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편 눈뜬장님
장로원 대회당.
장로라는 신분 특징상, 항상 많 은 수가 외부에 출장 중임에도 불 구하고.
게다가 겨우.
단 하나의 안건을 처리하기 위 한, 임시 장로 회의임에도 불구하 고.
오히려 평소보다 많은 인원들이
대회의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 다.
“많이도 왔군.”
나이 지긋한 장로가 그렇게 감상 을 표하자.
“•••그래 봐야, 절반이 조금 넘는 수입니다만.”
근래에 새로 임명된 장로 하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이 정도가 많은 겁니까?”
임명 후 첫 장로원 출석인 신입 장로에게 나이 지긋한 장로가 미소 지어 보였다.
“평소엔 절반만 제대로 참석해도 만석(滿席)이라 표현하며, 웃으며 떠들었다네.”
우측 좌석에 있던 동료 장로가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그들의 대화 에 끼어들었다.
“근래 들어, 이렇게 많이들 참석 한 광경은 처음 보는구려.”
그들이 같은 파벌이기 때문에 가 능한 일이었다.
“그러게 말일세.”
나이 지긋한 장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좌중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투표권의 행사를 동 료에게 맡기고는, 얼굴조차 보이지 않던 이들도 다들 참석했어.”
그 말에 우측 좌석의 장로가 어 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본인부터가, 오랜만의 참석이 아니오?”
그 말에, 나이 지긋한 장로가 쓴 웃음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 다른 일이 손에나 잡힐 리가 없지.”
대공자에 대한 소식올 듣자마자, 부리나케 장로원으로 뛰어온 그였 다.
“그렇긴 하오.”
마찬가지로 평소엔 업무로 인해 불참이 잦았던 좌측 좌석의 장로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현 전장장에 대한 불신임 건과 새 전장장 후보에 대한 의결은, 미 리 물밑에서 합의들이 전부 끝난 문제였으니 말이오.”
“그렇지.”
나이 많은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 다.
“원래라면, 오늘 형식적으로 투 표만 하면 끝날 일이었지.”
“원래라면, 말이오.”
잠시.
묵직한 침묵이 감돌았다.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진 않았지 만.
모두가 이 일이 꼬이게 된 근원.
대공자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음 은 틀림없었다.
‘…대체. 대공자는.’
‘•••무슨 자신감으로 장로원 전체
에 시비를 건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의견을 교환해 도 풀리지 않는 근본적인 의문.
그 의문이 이 자리에 감도는 침 묵처럼 묵직하게, 그들의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런데, 자네.”
그 침묵이 불편했던 동료 장로 하나가 슬쩍 신입 장로에게 말을 걸었다.
“ 예?”
“이런 말을 알고 있나?”
“무슨...‘?”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말했 다.
“장로원에서는 투표로 결과가 결 정되지만-.”
그렇게 그가 미소를 지으며 대신 운을 떼자.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을 잡은 우측 장로가 말을 받으려 했다.
“그 결과는-.”
그때.
“-그 결과는 투표 전에 결정된 다.”
“..!”
그 목소리는.
그들 파벌 내에서 들려온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심지어, 주변의 좌석에서 들려온 말도 아니었다.
“그 모순적인 말은, 낙양검가 최 상위 정치판에서 매우 오래된 금언 (金言) 이지.”
반사적으로 다들 뒤편으로 고개 를 돌리자.
그곳에는 검은 흑잠사 외투를 휘 날리는 인물.
“대공자…!”
대공자 연소현이 있었다.
다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와 중에.
“자네, 첫 참석인가?”
휘적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온 연 소현이 신입 장로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 예. 그렇습니다만….”
“잘 기억해 두게.”
어깨를 두드리다니, 마치 하급자 를 대하는 둣한 행동이었다.
“이 바닥에서 사전 합의가 얼마 나 크고 중요한지 알려 주는 말이
라네.”
하지만 그 태도가 너무나 자연스 러웠기에, 신입 장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얼떨결에 납득했 다.
“그, 그렇군요.”
“앞으로 본가의 장로로서. 좋은 활동 보여 주기를 기대하고 있겠 네.”
연소현이 급히 일어서느라 삐뚤 어진 그의 옷깃을 슬쩍 고쳐 주며 그렇게 말하자.
“가, 감사합니다…!”
신입 장로는 반사적으로 감사를
표했다.
대공자의 가르침에 대한 감사인 가.
기대하겠다는 말에 대한 감사인 가.
아니면, 손수 흐트러진 자신의 옷매무새를 고쳐 준 일에 대한 감 사인가.
“뭘, 감사하기까지.”
그렇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대공자 연소현은 감사 인사까지 받아 냈다.
아무리 장로원에선 신입이라지
만.
상대는 오십 대에, 심지어 산전 수전을 다 겪고 이 자리까지 올라 온 인물이었다.
대공자 연소현은 그런 인물을 기 습적이라지만 아이 다루듯 다루어 낸 것이다.
“대공자…!”
하지만 그 신입 장로와는 달리.
주변의 다른 동료 장로들은, 연 소현의 행동에 얼굴을 붉혔다.
“대체, 지금 무슨-!”
대공자는 말을 끊으며 피식 웃었 다.
“이 유서 깊은 낙양검가의 장로 원에 처음으로 출입한다는. 그런 개인적으로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 한 신입 장로에게, 본 대공자가 그 저 작은 조언과 격려를 건넨 것뿐 인데 말이야.”
그러더니 그가 억울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너무 과민들 한 것 아닌가.”
뻔뻔하기가 이를 데 없는 말.
그렇게 말하는 대공자 자신이야 말로, 장로원에 첫 출입이지 않던
가.
....
순간적으로 잠시 말문이 막힌 장 로들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 전에.
“그럼, 다들 수고하게.”
대공자는 그들에겐 관심 없다는 듯이, 굳이 더 상대하지도 않고 걸 음을 옮겼다.
뭔가 말을 꺼내려던 장로들은 입 을 다물었다.
대공자의 존재를 깨달은, 장로원 의 대회당 전체가.
장로들 전체가.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대공자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금까지 그렇게 소란스러웠던 대회당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 도로 부자연스러운 고요함 속에서.
저벅, 저벅.
대공자 연소현과 그를 따르는 장 로들의 발걸음 소리만이.
저벅, 저벅.
넓은 대회당 공간에 반사되며 울 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발소리들만이 존재하 는 긴장감 속에서.
백여 쌍의 번뜩이는 눈알이 자아 낸 시선.
그 시선들이 시퍼렇게 벼린 칼날 처럼 연소현을 주시하고 있었다.
대공자 연소현의 알 수 없는 속
을 내장째로 파헤치려는 듯이 날카 로운 눈초리들.
분노에 가득 차 연소현을 산 채 로 태울 듯 이글거리는 눈빛들.
대회당에 결집한 백여 명에 이르 는 대낙양검가의 장로들이 자아내 는 위압감.
그 한마디, 말도 없는 공간에서.
그 압박감에는 대공자의 바로 앞 에서 안내를 자청하던 부원주조차, 마른침을 삼킬 정도였으니.
꿀꺽.
하지만.
“부원주.”
아무렇지도 않게, 불쑥.
그 모든 긴장을 무시하듯이 연소 현이 입을 열었다.
“귀빈석이 저쪽이오?”
대공자의 심장은 무엇으로 만들 어졌는가?
그 태연한 태도에 잠시 아연하게 대공자를 바라보던 부원주가 급히 대답했다.
“아, 예…! 그렇습니다, 대공자
님!”
정신을 차린 부원주가 자신의 금 니까지 드러내며, 더욱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고...! 이런. 제가 제대로 안 내를 해 드려야 했는데. 죄송합니 다, 대공자님…!”
그렇게 안내를 받아 다시 발걸음 을 옮기는 연소현의 시선이 문득 반대편을 향했다.
‘•••호법원주와 감찰부주.’
그 두 실력자와 한동안 시선을 교환하던 연소현의 시선이 그들의
뒤로 향했다.
그곳에는 처음부터 연소현에게 가장 진득한 눈빛을 보내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살기라 해도 부족함이 없 는 시선을, 조금의 가감 없이 던지 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목 졸라 죽 일 듯, 대공자 연소현이라는 존재 자체를 중오하는 눈빛들.
‘•••이 가문을 좀먹는 늙은이들.’
그들 전부는 아니었지만.
대부분이 검가전장 사건의 주범 들인 그들은.
연씨 혈족의 장로들이었다.
‘대공자 놈!’
‘대체 우리와 무슨 원수를 졌다 고?!’
‘우리가 죽기 전에, 우리가 네놈 을 먼저 죽여 주겠다!’
당장이라도, 저 태연한 얼굴을 도끼로 찍어 버리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보이 는 몸통을 톱으로 썰어 버리고 싶
었다.
“홈홈.”
그때, 헛기침 소리와 함께.
“저는 오늘의 임시 장로 회의 진 행을 맡은 장로, 황목(荒木)입니 다.”
장로 한 명이 중앙으로 나와 좌 중을 향해 발언을 시작하자.
장로들의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곧, 임시 장로 회의가 시작될 예정이니. 모두 자리에 착석해 주 시기 바랍니-.”
“곧이 아니라, 지금 당장 시작할 것이니. 당장 다들 자리에 앉으시 오.”
그의 뒤를 따라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장로원주였다.
그는 회의 진행을 맡은 황목 장 로의 옆에 서서, 뒷짐을 진 채로 말을 이었다.
“오늘은 이 원주에게 주어진 권 한으로, 잡다한 절차는 전부 생략 하도록 할 것이오.”
평소에는 장난도 치고.
꾸벅꾸벅 조는 모습도 보여 주는 장로원주였지만.
지금 그의 강철처럼 굳은 낯빛에 는, 그런 모습을 조금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원주. 그 말은 지금 바로 불신 임안에 대한 표결로 들어가겠다는 말이오?”
“그렇소.”
잠시, 좌중이 웅성거렸다.
각 계파, 파벌마다 의견을 주고 받느라 대회당이 시끄러워졌다.
“진행에 불만이 있는 이가 있다 면, 지금 당장 건의하시오.”
평소라면, 장로원 고유의 분위기 상.
누구 하나 불평불만이라도 던졌 겠건만.
지금은 그 누구도 불만을 표하는 이는 없었다.
모두가 각기 다른 표정이었지만.
빠르게 결말을 내고 싶은 것은 모두가 한마음이었으니.
“•••그럼, 불만 없는 것으로 알고. 즉시 개회(開會)를 선언하겠소.”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긴장감 이 고조되는 와중에도.
“불신임 표결은 검가법전에서 정 한 대로. 무기명(無記名) 투표로 진 행될 것이오.”
‘작은 거인’이라는 별호에 어울리 게, 그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한 치의 혼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회의 진행을 맡은 황목 장로가 부가적인 설명올 고지했다.
“그리고, 해당 표결은. 전체에서 과반수가 찬성해야 불신임이 가결 되며….”
하지만, 거침없는 회의 진행에
시선을 빼앗긴 탓일까.
“하지만 만약. 무효표가 전체의 삼(三) 할 이상 되면. 잠시 휴정 이 후에 재투표를 진행하게 되는….”
그들 중 누구도.
연씨 혈족 장로들을 바라보는 연 소현의 눈 깊은 곳에서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푸른 귀화를 보지 못 했다.
투표가 끝나고.
개표(開票)가 한창 진행 중이었 다.
“표 확보는…?”
연씨 혈족의 장로들 사이에서 대 화가 오고 가고 있었다.
“이미, 끝났소.”
책상에는 모든 장로들의 이름이 표기된 큰 종이가 있었는데.
그의 말처럼, 대부분의 이름에 붉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대공자 놈이 갑자기 끼어들어
서, 오전부터 새로 접촉을 하고 협 상을 하긴 해야 했지만.”
원래였다면, 항상 법칙처럼.
마지막 순간에 거래 조건을 조정 하려는 이들이 있었지만.
오늘은 그런 이조차도 없었다.
“오늘은 그 대공자 놈이 장로들 의 자존심을 단단히 건드린 탓에, 오히려 평소보다 쉽게 끝났소.”
장로원에서는 투표로 결과가 결 정되지만, 그 결과는 투표 전에 결 정된다.
그 말처럼.
그들은 이미 사전에 충분한 표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럼 개표 결과를 발표하겠습니 다.”
이미, 결론은 났다.
호기심을 드러내는 신입 장로들 과는 달리, 중견 장로들은 심드렁 한 표정이었다.
“찬성이 칠(七) 할은 넘을 것이 오. 끝났다고 봐야지.”
“반대라 해 봐야, 대공자를 따르 는 몇 표뿐일 것이고.”
“이제, 새 전장장 후보를 만날
시간이군.”
투표 결과는 오차 범위 내에서 발표되리라.
“•••그런데.”
좌중의 장로 중의 하나가 중얼거 렸다.
“결국, 그렇다면. 대공자의 노림 수는 뭐였던 것이지?”
그때.
결과가 적힌 쪽지를 펼친 황목 장로가 그것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투표 결과. 찬성 칠 할.”
장로들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걸
렸다.
“칠 할에 딱 걸쳤군. 끝났어.”
“꼴좋다, 대공자.”
지금, 연소현의 표정은 어떨까.
장로들의 시선이 누구랄 것 없이 연소현에게 모였다.
“•••웃어?”
멀리서도, 그 미소가 너무나 선 명했던 탓에.
그들은 연소현의 얼굴에 걸린 의 미심장한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발표를 이어 가던 황목 장로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합계 결과, 무효표가 전체의 삼
(三) 할입니다.”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 려왔다.
“•••뭐라고?”
“무효표가 전체의 삼 할이라고?”
황목 장로 또한 그들만큼이나 당 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효표가 전체의 삼 할에 해당 함으로. 가법에 따라, 잠시 휴정 이 후에 재투표를 진행하도록 하겠습
니다.”
“아니, 이게 뭔 소리야?!”
“어떻게 하면, 무효가 삼 할이나 나올 수가 있는 것인가?!”
점차 커지는 웅성거림을 이겨 내 려는 듯이, 황목 장로가 거의 소리 를 쳤다.
“전 장로께서는 휴정 시간을 적 극적으로 이용해, 재투표에서는 의 사 결정을 확실히 하실 수 있도록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황목 장로의 말에 신경을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재투표라고?!”
“말도 안 되는…?!”
혼란에 찬 웅성거리는 소리가 좌 중을 뒤흔드는 속에서.
“장로원에서는 투표로 결과가 결 정되지만, 그 결과는 투표 전에 결 정된다.”
연소현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오 가는 고성 속에 섞여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