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315화 (315/350)

제15편 늪

조금 전만 해도.

그 팽팽한 긴장감과 조용한 전의 로 끓어오르던 장로원 대회당이었 다.

“아니, 대체?! 찬성 칠(七) 할, 무효 삼(三) 할이라니?!”

“그렇게 거짓말처럼 딱 떨어지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지만.

그 장로원의 대회당은 지금, 낙

양의 저잣거리도 울고 갈 정도로 소란스러운 상태였다.

“아, 아니. 본인은 그저 투표 결 과를 발표한 것뿐이라오.”

앞으로 치고 나온 장로들의 거센 항의가 쏟아지자, 회의를 진행하던 황목 장로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러니, 진정들 좀…!”

“진정은 무슨, 진정이오?!”

분기탱천해서 나온 단상 바로 아 래까지 밀고 들어온 삼공자 측 장 로들이 쏘아붙였다.

“재투표에 필요한 득표가 삼(三)

할인데, 지금 거짓말처럼 딱 삼 할 이 나왔지 않소?!”

대공자가 여기서 득세하면 큰 손 해를 볼 수밖에 없는 삼공자 측의 분노가 큰 것은 당연했다.

“그걸 우리더러 믿으라고?!”

총, 백십(百十) 표 중 삼십삼(三 十三) 표가 무효로 나왔다.

절묘할, 아니.

기이할 정도로 딱 맞아떨어지는 숫자.

이 상황에 당혹스러운 것은 황목 장로 또한 마찬가지였다.

“본인에게 이러지 말고, 개표인 과 참관인들에게 확인해 보면 될 것 아니오?!”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각 파벌이나 계파에서 무작위로 뽑힌 이들이니, 투표 절차에 부정 이 없었음을 그들이 증명할 것이 오!”

그 말에 장로들이 우르르, 개표 인과 참관인의 역할을 맡았던 장로 들에게로 흩어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이상 이 없었다오.”

“우리가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

소.”

각 파벌이나 계파에서 당일에 무 작위로 뽑힌 이들이니.

그들이 수작을 부릴 가능성은 거 의 없다시피 했다.

“•••그럼,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 가…?”

망연자실한 장로들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지만, 답을 할 수 있 는 이는 없었다.

“혼란스러운 것은 이해하겠지만. 다들, 더는 시간 낭비하지 말고 각 자 계파나 파벌로 돌아가게.”

그렇게 입을 열며 앞으로 나선 이는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장로 원주였다.

“재투표까지 남은 시간은, 반(半) 시진이니. 다들, 그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어떻겠나?”

대혼란에 빠져든 대회당의 풍경 을 보며 신입 장로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재투표라니.”

심지어, 몇몇 장로가 투표함까지 엎어 다시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 다.

“이런 제도가 있다는 것은 들었 지만, 실제로는 드문 일이라고 알 고 있었는데….”

“나 또한 별로 본 적이 없네.”

나이 지긋한 장로가 눈살을 찌푸 리며 답하자, 좌측에 앉아 있었던 장로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대체 재투표 제도는 왜 있는 겁니까?”

그 말에 나이 지긋한 장로가 한 숨을 쉬며 답해 주었다.

“애초부터, 장로원의 취지는. 세 력끼리 힘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입장의 이들이 의견을 주고받아, 더 나은 결론으로 합의 하게 하기 위함일세.”

질문을 던졌던 장로가 그 대답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다고 이해관계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짓을….”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제도이

니까.”

나이 지긋한 장로가 쓴웃음을 지 었다.

“장로원이 완전히 정치판이 되어 버린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의도 는 유명무실한 것과 마찬가지이긴 하지.”

거기까지 이야기하던 나이 지긋 한 장로가 분위기를 환기했다.

“하지만, 지금 초점을 두어야 하 는 쪽은 그 취지 따위가 아니라, 무효표 쪽이네.”

그 말에 다른 장로가 고개를 끄 덕이며 입을 열었다.

“장로원에서는 투표로 결과가 결 정되지만, 그 결과는 투표 전에 결 정된다.”

장로원의 오랜 금언을 다시 입 밖으로 꺼낸 그가 말했다.

“그럼에도, 모든 계파가 예측했 던 결과와 투표 결과가 상이하게 나왔다는 것은….”

나이 든 장로가 눈매를 좁혀 날 카로운 눈초리로 좌중을 바라보았 다.

“거짓말을 하는 계파나 파벌이 있다는 것이지.”

“이 거짓말쟁이 놈들…!”

와장창.

연씨 혈족 장로 중 하나가 휴게 실의 탁자를 엎었다.

“내 반드시 찾아서 잡아다가 껍 질을 벗겨 버릴 것이야!”

하지만 누가 말리는 이 하나 없 을 정도로, 그 휴게실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오.”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슬쩍 연 씨 혈족 장로들의 휴게실을 방문한 호법원주가 말했다.

“여기서 지금, 더 큰 문제가 있 다고 하는 거요?!”

“대체 그게 뭐요?!”

다그치듯 물어 오는 연씨 혈족 장로의 말에, 호법원주가 대답 대 신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 모습에 홍분해 달려들던 연씨 혈족의 장로들의 머리가 단숨에 식

었다.

애초에 그들은 일시적 동맹.

거기다가, 이번 일이 틀어지면.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이 호법원주가 바로, 그들을 뇌옥에 잡아 처넣을 인물이었다.

“•••다들 모르겠나?”

앉아서 깊이 생각에 잠겨 있던 연씨 혈족 장로가, 그 분위기를 끊 으며 말했다.

“방금 결과에, 반대표가 한 표도 없지 않은가.”

합의와 다른 결과에 흥분했던 이 들의 얼굴에 짙은 당혹감이 서렸다.

“대공자 측 장로들 중 누구 하 나, 반대표를 던진 이가 없다는 것.”

그들이 상황을 깨닫자, 호법원주 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딱 떨어지듯 나왔던 무효 표 삼(三) 할은, 대공자 측 장로들 의 투표까지 합쳐진 결과요.”

“그 말은…!”

호법원주가 말했던, 더 큰 문제

를 깨달은 연씨 혈족 장로의 목소 리가 떨려 왔다.

“…이 결과가, 전적으로 대공자 의 작품이라는 것이오?”

또 다른 파벌의 휴게실.

“웃고 있었다고 하셨소…?”

“그렇소.”

장로의 물음에, 그들 파벌의 우 두머리인 팽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 다.

“분명. 찬성이 칠(七) 할이라고 발표되었던 그때.”

의자 깊숙이 몸을 묻으며, 팽 장 로의 눈이 한충 더 깊어졌다.

“대공자는 분명, 웃고 있었소.”

“•••저도 본 것 같습니다.”

젊은 장로 하나가 조심스러운 태 도로 입을 열었다.

“그 이후에, 재투표 이야기가 나

오면서 장내가 혼란해져.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러면,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수염이 긴 장로가 자신의 긴 수 염을 쓰다듬으며 혀를 찼다.

“대낙양검가의 장로원이, 지금. 대공자의 손 위에서 놀아나고 있다 는 말인가?”

그의 인상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것도, 장로원이 정면으로 도 발을 당한 상태에서?”

말을 이어 갈수록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까지 해 가며 대공자가 장로원을 마음대로 농락하도록 협력하는 이가 있다 고?!”

분위기가 한충 무거워졌다.

모두가 입을 닫자.

구석에서 연초를 태우던 날카로 운 인상의 장로 하나가 입을 열었 다.

“…합의를 깨고, 투표 결과를 바 꾸는 이들은. 항상 파벌과 계파를

초월해, 치러야 할 대가를 치르게 되어 왔소.”

자신에게 시선이 한둘씩 모여들 자, 그가 말을 이었다.

“만약, 지금까지 나온 우리 추리 가 사실이라면-.”

“그 장로들은 그 위험을 감수하 고도 남을 만큼의 이득을.”

그의 말을 이어받은 것은 그들 파벌의 우두머리인 팽 장로였다.

“대공자에게 약속받았단 말이겠 지.”

여기저기서 침음이 튀어나왔다.

“…그런”

“허허.”

장로 중 하나가 믿어지지 않는다 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 대공자가. 장로들에게 장 로원과 척을 지게 할 정도의 이득 을 챙겨 줄 정도로 힘이 생겼단 말 인가.”

“대공자가 칩거를 끝낸 지 일 년 도 지나지 않았소. 그런데 벌써 그 런 영향력을 확보했단 말이오?”

“믿을 수 없는 일이오. 믿을 수 없는 일이야.”

이공자를 한번 꺾은 이후.

대공자의 위세가 날이 갈수록 커 지고 있다는 것은, 그들 모두가 잘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자신들의 본진에서.

뼛속까지 저리게 그 사실을 느끼 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던 그 들이었다.

“직접 겪고 확인한 것이니. 현실 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겠 지. 그러니….”

생각의 정리를 마친 팽 장로가 말을 하던, 그때.

“말씀 중, 실례하오.”

그들의 휴게실에 방문객이 있었 다.

방문객의 얼굴을 확인한 장로 하 나가 그에게 물었다.

“•••연씨 혈족의 장로께서, 이곳 까지 어인 일이시오?”

“돌려 말하진 않겠소.”

그 말에 연씨 혈족의 장로가 이 를 드러내며 물었다.

“그대들의 파벌과 우리가 했던

합의는 여전하오?”

그 말에, 수염이 긴 장로가 눈을 희 번덕 였다.

“•••지금. 우리 파벌을 의심하는 것이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오.”

연씨 혈족의 장로가 슬쩍 손을 내저어 부정하면서도, 눈을 가늘게 뜨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저, 현 전장장을 축출하기로 했던 우리의 합의가 깨졌을 때.”

얼굴에는 미소가 걸렸지만,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대들의 파벌에 어떤 악영향이 있을지. 걱정이 돼서 한 말이라오.”

실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협박이오?”

연씨 혈족 장로가 고개를 저었 다.

“아니. 다시금 친절히 사실을 주 지시켜 주는 것이오.”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 중, 검가전장과 엮여 있는 이가 다수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 오. 그리고-.”

그때까지 듣고만 있던 팽 장로가

그 말을 끊었다.

“-그리고 이 검가에서 연씨 혈족 의 힘은 말할 것도 없지.”

팽 장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 나며 말했다.

“나의 출신인 하북팽가(河北彭 家)와 우리 하북(河北) 파벌은. 연 씨 혈족과 어떤 원한도 가지고 있 지 않소.”

팽 장로는 한 파벌의 우두머리답 게.

“그리고, 앞으로도 연씨 혈족과 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소.”

연씨 혈족의 분노를 부드럽게 받 아 주면서도, 명확하게 파벌의 의 사를 표명했다.

연씨 혈족의 눈이 가늘어졌다.

낙양검가가 위치한 낙양과 이들 하북 파벌의 뿌리가 있는 하북성 (河北省)은 지리적으로 지나치게 가까웠다.

‘…이들이 우리 연씨 혈족과 척 을 지기에는, 위험 요소가 너무 많 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연씨 혈 족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좋소.”

더 이상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 것일까.

연씨 혈족 장로는 그 말만 남기 고, 쌩하고 나가 버렸다.

“•••살벌하군요.”

젊은 장로가 이마에 흐른 식은땀 을 닦으며 말하자, 긴 수염의 장로 가 입맛을 다셨다.

“우리에게는 자존심 문제지만. 저들은 생존이 걸린 문제니까.”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휴

게실의 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었다.

“실례하오. 삼공자 측 계파에서 왔소이다.”

이번엔 삼공자 측이다.

그 말을 들은 긴 수염의 장로가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알아서 이리도 열심히 뛰 어 주니, 우리가 할 일이 없을 지 경이로군.”

대략 반 시진 뒤.

“다음 분.”

마지막으로 호명된 장로가 대기 하고 있다가, 투표함에 다가가 자 신의 표를 넣었다.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아예, 딴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모두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투표 함을 열어 개표를 할 예정이었다.

“하북 파벌은? 누가 확인했소?”

“내가 확인했으니, 걱정하지 마 시오.”

“대공자 측의 감시는?”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소. 그들 의 휴게실을 찾는 이도 없었고.”

그 광경을 지켜보며, 각 파벌과 계파의 장로들이 마지막 확인 작업 을 하고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개표를 시작하 겠습니다.”

개표가 시작되자, 장로들의 눈빛 에 노골적인 초조함이 어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소.”

삼공자 측이든, 연씨 혈족 측이 든.

대공자와 적대적인 장로들은 누 구랄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시퍼런 눈초리로 그 과정을 주시하 고 있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며, 제대로 단 속하고 왔으니.”

“아까와는 결과가 다를 것이오.”

그런 목소리들 사이에서.

팔짱을 끼고 앉아 있던 감찰부주 가 옆 좌석의 호법원주에게 물었다.

“이번엔 결과가 어떻게 될 것으 로 예상하시오?”

“결국, 합의를 어기고 무효로 투 표한 이들은 찾지 못했소. 하지만, 다들 그 난리를 쳤으니.”

호법원주는 깍지를 낀 손을 턱에 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최악의 경우라 해 봤자. 찬성 칠(七)에 무효 삼(三). 이전과 같은 결과일 것이오.”

그 대답에 감찰부주가 혀를 찼 다.

“그러, 최악의 경우는 또 재투표 이겠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투표 결 과를 발표하는 황목 장로의 목소리 가 울려 퍼졌다.

“차, 찬성 육(大) 할에, 무효 사 (四) 할...I”

장로들이 누구랄 것 없이 자리에 서 벌떡 일어났다.

“뭐, 뭐라고?!”

“무효가 더 늘어났단 말인가?!”

“어떻게?!”

황목 장로는 그 아우성들 속에 서, 황망한 얼굴로 좌중을 향해 목 소리를 높였다.

“따라서 이번에도 재투표입니

다!”

오히려 무효가 더 늘어나 버린 상황.

그 결과가 발표되자마자, 호법원 주는 벌떡 일어나 맞은편에서 대공 자 연소현의 모습을 찾았다.

“•♦•대공자!”

하지만.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이미 비어 있는 대공자의 귀빈석과.

대공자의 뒤를 따라 퇴장하고 있 는 대공자 측 장로의 뒷모습뿐이었

다.

어째서인지.

자신의 귓가에 대공자의 웃음소 리가 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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