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310화 (310/350)

제10편 죄(罪)와 벌

낙양검가, 호법원.

호법원의 본관 전각의 복도는 업 무를 위해 바삐 오가는 인원들로 가득했다.

그것은 평소의 풍경으로.

아무리, 호법원주가 대공자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했다고 해도.

호법원의 업무가 멈추는 일은 있 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업무 와중에도.

분명 평소와 다른, 명백히 이질 적인 부분도 있었으니.

“•••그럼, 그 사건은….”

“•••알겠습니다. 보고를….”

전각 전체가 무거운 공기에 짓눌

리기라도 한 둣이.

호법원 인원들이 업무를 위해 의 사소통을 하는 목소리는 속삭이다 시피 했으며.

평소와는 달리, 업무 실수에 호 통을 치는 이도 없었고.

일상적인 자질구레한 잡담마저도 들을 수 없었다.

윗사람에 대한 험담마•저도, 작은 투덜거림마저도, 그들의 입에서 나 오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는.

달그락.

작은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이 들이, 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 자.

“•••죄, 죄송합니다.”

다 마신 찻잔들을 정리하던 이가 자신도 모르게 놀라, 고개 숙여 사 과를 할 정도였다.

‘•••허, 참.’

자신의 사무실 안 광경을 보던 호법원의 중간 관리자 하나가 속으 로 혀를 찼다.

호법원.

낙양검가 최대의 수사기관.

그런 호법원에 속한 이들은, 꺼 림칙하고 두려운 존재로 여겨졌으 며.

당연하게도 그렇기에 콧대가 하 늘을 찌를 듯이 높았던 호법원.

‘우리 호법원의 분위기가….’ 이제는 찻잔이 덜그럭거리는 소

리마저 신경이 쓰인 것인지, 다들 입에 달고 살던 차도 마시질 않고 있었다.

‘그런 호법원의 분위기를 하루아 침에, 이렇게 바꾸어 버리다니….’

이 원인은, 틀림없이….

중간 관리자는 슬쩍, 의자를 돌 려 서류를 보는 척하며.

열린 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그렇게 창밖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복도를 오가는 이들도.

사무 공간을 다니는 이들도.

취조 공간의 이들도.

그들은, 누구랄 것 없이.

무의식적으로.

업무 도중 자신도 모르게, 흘금 거리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쳐다보는 것을 누구에게 들키기

라도 하면 혼나기라도 하듯이.

감히, 내려다봐서는 안 될 것을 내려다보고 있기라도 하듯이.

그곳에는.

드넓은 호법원의 부지에서, 명백 히 호화스러운 전각이 존재했다.

호법원의 귀빈 응접용 전각.

그 안에는, 현재.

낙양검가의 대공자.

연소현이 있었다.

호법원.

귀빈 응접실.

대공자 연소현을 중심으로, 인원 들이 준비된 대형 탁자에 둘러앉은 가운데.

검가전장의 전장장은 중앙감찰각 소속의 화복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 고 있었다.

‘중앙감찰각이 대공자님께 충성 한다니….’

정확히는.

그를 통해서, 중앙감찰각주 독고 야연을 떠올리고 있었다.

백발백안(白髮白眼)의 귀신이라 불리는 독고야연이라면.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인 물.

‘•••그 독고야연이, 검을 바쳤다.’

전장장 자신이 바라던 것은.

중앙감찰각주가 대공자를 지지하 기라도 해 주면 좋겠다는 정도였었

다.

그런데, 지지하는 정도를 아득히 넘어, 충성을 바쳤다니.

이로써, 대공자 연소현은.

호법원과 감찰부라는, 낙양검가 내 양대 수사기관 전부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허허, 실로 대단하십니다.’

더 무슨 감상이 있겠는가.

그저 감탄할 뿐.

전장장의 시선을 눈치챈 연소현 이 그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여 준

다음, 육부장을 향Sfl 말했다.

“시작하지.”

연소현이 짧게 덧붙였다.

“본론부터.”

낙양검가 내(內).

어느 정원(庭園).

호법원주와 감찰부주의 대화도 본론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대공자가 호법육부장과 중앙감 찰각을 쥐고 있다는 것을, 드러냈 소.”

“•••그러면서, 그대와 본인. 우리 둘을 노골적으로 밀어냈지.”

감찰부주가 천으로 감싼 얼굴을 끄덕이자, 호법원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우리를 밀어내고 하려는 일은—.”

“필시.”

감찰부주의 나직한 목소리에 노 기(怒氣)가 실렸다.

“대공자는 우리의 영향력 없이 도. 자신이 원하는 이를 ‘무죄(無 罪)’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본가 전체에 보여 줄 셈이겠지.”

“증인 이십사(三十四)번은, ‘전장 장께서, 검가전장을 둘러싼 연씨

혈족들의 비리를 묵인하고 있었다’ 고 증언할 예정이었습니다.”

“적대적 증인이군.”

육부장의 말에, 연소현이 담담히 물었다.

“어떻게 처리했나?”

육부장은 조금의 지체 없이, 즉 시 대답했다.

“중인 이십사번은 넉넉한 금액을 쥐고 조금 이른 은퇴 생활을 하기 로 선택했습니다.”

그가 웃음기도 없이 말을 덧붙였 다.

“그는 더 이상 ‘적대적인 증인’이 아닙니다.”

“좋아, 계속 주시하도록.”

“예.”

누군가 끼어들 틈도 없이, 두 사 람의 회의가 이어졌다.

“ 다음.”

연소현이 서류를 다음 장으로 넘 기자, 순간 실내는 모두가 서류를 넘기는 소리로 가득 찼다.

“피의자 육(7느)번은, 현재 구금 증이며. 연씨 혈족이 전장의 자금 을 횡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문제는?”

“문제는 그 인물이, ‘자신은 분명 전장장께 보고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연소현이 피식, 마른 얼굴로 웃 었다.

“전장장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면, 자신이 당장에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나 보군.”

“ 예.”

“그렇다면, 살길을 줘야지.”

육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번엔 ‘사법거래(司法 去來)’를 통해, 무혐의 방면될 기회 를 주었습니다.”

이번 일에 대해 무혐의로 풀어 주는 대신, 더 큰 건수를 물어다 주었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말이지.”

연소현이 턱을 쓰다듬었다.

“주범 중 하나를 그냥 보내 주는 것은 마음에 썩 들지는 않는데?”

“그 부분은, 제가 보고드리겠습 니다.”

중앙감찰각주의 최측근, 화복이

입을 열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로 향했다.

“이번 감찰 도중, 피의자 육번이 저지른 별건(別件)의 비리를 찾아 냈습니다.”

그가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말 을 이었다.

“그자는 항시 추적을 받다가, 몇 개월 후에. 저희, 중앙감찰각에 의 해 체포 구금되어 별건으로 처벌받 을 것입니다.”

“좋군.”

연소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천 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나마, 자유를 느꼈다가 추 락할 때가 진짜 절망을 느낄 수 있 지.”

연소현이 서류를 넘기자, 다시금 실내가 서류 넘기는 소리로 가득 찼다.

“다음, 중인 오십(五十)번은….”

“그래서, 처리는?”

“그의 매제(味弟)가 운영하는….”

조금의 쉴 틈도 없이, 시간의 낭 비도 없이, 회의가 이어졌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강호는 눈이 핑글핑글 도는 것 같았다.

아니, 호화롭기 짝이 없는 실내 전체가.

천장이, 하늘이, 뒤집히는 것 같 았다.

‘이, 이것이....’

그 또한 과거, 감찰부 소속이었 으나.

말단에 불과했던 그가, 이러한 광경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바로, 사법 권력이라는 것인 가…?’

검가전장의 비리와 관련된 모두 의 운명이.

마치, 이 자리에서 결정이 되는 것만 같았다.

“십(十)번 피의자의 경우, 저쪽에 포섭된 것 같습니다.”

“처리는?”

“그것은 저희 중앙감찰각이….”

필요하다면, 죄를 없애 주고.

필요하다면, 죄를 만들어 준다.

입을 막을 필요가 있다면 막고.

입을 열 필요가 있다면 열게 한 다.

“•••그렇다면, 삼십칠(三十七)번과 백육십일(百大十一)번 중인은, 예정

대로 중인으로 서는 것으로….”

“•••구(九)번 피의자는 반드시 극 형(極刑)을 받아야….”

누가 어떤 증언을 해야 할지 결 정되고.

누가 어떤 벌을 받아야 할지 정 해진다.

호법육부가 부담이 될 만한 일 은, 중앙감찰각이 거들고.

중앙감찰각이 피하고 싶은 일은, 호법육부가 맡았다.

“강호.”

연소현의 목소리에, 강호가 제자

리에서 펄쩍 뛰었다.

“예, 예! 대공자님!”

넋이 나가 있던 강호를 쳐다보는 연소현의 눈초리가 묵직했다.

“집중해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 알겠습니다…!”

연소현의 명이 떨어지자.

정신을 번쩍 차린 강호가 전력으 로 회의에 집중했다.

연소현의 비서이긴 하다만.

이 자리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없

는 것이 그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연소현은 지금.

강호 자신에게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귀한 경험을 체험시켜 주고 있는 중이었으니.

“대공자님.”

이윽고, 회의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이들이, 전 장장의 목소리에 잠시 움직임을 멈 추었다.

“무엇이오?”

연소현이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 으며 대답하자, 전장장이 약간 떨 리는 목소리로 연소현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회의를 지켜본 바에 의하면...”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노인.

전장장은 강호가 보기에도, 동요 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대공자님께서는 이 늙은이를 구제해 주실 생각이셨군 요.”

호법육부도.

중앙감찰각도.

오늘 그들이 이 회의에 준비해 온 그 모든 것들은, 하루아침에 이 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대공자는 분명.

한참 전부터 이 일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만일, 이 늙은이가 오늘 대공자 님의 권유를 물리치고. 자리에 주

저앉아, 처음 생각대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면….”

그랬다면.

“그랬다면. 대공자님의 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셨을 겁니다.”

“아니.”

연소현이 즉답했다.

“그렇지 않소. 그대가 전장장에 서 해임되었을지라도. 이 모든 터 무니없는 혐의들에서는 벗어나게 해 주었을 것이오.”

전장장의 주름 가득한 얼굴에 의 구심이 걸렸다.

“이 늙은이가, 감히 대공자님의 손을 잡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대 공자께선 이 늙은이를 구명해 주셨 을 것이라고.”

전장장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 까‘?”

“물론.”

연소현이 단박에 고개를 끄덕이 며 말을 이었다.

“이 검가의 우직한 버팀목으로. 가주 부재의 시간을 지탱해 온 그 대에게, 그 정도는. 내가 해야 할 일이지.”

연소현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이 법정의 판관(判官)도 아니고, 이 가문의 수사기관의 일 원도 아니지.”

감히 끼어들 수 없는 두 사람의 대화에, 경청만 하던 이들의 시선 이 연소현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나는.”

연소현은 벼린 날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이 낙양검가의 대공자로서. 그 대의 충정은, 보답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오.”

“그래서, 만약.”

호법원주가 상황을 정리했다.

“대공자가 실제로, 우리의 영향 력 밖에서 전장장을 무혐의로 만드 는 데 성공한다면…?”

감찰부주가 고개를 저었다.

“상대는 그 대공자요. ‘성공한다

면’이 아니라, ‘성공했다’고. 우리는 그렇게 가정하고 움직여야 할 것이 오.”

“•••그렇지.”

그들은 점점 연소현이라는 인물 의 방식을 따라잡고 있었다.

“그 대공자가 그 정도 확신도 없 이, 육부장과 중앙감찰각주라는 귀 중한 패를 공개할 리가 없소.”

“이미, 예전부터 전부 준비를 해 두었겠지.”

명확한 근거가 없는 추측에 불과 했지만.

오히려, 상대가 연소현이었기에.

근거 따위가 없이도, 그들이 확 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장 집중해 야 할 곳은….”

“이미, 대공자가 손을 모두 써 버린 호법원과 감찰부의 내부가 아 니라….”

그들의 시선이 동시에, 저 멀리 를 향했다.

수목림 너머.

그 방향에 있는 것은.

“판결과 관계없이, 오늘 당장 전 장장의 불신임 투표가 진행될 곳.”

“장로원이군.”

호법원의 출구.

멀리, 아득하게 보이는 거대한 건축물.

그 권위와 힘을 느끼게 하는 장 엄한 장로원을 보며, 연소현이 미 소를 짓고 있었다.

“자, 이제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 는, 장로 놈들의 낯짝을 볼 차례인 가?”

칩거를 끝낸 이후.

연소현의 첫 장로원 방문이 시작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