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306화 (306/350)

제5편 대공자의 위상(位相)

이른 오전.

낙양검가.

검가전장(劍家錢場), 본점(本店).

검가전장은 해가 높이 솟은 다음 에야, 느긋하게 개점하여 이용객들 을 웅대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악명 이 높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돈을 쥔 쪽은 저쪽이니, 아쉬운 쪽이 참아야지.

하지만.

오늘의 검가전장 본점은 달랐다.

“어허…! 자네! 아직도 거리 청 소를 끝내지 못했는가!?”

점검을 하러 나왔던 검가전장의 중간 관리직이 놀라 외쳤다.

“아이고, 어르신…!”

하인들이 손사래를 치며 송구한 듯 고개를 숙여 보였다.

“사람을 세 배나 더 쓰고 있습니 다요! 이 정도면 평소보다 훨씬 빠 르고 깔끔하게 진행되는 중-.”

“되었네!”

평소라면 하인들에게 잔소리나 한껏 퍼부으며, 기강을 잡으려 했 을 중간 관리직이었지만.

“그거 이리 주게…!”

“ 어르신?!”

오히려 그가 여유분의 빗자루를 들고 거리를 쓸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하인들이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중간 관리직이 그의 부하들을 다그 쳤다.

“지금, 구경났나?! 너희는 뭣들 하고 있는 것이야?!”

거드름이라는 거드름은 전부 피 우던 검가전장의 직원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모습에 하인들이 당 황한 것도 잠시.

그들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십니다…!”

멀리서, 검가전장의 직원 하나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오며 외쳤다.

“대공자께서 오십니다!”

그것은 진풍경이라 할 만했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검가전장.

그것도 본점의 전 인원이 입구에 도열(增列)하여 허리를 깊이 숙여 누군가를 맞이하는 일은.

지극히 전례가 드문 일이었으니.

깊이 숙인 이마에서 홀러내린 땀 이 대리석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마 저 들릴 것 같은 침묵 속에서.

저벅, 저벅.

검을 찬 시녀들과 하녀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지만.

그들의 귓가에는 연소현의 발걸 음 소리만이 너무도 선명하게 들리 고 있었다.

과거.

낙양검가의 주인이 방문했으면,

이러했을까.

아니었다.

지금, 이들은.

그때보다도 더, 외경(뷰敬)에 짓 눌려 있었다.

‘사신 (死神)….’

여기 모인 이들 중.

대공자 연소현이 마지막에 검가 전장을 방문했던 그 날 밤을.

꿈에라도 잊은 이는 없었다.

“저항하는 이는 빠르게 제압하

라!”

“살상 허가가 내려졌다!”

밀어닥쳐 들어오던, 중앙감찰각 의 붉은 정복을 입은 인원들.

그들의 손에 들린 검에는, 체포 에 불응하고 저항하던 검가전장의 부패한 직원들의 붉은 피가 묻었으 며.

그들의 발걸음은 하얀 대리석에 붉은 피로 점점이 찍혔고.

붉은 피를 토하는 이들의 비명이 끊이지를 않으니.

그 공기마저도 붉디붉었던 날이 었다.

그리고.

“한 놈도 빠짐없이. ”

그 가장 선두에는.

“전부 잡아들여라.”

대공자 연소현이 있었으니.

그날을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검가전장의 직원들에겐.

대공자 연소현은 사신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물론.

연소현을 두려워하는 이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오랜만이오, 전장장.”

석상처럼 굳어 있는 직원들의 끝 에서.

환한 미소로 연소현을 맞이하는 검가전장의 전장장(錢場長)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전장장의 집무실.

하얀 아침 햇살이 실내를 비추 고, 다향(茶香)이 은은하게 집무실 을 맴도는 가운데.

“중앙감찰각 및 수사기관에서 들 어오는 협조 요청에는, 어떻게든 전면적으로 임하라 지시를 내려놓

았습니다.’’

전장장은 대공자 연소현에게, 당 연한 둣이 상석(上席)을 양보하며 말했다.

“전장장께서, 고생이 많소.”

담담하게 노고를 치하하는 연소 현의 말.

“내원 쪽에서 상당히 가혹하게 수사를 진행 중이라고 들었소.”

기회를 잡은 내원총관은 집요할 정도로 철저하게, 검가전장을 물어 뜯는 중이었다.

“고생이라니요.”

단정한 차림새의 전장장은 가볍 게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 다.”

말뿐만 아니라.

마지막에 만났을 때보다도, 그는 실제로 마음이 한결 안정을 찾은 듯했다.

“가문의 돈을, 제 돈처럼 여기고. 또 가문의 힘을 제 힘처럼 여기던 이들입니다. 그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처분을 받는 것이고, 저는

그는 잠시 말을 고르느라 잠시 뜸을 들였지만.

연소현은 전장장이 뜸을 들이는 이유가, 대공자의 앞에서 해도 될 언어를 고르기 위함이며.

그 마음과 각오는 두꺼운 돌기둥 처럼, 이미 굳건하게 서 있음을 알 고 있었다.

“•••저 또한. 그동안 그들을 제대 로 내부에서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책임이 막중함을 알고 있습니다.”

노인은 그날 밤, 연소현을 만났 을 때처럼.

한없이 겸손하고 정중하게 말했 다.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면, 얼마든지 책임을 지겠습니다.”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연소현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 장로원에서 시 작될 그대에 대한 ‘불신임(不信任) 투표’를 알고도 아무런 조치도 취 하지 않았던 것이오?”

불신임 투표가 장로원에서 과반 을 넘겨 통과되면.

전장장은 자리에서, 모든 것올 놓고 물러나야만 했다.

“그대의 정적(政敵)들이 이 기회 를 놓치지 않고, 그대를 물어뜯으 려 하고 있소.”

전장장은 오히려 검가전장 개혁 을 위한 결정적인 제보와 도움을 주었지만.

그의 오랜 정적들이, 이런 절호 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으니.

그들이 책임론을 꺼내 들고, 장 로원에서 불신임 투표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저, 물러나는 것으로만 끝나 지 않을 것이오.”

연소현이 조용한 어조로 경고했

다.

“그대의 정적들은, 이미 연씨 혈 족들과 손을 잡았소.”

그들은 공통적으로, 연소현에게.

그리고 연소현을 도운 전장장에 게 분명한 원한이 있었다.

“•••방임(放任) 또한 죄가 아니겠 습니까?”

창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통 해.

연소현이 들여다본 노인의 눈은 놀라울 정도로 맑았다.

욕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눈.

“이 늙은이 하나를 잡기 위해서, 그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헛되이 소 모한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요.”

“•••그들은 그대의 뼈마디도 남기 지 않고 씹을 것이오.”

“허허, 이미 삐걱거린 지 오래인 늙은이의 뼈마디를 씹어 봐야. 씹 는 맛도 없을 것입니다.”

고고한 정신.

결연한 각오.

하지만.

연소현은 그런 것들이 마음에 들 지 않았다.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노인의 태도는.

마치.

무검자 시절.

제암진천경에 의해 회귀하기 전 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으니까.

그렇기에, 연소현은.

노인이 자신과 같은 전철(前輸) 을 밟게 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요즘. 본가가 많이 바뀌고 있 소이다.”

두서도 없이.

뜬금없이 나온 연소현의 말에, 전장장은 조금 혼란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예, 예. 그렇습니다.”

어쨌든 연소현의 말은, 일단 사 실이 사실인지라.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요즘 이런저런 수사와 조 사에 불려 다니느라 바쁘다 보니. 제대로 직접 듣거나 보지는 못하고

있지만.”

연소현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대공자께서 훌륭한 성과를 거두 고 계시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습 니다.”

그런 노인의 미소를 보며, 연소 현은 확신했다.

이 노인은 지금.

검가전장에서 벌어졌던 온갖 비 리와 범죄에, 제대로 손을 쓸 수 없었던, 자신이.

그 스스로가 연소현에게 큰 정치 적 부담이 될까, 스스로를 희생하

려 하고 있었다.

“그래, 그렇소.”

연소현은 짐짓 어깨를 으쓱였다.

“몇 주란 시간 만에, 나는 많은 것을 바꾸었지. 아직은 턱없이 모 자라긴 하지만.”

느긋한 자세로 몸을 뒤로 기대며 말을 이었다.

“그대는 보고 싶지 않소?”

“•••무엇을 말입니까?”

고아하게 꾸며진 천장을 올려다 보며, 연소현이 답했다.

“내가 본가에서 이 모든 일을 끝

내면. 본가가 어떤 모습이 되어 있 을지, 궁금하지 않소?”

그 말에 노인이 쓴웃음을 지었 다.

“보고 싶지요, 대공자님. 물론 당 연히 궁금합니다.”

연소현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 모습을 내 곁에서 보고 싶지 않은 것이오?”

“그건-.”

연소현이 전장장의 말을 끊으며, 질문을 이었다.

“나와 함께 그 모든 역경과 고난

을 넘어. 훗날, 완전히 탈바꿈된 본 가를 보고 싶지 않은 것이오?”

연소현이 그 모습을 그리기라도 하듯이, 천장을 보며 허공에 손을 저어 보였다.

“진정한 천하제일가의 모습.” 대번에 머릿속에서 그 모습이 아

른거렸다.

그것은 결코.

대공자 연소현의 말 몇 마디와 허공을 수놓는 손짓이 그만큼 사실 적인 묘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 니었다.

“정명한 가주 아래, 하나로 통일 된 진짜 낙양검가의 위용.”

그것이 노인의.

평생의 숙원(宿願)이자.

인생의 소원(所願)이었기 때문이 었다.

“사패천이니, 뭐니, 할 것 없이. 감히 그 누구도 그 앞에서 허리를 펼 수도 없을 압도적인 힘!”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 물며, 자신도 모르게 의자의 팔걸 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늙은이의 연약한 뼈마디라고 했

던가.

“사해(四海)를 넘고, 대륙을 넘 어, 해외의 열강(列强)들 사이에서 도 뚜렷하게 울려 퍼지는 낙양검가 의 이름!”

그 말과는 달리, 전장장이 단단 히 틀어쥔 팔걸이가 도리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정녕, 그대는!”

느긋한 자세로 천장을 올려다보 던 연소현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 나, 꼿꼿한 자세로 전장장을 바라 보고 있었다.

겨우 몇 주 사이에, 키라도 커버

린 것인가.

전장장을 내려다보는 연소현의 모습은, 그 위압감은.

감히 이제는 누구도 소년이라 칭 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대는 그런 낙양검가를 직접 그 손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인 가?!”

대공자의 검고 투명한, 깊은 눈 이 노인의 눈을 꿰뚫고, 그 영혼을 직시하고 있었다.

전장장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제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암, 보고 싶고말고요!”

그는 자신도 모르게, 노구를 일 으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채였다.

“그리고 당연히 제 손으로 본가 를 새로이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조금 전까지.

묵묵히 자신을 희생하기 위해, 자신을 눌러오던 노인은 없었다.

“누가 하지 말라고 해도! 누가 말려도 하고 싶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그 옛날.

뜨거운 가슴 속에 풍운(風雲)의

뜻을 품고, 낙양검가에 투신했던.

그 젊은이의 심장을 가진, 지칠 줄 모르는 투사(圈士)가 있었을 뿐 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이와 함께 켜켜이 쌓여 온 경험과 지혜가 그의 발목 을 잡고 있었다.

“대공자께서 이 늙은이를 보호하 는 일에 힘을 쓰시는 것은, 지극히 소모적인 일이 될 것이옵니다.”

아무리 둥근 사람이라도.

권력을 가진 위치에 있다면, 정 적은 습한 지하실의 곰팡이처럼 자

연스럽게 생겨난다.

거기다 하물며.

대공자와 수사당국에게 적극적으 로 협조했던 일로 인해, 원한과 원 망까지 폭발하여.

새로운 적들까지 생겨난 상태.

“대공자께서는 이 늙은이의 시체 를 밟고서라도, 본가를 더 나은 곳 으로 이끌기 위해서, 한 발이라도 나아가셔야-.”

“아니.”

연소현이 그의 말을 끊었다.

“시체가 되어, 다른 이들의 길이

되고, 도로가 될 일이 있으면. 이 내가.”

연소현이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 켰다.

“이 연소현이 가장 먼저 시체가 될 것이다.”

어느새 대공자의 말투는 하대로 바뀌어 있었지만,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만 느껴졌다.

“나는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는 다.”

어찌 이리도 오만한 말인지.

그 말을 하는 것이, 대공자가 아 니라, 다른 이였다면.

전장장은 대뜸에, 현실을 깨달으 라며 호통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역으로.

연소현이었기에.

‘나는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 왔다.

“•••대공자님. 지금이라도 방법이 있겠습니까?”

전장장의 눈에 돌아온 투지 (K 志)를 보며, 대공자 연소현이 미소 를 지었다.

“그대가 조사와 수사에 쫓겨. 정 말로 바깥일에 신경을 못 쓰고 있 었나 보군.”

그 미소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이 연소현의 위신이 본가에서 얼마나 바뀌었는지. 이제부터 직접 보게나.”

검가전장의 전장장이라면, 아무 리 당장 지금 위치가 위태롭다 한 들.

낙양검가의 최고 권력자 중 하나 건만.

전장장을 발견한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슬쩍.

고갯짓으로 인사를 건네는 것뿐 이 아닌가.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콧대 높은 검가

전장의 고위층 누구도, 그 중년 무 사에게 감히 무례를 따지지 못했다.

검가전장의 무사들은 심지어.

혹여라도 그 중년 무사의 눈에 들까 두렵다는 둣이, 그의 시선에 서 비켜서 있었다.

무려, ‘다섯 자루의 검’을 방만하 게 늘어뜨리듯 차고 있는 모습.

그저 삐딱하게 서 있는 것만으로 주변을 모두 내리누르는 그 모습에 서.

전장장은 그 중년 무사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탈명귀검 (奪命鬼劍)

혈신악귀(血神惡鬼), 오검광인(五 劍狂人), 강남의 악몽(惡夢)이라 불 리며.

낙양검가의 적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무사(武士).

‘•••검가의 가장 흉포한 검이 대 공자께 검을 바쳤다는 정보가 사실 이었군.’

“나오셨군요.”

탈명귀검의 모습에 시선이 쏠렸

던 것도 잠시.

전장장의 시선은 대공자를 맞이 하는 젊은이에게로 향했다.

“강호.”

대공자 연소현의 입에서 청년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예, 대공자님. 대공자님의 전언 은, 전부. 전달 완료했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손을 모 아 대공자에게 고하는 청년의 모습.

‘강호라는 이름. 분명, 보고에서 들은 적이 있군.’

그 대공자의 전언이라는 것이 무

엇인지, 신경 쓰일 법도 했건만.

전장장의 시선은 그 강호라는 청 년에게로 향했다.

“강호라면, 혹시 자네는 강씨 집 안의...?”

강호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살짝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 예. 그렇습니다, 전장장님. 저는 부족하지만 대공자님의 비서 를 담당하고 있는 강호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부끄럽다는 둣이 고개를 숙 여 말을 덧붙였다.

“제 조부께서는, 황도에서 황제

폐하를 모시고 계십니다.”

“과연…!”

그 표현.

황제 폐하를 모신다는 말은, 겸 손한 표현이었다.

강호의 조부인 강상(姜尙).

그는 이미 두 황제를 걸쳐 재상 직을 역임했던 바가 있었으며.

얼마 전, 다시 재상직으로 돌아 온 이였으니.

가문도 아니고, 개인이 단독으로 세 번의 재상을 역임한 중원국 최 고의 실력자 중 한 명이었다.

그 이름 높은 검가전장의 전장장 조차도, 감히 함부로 이름을 입에 올릴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대공자께선, 그런 인물의 손자 를 한낱 비서로 부리고 계신단 말 인가?’

재상의 손자라니.

굵직한 직함 하나 쥐여 주고 적 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마저도, 충분히 부담스러운 일인 것을.

대공자 연소현은 그런 인물을 비 서로 삼아 곁에 두고 수족처럼 부 리고 있었던 것이다.

전장장은 아연한 표정으로 대공 자를 바라보았지만.

연소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으로 주변을 향해 명했다.

“뭣들 하느냐. 움직여라.”

낙양검가의 어느 대로.

검가 내에서 검가 내로 이동하는 모든 검가의 인원들은, 특별한 사 유가 없는 한 반드시 제 발로 걸어 야한다.

그것은 낙양검가의 상무정신(尙 武精神)을 보여 주는 가장 대표적 인 규칙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탓에,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이들의 화려한 행 렬로, 넓은 대로가 곳곳에서 정체 를 빚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어허, 그쪽이 조금만 오른쪽으 로 피하면 될 것을…!”

“무슨 소리! 그쪽이야말로 조금 기다렸다가 가면 될 것이 아닌 가?『

각기 다른 복식이지만, 집사들로 보이는 이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서로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아니, 지금 내가 모시고 계신 분께서 어떤 분이신지 아는가?! 감 히…!”

“감히? 감히는 이쪽이 할 말이 지! 그쪽이야말로 내가 모시는 분 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가?!”

시뻘겋게 얼굴을 달구며, 서로 길을 막고 선 행렬의 아랫것들이

입에 침을 튀기고.

서로의 무사들이 검을 만지작거 리며 지긋이 눈빛을 교환하는 모습 으

결코,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은 아 니었다.

그럼에도.

“ 어흠.”

“험험.”

그들의 주인이 되는 이들은 뒷짐 지고, 그 꼴을 구경만 하고 있었으 니.

비슷한 덩치의 권력자끼리 이렇

게 마주치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비켜설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이.

이 넓은 낙양검가의 대로에 정체 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길을 비켜라!”

그 모든 것이.

“본가의 대공자께서 행차하신 다!”

그 외침 한 번에 정리되었다.

“대, 대공자님?!”

핏대를 세우던 집사들이 깜짝 놀 라 고개를 돌려 각자 주인들의 의 향을 살폈다.

상대가 대공자인지라, 비킬 때는 비키더라도.

주인의 허락 없이 먼저 마음대로 길을 텄다가는, 나중에 치도곤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뭣들 하고 있는 것이야?!”

하지만 막상 그들의 주인들이 가 장 당황하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그들은 체통도 잊 고, 이미 길가로 화들짝 물러나 소 리쳤다.

“어서 길을 터야 할 것이 아닌 가?!”

“빨리 길을 비워라!”

그들이 후다닥 길을 비키기 무섭 게, 대공자의 행차가 들이닥쳤다.

거드름을 피우던 주인들은, 혹시 얼굴이 보일세라 머리가 땅에 닿을 둣 고개를 숙였고.

아랫것들은 감히 허리도 펴지 못

하고 바닥에 그대로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그 광경은 그 한 곳에서 만 펼쳐지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 길을 비켜라!”

마차를 탄 채, 낙양검가를 방문 했던 지체 높은 외부인도.

낙양검가에서 어깨에 힘을 준다 는 그 어떤 권력자도.

“대공자께서 행차하신다!”

대공자 연소현의 행렬이 지나가 는 모든 대로에서.

감히, 그 누구도.

그 앞을 가로막지 않았다.

가로막기는커녕, 심지어 옆을 피 해서 걷는 일도 없었다.

누구도 강제하지 않았지만.

누구랄 것 없이.

그 모두가 길가로 비켜서 깊이 예를 표하며, 대공자 연소현의 행 렬이 지나가길 얌전히 기다릴 뿐이 었다.

••••••

그 행렬의 가운데서.

검가전장의 전장장은 겉으로 드 러내지는 않았지만.

‘그 대공자께서, 이제는….’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감 정을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얼굴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 를 숙인 권력자들과 실력자들의 모 습.

그들의 모습에서 선연하게 느껴 지는 것은, 분명.

대공자 연소현을 향한 두려움과 존경.

즉, 외경(良敬)이었다.

“감회가 새롭소?”

무장한 하녀단의 병력 사이에서 걸음을 옮기던 연소현이 짐짓 미소

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새롭다마다요.”

전장장은 주름 가득한 얼굴에 미 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겨울이 끝나 가던 무렵부터 지 금까지, 고작해야 대략 반년에 불 과했거 늘….”

올해가 시작될 무렵만 해도.

그 누구도, 연소현을 낙양검가의 권력자라 생각하지 않았다.

권력자는커녕, 후계자로 대접하 는 이들조차 볼 수 없었다.

그런 취급을 받던 대공자 연소현

이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 누구도 감히 그 가 낙양검가의 대공자라는 것을 부 정하지 못하는 위치까지 다다른 것 이다.

“•••겨우 대로를 걷는 것만으로 도, 그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가 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대공자님.”

허허,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전 장장에게 연소현이 피식 미소 지어 보였다.

특유의 오만한 미소였다.

“겨우, 이 정도에 놀라지 마시오. 아직 전장장의 문제는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았잖소?”

그렇다.

아직, 대공자 연소현과 함께 대 로를 걸은 것뿐.

이리저리 뒤엉킨 채로 방치되어, 깊어져만 가던 자신의 문제는 아직 하나도 해결된 바가 없었다.

“그렇지요. 하지만….”

전장장은 한결 가벼운 얼굴로 답 할 수 있었다.

“어째서인지, 여기서부터 모든

일이 술술 풀려 나가도, 이 늙은이 는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 호오?”

연소현이 짐짓, 자신의 턱을 쓰 다듬으며 말했다.

“더 이상 놀라지 않으실 것이라 고?”

그리고.

그들 행렬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무렵.

“아니, 대공자님. 이곳은….”

전장장은 자신이 했던 말과는 다

르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호법원이 아닙니까?”

“그렇소.”

그 화려하고 웅장한 전각을 배경 으로, 연소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대의 말처럼, 이곳이 바로 낙 양검가 내부의 모든 범죄를 조사하 고 수사하는 호법원이지.”

전장장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검가전장은 지금 이 호 법원에 수사를 받는 상황인데….”

평소의 검가전장과 호법원은, 전 장과 수사기관이라는.

마치, 소와 닭 같은 데면데면한 관계였지만.

검가전장이 수사 대상이 된 지금 은, 용담호혈(龍譚虎穴)이나 다름없 는 곳이 아니던가.

“전장장. 지금 불거지게 된 그대 의 책임론은 이 수사 과정에서 시 작된 것이 아니오?”

“그것은 그렇지만-.”

연소현은 당황한 전장장을 보면 서,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 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 매듭을 풀려 면, 가장 먼저 이 호법원에서 풀어 야 하는 것이지.”

“대공자님…, 하지만!”

연소현이 대공자로서 위엄을 되 찾았다지만.

호법원은 결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매듭을 풀겠다고 어설프게 가위 를 들이대 봤자, 가위질은커녕 역 으로 묶일 정도로.

권력 간 이해관계에 의해 얽히고 설킨 것이 바로 수사기관이 아니던 가.

“수사기관과의 거래는 충분한 사 전 준비 끝에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

“그대에겐 그럴 시간이 없잖소?”

사실이었다.

장로원에 의한 전장장의 불신임 투표는, 바로 오늘.

충분한 사전 준비와 신중한 접근 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대공자님-.”

전장장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 다.

“열어라.”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호법 원의 정문이 활짝 열렸던 것이다.

그리고.

전장장은 자신이 했던 말이 무색 하게.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본가의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정문까지 나와, 연소현을 맞은 것이, 다름 아닌.

“오랜만이오, 호법원주.”

호법원주(護法院主).

호법원의 총책임자이자, 검가에 서도 손꼽히는 권력자이며, 그리고 장로원의 기둥 중 하나인 그가.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공자 님.”

그 호법원주가 직접, 대공자 연 소현을 맞이하러 정문까지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군. 본 대공자가 칩거를 끝 낸 이후 처음인 것 같소?”

떨떠름한 표정의 호법원주.

그리고 얼굴에 비틀린 미소를 띤 연소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 했다.

하지만, 결국 호법원주는 답변을 하기 위해서 입을 열 수밖에 없었 다.

“•••그렇습니다.”

호법원주의 표정이 한층 더 떨떠 름해졌다.

칩거를 끝낸 이후, 그 모든 사건 에서 호법원주는 그동안.

단 한 번도, 연소현에게 유리하 게 일을 처리했던 적이 없었다.

비록, 그렇다고 연소현을 노골적

으로 적대하지는 않았지만.

결코, 그들은.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

“본 대공자는 그저 호법원을 방 문하겠다고 알린 것뿐인데. 이렇게 호법원주가 손수 맞이하러 나와 주 다니.”

연소현이 껄껄하고 웃어 보였다.

“이거, 영광이오.”

호법원주가 굳은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공자께서, 방문하시겠다고 하시는데, 제가 직접 나와야지요.”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전장 장은 느낄 수 있었다.

‘이 모습은-.’

인정받지 못하던 검가의 대공자 와.

검가의 최고 권력자 중 하나인 호법원주.

그들의 뒤바뀐 관계를 보여 주고 있는 광경이었다.

“•••대공자님. 자, 안으로 드시지 요.”

호법원주가 맨손을 펼쳐 안쪽을 가리켰다.

“제가 두 분을 직접 안내해 드리 도록 하겠습니다.”

전장장은 그 모습에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것은, 호법원주 나름의 의사 표현인가.’

지금의 연소현과 검가전장을 놓 고 지저분한 다툼을 벌일 생각이 없다는, 그런 우회적인 표현.

‘다행이군…. 일이 어떻게든 풀릴 것인가.’

연소현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워 준 것 같던, 전장장은 속으로 약간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고맙소.”

하지만.

연소현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 았다.

“그런데 본 대공자는. 굳이 호법 원주, 그대의 안내를 받을 생각도, 이유도 없소이다.”

“……I*

호법원주가 내밀었던 화친(和親) 의 의사를 그대로 짓밟아 버리는 연소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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