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307화 (307/350)

제7편 둥하불명(燈下不明)

“그런데 본 대공자는. 굳이 호 법원주, 그대의 안내를 받을 생각 도, 이유도 없소이다.”

호법원주가 에둘러 표현했던 화 친 의사를 완전히 짓밟아 버린 연 소현.

순식간에 적막 속으로 빠져든 호법원의 안마당.

대공자 연소현을 마중하기 위해 서 모였던 인원들이, 전원 입을 다물고, 움직임을 멈췄던 것이다.

그 넓은 호법원의 안마당에.

옷깃 하나 스치는 소리도 들리 지 않았다.

대공자 연소현의 바로 뒤에 서 서 그를 수행하던 강호는, 그 자 리에서 도망을 치고 싶을 지경이 었다.

표정이 완전히 사라진 호법원주

의 얼굴에는 냉기(冷氣)마저 흐르 고 있었다.

만약.

그가 강호의 앞에 서 있는 대공 자 연소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 라, 강호 자신을 직접 노려보고 있었다면.

강호는 단 몇 초도 그 압박감을 견디지 못했으리라.

“꿀꺽.”

누가 삼킨 건지 모를 마른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 다.

“•••대공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연 것 은, 호법원주 본인이었다.

“본 호법원에 용무가 있는 것이 아니셨소?”

그의 검은 유리 같은 눈알이 검 가전장의 전장장을 향했다.

정치적 위기에 처한 검가전장의 전장장을 구하기 위해서는 호법원 의 협력이 필수가 아니던가.

호법원주의 말과 행동은 그것을 대공자에게 다시 주지시키기 위함 이었다.

“그렇지.”

의외로 순순하게 인정하는 대공 자 연소현.

“과연, 그렇지 않소?”

순순한 연소현의 대답에 순간, 호법원주의 표정이 풀리고.

주변인들이 멈췄던 숨을 다시 쉬는 그 순간에 연소현의 말이 이 어 졌다.

“그런데, 본 대공자가 용건이 있는 것은 호법원이지, 호법원주 그대가 아니라오.”

“•••뭣?”

눈을 부릅뜬 호법원주.

이번엔 그저 노려보는 것이 아 니라, 실제로 압력이 느껴졌다.

강호는 속으로 비명을 겨우 삼 켰다.

....

예를 차리느라 풍성한 옷자락 덕에, 자신의 떨리는 다리가 겨우 감춰졌다.

“대공자께서 잘 모르시나 본 데….”

이마에 혈관이 돋은 호법원주가 시퍼런 눈초리로 눈 한 번 깜빡이 지 않고 연소현을 내려다보며 말 했다.

“이 호법원주가 즉, 호법원이라 오.”

그 얼마나 광오한 말인가.

마름이 지주 노릇을 하는 격.

하지만.

가주가 쓰러진 이후, 낙양검가 의 권력을 사유화해 온 이들에게 는.

오만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 다.

이젠, 침묵 속에서 모두의 시선

이 대공자 연소현에게로 향했다.

“ 호오?”

하지만 의외로.

답변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감히, 본가의 대공자님 앞에서 내공을 끌어 올려?”

호법원주 개인이 자아낸 내공의 압력과.

마중 나온 호법원의 인원들이 자아내던 침묵의 압력 따위는, 조 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투.

“날도 더운데 피로 마당을 좀 식혀 보자는 건가?”

호법원 전체를 적으로 삼아도 상관없다는 말투에, 호법원의 전 투 인원들의 손이 슬금슬금.

자신들의 검으로 향했다.

“거, 좋지. 오늘 한번, 나랑 제 대로 놀아 보자고.”

하지만.

검으로 손올 가져가던 이들이 목소리의 주인이 앞으로 나서는 것을 보고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탈명귀검.”

누군가 중얼거린 그 이름에, 탈 명귀검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그래, 나다.”

그 말과 동시에.

그의 등에서 스르륵, 손도 대지 않은 검들이 뽑히기 시작했다.

“… 이기어검 (以氣取劍)!”

탈명귀검의 성명절기(成名絶技) 나 다름없는 그 수법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는.

적어도 낙양검가에는 없었다.

호법원주의 시선이 먼저, 탈명 귀검을 향했지만.

“좋아, 좋아. 호법원에 쓸 만한 무사가 그렇게 많다고 들었는데, 오늘 제대로 즐길 수 있겠어!”

탈명귀검은 신경도 쓰지 않았 다.

누군가 말리지 않는다면.

기어코 피를 보겠다는 각오에 가까운 귀기(鬼氣)가 느껴졌다.

다음으로 호법원주의 시선이 검 가전장의 전장장을 향했다.

하지만 수많은 경험으로 켜켜이

쌓인 전장장의 깊은 주름 아래서. 그 심중을 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전장장 의 눈에서 개입 의지를 찾는 것을 포기한 호법원주의 눈이.

이번에는 연소현의 수행원들에 게 향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하다못해, 한낱 하녀들마저도.

그 자리에서 연소현에게 중재의 말을 꺼내기는커녕, 오히려 한 걸 음 슬그머니 앞으로 내뻗는 것이.

언제라도 검을 뽑아 들 기세였 다.

결국.

호법원주는 마지막으로.

어쩔 수 없이, 대공자 연소현을 바라보았다.

피식.

그와 눈이 마주친 연소현의 입 가에서 노골적인 비웃음이 걸린

것을 보았다.

‘•••대체 뭐지?’

실컷 시간이 부족한 전장장을 여기까지 데려온 대공자다.

아쉬운 쪽은 대공자란 말이었 다.

‘그래서 내가 먼저 손을 내밀기 까지 했건만….’

대공자는 그 손을 쳐 내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노골적으로.

수하들의 무력 도발까지도 묵인 하고 있었다.

[원주님.]

상황을 지켜보던 호법원주의 측 근이 근거리에서 전음을 전했다.

[우리 호법원의 전력은 충분하 지만. 이대로 대공자와 무력으로 부딪치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상대는 이미 예전의 대공자가 아니었다.

[우리 측에 막대한 정치적, 물 적 손해밖에 남지 않을 겁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문제는-.

그의 시선이 다시 한번 대공자

연소현에게로 향했다.

더욱 짙어진 미소.

그 미소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 인가.

‘놈이 대체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자신에게, 고민할 수 있는 시간 O

‘대체 뭘 믿고 있는 것이지?’

그런 여유 따윈, 더 이상 없었 다.

‘제길...!’

그는 어쩔 수 없이, 먼저.

대공자 연소현을 향해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무례에 사죄드립니다, 대공 자님.”

주변을 둘러싼.

호법원의 인원들이 이를 악무는 것이 호법원주에게 느껴졌다.

분하리라.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내심 안 도하고 있는 것도 느낄 수 있었

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숙였음에도.

“자....”

탈명귀검의 검들은 그러건 말 건.

“ 해보자고.”

결국, 검집을 벗어나 완전히 뽑 혀 나왔다.

아연실색한 기색의 호법원 인원

들이 당황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그 순간.

“그만.”

연소현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 려 퍼졌다.

그리고 그때야 탈명귀검의 검들 이 다시 검집으로 돌아왔고.

검집에 검이 돌아와 꽂히는 소 리에, 여기저기서 흘러나온 안도 의 기색이 섞여 들었다.

“충 (忠).”

짧게 대답한 탈명귀검이 뒤로 물러서자, 연소현의 시선이 호법 원주를 향했다.

“그대의 사죄는 받아들이겠다. 허면-.”

“그런데.”

연소현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 에 호법원주가 손을 모아 들어 보 였다.

“알고 보니, 접객 담당 쪽에서 차(茶)가 전부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대로 손님을 맞이하면, 큰 결례 가 되겠지요.”

에둘러 한 표현이지만.

“그러니, 제대로 준비가 되면. 그때 다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명백한 축객령(逐客令).

연소현이 무엇을 바라는지는 몰 라도, 그것을 이곳에서 얻을 기회 조차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죄송합니다, 대공자님.”

입으로는 사죄의 말을 흘리면서 도, 둥글게 호선(孤線)을 그린 호 법원주의 시선이.

슬쩍 검가전장의 전장장을 향했 다.

웬만해서는 눈치조차 채지 못할 짧은 순간이었지만.

전장장의 눈이 그 짧은 순간 혼 들리는 것을, 분명 호법원주는 확 인했다.

‘이 내가.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줄 알았다면 오산이오, 대공자.’

이로서.

대공자 연소현은 시간만 버리 고, 발품만 헛되이 판 것이 되었 다…고.

적어도.

호법원주는 그렇게 판단했다.

“하핫.”

연소현의 짧고 시원한 웃음소

리.

“차가 없다니, 그것참 유감이구 려.”

‘•••뭐지?’

하지만 호법원주의 귀에는 그 웃음소리가, 마귀의 웃음소리보다 도 거슬렸다.

‘아직, 대공자에게 수가 남았단 말인가?’

아무리, 연소현에 비할 바가 아 니라 하더라도.

호법원주의 비상한 머리가, 연 소현의 여유로운 태도에서 순식간 에 번뜩임을 일으켰다.

‘설마…‘?!’

“하지만. 내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소이까?”

연소현은 능청스럽게.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본 대공자는 그대가 필요하지 않다고.”

그러면서 연소현의 시선이 여유 롭게, 한쪽을 향한다.

연소현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 로.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고개 를 돌린 호법원주였다.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무뚝뚝한 목소리.

그동안 구석에 묵묵히 서 있던 이가 앞으로 나와 연소현에게 고 개를 숙였다.

“제 수하들이 대공자님을 위한 차를 준비해 두었으니. 제가 모시 도록 하겠습니다.”

그 인물의 얼굴을 확인한 호법 원주의 입이 자신도 모르게 열렸 다.

“육(大)부장…!”

호법육부장(護法 7느部長).

호법원의 부장 중 막내.

근래 들어 이런저런 일을 많이 맡고는 있었지만.

평소에는 딱히 두각올 드러내는 일도, 마찰을 크게 일으킨 적도 없던 그가 어처구니없게도.

지금 이 순간, 호법원주를 정면 으로 거스르고 나선 것이다.

“지금 뭐 하나?!”

“제정신이야?!”

주변에서 기겁한 부장들이 외쳤 지만, 육부장은 그들에게는 시선 조차 주지 않았다.

“부디, 이쪽으로.”

눈치를 살피기는커녕.

오히려 한 발 더 나서서, 대공 자를 위해 직접 안내를 자청하기 까지 했다.

[육부장.]

그런 육부장의 귓가에 호법원주 의 전음이 찌르듯이 들려왔다.

[내가 이 이 일을 어떻게 받아 들일지는. 충분히 각오하고 있는 바겠지?]

경고.

하지만, 육부장은 마치 전음을

듣지도 못한 것처럼 태연하게 연 소현과 그 일행들을 안쪽으로 안 내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원주님!]

그 뒷모습을 서릿발 같은 시선 으로 쳐다보는 호법원주에게 측근 의 전음이 들려왔다.

[현재, 검가전장과 관련된 수사 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 바로, 호 법육부입니다!]

그리고 연소현의 볼일은 검가전 장과 관련된 것이 전부였다.

대공자 연소현은 정확하게.

미리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딱, 자신이 필요한 인원인 육부 장을 설득해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언제…?’

호법원주가 측근들에게 전음을 던졌다.

[호법육부는 검가전장 말고도, 현재 맡고 있던 굵직한 건수들이 제법 있지 않나?]

삼공자 측이 추진하던 ‘용봉지 회 경기장 건설 부지’와 관련된 수사 밑 법무 전반을 맡고 있는 육부장.

그런 육부장이 검가전장까지 담 당하고 있다고?

[대체 어쩌다가, 이 건까지도 호법육부가 맡게 된…!]

스스로 답에 도달한 호법원주가 이를 부득 갈았다.

‘중앙감찰각…!’

검가전장에 대한 수사의 첫 시 작은 분명, 중앙감찰각(中夫監察 閣)이었다.

그 중앙감찰각이 인원 부족을 이유로 호법육부에 수사 공조를 부탁했던 것이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호법육부가 검가전장의 수사까

지 참여했고.

지금까지 호법육부에서 모든 수 사 과정을 보고하고 있었기에.

호법원주 자신 또한, 문제를 느 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길…!’

호법원주는 체통도 잊고, 자신 도 모르게 이를 부득 하고 갈았 다.

이 건은, 눈뜨고 코 베인 수준 이 아니었다.

웅성웅성.

대공자를 맞이하기 위해서, 모 아 두었던 이 수많은 호법원의 인 원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웅성웅성.

자신이 직속 수하에게 뒤통수를 얻어맞는 모습이, 너무도 적나라 하게 드러나 버린 것이다.

“호법 원주.”

그 웅성임을 뚫고, 대공자 연소

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법육부장의 안내를 따라서 이 동하던 그가, 그렇게 멈춰서 돌아 서서 입을 열자.

호법원의 인원들이 길을 열어, 호법원주와 연소현 사이에서 피했 고.

“호법원의 주인 노릇이 하고 싶 었다면, 호법원에만 충실할 것이 지. 왜 본가 정치판에까지 기웃거 렸소?”

호법원주는 연소현의 입가에 걸

린 조소(톄笑)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자기 식구들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통솔도 제대로 못 하는 것이지.”

호법원주의 귓가에 멀어지는 연 소현이 쯧쯧, 하고 혀를 차는 소 리와.

주변의 인원들이 옹성거리는 소 리가, 영원히 그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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