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304화 (304/350)

제3편 성지 계곡(聖地潔谷)

“그, 그만…!”

연비가 히익히익 가쁜 숨을 몰0} 쉬면서 미약하게 저항을 해보았지 만.

“아니, 겨우 이 정도를 먹고 배 가 부르다니…!”

이공녀 연서린은 멈출 생각이 없 는지, 또다시 숟가락에 고기를 가 득 쌓아 연비에게 먹였다.

“이 녀석아. 네가 이렇게 소식이、

食)을 하니, 키가 크지 않는 것이 다…!”

연소현 덕분에.

크게 긴장이 풀렸던 탓일까.

식사와 함께 반주를 몇 잔 했던 것뿐이지만, 연서린의 얼굴은 발갛 게 취기가 올라 있었다.

그녀가 술 냄새 풀풀 나는 입김 을 뿜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네 어머니께서 내게, 너를 살펴 봐 달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셨 는데, 이대로는 훗날 저승에서 네 어머니를 뵐 면목이 없다…!”

마치 유언이라도 받들듯, 결연한

어조.

“아니, 누님…!”

입에 한가득 음식이 들어찬 채 로, 연비가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 다.

“제 어머니는 살아 계시거든요?! 그저 밖에 나오시지 못하는 것뿐이 지…! 그러니 돌아가신 것처럼 말 씀하지 마시지요!”

“어허!”

연서린이 인상을 팍하고 쓰자, 안 그래도 강인한 그녀의 인상이 한층 위압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히익...!”

연비가 움찔하고 움츠러들자, 연 서린이 그렇게 사뭇 진지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소현아.”

요..

소현이라니.

“누, 누님? 저는 큰형님이 아니 라, 연비-.”

그의 말은 끝맺음을 맺지 못했 다.

“소현아. 아무리 네 무공이 고강 하다 한들. 그 키와 덩치 가지고는, 모든 위력을 끌어올릴 수가 없단

다.”

아무래도, 취할 대로 취해 버린 그녀는 연소현과 연비를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공의 근본은 심(心), 기(氣), 체(體)의 조화! 육신의 성장은 식사 에 있다!”

“저, 저는 애초에 독인(毒人)이라 이 이상 성장할 수 없는-!”

그렇게 연비가 외치며 입을 벌리 자, 그 안으로 고기가 또 한 움큼 들어갔다.

“읍읍…!”

그리고 그 광경을 보는, 삼공녀

연다은과 사공녀 연다혜는 새빨간 얼굴로 발까지 굴러 가며 박장대소 를 하고 있었다.

어른에게 술을 배워야 한다는 연 서린의 취지는 사라진 지 오래.

그들은 이미 만취 상태였다.

“맨날 이 누님들을 피해 다니더 니. 연비 녀석, 꼴좋다!”

“둘째 언니! 균형을 위해선 채소 섭취도 중요해요!”

•••어째서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연비가 누님들을 피해 다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끄에엑-!”

품격 있는 연씨 가문 형제자매들 의 오찬(午쓰)으로 시작된 가족 모 임은 이미 난리 통으로 변해 버린 지 오래였다.

“쿡쿡.”

떨어진 자리에 홀로 앉은 연소현 은 술 향을 즐기며, 나직하게 웃었 다.

혹자는 뼈대 있는 가문의 자제들 이 추태를 벌인다고 손가락질을 할 지 몰라도.

그 광경을 바라보는 연소현은 그 난리 통이 그저 반갑기만 하고.

심지어.

어딘가 그립기까지 했다.

‘••♦이런 모습이 얼마 만인가.’

황보세가로 시집을 간 자신의 큰 누님이나.

지금은 동석(同席)할 수 없는 둘 째와 셋째 형제들을 제외하고서라 도.

이렇게 가족이 모여, 이리도 가 족다운 분위기를 가졌던 것이, 얼 마나 오래된 일인지.

그것은.

앞서, 고통과 후회로 점철된 한 번의 생애를 살았었던 연소현에게

는 더욱더, 간절하고.

애절하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콰당!

의자가 밀려 쓰러지는 소리가 연 소현의 상념을 깼다.

“누님들 밉습니다! 밉다고요!”

연소현이 그렇게 감상에 젖어 있 는 사이.

“우아앙-!”

지원군이 없이 홀로 고독한 싸움 을 벌이던 연비가 눈가에 눈물이 그렁한 채로 도망쳤다.

“잡아라!”

“잡아서 오동통하게 만들어 주 지!”

이히히, 하고 웃으며.

연다은과 연다혜가 벌떡 일어나, 연비를 쫓아 달려 나가버렸다.

취기로 인해 중간에 연다은의 발 이 꼬여 연다혜를 붙들고 자빠진 것은 덤이지만.

“아니, 언니?! 왜 거기서 나를 붙들고 넘어지는 거야?!”

“너야말로, 겨우 그걸 못 버티 니?!”

둘이서 투덕거리면서도, 벌떡 다

시 일어나서 연비를 쫓아간다.

“아앗?! 도망가잖아!”

“게 섯거라!”

평생을 공녀로 살아온 아이들이 라.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저번 일 에서, 큰 마음의 상처를 받을까 걱 정했건만.

그런 연소현의 걱정은 기우에 불 과했던 모양이었다.

“이 오라비를 원망하지는 않는 것이냐?”

“원망 따윈 하지 않아요. ”

지난날.

피바다가 되었던 검가전장에서 불안해하던 연소현의 손을 꼬옥 잡 아 주었을 때 느꼈듯.

‘강한 아이들이야.’

그녀들의 어머니인 하(夏) 태상 부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음냐-.”

쿵, 하고.

만취한 연서린이 결국 고개를 식 탁에 처박고 잠들어 버렸다.

연소현은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흑잠사 외투를 곯아떨어 진 연서린에게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엉망이 되어 흘 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려 정리를 해주었다.

그 손길은, 지나칠 정도로 섬세 하고 꼼꼼하며.

또 세심하기까지 했다.

‘잘 돌아왔소, 누님.’

그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공간을

둘러보았다.

형제자매들의 식사 자리가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찰나처럼 짧은 순간이었 지만.

이 순간의 기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소중한 보물이 되리라.

잠시, 지금의 순간을 되새기듯, 눈을 감았던 연소현이 조용한 발걸 음으로 자리를 빠져나갔다.

“음냠냠.”

연서린은 잠들었고, 연비는 도망 쳤고, 쌍둥이들은 그를 쫓아갔으며, 연소현은 퇴장한 공간이었지만.

그 공간에는 훈훈함만이 남겨져.

그저 가득했다.

시녀장 정아에게 연서린을 부탁 하고, 연소현은 오랫동안 꺼내지 않았던 무명옷을 입었다.

가난한 서생들이나 입을 법한 흰 무명옷.

무검자가 멸칭이던 시절.

그가 몰래 저잣거리를 구경하기 위해서 입고 다녔던, 바로 그 옷이 었다.

“쌉니다, 싸요!”

“거기, 꼬치 두 개 주세요!”

해가 저물어 갈 무렵이었지만.

옛 죄악계곡, 지금의 성지계곡은 오히려 경건하던 낮보다도 훨씬 더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골목을 따라 주욱 걸려 불을 밝

힌 붉은 유등들이 흥겨운 축제 분 위기를 일으켰고.

한두 푼에 신나게 악기를 연주하 는 유랑 악사들이 분위기를 한층 돋우고 있었다.

“어머, 예쁜 장식품이네…!”

“소저와 잘 어울리는구려.”

골목골목 점포로 개조를 끝마친 건물들이 들뜬 순례객들로 호황을 누리고 있었으며.

“약 선녀님의 자애가 가득 담긴 불상(弗像)이오! 다른 곳에서 파는 것들은 전부 가짜라오!”

심지어 해적 용병선단의 포격으

로 무너졌던 자리에는 노상 점포들 이 임시로 들어와, 계곡의 가파른 골목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제는.

낙양의 새로운 명물(名物)로 자 리 잡은, 성지계곡의 야시장(夜市 場)이었다.

그렇게 연소현은 평온한 눈으로. 그저 인파들을 바라보았다. 고민은 잠시 벗어 두고.

인생의 역경은 잠시 잊고.

흥겨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의 까만 두 눈에 가득 담 겼다.

이 순간은 마치, 대공자가 아니 라.

무검자, 한낱 서생으로 남고 싶 었던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암행 (暗行) 이십니까?”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이제는 그가 아무리 누추한 옷을 입어도, 그를 알아보는 이가 있었 다.

낙양검가의 대공자가 아니라. 연소현을 알아보는 이가 있었다.

“이거, 귀하신 분이 행차하셨습 니다.”

허허, 하고 웃으며.

연소현의 옆자리에 걸터앉은 것 은, 전쟁자문단의 노(老)군사였다.

술독에 빠지기라도 했는지.

노인의 주름진 얼굴은 더할 여지 하나 없이 진한 대춧빛으로 붉었다.

“또 대낮부터 술판을 벌이셨소?”

“아무렴요.”

연소현의 말투가 타박하는 것처 럼 들리기도 하련만, 노군사는 그 저 기분 좋게 웃을 뿐이었다.

“평생 전쟁터에서 살아왔고. 할 줄 아는 것은 전쟁밖에 없는 늙은 이가 할 일이 없다는 것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과연, 노군사답게.

뼈가 있는 말이었다.

“•••그렇군.”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여 수긍한 연소현이 시선을 돌려 야시장의 풍 경을 바라보았다.

“산바람이 좋군요.”

노군사는 느긋하게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어 벌컥 들이켰다.

알싸하게 주정(酒精) 향이 여기 까지 느껴지는 것이, 보통 독한 술 이 아닌 둣했다.

“대체 누가 있어서. 그 폐허 같 기만 하고, 인육을 뜯어먹던 빈민 으로 가득 찬 지옥 구덩이가 이렇 게 탈바꿈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 습니까.”

노군사는 아련히 들려오는 노랫 소리와 악기 소리에 맞춰, 노래처 럼 홍얼거리듯 말했다.

“주공(主公)께서는 큰일을 해내 신 겁니다.”

주공.

대공자가 아니라, 노인은 연소현 을 주공이라 불렀다.

그것은 그 나름의 신뢰의 표현이 근] 라.

“하지만 아직 부족하네.”

연소현은 담담히 말했다.

“저 야시장을 즐기는 것은, 순례 를 할 정도로 삶에 여유가 있는 이 들이지.”

중원국에서 여행(旅行)은, 특권이 라 부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은 아니었다.

“이 계곡의 주민들은 지금 이 시 각에도 저리도 힘들게 일을 하고 있으니 말일세.”

연소현의 시선은 물건을 나르고, 팔고, 호객하는 이들에게 향해 있 었다.

“그들은 해가 뜨기도 전에 장사 를 준비하고, 해가 지고 나서도 저 렇게 노동을 해야 하지.”

심지어.

저들의 장사 수단, 점포부터 물 건까지.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자애 원에서 임대해 준 것에 불과했다.

빈민들이 무슨 돈이 있어, 장사 밑천을 마련했겠는가.

“허허.”

하지만.

노군사는 기분 좋게 취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가진바 능력이 부족하고, 밑천 이 없으면, 몸으로라도 때워야지 요.”

“•••가차 없는 말이군.”

“그런가요?”

노군사가 껄껄 웃더니, 손을 들 어 지게에 등짐을 가득 지고 계곡

의 골목을 오르는 이를 가리켰다.

“저 젊은이의 얼굴이 보이십니 까?”

온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고, 다 리가 후들거리는 와중에도, 그의 표정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노군사가 흘러가둣 말을 이었다.

“누군들 부자가 되는 것을 바라 마지않는 자가 있겠습니까마는. 그 럼에도 저들이 현실적으로 바라는 것은, 그저 삶이. 조금만 더 쉬워지 는 것입니다.”

“•••삶이 조금만 더 쉬워진다?”

“그럼요.”

노군사가 세월의 혼적이 가득한 얼굴을 끄덕였다.

“아주 조금만 쉬워지면 됩니다.”

연소현이 노인이 넘겨준 독주를 한 모금 마시는 사이, 그가 말을 이었다.

“위정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노 력하든. 바뀌어봐야 저들의 삶이 얼마나 극적으로 바뀌겠습니까?”

“이 늙은이가 지금은 이렇게 느 긋이 술을 즐기고 있지만, 결국 다 시 전략을 연구하고, 전술을 궁리 해야겠지요.”

노인이 손을 들어 한 골목을 가 리켰다.

“저기, 휴가를 즐기는 전쟁자문 단의 무사들이 있군요.”

노인의 말처럼.

한 무리의 무사들은 무엇이 그리 홍겨운지.

노상 주점에서 술병을 하나씩 들 고, 서로 어깨를 끌어안고 노래를 불러 대고 있었다.

몰래 연소현을 돕기 위해, 휴가 를 위장했을 때와는 달리.

이번에야말로, 진짜 휴가를 즐기

고 있는 그들이었다.

“무사들은, 병사들은, 다시 진법 을 훈련하고, 무기의 날을 갈아야 지요. 군마를 먹이고, 무예를 단련 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국 다시 싸 움터에 나가야 합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았던, 전쟁 을 업으로 살아온 군사가 말했다.

“그런 저들이 원하는 것은, 지금 처럼 잠시간의 휴식이겠지요.”

연소현이 그의 말을 앞서 이해하 고, 먼저 답했다.

“삶이 전쟁에서 바로 전쟁으로, 전쟁터에서 다음 전쟁터로 이어지

지만 않는 정도라면 된다는 것인 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렇게 삶이, 아주 조금 씩만 쉬워지면 됩니다.”

연소현의 시선이 다시, 지게를 지고 짐을 나르던 이에게로 향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는 비척거리면서도, 어느새 저 만치 계곡을 올라가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연소현의 얼굴은, 조금은 더 편해 보였다.

“그럼에도 말입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연소현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것에 성공 한 노군사가 내심 기쁜 얼굴로 말 을 이었다.

“어쩌면, 이상주의에 불과할지라 도. 주공처럼 닿을 수 없는 이상에 손을 뻗는 이들이 계시기에. 틀림 없이 저희의 삶이 조금씩, 이렇게 쉬워지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말을 마친 노군사는 몸을 일으켜 휘청이며 멀어졌다.

“•••그런가.”

잠시, 눈을 감고 밤바람을 느끼

던 연소현이 품에서 작은 조각상 하나를 꺼내 들었다.

삐뚤삐뚤하고, 엉성하며.

심지어 부서졌던 것을 붙인 것이 라 볼품이 없었지만.

약 선녀를 깎은 나무조각상.

그것은, 과거.

호두마을의 자애원에서 고기죽을 얻어갔었던 퇴역 병사의 죽은 동생 이 남긴 물건이었다.

연소현은 그 조각상을 자신이 기 대앉아 있던 바위에 기대 세웠다.

그러고는 노군사가 남긴 술병을 열어 조각상에 술을 듬뿍 부었다.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야.”

연소현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들 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부쩍 다가온 여름의 하늘 에는 샛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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