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편 존재감(存在感)
장로원주 집무실.
묵묵히 앉아 생각에 잠긴 장로원 주의 귓가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를 따르는 장로 중 하나였다.
“•••대공자님의 행렬에, 부원주가 함께하고 있더구려.”
장로원주가 짧게 침음을 삼켰다.
‘결국, 그렇게 되었나.’
마지막으로, 부원주와 독대했던 그날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네는 방금 그 정신 나간 노괴 물을 적으로 만들었어!”
노성(怒聲)을 질렀던 장로원주 자신의 목소리.
“그것도 그자가 가장 싫어하는 대공자의 손을 잡고서!”
내원의 ‘책값 사건’ 이후.
부원주는 그 내원총관으로 하여 금, 대공자에게.
막대한 액수의 징벌적 배상금을 지급하게끔 만들었었다.
“•••이젠 나 또한 짊어지고 있는 소중한 것들이 너무 많아졌어. ”
그 결과로 천하의 내원총관을 적 으로 돌렸던, 부원주였다.
‘•••그리고 이후. 이공자와의 힘겨 루기에서 대공자님이 숭리를 거두 셨지.’
그랬기에, 부원주에겐 선택지가 없었으리라.
지금까지 정치력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과시하던 내원총관에게서, 연전연승을 따내고 있던 것은.
대공자 연소현이 유일했으니까.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겠지.’
장로원주는 얼마 전.
대공자와 자신이 비밀리에 나누 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
그 시각, 장로원 정문 앞.
“•••그렇게 장로원의 체면을 신경
써 주시기 전에. 앞으로 망가질 본 인의 체면부터 신경 쓰시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중진 장로의 시퍼렇게 날이 선 말.
대공자 연소현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을 뿐.
딱히 자신이 그 말에 대꾸를 하 지도 않았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연소현은 더 이상 혼자 자신을 대변하고, 혼자 자신을 방 어할 필요가 없었으니.
“그렇게 체면을 신경 쓰는 분이,
본가의 대공자님께서 우리 장로원 을 방문하셨는데, 멀뚱하게 입구에 세워 두고 계셨소?”
어느새 그의 뒤에 장막처럼 선, 대공자 측 장로들이 한마디씩 던졌 다.
“쯧쯧. 같은 장로로서 부끄럽구 려.”
“이 많은 군중을 앞에 두고. 우 리 장로원의 예를 만방(M方)에 널 리 알리기는커녕, 망신만 시키는구 나.”
“누가 보면, 대낙양검가의 장로 원이 아니라. 낙양의 저잣거리인
줄 알겠소."
꼬투리를 하나 잡자, 사정없이 퍼붓는 대공자 측 장로들의 언사.
“크흠….”
대번에 중진 장로의 얼굴이 속으 로 일그•러졌지만, 그들의 말처럼.
싫으나 좋으나, 대공자를 뙤약 볕에 세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 다.
“•••뭔가, 시작부터 다투는 것인 가?”
“설마. 장로원이 대공자님을 아 예 출입조차 못 하시게 막으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천하가 비웃을 노릇 이 아니겠는가?”
멀찍이 지켜보던 군중들 사이에 서, 벌써 웅성거림이 시작되고 있 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슬쩍 살피는 중진 장로의 눈이 가늘어졌다.
‘군중은 대공자의 편인가?’
썩어도 준치라고.
군중의 제대로 내용이 들리지 않 는 옹성임과 제대로 확인되지 않는 행동만으로도.
분위기를 파악하는 중진 장로였
다.
‘쯧쯧. 언제는 대공자를 가장 헐 뜯고 뒤에서 욕하던 것들이…!’
돌이켜 보면, 그의 말처럼.
대공자는 낙양검가 내 아랫사람 들이 가장 쉽게 헐뜯을 수 있는 대 상이었고.
그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서 든 대공자의 욕을 쉽게 들을 수 있 었다.
오죽하면, 내원에서 대공자의 책값을 치러 주지 않겠다고 나왔 었던.
그 ‘책값 사건’까지 있었겠는가.
“장로원의 장로들이 대공자님께 단단히 겁을 먹은 것 같구먼.”
“함께 한자리에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길고 짧음이 비교되니. 옹졸 하게 구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 분위기가 어느 순간 부터 변하고 있었고.
죄악계곡의 전투를 기점으로 아 예, 여론이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당장은 어쩔 수 없군.’
중진 장로는 빠르게, 자기 생각 과 태도를 결정했다.
“내가 언제, 대공자님을 맞지 않
겠다고 했었소이까?”
그렇게 얼버무리며 대공자에게 손을 펼쳐 보였다.
“자, 대공자님. 일단 안으로-.”
하지만 그때.
슬쩍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대 공자에게 양손을 모아 보이는 이가 있었으니.
“허허. 장로원의 부원주로서, 장 로원의 인심이 박하다는 말은 참을 수가 없지.”
아니나 다를까.
약삭빠르게 끼어든 것은, 낙양검
가의 정치판에서 뼈가 굵은 부원주 였다.
“부원주…!”
부원주에게 슬쩍 밀쳐진 중진 장 로가 얼굴을 붉혔지만, 부원주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자 자, 대공자님. 볕이 따갑습니 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그는 얼굴에 철판이라도 몇 겹 깐 것처럼, 중진 장로를 무시하고 연소현에게 손짓했다.
“부원주. 그대의 환대, 잘 받았 네.”
연소현은 그 장단에 맞춰 능청스
럽게, 대꾸하며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본 대공자를 환영하기 위해, 부 원주가 직접 나서다니. 장로원의 의전에 감사를 표하지.”
“아니요, 별말씀을요. 대공자께서 우리 장로원을 방문하게 되어 영광 일 뿐입니다.”
어느샌가 연소현과 함께 왔던, 부원주가.
대공자를 맞이하는 장로원의 공 식 의전을 담당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광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공자님께선. 저
희 장로원의 차에 대해 들어 보셨 습니까?”
“장로원에서만 마실 수 있다는 찻잎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네.”
“허허. 역시, 대공자님이십니다! 대기하시는 동안 제가 직접 그 차 를 선보여 드리도록 하지요.”
“하하, 고맙군.”
부원주는 그 옆에 붙어서, 원래 장로원에서 대공자를 맞이하기 위 해 나왔던 이들 보란 듯이.
대공자에게 찰싹 붙어 손바닥을 비비기까지 하고 있는 것이 아닌 가.
‘이런, 망할 늙은이가…!’
증진 장로의 주름진 이마에 혈관 이 곤두섰다.
‘내 역할을 은근슬쩍 뺏어 가 •••?!’
대공자를 맞이하는 역할은 장로 원 내에서도 은근히 경쟁이 치열했 다.
그 많은 장로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킬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이쪽입니다, 대공자님.”
하지만, 이미 늦었다.
장로원의 부원주가 장로원에 방 문한 대공자를 안내한다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거기다가, 그에게는 더욱 큰일이 있었으니.
자신들이 따르던 중진 장로가, 시작부터 맥을 추지 못하자.
그를 바라보는 후배 장로들의 눈 이 조금씩 굳어 가기 시작했기 때 문이었다.
‘저놈들의 눈빛….’
중진 장로는 그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무리의 지도자를 따르는 눈빛이 아니라.
무리의 지도자가 약해졌을 때, 입맛을 다시며 나오는 눈빛이었 다.
‘제길.’
어떻게든 이 상황을 뒤집을 수를 보여야 했다.
“대, 대공-.”
대공자를 부르려 했던 중진 장로 였지만, 돌아서서 입을 연 것은.
그 대공자가 먼저였다.
“염 장로.”
“예, 대공자님.”
염 장로가 그 거대한 덩치와 위 압감을 과시하며 앞으로 나서자.
“아, 아니. 이 사람이….”
중진 장로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한번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명 (下命)하십시오.”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한 태도로 손을 모은 염 장로의 입에서, 하명 이라는 말이 나오자.
대번에 장로원 측 장로들의 안색 이 굳고, 눈알들이 튀어나올 듯 크 게 불거졌다.
‘•••그 염 장로가 하명을 해 달라 니.’
‘대체, 두 사람 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 모습은 후계자 중 하나인 공 자와 장로의 관계가 아니라, 군에 서나 볼 수 있는 상명하복의 관계 처럼 보였다.
“저자들이 아까부터 나를 내려다 보고 있구나.”
연소현의 손이 들리자, 장로원의 장로들이 반사적으로 그 손의 방향 에서 피했다.
애초에, 대공자는 그들을 가리키 려던 것이 아니었기에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괜히 지레 겁을 먹고, 대공자의 손을 피한 형상이 된 장로들은 얼 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허, 허홈.”
하지만 그들이 헛기침과 함께 입
을 열어 뭐라, 스스로의 행동을 정 당화할 틈도 없었다.
“감히 대공자님을 내려다보다 니…!”
다루의 창가에 붙어 연소현을 내 려다보는 연씨 혈족들을 발견한 염 장로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엄하구나!”
우르릉.
염 장로의 산을 무너뜨릴 기세가 사방을 울렸다.
장로원 앞 다루.
“무엄하구나!”
낙뢰의 형태로 대지에 떨어진 벼 락의 소리가 이러할까.
귀청이 찢어지고, 다리가 후들거
리는 검악파산의 일갈(一1渴)에.
“ 어이쿠.”
“크홈…!”
다닥다닥 붙어 밖을 내다보던 연 씨 혈족들이 바퀴벌레 홑어지듯, 창가에서 떨어졌다.
“이거 계속 서 있었더니. 무릎이 시큰거리는구려.”
“계속 대화를 하다 보니, 목이 타서….”
그들 중 몇몇은 자신들의 추태에 변명하듯 아무런 말이나 주워섬겼 지만.
결국, 그들 또한 다른 이들처럼.
이 상황에 뭐라 말을 하든 구질 구질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수치심 에 얼굴을 붉혔다.
“에잉. 차가 식어 버렸지 않은 가?”
“쯧쯧. 다루 관리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그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
애꿎은 다루를 욕하며 식은 차만 연신 들이켰다.
[•••과연, 검악파산(劍括破山)이라
더니. 조금의 허명(虛名)도 아니었 군요.]
중년인 또한 실력이 부족한 이는 아니었지만.
검악파산 앞에서는 작아질 수밖 에 없었다.
[그러게.]
창가의 벽면에 몸을 숨긴 중년인 을 보면서, 짧은 턱수염의 청년은 그를 비웃지 않았다.
자신부터가 이미 의자에 깊이 몸 을 묻어서, 검악파산의 끓는 용암 같은 시선을 피했기 때문이었다.
[낙양 본가(本家)의 장로원은 예
전부터 정치꾼들이 장악해서. 무사 (武士)들이 설 자리를 잃었다고 하 더니.]
과거 눈부신 활약을 보였던, 순 수 무인(武人)들은 이미 전쟁부로 밀려났다는 것은.
딱히 비밀도 아니었다.
[그런데 여전히.]
귀 안에서부터 저릿하게 아려 오 는 통증을 느끼며, 짧은 수염의 청 년이 혀를 내둘렀다.
[고고한 검악(劍括)은 굳게 자리 를 지키고 있구나…!]
그는 그렇게 감탄한 후에.
슬쩍 고개를 들어, 살짝 밖을 엿 보았다.
연씨 혈족들이 겁을 먹고 후다닥 물러난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하하핫!”
대공자는 한차례 호탕하게 웃어 보이고는.
“보기 좋구나!”
검은 외투를 펄럭이며 돌아서서 는, 뒷짐을 떡하니 지고, 장로원의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닌 가.
뒤에서 뭐라고 떠들며 장로원의 장로들이 뒤늦게 대공자에게 따라 붙었지만.
그 모양새가 마치 주인이 제집에 들어가는 형상이라, 여유롭기가 짝 이 없었으니.
누가 감히 그 모습을 보고, 적진 (敵陣)으로 들어가는 중이라 생각 하겠는가.
‘군계일학(群鷄一鶴) 이라.’
대화를 나눠 본 것도 아니고.
얼굴을 본 것도 처음이며.
심지어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본 것에 불과하건만.
짧은 수염의 청년은 단언할 수 있었다.
‘낙양 본가의 대공자는, 소문 이 상의 인물이구나.’
대공자의 뒤를 따르던 염 장로가 마지막으로 다시 이쪽을 보자.
“..r
화들짝 얼른 고개를 숙인 그가 식은땀을 닦으며 생각했다.
‘아아, 나도 저 장로원에 들어가
서 일이 어떻게 되는지 보고 싶구 나…!’
이 순간은 그 점이 가장 아쉬웠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