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편 비탈길
삼공자 측 휴게실.
안 그래도 머릿수가 많은 삼공자 측 장로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중앙감찰각 으로 인해 한꺼번에 전부 휴게실로 모이자.
휴게실은 미어터질 듯 사람으로 붐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원래 이 정도 수가 좁은 곳에 한꺼번에 모이면.
여기저기서 입씨름을 하는 이들 이나, 기 싸움을 벌이는 이들의 소 음이 가득했으련만, 지금은.
그저 여기저기서, 삼삼오오 모여 든 이들이 작게 주고받는 수군거리 는 소리와.
그저 의자에 죽치고 앉아, 입만 뻥긋거리며 천장에 자욱한 연기구 름을 더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무거운 분위기는 휴게실 가운 데를 차지하고 있는 중진들 사이에 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면
“중앙감찰각에서 새로 확보했다 는 중거라….”
“•••지금에라도 사람을 보내어 확 인을 해 봐야 하지 않겠소?”
확정된 사문(死門) 안에서도, 숨 이 끊어질 때까지 활로(活路)를 탐 색하는 집착적인 끈기와 투지.
“그렇군.”
그것이 노회한 정치인의 무서운 점이었다.
“기왕 갈 거면. 어설프게 아무 장로나 보내지 말고.”
“법무(法務)나, 감찰(監察) 쪽에 확실한 장로를 보내는 편이 좋겠 소.”
휴게실의 외곽에 앉아 있던 이들 도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둘씩 가운 데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지. 그래야 허점이 있다면, 단박에 파고들어, 증거를 무너뜨릴 수 있겠지.”
“사소한 절차적인 불법성이든, 제보자의 신뢰도에 대한 시비든, 일단 걸 수 있는 것을 전부 걸어 봐야-.”
억지로 끌어 올린 것이긴 하지 만.
어쨌든 전의를 다시 찾아가던 그 순간.
“소용없을 것이오.”
그렇게 논의를 끊어 버린 것은.
중앙에 앉아 묵직한 존재감을 드 러내면서도.
지금까지 홀러가는 상황을 지켜 만 보고 있던 이였다.
“•••소용없다고 하셨소이까?”
그가 고집이 느껴지는 단단한 턱 선을 드러내 보이며 천천히.
“그렇소. 가 봐야 소용없을 것이 오.”
그렇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고개 를 끄덕였다.
“그대들은 지나치게 상황을 낙관 적으로 보고 있소.”
억지로 불어넣으려던 전의를 단 번에 꺼트려 버리는 말이었지만.
누구도 감히 거기에 대해서 노골 적으로 반발감을 표출하지는 못했 다.
“•••남궁 장로.”
“그래서, 어떤 말씀을 하시고 싶 으신 겁니까?”
남궁 장로.
성에서부터 알 수 있듯.
그는 삼공자 연적광(溫赤債)의
외척이며, 남궁세가의 직계혈족이었 으며.
그 거구의 노인이 그들.
삼공자 계파의 우두머리였다.
“그 대공자가.”
그는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에도 꿈쩍없이, 마시고 있던 술잔을 들 어 천천히 향을 음미하며 말을 이 었다.
“겨우 그딴 허점을 남겨 두었으 리라 기대하는 것이오?”
그들이 애써 외면하고 있던 점을 정확하게 끄집어낸 남궁 장로의 질 문이었고.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야말로 완 전한 침묵이 넓고 호화로운 휴게실 에 내려앉았다.
“대공자의 기습으로 시작된 일이 니, 모든 일이 그가 짠 판 위에서 일이 돌아가고, 모두가 놀아난 것 은 어쩔 수 없지.”
그는 한 무리를 이끄는 수장답 게, 깔끔하지만 묵직하게 선을 그 어 주었다.
“이번 건은, 우리 패배요.”
더 이상, 결론은 지켜보나 마나 였다.
대공자가 굴린 바위는 이미 비탈 길을 거침없이 달렸고.
그 낙석(落石)은 그대로 산사태 가 되었다.
“다음번엔. 일이 이렇게 시작되 지도. 일이 이렇게 끝나지도 않을 것이오.”
그가 잔을 탁 하고 내려놓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한 치 의 미련도 없이 휴게실에서 퇴장했 다.
남궁 장로의 직속이라 불릴 만한 장로들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아무런 허점과 문제가 없는 중거라니.”
남아 있던 중진 장로 하나가, 떨 쳐 낼 수 없는 의문을 입에 담았 다.
“하필이면 그런 증거가. 하필이 면 이 순간에 제보되어. 하필이면 이 순간에 부전장장의 숨통을 끊어 버린단 말인가…?”
남궁 장로와 그의 직속 장로들이 빠져나간 이후에도 꽤 많은 수의 장로가 남아 있었지만.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장로 는.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호법원주의 휴게실.
‘분명.’
호법원주는 신경질적으로, 흘러 내린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대공자에 게는 부전장장의 비리에 대한 아무 런 증거가 없었다.’
그것은 정황적으로도, 물적으로 도 호법원주가 확신하고 있는 부분 이었다.
‘그렇다면, 그 제보자는 이 장로
회의가 진행 중일 때. 중앙감찰각 에 중거를 넘겼다는 말이 되는 것 인데....’
“•••대체, 누가?”
••••••
근처에 앉아 있던 감찰부주에게 서는 아무런 답변도 돌아오지 않았 지만.
호법원주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답을 알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으니.
“원주님.”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의 오른팔인 호법일부장이었다.
“ 놈들은?”
호법일부장의 안색은 어두웠다.
“중앙감찰각의 인원들이 점점 수 색 범위를 좁혀 오고 있습니다.”
호법일부장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그들도 우리 호법원과의 마찰을 피하고 싶었던 것인지. 수 색 우선순위에서는 밀린 듯하지만 _ 99
호법원주가 그의 말을 끊었다.
“결국, 이곳까지 도착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군.”
“•••그렇습니다.”
“장로원의 비밀 통로는?”
호법일부장이 고개를 저었다.
“장로원주가 절차에 따라 중앙감 찰각에 협조 중입니다. 비밀 통로 들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호법원주가 혀를 찼다.
“•••이미 계산을 마쳤다는 것인 가‘?”
“비리 제보가 결정적이었습니다.”
우드득.
호법원주가 거칠게 말아 쥔 주먹 이 거북한 소리를 냈다.
“감찰부주.”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붕대로 감은 얼굴을 든 감찰부주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불가능하오.”
그가 짧게 덧붙였다.
“말했듯. 이미 중앙감찰각은 이 손을 떠났소이다.”
감찰부주가 말한 것처럼.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그는 다 시 언급해 준 것뿐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 특유의 건조한 말투마저 거슬 렸다.
“•••원주님.”
호법일부장이 휴게실의 내실(內 室) 방향을 신경 쓰듯, 그쪽을 힐긋 보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쯤에서 돌을 던져야 할 때 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대마(大馬)는 죽었고.
이미, 계가(計家)를 해 볼 필요도
없을 정도로 형국이 기울었다. 호법일부장의 말처럼.
투료(投7)해야 할 때였다.
“그런가….”
장고(長考)의 끝에, 호법원주가 감았던 눈을 떴다.
“…우아하게 퇴장할 길은?”
그의 물음에.
호법일부장은 시선을 피하며 난 색을 표했고.
감찰부주는 침묵을 지켰다.
“•••있을 리가 없지.”
연씨 혈족이 주도적으로 움직이 긴 했지만.
결국, 호법원주 자신이 벌였던 판이었다.
장본인이 우아하게 퇴장할 수 있 는 방법 따윈 없었다.
“•.•그렇다면.”
호법원주가 결정했다.
“차라리 이 손으로 직접. 이 판 을 엎겠다.”
그의 의도를 이해한 호법일부장
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연씨 혈족과 잡았던 손을 뿌리 치고. 역으로 대공자에게 협조하겠 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아직 스스로를 팔 수 있 을 때, 비싸게 팔아야지.”
호법원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호 법일부장이 우려를 표했다.
“당장에 검가전장과 얽힌 연씨 혈족들은 우리 손으로 어떻게 할 수 있어도-.”
“-나머지 혈족들이 가만히 있진 않겠지. 하지만.”
호법원주는 확고하게 의사를 표
명했다.
“이대로 패자(敗者)들을 껴안고 함께 황하(黃河)에 가라앉을 수는 없잖은가?”
“…그것은 그렇지만.”
호법원주가 이를 드러냈다.
“최선(最善)을 선택할 수 없다면. 더 늦기 전에 차악(次惡)을 선택할 뿐.”
연초를 하나 꺼내, 입에 물고.
잠시 고민하던 호법일부장 또 한.
이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납득 을 표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최 악(最惡)이 될 터이니. 어쩔 수 없 군요.”
호법원주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내실 방향으로 향하며, 나직한 목 소리로 말했다.
“•••다행히. 우리가 부전장장을 데리고 있으니.”
“우리 손으로 저자의 신병을 인 도하며, 대공자와의 대화에 물꼬를 터 보도록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호법일부장의 표정은 마냥 좋지 만은 못했다.
“••자네.”
그런 호법일부장을 보며, 호법원 주가 혀를 찼다.
“아직도 신입 장로 티를 전부 벗 지 못한 것인가? 내, 누누이 말하 지 않았던가. 이 정치판에는-.”
호법일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법원주의 말을 끊었다.
“이 정치판에는 영원한 적도, 영 원한 친구도 없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표정이 좋지
못한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호법원 주가 감찰부주에게 물었다.
“감찰부주께서는? 마음을 정하셨 소이까?”
감찰부주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팔걸이를 두드리다가 입을 열었다.
“•••이미 정했소.”
“좋군.”
계산 빠른 감찰부주의 말에, 호 법원주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중앙감찰각의 인원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대 공자에게-.”
그는 자신의 말을 끝맺음 짓지 못했다.
쾅!
“어느 놈이, 감히…!”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온 상대에게 호법일부장이 고함을 쳤 다.
“여기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니 까.”
백발백안의 귀신을 대동하고 나 타난 상대의 모습에, 호법일부장이 당황하며 문에서 물러났다.
“••대, 대공자님!”
“ 어이쿠.”
대공자 연소현이 휴게실 내를 둘 러보며 그 하얀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이번 일의 주인공들께서 전부 여기 있었군.”
그렇게 갑작스럽게 등장한 대공 자 연소현의 모습에, 호법원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 다.
‘어차피, 내가 찾아갈 예정이었으 니. 잘되었다.’
호법원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에게 양손을 모아 인사를 하려 했 다.
“본가의 대공-.”
하지만.
그보다 빠르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이가 있었다.
“본가의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감찰부주였다.
‘•••이런 일에 먼저 나서는 것을 싫어하는 그 감찰부주가 대공자에 게 먼저 인사를 올린다고?’
순간 떠오른 의문이.
곧 의심이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 지 않았고.
“반갑소, 감찰부주.”
그 의심이 확신에 이르기까지는.
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대 덕분에, 이번 일을 잘 마 무리할 수 있게 되었소이다.”
“...!”
“......!*
호법일부장의 눈이 화등잔만 하 게 커지고, 호법원주는 선 채로 눈 을 질끈 감았다.
“‘중거’에 따로 문제는 없었습니
까?”
감찰부주의 정중한 질문에 대공 자 연소현이 손을 내저었다.
“제공해 준 제보자의 신원이 누 군데 감히 그런 문제가 있겠나?”
“잘됐군요. 좋은 거래였습니다.”
“좋은 거래였네.”
대공자 연소현이 감찰부주를 향 해 고개를 끄덕여 주고, 내실 방향 으로 향했다.
“본 대공자는 저쪽에 볼일이 있 으니....”
걸음을 옮기던 대공자의 시선이
홀긋, 호법원주를 향했다.
붉으락푸르락.
노기(怒氣)를 감추지도 못하고, 온몸을 떠는 호법원주.
“두 사람은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군.”
연소현이 노골적으로 조소를 지 으며 걸음을 옮기자, 중앙감찰각주 독고야연이 그 뒤를 따랐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이마에 혈관
을 곤두세운 호법원주 대신, 호법 일부장이 감찰부주에게 물었다.
“•••감찰부에도 감춰 둔 부전장장 의 비리에 대한 중거가 있었습니 까?”
답변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니었 지만, 뜻밖에도.
“ 있었지.”
감찰부주는 선선히 답해 주었다.
“그러니, 부전장장을 전장장에 올리기로 동의한 것이 아니겠나.”
“•••언제, 대공자에게 증거를 넘 긴 겁니까?”
“틀림없이, 첫 번째 재투표가 선 언된 직후였겠지.”
그 대답은, 호법원주에게서 나왔 다.
“•.•원주께서 어찌 그것을?”
호법원주는 애써 표정을 누그러 뜨리며 답했다.
“나였다면. 그때가 가장 좋은 기 회라고 여겼을 테니까.”
잠시 호법원주의 답변에 말문이 막혔던, 호법일부장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건.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너무 이른 때는 없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채비를 모두 갖춘 감찰부주로부 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인(商人)은 상품이 가장 비싸 게 팔릴 때, 상품을 팔 줄 알아야 하고. 정치인은 자신이 가장 가치 있을 때, 자신을 팔 줄 알아야 하 지.”
그는 나직하게 혀를 찼다.
“…하지만, 이번 거래의 승자는 대공자였어. 나는 손해만을 간신히
면했을 뿐. 아무런 이득도 보질 못 했군.”
그는 눈짓으로 두 사람에게 인사 하고 방을 나섰다.
“이번 기회에 잘 배웠길 바라네, 일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