三十) 보(步)까지 줄인 다음이었다.
“..!”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이 누군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대공자님…!”
전장에서 단련되고 또 단련된 검 악파산(劍括破山).
염 장로는 반사적으로 내공을 끌 어 올리며, 대공자에게로 향하는 연씨 혈족 장로의 경로를 차단키 위해 몸을 날렸다.
“이 미친놈이…!”
그리고 또 한 명.
작은 거인.
그 이름은 결코 허명(虛名)이 아 닌지라.
대회당 중앙의 단상에 서 있던
장로원주가 분기탱천하여 노성(怒 聲)과 함께 양손을 들어 올리며, 일 순(一聯)에 내공을 끌어 올렸다.
이십(三十) 보(步).
....
내공이 없는 장로들 중에서도.
그나마 중앙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던 이들이 상황을 파악했던 그 짧은 순간.
“큽 •••!”
너무나 급작스럽게 강제로 끌어 올린 내공의 반작용에.
염 장로의 전신(全身)의 혈관들 이 지렁이처럼 곤두섰고, 두 눈의 실핏줄들이 압력에 출혈을 일으켰 다.
온몸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을 억 누르며, 그의 손이 반사적으로 자 신의 둥으로 향했지만.
이곳은 장로원.
둥에는 애병인 거검(巨劍)이 없 자, 대신 그는 즉각 솥뚜껑 같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흐읍-!”
“죽어라아아아——
남은 거리, 십(十) 보(步).
대회당의 중앙 단상에서부터 폭 풍 같은 기파(氣波)가 몰아닥쳤고.
“어이쿠-!”
중앙 단상 근처에 서 있던 황목 장로 등이 그 기파에 밀려 나자빠 지던 순간.
번쩍.
쌍장(雙掌)에 가공할 만한 기운 을 끌어 올린 장로원주는 이미 허 공으로 치솟아 있었다.
‘내공을 끌어 올리는 속도가 모 자란 것은, 거리를 확보하여 보충 한다…!’
장로원주는 돌격해 들어오는 연 씨 혈족 장로에게 돌진하는 대신.
연소현 방향으로 몸을 날려 그 앞을 막으며, 노련하게 내공을 끌 어 올릴 시간을 벌었던 것이다.
“갈(陽)--!”
그의 양 소매가 터져 휘날리며, 그 두 눈에는 시퍼런 전광(電光)이 줄기줄기 길게 꼬리를 물었다.
오의 (與義).
동륜쌍뢰 (動輪雙뽀).
극성(極成) 봉요격(鳳選擊).
그리고.
범(虎)과 같은 눈을 부릅뜬 염 장로 또한.
일신(一身)의 기를 겨우 반(半) 호흡 만에 주먹에 집중시키는 데
성공했다.
검악파산 독문무공(獨門武功).
초중권형 (超重奉型),
파산경 (破山勤).
“…허억!”
“•••큭!"
그를 중심으로 바닥의 석재(石 材)들이 사방으로 갈라지며, 주변의 장로들이 그 태산(泰山)과 같은 압 력에 무릎을 꿇고.
“그아 O]아악——
동귀어진 (同歸於盡).
진원진기 (M元眞氣)까지 끌어 올 려, 사실상 자살 공격을 감행하는 연씨 혈족 장로와 대공자와의 거리 는.
이제, 단 다섯(五) 걸음(步).
‘절대, 늦지 않는-!’
‘-다!’
내공을 극한(極限)까지 끌어 올 린 두 무인(武人)의 집중력이.
모든 것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 은 시간의 벽(壁)에 도달했던, 그 순간.
.....
.....
그런 두 사람의 곁을 유유히 스 쳐 지나가는 이가 있었으니.
그 모양새가 거친 계곡의 폭포에 씨름하는 연어들 따위엔 무심하게 창공(蒼空)을 누비는 대붕(치!)의
움직임이라.
‘ 대공-.’
자?!’
모든 것이 느려진 그 시간의 벽 에서.
대공자 연소현의 신형은 홀로 아 무런 제약 따윈 없는 것처럼 표표 히 움직여, 그들을 앞질렀다.
그리고.
장로원주와 염 장로의 눈이 경악 에 부릅떠지던 그 순간, 연소현의 발끝이 사뿐하게 지면을 내디뎠다.
톡.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사뿐히 내디뎌진 발 끝을 중심으로.
아무런 굉음(蟲音)도, 흩날리는 먼지조차도 하나 없이.
대회당의 대리석 바닥이 소용돌 이치며 내려앉았다.
‘저 진각(震脚)은-?!’
장로원주와 염 장로는 즉시, 그 한없이 특징적인 진각을 알아보았 다.
‘태상가주님의-?!’
그리고.
두 고수의 눈이, 진각에 의해 연 소현의 몸을 타고 오르는 내공을 쫓듯.
반사적으로 그 내공의 종착지인 손올 바라보았다.
‘저건-?!’
검을 쥐듯 주먹을 말아 쥐고, 검 지와 중지, 두 손가락만을 검과 같 이 곧게 내뻗은 모양.
‘-검결지 (劍諫指)!’
본디, 검결지란.
아무리 검술(劍術)의 일부라 하 여도, 어디까지나 주(主)가 되는 검 (劍)의 보조적인 수단에 불과하건 만.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연소현의 검결지는, 봉인되어 있 던 보검(寶劍)이 뽑혀 나온 것과 같아.
그 예기(銳氣)가 아릿하게 공기 마저 저미는 듯했다.
그 순간만큼은 그 자리의 모두 가, 마치 사술에라도 홀린 듯이.
대공자의 검결지만을 바라보았 다.
하지만.
....
대회당에 있던 그 누구도.
그 어떤 무사(武士)도.
가장 안력(眼方)이 좋은 이조차 도.
연소현의 검결지가 움직이는 순 간을 포착하지 못했다.
“아…!”
딱 짚어 설명할 수 없는 본능적 인 안타까움에 누군가의 입에서 탄 성이 터져 나오고.
그 탄성에 홀린 듯 연소현을 바 라보던 모두가 정신을 차렸을 때.
푸확-!
짓쳐들어오던 연씨 혈족 장로의 몸이 그대로 허공에서 좌우로 양분 (兩分) 되었고.
그 기세 그대로 연소현의 양옆으 로 스쳐 지나가, 좌우가 제각기 볼 품없이 구겨져 처박혔다.
!”
뒤늦게.
허공에서 연씨 혈족 장로의 피가 안개비처럼 사방에 홑뿌려지는 가 운데.
마찬가지로 뒤늦게나마.
그 무공을 알아본 이들의 입에서 그 일검(--劍)의 정체가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저건, 태상가주님의 성명절기 (成名絶技).”
“절명 (絶命)…!”
내공이란 재능을 타고난 자든, 무인 출신이 아니든.
이 낙양검가에서 장로 위까지 오 른, 그 누가 감히 그 일검을 알아 보지 못하겠는가.
“후우….”
만감(M感)이 교차하는 경악 속 에서, 길게 연소현이 호홉을 다스 리자.
쩌적, 쩌저적.
그때야.
연소현의 진각 흔적에서부터, 바 닥을 치달린 균열(鎬製)이 저 멀리 벽면을 긁고 지나쳐, 그 높은 대회 당의 천장까지 다다랐다.
후두둑.
천장의 갈라진 균열에서부터 떨 어진 흙먼지 따위를 뒤집어쓰면서 도.
지금 이 순간,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