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311화 (311/350)

제11편 자존심(自尊心)

낙양검가, 장로원.

오늘의 안건은 단 하나.

‘검가전장 전장장에 대한 불신임 투표’뿐이었다.

“•••원래라면, 간단하게 끝났을 일인데.”

호화로운 휴게실에 앉은 장로 하

나가 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심기 가 불편함을 드러냈다.

“원래라면, 그러했겠지요.”

그와 같은 파벌의 장로가 혀를 찼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장장은. 이미 투지(패志)를 잃은 상황이었 고, 아무런 저항도 하고 있지 않았 었으니.”

“우리는 그저, 투표를 통해 간단 히 현 전장장을 실각시키고-.”

다른 장로가 말을 받았다.

“모든 파벌과 계파들이 합의를 본 ‘후보’를 최고운영회의에 추천하

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지요.”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판에서, 대다수의 장로들이 동의하는 후보 란.

결국, 아무리 좋게 이야기해도.

문제를 일으킬 생각도 없고, 심 지어 문제를 일으킬 능력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같은 파벌 소속의 또 다른 장로 가 혀를 찼다.

“갑자기, 그 대공자가 튀어나오 다니….”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서리라도 맞은 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 너무 겁먹은 것 아니오?”

그 모습에 느긋한 기색의 장로 하나가 실소를 지었다.

“어차피 여기는 장로원이지 않 소? 장로원은 우리, 장로들의 ‘영 역’이라오.”

전대 가주가 제자리에 있었을 시 절에도.

전전 대 가주가 있었던 시절에 도.

그 가주들조차 장로원의 역할과 그 영역을 존중했다.

“하지만, 상대는.”

불안한 모습을 보이던 장로의 눈 에 힘이 들어갔다.

“몇 달 전의 대공자가 아닙니다. 아니에요.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 다.”

“헹.”

그러자 큰소리를 치던 장로가 더 큰 소리로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 봐야, 이 건에서 그 대공 자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장

로가 몇이나 될 것 같소?”

“하지만….”

상대가 제대로 반박을 하지 못하 자, 그는 팔짱을 끼며 비웃음을 홀 렸다.

“거참. 대낙양검가의 장로라는 사람이, 이렇게 간이 작아서야….”

그러자 불안한 모습을 보였던 장 로도 발끈했다.

“지금, 내게 뭐라 했소?!”

“다시 말해 보라면, 못 할 줄 아 시오? 내 열 번이라도 다시 말해 드리겠소이다. 대낙양검가의 장로라 는 사람이-.”

“그만.”

상석에 앉아 침묵에 잠긴 채, 장 고에 잠겨 있던 이.

“그쯤 해 두시오.”

그들 파벌의 우두머리인 팽 장로 가 입을 열자, 언쟁을 벌이던 두 장로가 즉시 입올 다물었다.

덩달아서 다른 장로들마저 입을 다물자.

“먼저.”

하북팽가(河北彭家) 출신의 팽

장로는 손가락을 들어, 대공자에게 겁을 먹었던 장로를 가리켰다.

“조심성도 좋지만. 명확한 근거 없이, 불안감을 일으키고 확신시키 려 하지 마시오.”

“•••예.”

그러자, 그런 그를 윽박지르던 상대방 장로가 대번에 의기양양해 진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하지만 팽 장로의 손가락은 여지 없이 그에게 향했다.

“그대 또한 불안했던 것이 아니 오?”

“아닙니다…!”

그러자 의기양양하던 장로가 즉 각 고개를 저어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대체 무슨 근거로, 제가 겁을 먹었다고-.”

“그렇다면.”

팽 장로가 그의 말을 잘랐다.

“어째서, 바쁘기 짝이 없는 그대 가. 장로 회의가 시작되기도 한참 전인 지금.”

팽 장로가 휴게실 바닥을 가리켰 다.

“벌써, 이곳에 와 있다는 말이 오?”

어째서냐니.

그것은, 오늘 오전에 있었던 호 법원에서의 난리를 들었기 때문이 아니던가.

할 말을 잃은 장로가 침묵하자, 팽 장로가 정리를 시작했다.

“…하지만. 두 장로께서 하시던 말씀이, 근본적으로 틀린 것은 아 니오.”

우두머리가 그렇게 운을 떼자,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수염을 쓰 다듬던 장로가 말을 받았다.

“대공자가 어떤 방식으로 이번 장로 회의에 개입할지는 모르지만. 그자가 실질적인 위협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오.”

입구 근처에 앉아 쉴 새 없이 들 어오는 정보를 확인하던 장로도 입 을 열었다.

“오늘 오전에 호법원에서 있었던 일을 간과해서는 아니 되오.”

‘‘그 이야기는?”

쪽지를 펼쳐 보던 장로의 시선이 좌중을 향했다.

“대공자는 얼마든지, 이곳. 장로 원에서도 같은 준비를 해 두었을 수 있소.”

불편한 침묵이 좌중에 감돌았다.

그 대공자 연소현이.

장로원에도 이미 같은 준비를 해 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들도, 대공자에게 호법원주가 당했던 것처럼 당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이들 모두의 불안감 의 근원이자.

이들 모두가 누구 하나 호출을 하지 않았음에도.

이 시각부터 장로원에 모이게 만 든 정확한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팽 장로께서 두 장로의 말이 모두 일리가 있다고 말씀하셨 다시피.”

수염 긴 장로가 다시 입을 열었 다.

“마냥, 우리도 겁부터 먹을 필요

는 없소. 왜냐하면-.”

팽 장로가 그의 말을 받았다.

“지금. 장로들 대부분이 그 ‘불안 감’을 공유하고 있을 터이니.”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회의 중 미안하지만.”

밖에서 대기하던 장로가 문을 열 고 들어왔다.

“지금, 각 파벌과 계파의 수장들 에게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싶다는 요청들이 밀려들고 있소.”

“어떤 파벌과 계파 말이오?” 소식을 알린 장로가 어깨를 으쓱

였다.

“ 전부라오.”

그 말에 팽 장로가 얼굴에 희미 한 미소를 띠었다.

“원래라면, 이 검가에서 절대 한 곳으로 뭉칠 수가 없는 것이. 장로 들의 파벌과 계파들이지.”

장로원은 승자와 패자가 명확히 나뉘는 투기장과도 같은 곳.

누군가 이기면.

누군가는 반드시 패배한다.

그런 장로원의 파벌과 계파들이 모두 일제히 대화를 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랬군…!”

그 의미를 깨달은 장로가 나직하 게 탄성을 홀렸다.

“대공자로 인해서, 절대 뭉칠 수 가 없는 이들을 뭉치게 만든 것이 었어…!”

호법원에서 보여 준 일로.

장로들은 위기감을 공유했다.

“그렇소.”

긴 수염의 장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고

싶었던 것일까. 대공자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는….”

팽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오만한 대공자는, 경솔하게 벌집을 건든 것이오.”

장로원, 회의실.

원래는 위원회 회의를 진행하기 위한 용도인 회의실은, 각 파벌과 계파를 대표하는 장로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 일을 그냥 평소처럼 대응해 선 안 될 것이오!”

장로 하나가 목소리를 우렁차게 높이자, 호웅하듯 다른 장로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렇소!”

“이미 장로들끼리 협의가 끝난, 전장장 해임 문제를 건드리다니

“이것은 대공자가 우리 장로원에 선전포고를 한 것과 다른 바가 없 소!”

평소라면, 상대 파벌이나 계파가 하는 말엔 냉소적인 비웃음부터 날 렸던 이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풍경이었다.

그렇게 목소리를 높여, 공동 대 응을 촉구하는 이들의 뒤에서는 상 대적으로 신중한 성향의 장로들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대공자는 지금, 선대로부터 내 려오던 암묵적인 규칙을 어기고 있 소.”

“장로원은 신성한 곳이오.”

“그런 장로원을 아무리 대공자라 해도, 흙발로 더럽히는 꼴을 보고 만 있을수는 없지.”

심지어 평소에는 결정적인 순간 을 제외하고는 이를 드러내지도 않 는 부류들까지도, 이를 갈고 있었 다.

“대공자의 능력이 대단하고, 그 위세에 한창 물이 오른 것은 알지 만….”

“지나치게 오만하다는 감상을 지 울 수가 없습니다, 그려.”

“아무래도 이쯤에서 우리 장로들

이 한 번, 그 오만함을 꺾어 주어 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석에서 그 광경을 보던 호법원 의 일부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거, 우리가 뭔가 손을 쓸 필요도 없겠습니다.”

누구보다 발이 빠르고.

말은 그것보다도 빠른 이들이 낙 양검가의 장로들이었다.

“다들, 자존심이 상한 게지.”

그의 말에 호법원주가 고개를 끄 덕였다.

“자존심이라….”

호법원 소속이면서, 장로이기도 한 그들이 이곳에 와 있는 것은, 대공자 연소현을 막기 위함이었지 만.

“것참.”

호법일부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오전에 대공자가 우리 호법원에 서 그 난리를 친 것이, 오히려 전 화위복(轉禍爲福)이 된 격이 되었 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좋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그만큼 호법원의 격이 크게 추락 한 반작용으로 얻은 이득이었다.

그 이득으로는 손해를 보전하기 는커녕.

자존심도 세울 수 없었으니.

쓴웃음이 절로 나오는 것이다.

“•••어쨌든, 이쪽에서는 우리가 손을 더 댈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확실히.”

그 말에 벽에서 등을 뗀 호법원 주가 동의했다.

“괜히 손을 어설프게 대었다가, 이 분위기가 망가지면 그쪽이 더 골치 아프겠지.”

“그렇다면….”

호법원주가 먼저, 문밖으로 나섰 다.

“새 전장장 예비 후보자나 보러 가지.”

“대공자가 이 일에 나섰다고?” 조금은 다른 휴게실에 비해 좁은

듯하지만.

그럼에도 한 명의 인원이 대기하 기에는 호화롭기 짝이 없는 공간이 었다.

“안 돼. 그래선 안 돼….”

하지만.

그 안을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 는 중년인은 마치 뇌옥에라도 갇힌 것처럼.

답답함과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 다.

“여기서, 내가 새 전장장이 되지 못하면-.”

“계시오?”

평소라면 예의도 없이 문부터 벌 컥 열고 들어오는 이에게 화라도 냈겠건만.

“아, 아. 오셨습니까.”

새 전장장 예비 후보는, 감히 화 는커녕.

낯빛을 싹 바꾸고 최대한 정중하 게 손을 모아 인사했다.

“우리 호법원에서의 소식에 불안 해할까 싶어, 얼굴이나 보러 왔소 이다.”

호법일부장의 말에, 얼른 손사래 를 치는 새 전장장 예비 후보자.

“아, 아닙니다!”

그는 호법원에 약점이라도 잡힌 것처럼, 당황한 기색을 감추질 못 했다.

“불안은 무슨, 불안이 있겠습니 까? 저야 그저, 대로를 달리는 마 차에 편히 앉은 것처럼 안정감만 느낄 뿐입니다…!”

“그런 것치곤, 너무 땀을 흘리시 는데?”

“이, 이것은…!”

호법일부장이 그렇게 말하는 사 이, 제집처럼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은 호법원주가 입을 열었다.

“본론부터 이야기하지.”

“예, 예.”

호법원주가 새 전장장 예비 후보 를 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장장이 된 이후의 자네 역할 은 잘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 말에 새 전장장 예비 후보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씨 혈족과 관련된 일들을 제 대로 묻어야-.”

어홈, 하고 호법일부장이 헛기침 을 하자, 새 전장장 예비 후보가

급히 말을 바꾸었다.

“-처리해야 하는 것이 제 첫 임 무이자, 사명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잘 기억하고 있군.”

호법원주가 보이지 않는 압력을 슬그머니 홀리며 말을 이었다.

“그 일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으 면, 가장 곤란해지는 이는. 바로 자 네라는 것을 잘 기억하게.”

그러고는 호법원주가 새 전장장 예비 후보의 직함을 또박또박 불렀 다.

“부전장장.”

새 전장장 예비 후보이자, 원래 검가전장의 부전장장이었던 중년인 이 굳은 표정을 지었다.

“물론, 제가 제 처지를 가장 잘 알고 있으니. 그 부분은 안심하셔 도 좋습니다.”

연씨 혈족의 비리를 제대로 묻어 버리지 못하면, ‘곤란할 것이다’라 고 표현한 호법원주였지만.

그 비리 깊은 곳에서부터 얽혀 있는 부전장장은, 그 표현이 매우 크게 에두른 말이라는 것을 잘 알 고 있었다.

‘이 일이 틀어지면, 시체도 부지

하지 못할 테지.’

지난봄.

그는, 검가전장에 들이닥쳤던 대 공자 연소현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발악해 보라고.”

그와 이마를 맞댔던 대공자의 스 산한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끌어들일 수 있는 무리들은 전 부 끌어들여 저항해 봐라. ”

대공자의 눈 깊은 곳에서 피어오 르던 그 시퍼런 귀화를, 그는 꿈에

서도 잊을 수 없었다.

“안 그랬다가는 네놈 혼자서 쓸 쓸하게 지옥에 떨어지게 될 터이 니.”

자신과 직접 엮여 있던 중거들을 모두 파괴했던 자신에게 대공자가 했던 말.

어찌, 그날을 잊을 수가 있겠는 가.

“모처럼, 그 콧대 높은 연씨 혈 족과의 거래에서 큰 이득을 볼 참 이니 말이지.”

장로들은 부패한 연씨 혈족의 비

리를 묻어 주는 대가로 크게 정치 적인 이득을 챙기고.

“자네에게 기대하는 바가 커.”

호법원주는 부전장장을 수사하는 대신, 사건의 핵심 피의자인 부전 장장에게, 직접 수습을 맡긴 것이 다.

“•••명심하겠습니다.”

부전장장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나는 이 기회로 살아난다. 반드 시 살아서, 대공자 놈의 면전에서 비웃어 주마…!’

어떻게 얻은 기회인가.

하늘이 무너지는 가운데, 겨우 찾은 구멍이었으니.

절대 놓칠 수 없는 구명줄이었 다.

“안 보인다 했더니. 이곳에들 계 셨군.”

호법원과 우호적인 장•로 하나가 고개를 들이밀고 소식을 전했다.

“방금, 대공자가 도착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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