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317화 (317/350)

제17편 육(7느) 할

낙양검가, 장로원.

대회당.

“차, 찬성 육(7느) 할에, 무효 사 (四) 할…!”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황목 장로 의 목소리가 높이 울려 퍼지고.

“따라서 이번에도 재투표입니 다!”

지난번 투표에서 삼(三) 할이던 결과가 이번엔 사(四) 할이 되었다.

“오히려 늘어났다고?!”

“대체, 어떻게…?!”

장로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고, 장내가 일제히 술렁였다.

그리고 그 술렁임은.

첫 재투표 발표의 충격과는 그 성격이 명백히 달랐다.

“•••결과가 또 달라지다니!”

삼공자 측 장로가 책상을 내리쳤 다.

“대공자 측은 누구도 만나지 않

았다고 하지 않았나?!”

“아무도 만나지 않았소!”

대공자 측의 휴게실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었던 장로가 억울한 표정 으로 소리를 높였다.

“그 휴게실에는 쥐새끼 한 마리 접근하지 않았단 말이오!”

“아니, 그럼 대공자 측에서 유령 이라도 보내서 장로들을 설득했단 말인가?!”

자신들의 휴게실이 아닌.

공개된 대회당 한가운데였음에도 그들은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 리를 높였다.

평소였다면, 그것은 모두의 주목 을 받을 만한 일이었지만.

“분명히, 확답을 제대로 받아 왔 다고 했었지 않소?!”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기까지 했단 말이오!”

“•••협박은 분명 통했을 터인데!”

사방팔방에서, 비슷한 광경이 펼 쳐지고 있었기에.

딱히 주목을 끌지도 못했다.

“대공자가 우리 장로원의 자존심 을, 이렇게 짓밟는단 말인가?!”

하다못해, 답답해진 장로 하나는

자신의 책상에 올라가 가슴을 두드 렸다.

“대낙양검가의 장로들! 장로 동 지들! 이렇게 우리 장로원이 무너 지도록 둘 것인가?!”

한껏 격앙된 말투로 외치고 있지 만.

그 행동의 근본이 비롯되는 감정 이, 바로 위기의식이라는 것을 모 두가 알고 있었다.

“장로 동지들이여! 마음을 고쳐 먹어 주시오! 이렇게 우리 대낙양 검가의 장로원이 무너져서는…!”

모두가 알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다음 결과는.”

모두가, 그 위기의식을.

“대공자….”

대공자에 대한 공포를.

생생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점심시간이 되었지만. 재투표 진행 도중엔 장로원에서 퇴장이 불 가하기 때문에. 준비된 도시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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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목 장로의 공지는 그 소란과 혼란 속에서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

다.

진행자 휴게실.

“흐으으….”

첫 회의 진행에 대공자라는 날벼 락을 맞은 황목 장로가 의자에 퍼 지듯 앉아 있었다.

“고생이 많군.”

장로원주는 그런 황목 장로를 위 로하듯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럼, 나는 내 집무실에서 식사 를 하고 오겠네. 자네도 끼니 거르 지 말고. 챙겨 먹게나.”

“예, 예. 다녀오십시오….”

기진맥진한 대답에 장로원주는 쓴웃음을 짓고, 몸을 돌려 통로로 나섰다.

“것참….”

황목 장로를 위해, 문을 조용히 닫아 준 장로원주가 한숨을 쉬었다.

“점심시간인데, 본인도 조용히 식사 좀 하게 두면 안 되겠소?”

장로원주가 그렇게 말하자, 통로 의 저편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점심시간이기도 하지만, 다음 투표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반 시진이기도 하니.”

높디높은 천장에서 좁은 통로로 낙하하는 햇빛 줄기를 맞으며 모습 을 드러낸 것은.

연씨 혈족의 장로였다.

“그러니, 원주께서 양해를 좀 해 주시오.”

표현은 온화했지만, 그 실핏줄이 불거진 눈알에서 나오는 시선은 그 렇지 못했다.

“•••어째서 날 찾아왔는지, 짐작 은 하오만.”

벼랑 끝에 몰린 자의 모습이 이 러할 진가.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목을 물어 뜯을 듯한 모습의 연씨 혈족 장로 에게, 장로원주가 두 손을 펼쳐 보 였다.

“본인은 이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오. 맹세할 수 있소.”

맹세라는 말에 연씨 혈족 장로가

코웃음을 쳤다.

“평소라면 원주의 맹세이니만큼, 당연히 신용했겠지.”

그가 천천히 장로원주에게 다가 오며 나직한 목소리로 뇌까리듯 말 했다.

“하지만. 원주가 요즘 대공자와 부쩍 친분을 다지고 있다는 정보를. 우리도 요즘 여러 경로로 듣고 있 었다오.”

연씨 혈족 장로는 터벅터벅, 조 여 오듯이 장로원주의 코앞까지 다 가왔다.

“그대가 죄악계곡 사건 이후 돌

아온 대공자를 맞이했던 것부터. 그 이후로도 수차례 비밀리에 만남 을 가졌던 것도 알고 있지.”

하물며, 구석에 몰린 쥐도 고양 이를 물어 버린다고 하는데.

낙양검가의 장로이자, 검가에 지 대한 영향력을 지닌 부패한 연씨 혈족들이 구석에 몰린 상황이었으 니.

“그러니. 우리가 어찌, 원주를 의 심하지 않을 수 있겠소?”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 로 다가오자.

“ 원주.”

장로원주는 그 섬뜩한 살기(殺 氣)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 을느꼈다.

“만약 우리가 죽게 되면.”

가뜩이나 키가 작은 장로원주를 내려다보며 연씨 혈족 장로가 이를 드러냈다.

“우리 연씨 혈족은 파멸시킬 수 있는 모든 적들을 파멸시키고 폭사 (爆死)할 것이오.”

광기(狂氣)마저 느껴지는 협박.

이걸로 만약, 이번 투표에서 승 리를 거둔다고 해도.

연씨 혈족은 이 노골적인 협박으 로 적잖은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투표 결과가 보여 주듯.

이제는 절벽의 끝.

그들에게 더 이상 수가 없었다.

“•••그렇군.”

하지만.

“충분히 본인을 의심할 수 있는 여지가 있겠지.”

장로원주는 작은 거인이라는 이 름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단 한 걸음도 제자리에서 물러나 지 않았고, 심지어는 주름진 얼굴 에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그렇다면, 본인이 이렇게 한다 면 어떻겠소?”

장로원주는 그 시뻴겋게 충혈된 눈알을 직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본인은 다음 투표에서, 실수를 가장하여 본인의 투표지를 공개하 도록 하지.”

“..J”

연씨 혈족 장로의 눈이 커졌다.

“물론.”

장로원주는 또박또박한 말투로 오히려 연씨 혈족 장로를 역으로 압박하듯 말했다.

“본인은 현 전장장에 대한 불신 임에 찬성을 표하겠소.”

“그 정도면 만족하겠지?”

뜻밖의 강수에 잠시 침묵하던 연 씨 혈족 장로가 몸을 돌렸다.

“•••지켜보겠소, 원주.”

이윽고 그가 발걸음 소리와 함 께,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자.

“후우.”

장로원주가 한숨을 돌리자, 뒤의 문이 살짝 열리며 황목 장로가 얼 굴을 내밀었다.

“•••미쳤군요. 생짜 협박이라니. 그것도 원주께.”

장로원주가 대답 없이 그저 어깨 를 으쓱이자, 황목 장로가 슬쩍 입 을 열었다.

“•••그런데, 원주님.”

그는 눈치를 살피며, 소곤거리는 말투로 물었다.

“정말. 대공자께선 원주께 아무 런 말씀도 없으셨습니까?”

장로원주가 그 물음에 쓴웃음을 지었다.

“•••있긴 있었네.”

“역시, 그랬습니까?!”

그러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던 황목 장로의 표정이 불현듯 바뀌었다.

“아니, 그러면. 진작 저에게도 좀 귀띔이라도 해 주셨으면 좋았을 것 이 아닙니까…?!”

“그래 봐야 별 소용 없었을 걸 세.”

“아니. 그래도, 저도 마음의 준비

라도 할 수-.”

“그런 말이 아닐세.”

황목 장로의 말을 끊어 버린 장 로원주가, 입맛을 다시고는 답했다.

“대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장로원 주 내키는 대로 하시오.’라고 하셨 네.”

“•••예‘?”

순간적으로 이해를 하지 못한 황 목 장로의 물음에 장로원주가 쓴웃 음을 지었다.

“본인도 그 말을 들었을 때. 자 네와 똑같은 표정을 지었지.”

“그, 그렇다면….”

장로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방금 그 결정도. 내키는 대로 한 것뿐일세.”

삼공자 측, 휴게실.

“•••연씨 혈족들이 밑도 끝도 없

는 협박을 하고 다닌다더군.”

소식을 가져온 장로의 말에, 다 들 침음을 흘렸다.

“•••드디어 미쳤군.”

“•••효과는 없잖아 있겠지마는.”

장로 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 봐야, 그런 주먹구 구식 방식으로는-.”

“-한계가 분명하오.”

첫 투표가 칠(七) 대 삼(三).

두 번째가 육(A) 대 사(四).

“대공자 측이 어떤 방식으로 이

런 결과를 만들고 있는지는 몰라 도….”

“대세가 저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점은 너무 확실하니….”

“좀 더 확실하고 뾰족한 방법이 필요하오.”

“제길…!”

장로 하나가 머리를 감싸 쥐고는 탄식했다.

“적어도 배반자 놈들이라도 특정 할 수 있었다면…!”

그 말에 다들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가 말한 것처럼, 합의를 어긴 이들을 찾아내서 족치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그게 가능했다면, 우리가 여 기서 이러고 있겠소?”

그들의 뒤에서는 도시락들이 덩 그러니 쌓인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누구도 손을 댈 생각도 하지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파와 파벌이 너무 많으니….”

“합계가 삼십삼(三十三)이 되는 경우가 너무 많았헜지.”

한숨 소리가 더해졌다.

“거기다가, 이제는 삼십삼이 아 니라 사십사(四十四)요.”

그랬다.

합계가 삼십삼이 되는 조합을 찾 아내는 것도 어려웠는데.

이제는 사십사라니.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짙은 패색(敗色)이 그들에게 드 리우고 있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 지 못했다.

그때.

“…었소.”

구석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나 마 가까이 있던 장로들이 반웅했다.

“구(般) 장로? 방금 뭐라고 하셨 소?”

아까부터 구석에 앉아.

주판을 잡고 한참을 끙끙거리던 구 장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건 애초에, 합계가 사십사가 되는 조합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 니었소!”

구 장로는 들고 있던 주판을 내

팽개치고 외쳤다.

“우리는 잘못된 방향을 보고 있 었단 말이오!”

장로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제 가슴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삼십삼! 두 번째는 사 십사!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바 로 그 열한(十一) 명이오!”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합계가 열하나인 조합만 찾으면 된다고!”

그 외침에 장로 하나가 팔짱을 끼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구 장로. 당연히 합계가 삼십삼이나 사십사가 되는 조합보 다야, 합계가 열하나가 되는 조합 이 찾기 쉽겠지만….”

다른 장로도 거들었다.

“그걸 찾는다고 상황이 역전되지 는—.”

“이 사람들, 정말 시야가 좁아졌 군! 좁아졌어! 그게 아니란 말이 오!”

구 장로가 다시 한번 외쳤다.

“대공자 놈만이 재투표를 무기로 사용하게 둘 이유가 무엇이 있소 ?!”

.....

.....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낙양검가 의 장로들.

거기까지만 듣고도, 그의 전략을 이해했다.

“•••그렇군.”

“우리는 먼저, 남은 시간을 활용 해. 그 열한 명을 찾아, 무너져 가 던 투표의 균형을 되돌리고-.”

“-다시 이번엔 우리가 재투표를 유도한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쉽지.”

“이번에 대공자 측이 어떤 방식 으로 투표를 하든.”

“지난 투표에서 육 할을 차지했 던, 우리 중 반만 무효를 던지면-.”

“확정적으로 재투표가 선언되어,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소!”

구 장로가 손뼉을 크게 쳤다.

“그렇소! 바로 그거요!”

대공자만이 재투표를 이용하게 둘 필요가 없다.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시간을 활

용해서-.”

“-찾아낸 열한 명을 쥐어짜서, 나머지 서른세 명을 찾을 단서를 구하면 되는 것이지…!”

역전(逆轉)의 활로가 보였다.

삼공자 측의 휴게실에 활기가 돌 았다.

“좋아, 그러면 당장 그 합계 열 하나의 조합부터 찾으면-.”

“그럴 필요 없소!”

구 장로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이미 그 조합들을 몇 가지 로 추려 놓았으니. 여러분께선 그

자들을 찾아가기만 하면 될 것이 오!”

“구 장로!”

“훌륭하오!”

그때, 다른 장로 하나가 문득 생 각난 발상을 입에 올렸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직접 나서 는 것보다 더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는 이들이 있지 않소?”

“그렇군…!”

그 의도를 눈치챈 장로가 웃음을 터트렸다.

“연씨 혈족의 장로들!”

“지금 그자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협박을 하는 중이니.”

“우리가 이 정보를 넘겨주면, 틀 림없이 연씨 혈족의 장로들이 미친 개처럼 그자들에게 달려들 것이 오…!”

삼공자 측 장로들의 얼굴에 너 나 할 것 없이 음흉한 미소가 걸렸 다.

꽉 막혀 있던 활로가 한번 뚫리 자, 운이 트였는지.

일이 술술 풀려 나가기 시작했 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나도 같이 가겠소…!”

장로들이 누구랄 것 없이 자리에 서 벌떡 일어났던 그때.

“크, 큰일이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밖에 있던 장로가 휴게실로 뛰어 들어왔다.

“지, 지금 장로원에, 중앙감찰각 (中夫監察閣)이…!”

중앙감찰각.

유일하게 장로 회의까지도 감찰 할 수 있는 낙양검가의 조직.

그들이 장로원에 들이닥쳤다.

당연하게도.

그들의 가장 앞에 선 것은 백발 백안(白髮白眼)의 귀신, 중앙감찰각 주 독고야연이었다.

“주, 중앙감찰각이 갑자기 무슨 일인가?!”

그녀는 자신을 가로막듯이 선 장 로를 훤칠한 신장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곳에, 검가전장의 부전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사실이네만.”

장로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순 순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는 많은 혐의를 받긴 했지만. 아무런 중거가 없다고 들었네.”

그러자 다른 장로 하나가, 슬쩍 나섰다.

“혹여나, 증거를 조작할 생각이 라면 접어 두는 것이 좋을 걸세.”

입구 근처에 있던 다른 장로들도

한마디씩 보탰다.

“이곳은 낙양검가의 장로원.”

“되지도 않는 허튼수작 정도는 금방 밝혀질 걸세.”

하지만.

중앙감찰각주 독고야연은 특유의 무표정함 그대로 답했다.

“조금 전. 새로운 중거가 제보로 들어왔습니다.”

“새로운 중거…?”

“제보…?”

그녀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 내 들었다.

“이것은 중앙감찰각의 자체적인 판단이 아닙니다.”

“그, 그건…?!”

그 종이에 찍힌 선명한 인장을 확인한 장로들이 화들짝 놀랐다.

“이건 본가의 최고운영회의에서 내려온 구금(拘禁) 명령서입니다.”

그것은.

판의 밖에서 날아온 거대한 바위 가, 판을 송두리째 박살 내는 순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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