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312화 (312/350)

제12편 당랑거철(韓휴桓撤)

낙양검가, 장로원.

낙양검가의 장로원은 본디, 그 신분이 장로에 준하거나.

혹은, 가법상 예외적으로 지정된 경우에만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했 다.

그렇기에, 장로원은 특별히 용무 없는 이들이 찾아올 이유가 없는 곳이었다.

“•••호오, 이런 곳에서 다 만나게 되는구려.”

“허허. 이런 대형 볼거리가 터졌 는데. 내 어찌, 와 보지 않을 수가 있겠소?”

그런 장로원의 정문 앞 큰길(大 路) 이.

오늘따라 인파로 들끓고 있었다.

“들었소?”

“당연히 들었으니, 이곳에 다들 모인 것이 아니겠소?”

“사실상, 대공자님이 장로원에 선전포고를 먼저 날린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들었소.”

그들의 대화처럼.

오늘 오전부터 시작된 대공자의 행보가, 검가 내외에서 급속히 주 목을 끌어모은 까닭이었다.

“흐음….”

짧은 턱수염을 쓰다듬는 이는 큰 길에서 부대끼는 다른 대부분의 이 들과는 다르게.

장로원 맞은편의 다루(茶樓)에 앉아, 큰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다루는 장로원의 부속 건물이 었기에, 장로원과 마찬가지로, 출입 제한이 걸려 있었으니.

그의 신분이 범상잖음을 의미하 는 바이기도 했다.

“오전엔 호법원을 들쑤셔 놓더 니, 오후에는 장로원이라….”

평소라면 점잔을 떠는 이들의 헛 기침 소리가 더 들려왔을 터이지만.

오늘따라 그들은 입 안에 침이 마르도록 수군거리고 있었다.

“주목받는 것을 즐기기까지 하는 대공자라지만, 터무니가 없군. 난데 없이 장로원 전체를 적으로 돌리다 니….”

혀를 나지막하게 차는 이.

“제정신이 아니군. 제정신이 아 닌 게야.”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젓는 이.

“요즘, 대공자 취급을 좀 받기 시작했다고. 자기가 진짜 가주 대 리라도 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침을 튀겨 가며 흥분하는 이.

“사마귀가 제나라 장공(莊公)의 수레바퀴에 달려드는 격이 아닌 가?”

“신산(神算)이니, 뭐니 해도. 결 국엔 갓 성인이 된 어린아이에 불

과한 게지.”

그렇게 대공자 연소현을 향해 감 추지도 않고 적대감을 드러내는 그 들의 공통점이 있었으니.

“대공자는 우리 혈족들을 무시한 것에 대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 오.”

다름 아닌, 그들은.

낙양검가의 연씨 혈족들이었다.

“그런 어린아이가 본가를 이끈다 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

“본가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있어 서는 안 될 일이오.”

“황도의 십육가문과도 척을 져 버리고, 유폐된 것과 다름없던 황 제의 편을 들었다는 정보는 들었 소?”

“어이가 없군.”

“그 대공자 놈이 소가주가 되는 날이, 바로 우리 검가가 멸문하는 날이 될 것이오.”

그들은 열심히 검가의 미래를 걱 정하는 척을 하고 있었지만, 당연 히 속내는 전혀 달랐다.

[•••새 전장장 후보가 임명이 되 면, 우리 문제도 해결이 될 것이 오.]

[부전장장은, 우리와 거래를 하던 핵심 인물이니. 어찌어찌해도 자기 가 살려면, 결국엔 우리도 살릴 수 밖에 없을 것이오.]

[애초에 그자가 그 자리까지 올 라갈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우리가 끌어 준 덕이지 않소?]

전음으로 대화를 나눈다고, 그 검은 속내가 숨겨지겠는가.

‘더러운 늙은이들.’

창가에 앉아 있던 중년인이 그런 그들의 모습에 속으로 혀를 찼다.

‘본가나, 방계인 우리나. 가장 위 에서부터 썩어 버린 것은, 똑같은

모습이군.’

“•••이상해.”

부패한 혈족들을 보던 연씨 방계 의 중년인이, 자신의 맞은편에서 들려온 혼잣말에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다고요? 아까부터, 뭘 그 리 신경 쓰고 계십니까?”

중년인의 물음에.

아까부터 밖을 내다보고 있던 짧 은 수염의 청년이 눈을 떼지도 않 고 대답했다.

“이 다루에 우리 혈족들이 들끓 는 것은 이해할 수 있네.”

“오전부터 그 난리가 있었으니. 일이 어찌 되어 가려는지. 다들 지 켜보려 모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 까?”

“그렇지. 저 늙은이들이야, 다들 귀를 여기저기 둔 이들이니까. 하 지만….”

짧은 수염의 청년이 손을 들어 큰길을 가리켰다.

“그런데, 저들은? 대체 어떻게 이렇게 텔’리 정보를 듣고 몰려왔다 는 말인가?”

평소, 낙양검가 내의 정보에 밝 고 권력 지형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몰라도.

대다수에게, 이 일은 상당히 복 잡한 문제였다.

“•••그건.”

“게다가 소문이 퍼진 속도가 너 무 빨라. 결국엔 낙양 저잣거리까 지도 이 소문을 듣게는 되겠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느껴지지 않나?”

그 말을 듣고 보니, 중년인에게 아래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이 전 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 다.

“물러서시오!”

“길을 막지 말고, 물러나란 말이 오!”

장로원의 무사들과 경비대원들이 출입구를 확보하기 위해서, 땀을 뻴뻘 흘리며 인파를 밀어내고 있었 다.

얼마나 인파가 몰렸던지.

범상찮은 내공과 인상적인 경력 을 가진 장로원의 무사들마저도, 난색을 보일 정도였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소문을 흘렸다는 말씀입니까?”

중년인의 말에 짧은 수염의 청년 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소문을 흘린 것이 아니 야.”

청년이 눈올 가늘게 떴다.

“정보를 알기 쉽게 정리하고, 가 공해서. 본가의 대다수가 흥미를 곧장 느낄 수밖에 없게끔. 구도를 살려 소문이란 형태에 최적화를 시 킨 것이야.”

전문가.

그것도 최상급 전문가의 노련한 솜씨가 느껴졌다.

“…대체 누가?”

중년인의 물음은 끝을 맺지 못했

다.

“본가의 대공자께서 납시오!”

경비대원들과 몸싸움을 하다시피 하던 이들도.

음습한 대화를 전음으로 주고받 던 지체 높은 연씨 혈족들도.

누구랄 것 없이, 입을 다물고.

저 멀리,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일행인 중년인과 마찬가지로.

짧은 수염의 청년 또한, 의문을 접어 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모두의 시선이 쏠린 방향을 바라보 았다.

여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넓 은 대로 저편에, 여인들의 행렬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저들이….’

고아한 원각정의 의상과 가볍게 더해진 화장에 그 미모들이 눈부셨 지만.

정작 그들의 존재감은, 일사불란 하면서도 지면에 깔린 듯한 안정적

인 걸음걸이와.

사방을 물샐틈없이 경계하는 날 카로운 눈빛.

그리고 그들이 차고 있는 한 자 루의 검에 있었다.

‘원각정의 무사들.’

처음엔 그저.

귀한 무인들을 하녀 따위로 쓸 수 있다는 점을 과시하기 위한, 대 공자의 고약한 취미라 여겨졌던 원 각정의 하녀단.

“매서운 기세로구먼.”

군중들 사이에서 작은 속삭임들

이 오갔다.

“…저들이 그 죄악계곡의 아수라 (阿修羅)들인가?”

“성지(聖地)를 수호하는 신군(神 軍)이라고도 하더군.”

“낙양의 혹도 무림인 놈들을 도 살하다시피 했다던데?”

그녀들의 위상은.

앞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으로,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하녀단에 이어, 자 연스럽게 시선을 받는 이가 있었으 니.

절그럭, 절그럭.

다섯 자루의 검.

나찰(羅최J)을 연상케 하는 사나 운 기세와 인상.

이 자리에 누구도 그를 개인적으 로 아는 이가 없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알아보 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

“•••탈명귀검 (奪命鬼劍)

“검가의 가장 홍포한 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의 이름은 색이 바래기는커녕, 더욱더 선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탈명귀검이 대공자님께 검 을 바쳤다더니.”

“소문이 사실이었구먼.”

탈명귀검의 다음으로 모습을 드 러낸 것은, 낙양검가 무력의 상징 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여, 역시 크다.”

“저 거검(巨劍) 좀 보게.”

“저 검으로, 단 일격에 낙양 시 내에 지진(地震)을 일으켰다더군 •••!”

압도적인 신장과 덩치로 행렬 가 운데 불쑥 튀어나와 있는 사내.

검악파산(劍括破山), 염곽추.

“북부 전쟁의 영웅!”

하지만.

다루에서 내려다보던 연씨 혈족 들의 반응은, 아래의 군중들과는 달랐다.

“염 장로가 저 행렬에 함께 있다 는 건-.”

“이제 확실하게 자신이 대공자의 계파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인가?”

그런데 그 시기가 하필.

장로원이 들끓고 있는 지금이란 말인가.

“에잉, 쯧쯧.”

심기가 불편해진 이들이 헛기침 들을 하며 혀를 차고 있을 때.

[염 장로가 하필 지금, 저런 행동 을 보인다는 것은-.]

불편해하는 좌중의 눈치를 살피 며 중년인이 짧은 수염의 청년에게 전음을 통해 말을 건넸지만.

“이번 일에서 명백히 대공자께 서서 자신의 힘을 실어 주겠다는 의도겠지.”

측근의 그런 의도를 알면서도.

짧은 수염의 청년은 주변을 아랑

곳하지도 않고, 입 밖으로 말을 꺼 냈다.

“대공자께서도 아무런 대책 없이 장로원과 각을 세우지는 않으셨다 는 말이군.”

대번에.

사방에서 칼을 품은 둣한 시선들 이 날아들었지만.

“어, 어홈.”

식은땀을 흘리며 쩔쩔매는 중년 인과 달리, 짧은 수염의 청년은 신

경도 쓰지 않고 저편을 가리켰다.

“그리고, 대공자의 편에 선 것이 염 장로. 한 명뿐만은 아닌 모양이 야.”

다가오는 행렬을 지켜보던 연씨 혈족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신장과 덩치 덕분에 염 장로가 가장 먼저 보였다 뿐이지.

그의 옆에는 십수 명의 인물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저건, 유 장로군.”

백발을 곱게 틀어 올린 노부인의 모습에 그녀를 알아본 누군가가 혀 를 찼다.

“그뿐만이 아니야.”

“저들은 전부. 원래, 사공자를 지 지하던 장로들이 아닌가…?!”

유 장로 옆으로 늘어선 이들은 분명, 그동안 사공자의 계파로 알 려진 장로들이었다.

“저들이 이 상황에서 사공자가 아닌, 대공자의 행렬에 참가했다 니….”

저 모습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 가?

연씨 혈족 중 하나가, 누구도 입 에 담기 싫어했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입 밖으로 꺼냈다.

“사공자가 단순한 연합이나 협력 의 형태가 아니라. 대공자의 밑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는 소문이 사 실이었군….”

“그렇다면, 그 두 세력이 일원화 를 추진하고 있다는 소문도?”

“사실이겠지.”

안색이 나빠진 그들의 대화에 짧 은 턱수염의 청년이 흥미롭다는 듯 이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사공자가 대공자의 밑에 들어가 기로 했다고-?’

그는 과거 사공자를 만났던 적이 있었고.

그렇기에 사공자 연비가 얼마나 뛰어난 기재(奇才)인지 잘 알고 있 었다.

그런 사공자가 대공자의 밑에 들 어가다니.

‘사공자가 애초에 부족한 인물이 었다면 모를까. 내부의 반발이 엄 청났을 터인데?’

그런데 결과는 어떠한가.

장로원 전체가 대공자와 대립하 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사 공자 계파의 장로들이.

보란 듯이, 대공자 연소현의 행 렬에 참가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그 정도로 대공자가 뛰어난 인 물이란 것이겠지.’

그는 한층 기대감이 커진 얼굴 로, 행렬에 집중했다.

‘그 대단하다는 대공자의 얼굴을 보고 싶군.’

“그런데, 사공자의 계파치고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중년인의 의문에 답이라도 하듯 이.

“아니, 저 사람은”?!”

연씨 혈족 중 하나가 깜짝 놀란

얼굴로 장로들의 행렬을 가리켰다.

“함 장로와 그의 파벌이 아닌 가?!”

“함 장로라고?!”

기함한 이들이, 체통도 잊고 창 에 달라붙다시피 해서 밖을 내다보 기 시작했다.

“함 장로는 장로원의 부원주가 아닌가?!”

“부원주가 대공자의 세력에 들어 갔다고?!”

자신의 파벌 장로들에게 둘러싸 여, 긴장한 기색도 없이 ‘금니’를 드러내며 대화를 주고받는 노인은.

틀림없이 장로원의 부원주인 함 장로였다.

‘이런…!’

황급히 아래를 내려다보던 연씨 혈족들의 안색이 나빠지기 시작했 다.

‘어째서, 부원주가 대공자와 함께 한단 말인가?’

‘차기 원주를 노리던 인물이 어 째서?’

존재하지만 보이지는 않는 힘의 저울이, 분명히 움직이는 것을.

그 자리의 모두가 느끼기 시작했

다.

‘•••대공자가 이 상황에 부원주를 가세시켰다고? 대체 어떻게?’

짧은 턱수염의 청년이 시선을 돌 려, 장로원 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형식적으로나마 대공자 를 맞이하기 위해 나온 장로들의 모습이 있었고.

그는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는 그 들의 안색이, 분노와 당혹감으로 검붉어지는 것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일이 더욱 흥미로워지는군.’

형식적으로나마, 대공자의 마중 을 위해 나왔던 장로 하나가 낮은 소리로 외쳤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오…?!”

그리고 흥분한 것은 그뿐만이 아 니었다.

“부원주가 후계자의 계파에 들어 가다니…?!”

“적어도 부원주라면. 정치적 중 립을 지켜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 그들에게 중진(重鎭)급에 속하는 장로의 나지막한 호통이 들 려왔다.

“대공자가 상대인데, 뭘 기대했 소? 당연히 이 정도 예상 밖의 일 은 발생하는 것이지…!”

중진 장로가 호통을 이었다.

“그래 봐야, 숫자는 이쪽이 압도 적이고. 결정은 투표로 이루어지지 않소? 뭘, 다들 호들갑이란 말이

오?’’

중진 장로는 시선을 주변으로 던 지며, 못마땅함을 드러냈다.

“마땅히 이겨야 할 싸움에서, 품 위 있게 승리를 거두기는커녕. 이 많은 인파 앞에서, 기선부터 제압 당하는 꼴을 보여 주다니.”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낯빛을 관리하는 장로들에게, 중진 장로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잉, 쯧쯧….”

지금에서야 표정 관리해 봐야 무 엇 하는가.

이미 군중들은 멀리서 장로들의

당혹감을 직접 지켜본 다음이었다.

“그러게 말이오.”

그 동의의 말은 장로들 사이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본가의 장로란 자들이, 고작 이 정도 일로 당황하는 모습을 내보이 다니.”

정지했던 행렬이 갈라지며, 염 장로를 포함한 장로들의 모습이 전 면에 드러나고.

장로들이 정중히 갈라져 물러서 자, 그 사이에서 목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이러다가. 대낙양검가 장

로원의 체면이 크게 상하게 될까 걱정이구려.”

어깨에 걸린 채 바람에 나부끼는 혹잠사 외투.

오만함이 느껴지는 조롱으로 가 득한 말투.

고개를 들고 장로들을 내려다보 는 눈초리.

“•••그렇게 장로원의 체면을 신경 써 주시기 전에. 앞으로 망가질 본 인의 체면부터 신경 쓰시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중진 장로가 뜨거운 햇볕 아래서 뒤틀린 미소를 짓고 있는 이에게

이를 드러냈다.

“대공자님.”

대공자, 연소현의 입에 걸린 미 소가 진해지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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