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편 호법원주(護法院主)
“음‘?”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 그자가 있던 것이 아니 었습니까?”
벽 너머의 소리였기에, 제대로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그 서릿발 같은 목소리의 주인은 내용 따위는 파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백발백안의 귀신 독고야연…!’
중앙감찰각에 끌려간 이들의 최 후가 어떻게 되는지는.
그리고 그 최후에 이르기까지 무 슨 일을 겪게 될지.
자신의 오랜 검가전장 생활 속에 서 너무나 많이 들어왔다.
‘대체,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것이야...?!’
혹시나 숨 쉬는 것마저 들릴세 라.
부전장장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 고, 호흡마저 참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틀어지게
된 것이냔 말이야?!’
내실의 침상 아래.
작은 비밀 공간에 부전장장이 숨 어 있었다.
협소하기 짝이 없는 그 비밀 공 간은, 몸을 구겨 넣다시피 해야 할 정도로 비좁고 불편했지만.
자신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음?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이
곳에 있는 것을 확인했었소만.”
그 목소리의 주인은 부전장장, 자신을 윽박질러 왔던 호법일부장 이었으니.
내실에 들어온 그들이, 자신을 찾는 상황이었다.
“일부장님. 이미, 이 건은 끝난 것과 다름없는 일입니다. 순순히 협조를….”
호법일부장 또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허..! 그대 말대로. 지금에 이 상황까지 와서 그자를 숨길 이유가 무엇이 있단 말….”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부전장장 은 속으로 치를 떨었다.
‘망할 호법원 놈들…! 필요할 때 만 사람을 대중 써먹으려 하고. 필 요 없어지니, 대번에 팔아먹으려 들어?!’
부전장장에게 이 비밀 장소를 알 려 준 것은, 다름 아닌 부패한 연 씨 혈족 장로였다.
“이 기관(機關)은 우리 혈족들 사이에서도 소수만이 알고 있다네. 장로원을 건설할 당시에, 비밀리에 만든 공간이라, 장로원주조차 모르 는 곳이지 ”
부전장장의 머릿속에 부패한 연 씨 혈족 장로가 해 주었던 말이 떠 올랐다.
“충분한 물과 식량을 넣어 두었 으니. 버티게. 기회를 봐서 우리가 그대를 꺼내 줄 것이야. ”
부패한 연씨 혈족과 부전장장 자 신은 한배를 탄 신세였고.
그들은 호법원과 손을 잡고도, 호법원을 신용하지 않았다.
부전장장은 그 점을 이용하여, 호법원에서는 모르는 생명줄을 또 하나 확보해 두었던 것이다.
교토삼굴(校免三衛) 이라.
토끼는 굴을 하나만 파지 않는다 고 했던가.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모두 겪고 부전장장까지 올라선 그에게는 또 하나의 생존 수단이 있었으니.
‘이렇게 끝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의 품속에 있는 장부를 부둥켜안으며, 굴욕과 분노를 삼켰 다.
‘이 비밀 장부가 내게 있는 한. 연씨 혈족은 나를 살리는 데 최대 한 협력할 수밖에 없다…!’
비록, 낙양검가의 수배 대상이 될지라도.
자신의 비밀 장부가 있는 한.
비밀 장부에 기록된 부패한 연씨 혈족들의 힘을 빌려, 어디서든 다 시 한번 재기할 수 있으리라.
‘나는 살아난다…! 나는 살아난 다…! 나는 반드시 살아-!’
그때.
부전장장의 귀에 절대로.
결코, 듣고 싶지 않았던.
또 다른 인물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둘 다 목소리 높일 필요 없네.” 무려 호법원의 일부장과 중앙감
찰각의 각주에게 하대를 할 수 있 는 인물.
“맛있는 냄새는 이곳에서 나고 있거든.”
추리 따윈 할 필요도 없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꿈에서도 잊 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철컥철컥.
뭔가 조작되는 소리와 함께.
‘이 소리는…?!’
구그긍 하고, 그의 머리 위에서 비밀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실로 단순한 기관이로다.”
불쑥, 하고 아래로 머리를 들이 민 인물의 시선과 부전장장의 올려 다보는 시선이.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미공자(美公子)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빼어난 얼굴이었지만.
부전장장에게는 사신의 얼굴과 다름없었다.
“내가 최대한 저항해 보라 하지 않았던가?”
대공자 연소현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목숨을 걸고. 끌어들일 수 있는 모든 것을 끌어들여 저항해 보라 했더니.”
나직하게 혀를 차는 소리.
“겨우, 이게 네놈이 할 수 있는 전부였더냐?”
쑤욱 하고.
내려온 새하얀 손이 부전장장의 머리를 덥석 하고 쥐었다.
“끄, 끄아아아악!”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고통 가득 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쥐
새끼 같은 놈■이, 그동안 내 가문을 갉아먹고 있었구나.”
그 손아귀에 실린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마치, 머리가 마차와 지면 사이 에 끼여 그대로 쪼개지는 것 같았 다.
“끄아아아, 아아악!”
대공자 연소현.
아니, 사신(死神)은 눈에서 푸른 귀화(鬼火)를 피워 올리며 선고(宣 告) 했다.
“너는 이제부터 중앙감찰각에서 현세의 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머리통 을 붙잡힌 부전장장이 쑤욱 하고 딸려 올라갔다.
“ 으아아아악——
쓸데없이 긴 그의 명줄처럼.
쓸데없이 긴 비명만을 남긴 채.
그리고.
그 좁아터진 비밀 공간에는.
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식량 과 식수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 다.
“끌고 가라.”
“존명!”
중앙감찰각주 독고야연의 명에, 붉은 정복을 입은 중앙감찰각의 인 원들이 부전장장을 끌고 갔다.
“제, 제발!”
부전장장은 양어깨가 단단히 붙 들린 상태에서 손에 걸리는 대로 붙잡아 댔고.
와장창.
탁자니, 도자기니, 전부 나자빠지 고 부서지며 사방이 아수라장이 되 었지만.
“사, 살려 주십시오! 제발, 대공 자님! 한 번만 기회를…!”
휴게실 내의 그 누구도.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자에 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대공자 님.”
그렇게 먼저 입을 연 것은, 호법 원주였다.
후일을 도모할 때는 도모하고,
상대의 뒤를 노릴 때는 노리더라도.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 다.’
그 상대와 원수까지는 지지 않는 것이, 정치판에서 오랫동안 살아남 는 비법이었으니.
호법원주는 속에서는 칼을 갈면 서도, 억지로 굳은 미소를 지어 보 였다.
“•••훌륭한 승부였습니다.”
“고맙소, 호법원주.”
호법원주의 굴욕을 즐기기라도 하듯, 미소를 지으며 연소현은 손 에 든 비밀 장부를 확인하고 있었
다.
부전장장의 마지막 생명줄이던, 그 비밀 장부였다.
“•••그런데, 그런 비밀 공간이 있 는 것을 어떻게 알고 계셨습니까?”
호법원주의 질문에, 내심 궁금해 하던 중앙감찰각주와 호법일부장의 시선도 그에게로 향했다.
“몰랐소.”
“예…?”
연소현은 천천히 비밀 장부를 넘 겨보며 답변했다.
“비밀 공간이 있는 것을 알아서
저자를 찾아낸 것이 아니라. 저자 가 이곳에 있는 것을 알았기에 비 밀 공간을 찾아낸 것이라오.”
답변은 답변이었지만.
제암진천경의 존재에 대해서 모 르는 이가 이해할 수 있는 답변은 아니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호법원주의 말에 연소현이 더 설 명을 하는 대신 피식 웃었다.
연소현의 숭리를 축하하며, 이런 저런 말을 하고는 있었지만.
호법원주의 시선은.
아까부터 연소현이 천천히 넘겨 보고 있는 부전장장의 비밀 장부에 서, 떨어질 줄을 모르고 있었던 것 이다.
“부패한 연씨 혈족을 도와 이득 을 챙기는 일은 이제 물 건너갔으 나….”
대공자 연소현이 호법원주를 향 해 빙긋 미소 지어 보였다.
“이 비밀 장부가 있다면, 부패한 연씨 혈족을 잡아들이는 것으로. 이번 일의 손해를 보전(補愼)할 수 있겠지?”
대공자 연소현이 은근슬쩍, 말을 낮추자 호법원주의 주름진 얼굴이 꿈틀거렸다.
그 얼굴을 들여다보며, 연소현이 말을 이었다.
“감찰부주는 이 판에서 제 몫을 보전해 나갔고. 자네는 이대로 맨 손으로 나갔다간 속이 쓰리는 정도 로 끝나진 않을 테고 말이야.”
‘제길….’
하지만.
승자(勝者)는 명백히 대공자였으
며.
자신은 숭자의 호의(好意)를 기 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호의를 베풀어 주신다면. 잊 지 않겠습니다.”
호법원주가 두 손을 모아, 최대 한 정중하게 말했다.
“비록, 이번엔 대공자님의 신산 (神算)에 크게 낭패를 보았지만. 제 가 호법원주 자리에 있는 이상. 앞 으로도 대공자께 종종 큰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호법원주의 속은 물론.
겉과는 전혀 달랐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했다, 대공자.’
최후에 웃는 자가 승자라.
당장의 굴욕이 문제이겠는가.
“•••과연.”
비밀 장부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고민하던 대공자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도 호법원의 도움은 종 종 필요하겠지.”
‘됐다…!’
그 말에 호법원주의 얼굴에 화색
이 돌았다.
“ 받게.”
연소현이 대충 던진 장부를 척 하고 받아 든 호법일부장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대공자님.”
호법원주 또한 얼굴에 싱글벙글 미소를 띠고 연소현에게 고개를 숙 여 보였다.
“대공자님. 절대 이번 결정을 후 회하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비밀 장부와 중앙감찰각의 협조가 있다면, 충분하겠지?”
“예, 그렇습니다.”
대공자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 고, 호법일부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호법일부장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공자에게 받은 비밀 장부를 훑어 보며 말했다.
“검가전장으로부터 본가의 자산 을 빼먹던 권력자들. 그것도, 평범 한 권력자가 아니라 그 연씨 혈족 의 부패를 척결하는 일이라면….”
호법일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업적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대공자가 동의하듯.
호법일부장에게 미소를 지어 주 었다.
“그리고 그 정도라면, 자네가 그 동안 쌓아 온 경력과 합쳐, ‘새’ 호 법원주로 취임하기 위한 업적으로 도 충분할 것이야.”
호법일부장이 정중하게 고개를 다시 한번 숙였다.
“감사합니다, 대공자님.”
그가 고개를 깊이 숙인 자세 그 대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 호법원에서는 성역(聖 域) 없는 수사를 할 것을, 다시 한 번 약속드립니다.”
“기대하고 있겠네.”
대공자 연소현이 다가와 그의 어 깨를 두드려 주었다.
“최고운영회의에서의 최종 심사 와 결정이 있을 테지만. 그쪽은 내 게 맡기고 걱정하지 말게.”
정체도 알 수 없는 최고운영회 의.
까다롭기 짝이 없는 최고운영회 의에서의 절차를 아무것도 아니라 는 듯이 말하는 대공자였다.
“자네는 그런 정치적인 것은 다 본 대공자에게 맡기고. 업무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이야.”
마른침을 삼킨 호법일부장이 고 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번엔, 뒤에서 지켜보던 중앙감 찰각주 독고야연의 축하였다.
“앞으로 중앙감찰각과의 수사 협
조도, 잘 부탁드립니다.”
중앙감찰각주 독고야연의 말에, 호법일부장은 그쪽으로도 정중히 대답했다.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 다.”
모두가 당연한 듯이 대화를 주고 받고 있었지만.
상황을 쫓아가지도 못하고, 납득 을 하지도 못하는 이가 하나 있었 다.
“•••이, 이게 무슨?”
호법 원주였다.
“대체, 지금 무슨 말들을 하 는…?”
그 정도의 정치력을 지닌 이가 지금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이게, 대체…‘?”
하지만,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 었다.
“둘이 할 말이 많겠군.”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은 연소 현이 중앙감찰각주를 거느리고 밖 으로 나갔다.
“대회당에 먼저 가 있겠네.”
“예, 대공자님. 잠시 뒤 뵙겠습니 다.”
대공자가 평소와 같은 유유자적 한 모습으로, 뒤를 향해 손을 흔들 어 주고는 복도의 저편으로 사라졌 다.
침묵을 깬 것은.
그 짧은 사이에 십 년은 늙어 버 린 듯한 호법원주였다.
“…처음부터 였나?”
“•••그렇습니다.”
이번 일이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미, 호법일부장은 연소현의 줄 을 잡고 있었단 말이었다.
“그런가….”
호법원주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 지만, 그 꼴이 바닥에 주저앉는 것 과 별 차이가 없었다.
“가장 자신이 가치 있을 때 팔았 군. 잘했네.”
호법원주가 눈을 들어 자신의 오 른팔이었던 호법일부장을 칭찬했다.
“자네도 이제 훌륭한 한 명의 정 치인이자, 본가의 장로가 되었어.”
그 말에 호법일부장이 고개를 저 었다.
“아닙니다.”
“겸양을 떨 필요 없네. 자네는-.”
호법일부장이 그 말을 끊었다.
“저는 호법원주에 취임하는 즉 시, 장로 위(位)를 내려놓을 것입니 다.”
“뭐라고…?”
호법원주가 어안이 벙벙하여, 대 체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 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수사기관의 수장이, 장로원의 일원을 겸임하며 정치를 해서는 안 됩니다.”
호법일부장은 그동안 자신이 품 고 있던 생각을.
마치, 자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자신과 만났던 대공자가 해 주었 던 그 말올 꺼내 놓았다.
“이제 앞으로 본가에서. 더 이상 수사기관이 정치권력화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자 신을 바라보는 호법원주에게.
“그동안 많이 배웠습니다.”
호법일부장이 마지막으로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