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편 마장(魔障)
장로원 앞 다루(茶樓).
연씨 혈족들이 입에 불을 뿜듯, 사람 하나를 다그치고 있었다.
“그래서, 어찌 되어 가고 있단 말인가?!”
“중앙감찰각이 장로원에 닥쳤던 일은 또 뭣 때문이라던가?!”
“수장(首長)급 중진들 몇몇이, 끝 나기도 전에 먼저 빠져나가 버린
이유는 뭐고?!”
연씨 혈족들의 호통에.
“그것이….”
장로원 내부 정보를 가져온 이가 눈치를 보면서 답했다.
“•••아무래도, 일이 대공자 쪽으 로 풀려 가고 있다는 듯합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 가길 래?!”
제대로 된 소식이라고는 들어오 지도 않고, 들려오는 것은 하나같 이 좋지 않은 소식뿐.
시간이 갈수록, 연씨 혈족들의 안색은 거무죽죽하게 죽어만 갔다.
....
그때.
창가에서 초조한 얼굴로 연신 장 로원 방향을 바라보던 연씨 혈족 중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저건…?!”
없던 체통(體統)마저 잊고.
후다닥거리며 창가로 몰려든 연 씨 혈족들이 장로원의 출입구를 보 고 대경실색(大호失色)했다.
“저자가 대체 왜…?!”
섬뜩한 붉은 정복을 입은 중앙감 찰각의 인원들에게 붙들려 압송당 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검가전장의 부전장장 이었다.
뭍에 밀려와 썩어 가는 죽은 생 선 눈을 한 부전장장은.
다리마저 풀려 버린 채로,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고 있었으니.
그 꼴을 보아하니, 이미 사자(死 者)라 부른다 해도 과장이 아니었 다.
“…아니, 저자가 저렇게 붙들려 간다는 것은.”
핏기 하나 없이.
안색이 하얗게 질려 버린 연씨 혈족이 부들거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기존의 전장장을 쳐 내기는커 녕, 이쪽이 역으로 당했다는 건 가...?”
그들이 어째서 부전장장을, 전장 장 자리에 앉히려 했던가.
“어이쿠.”
장난기 어린 말투와 함께, 누군
가 불쑥하고 창가 쪽 난간에 척 하 니, 모습을 드러냈다.
“지체 높으신 연씨 혈족의 어르 신들께서 이곳에 계셨군요.”
붉은 옷자락을 휘날리며, 부드러 워 보이는 얼굴에 짓궂은 미소를 띤 것은.
중앙감찰각주의 오른팔, 화복이 었다.
“아니. 그렇게 호출들을 하고, 참 고인 조사를 부탁드렸는데 말입니 다.”
그는 섭섭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공사다망(公私多't)하여 조사를 거부하시던 분들이, 이런 시각에 다들 한가로이 다루 따위에 모여 계시다니요?”
화복이 한껏 그들을 비꼬았다.
“혈족에 무슨, 행사라도 있는 겁 니까?”
평소라면, 벌컥 호통이라도 쳤으 련만.
천천히 핥둣이.
자신들을 훑어보는 화복의 시선
에도, 연씨 혈족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양이 앞의 쥐 꼴이라.
“얼굴 뵙기가 어려운 분들이라, 일일이 방문해 알려 드리기도 뭣했 는데. 아무튼 잘되었습니다.”
조용한 공간에 화복이 홀로 큭큭 거리며 웃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연씨 혈족 모두는.
그렇게 웃는 화복의 눈에 아주
약간의 웃음기도 없었으며.
“이제, 그대들의 마지막 끈이 떨 어 졌으니….”
심지어 섬뜩한 기색마저 스쳐 지 나가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최대한 저항들 해 보시오.”
감찰이 임무였지만, 그 오랫동안 제대로 된 감찰이라고는 해 보지 못했던 이가 말했다.
“그 알량한 목숨들을 걸고. 끌어 들일 수 있는 모든 것을 끌어들여 저항해 보시오.”
그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에.
“네놈…!”
그동안 참고 있던 연씨 혈족들의 얼굴이 대번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보자 보자 하니까.”
“일개 감찰원 따위가 감히…!”
“우리가 이런 상황이라 하여, 네 놈 하나를 어쩌지 못할 것 같으 냐?!”
모골(毛骨)이 송연해지는 살기.
평소라면, 아무리 간이 부은 화 복이라 한들 섬뜩하여 자리를 떴으 리라.
하지만.
“방금, 그 말은 중앙감찰각의 의
지이기도 하지만….”
오늘의 그는 달랐다.
“본가의 대공자님께서 친히. 여 러분께 전하라 명하신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공자 연소현이 부전장장에게 했었던 말이기도 했다.
....
....
당장에라도 화복에게 달려들려 했던 연씨 혈족들이 그 자세 그대 로 딱딱히 굳어 버렸다.
“혹시….”
마치 산 채로 석상이라도 된 것 처럼 보이는 그들을 향해, 화복이 노골적으로 조소했다.
“행여라도, 이번처럼. 호법원에서 여러분께 협조하리라 기대하시지는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뒤에서 못마땅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던 나이 많은 연씨 혈족이 입을 열었다.
“•••호법원이. 호법원주가 대공자 의 손을 잡았나?”
노골적일 정도로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화복이 어깨를 으쓱였다.
“여러분과 저에게는, 거기까지
말씀드릴 정도의 의리는 없는 것 같습니다.”
호법원주가 실각하고, 새 호법원 주가 들어오게 되리라는 것을 저들 이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화복은 입이 간질거렸지만, 참았 다.
“그럼, 아무쪼록. 앞으로 있을 강 제 소환에서 순조로운 협조 부탁드 립니다.”
그가 히죽하고 웃으며, 훌쩍 그 난간에서 떠났다.
그렇게 화복은 모습을 감추었지
목숨들을 걸고, 끌어들일 수 있 는 모든 것을 끌어들여 저항해 보 라는 말.
일개, 감찰원이 아니라.
그 대공자에게서 온 전언에, 분 위기는 전에 없이 무거웠다.
그 무거운 분위기를 깨듯, 의자 가 덜컥이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어르신.”
자리에서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혈족의 시선을 받던 노인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다가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마장(魔障)로구나, 마장이야.”
마장(魔障).
귀신의 장난이라는 뜻이었다.
지금 자신들의 상황을 달리 뭐라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 대공자 놈이 직접 움직인 이 상, 뭐라도 숨겨 놓은 수가 있으리 라는 점까지는 알았지만….’
이렇게, 한 수에 그 모든 것이 뒤집히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이 상황을, 귀신이 부린 장난이 아니고서는 어찌 납득할 수 있겠는 가.
“…아니면, 그 대공자 놈이 귀신 이었던 것인가?”
지금에 이르자.
어째서 태상가주가 큰아들을 그 리도 깊숙이 숨겨 두며 싸고돌았는 지, 알 것 같았다.
“어르신....”
노인은 부축을 받으며 아래층으 로 떠나며 말했다.
“•••전원.”
노인의 어조는 전에 없이 무거웠 다.
“지금부터 각자, 생로(生路)를 모 색하게.”
그 시각, 장로원 대회당(大會堂).
입만 열면 청산유수(靑山流水)와 같은 언변을 쏟아 내는 대낙양검가 의 장로들이 무수히 모여 있었지만.
“저들이 전부 대공자의 계파라 고…?”
“•••삼(三) 할.”
“그렇다면, 저들이.”
“처음에 무효표를 행사했던 그 삼 할이었던 것이지.”
그들 가운데에서도 이 상황을, 감히 시원하게 해설할 수 있는 이 는 없었다.
“•••대비하려 했던 최악의 일은 이미 일어나 있었단 말인가.”
대공자의 계파가 형성되어, 수면 위로 부상하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 고자 했던 중진 장로가 자신의 이 마를 짚었다.
저들이 저렇게 공개적으로 모습 을 드러낸 이상.
공식적으로 대공자의 계파가 출 범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 이었다.
“•••대체 대공자는 언제 저 많은 이들과 접선했던 것이오?”
“우리뿐만 아니라 모두가 철저하 게 대공자 측을 감시하지 않았소이 까?”
“대공자는 장로원에 도착한 이후 에 저들과 접촉할 기회 따윈 없었 단 말이오…!”
“그런데 어떻게…?”
시원하게 해답을 추리하는 이는 없고, 다들 의문만이 가득했다.
“자네들은 아직도 모르겠나?”
탄식했던 중진 장로가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저들은 오늘 이 장로원에서 영 입된 이들이 아니야.”
“오늘이 아니라면…?!”
그 말에 주변에서 듣고 있던 장 로들의 눈이 커졌다.
“그래.”
중진 장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 을 이었다.
“기존의 전장장을 몰아내고, 새 전장장을 임명하기 위해서 표를 모 으던 그 기간.’’
장로원에서 결과는 투표 이전에
결정되고.
투표 이전이라 함은, 당연하게도 투표 당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 다.
“그 기간에 대공자 또한 수면 밑 에서 저들과 비밀리에 접촉을 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수면 아래에서 이루어졌던 장로 들 간의 비밀스러운 합의.
그런데 그 아래의 더 깊은 심해 (深海) 에서.
대공자가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 었다.
“•••구체적인 방법 따윈 나도 모
르네. 하지만 적어도.”
중진 장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 있었던 그 기이한 일들. 대량의 무효투표와 재투표가 어째 서 나오게 되었는지는, 이제 알겠 군.”
장로들은 그 말에 마른침을 삼키 며,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 다.
그곳에 있는 삼 할의 인원.
즉, 대공자의 계파는 얼굴에 철 판이라도 깐 것처럼.
모두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인사 와 더불어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처음엔 대공자께서 어째서 제게 무효표를 행사하면 알게 될 것이라 고 하셨는지 몰랐지만…!”
“무효가 무려 삼 할에 이르러. 재투표가 선언된 순간, 감탄을 금 치 못했습니다…!”
대공자 연소현의 주변에 모여든 장로들이 앞다투어 말을 하고 있었
다.
“그리 어렵지는 않은 일이었네.”
대공자 연소현은 평소처럼,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이 자리에 모인 누구도.
심지어는 그의 정적(政敵)들까지 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나는 그저, 그대들에게 약간의 용기만을 불어 넣어 주었을 뿐.”
“아닙니다, 대공자님.’’
연소현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 며 나선 것은, 연소현이 어깨를 두 르려 주었던 그 신입 장로였다.
“대공자께서는 용기는커녕, 엄두 도 내지 못하던 저희에게. 단지 무 효표를 투표할 것만을 당부하셨지 요.”
그가 그렇게 나서자, 다른 장로 들도 거들었다.
“그리고 저희는 단지 무효표를 투표한 것만으로.”
그 결과는 무려 삼 할에 이르는 무효표로 인한 재투표.
“저희는 뜻을 같이할 동지들이 많다는 것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 었습니다…!”
연소현은 그들에게 단지 무효표
를 던질 것을 요구했기에.
그들은 부담 없이 간단한 방법으 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 고.
“동시에 그 많은 이들을 모은 대 공자님의 영향력 또한 명확히 실감 할 수 있었지요…!”
그 숫자는 모두가 확인 가능했기 에.
대공자 자신의 능력과 실력 또한 중명 가능했다.
“그러면서도, 감히 누구도.”
“이 과정이 실시간으로 우리의 계파가 형성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그 대량의 무효표는 대공 자가 특정 계파와 파벌 따위를 설 득하는 중간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 었다.
그랬기에 대공자의 정적들은, 지 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착각 속에 서, 최대한 표를 되찾으려 헛된 노 력을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무효표가 삼 할 이 모이자.”
“대공자께서 ‘정치적 거래’를 통 해 확보해 두셨던, 일 할의 인원들
이 승산을 보게 되었고.”
“이어진 재투표에서 추가로 일 할의 무효표를 더하게 되었지요.”
그 말에 연소현이 고개를 돌리더 니.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적대적 장 로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대부분이 언짢은 표정을 짓거나, 고개를 돌리거나, 콧방귀를 뀌는 이들까지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에는 분명.
계파에는 들어오지 않았지만.
이번 일에서 연소현과 정치적 거 래를 했던 일 할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 할에 이르는 무효표와.”
“더해서 부전장장의 체포는 사실 상의 쐐기가 되었지요…!”
그 쐐기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 게.
“지, 지금부터 이번 재투표의 결 과를 발표하겠습니다…!”
투표 결과가 적힌 쪽지를 넘겨받 은 황목 장로가 발표를 시작했다.
“검가전장의 전장장 불신임에 대 한 삼차(三次) 투표 결과. 불신임 찬성 스무 표. 무효 열 표. 반대 팔 십 표. 따라서….”
패배를 직감한 장로들은 대부분 이 빨리 이 순간을 끝내는 것을 택 했다.
“따라서 전장장에 대한 불신임안 은, 최종적으로 부결(否決)되었습니 다...!”
장로원주가 뒤를 이어 말했다.
“회의 종료를 선언하오.”
그 순간, 대공자 계파에서 환호 성과 함께 요란한 박수가 터져 나
왔다.
“좋았어…!”
“이겼다…!”
정적의 숭리는 속이 쓰린 일이었 고.
심지어 그 승리가 자신들의 패배 에서 비롯되었다면, 복장(腹臟)이 뒤틀릴 노릇이었다.
“•••망할.”
환호성을 뒤로하고 장로들이 욕 지거리를 내뱉으며, 자리에서 하나 둘씩 일어났다.
“•••당장, 대책을 준비하지.”
“•••즉각적인 대처가 필요하오.”
“•••먼저 자리를 비우셨던 남궁 장로께도 즉시 알리겠습니다.”
승자와 패자의 명암이 뚜렷이 나 누어지고.
그렇게 폐장(閉場) 분위기가 물 씬 감도는 가운데.
“…소현.”
그 결과 발표가 단순히 한 번의 패배가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의미하는 이도 있 었다.
“연소현 네놈이이이——
괴성과 함께.
명백히 내공에 의한 가공할 압력 이 발생하는 순간.
부패한 연씨 혈족 장로 중 하나 가 뒤집힌 눈에서 살기와 광기를 줄기줄기 흩뿌리며 연소현에게 달 려들었다.
“죽어라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