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303화 (303/350)

제2편 재탄생(再說生)

몇 주 뒤.

낙양, 서쪽 성문 밖.

출입을 위한 절차를 기다리는 이 들로, 한바탕 길게 줄이 늘어서 있 었다.

짐을 가득 실은 마차를 끄는 말 이나 소들이 우는 소리.

“아니, 자네! 오랜만이군.”

“그렇구먼. 난 이번엔 개봉(開封) 에 상행을 다녀오던 참이네.”

안면이 있는 자들이 서로를 발견 하고 인사를 나누고.

“허허, 먼 길을 오셨구려.”

“드디어 교단에 성지가 생겼다는 데, 참을 수가 없더이다. 소식올 듣 자마자, 내 한달음에 달려온 참이 오.”

지루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 낯선 이들끼리도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 다.

“저, 저놈 잡아라!”

“내 지갑!”

이런 날은 소매치기들에게도 대 목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성문 앞이 사람의 행렬로 미어터지며 소란스러운 와 중에도.

유달리 조용한 곳이 있었다.

입을 꾹 다문 떠돌이 상인은 불 안한 눈초리로 슬쩍 눈알을 굴려, 그 침묵의 원흉을 바라보았다.

큰 키.

큰 삿갓으로 가렸기에 알아볼 수 없는 얼굴.

작은 봇짐.

그리 초라하지만은 않은 행색.

그렇다고 깔끔하거나 고급스럽지 도 않은 복장.

그리고 둥에 단단히 메어 고정한 고색창연한 검.

그 검이 좀 비범해 보이긴 했지 만.

낙양검가가 있는 낙양에서, 겨우 검 한 자루에 다들 이렇게 불편한

침묵을 지키는 것은 아니었다.

떠돌이 상인은 눈을 좀 더 굴려, 그 검객(劍客)의 허리춤에 걸린 가 죽 주머니들에 시선을 향했다.

‘저 주머니들”.’

특이할 것 하나 없는 주머니들이 었다.

지금도 아래쪽이 피에 젖어, 시 뺄건 피가 바닥에 방울방울 떨어지 는 것을 제외하곤.

몇 개는 거무죽죽하게 말라 있었 지만.

그게 피가 마른 자국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꿀꺽.

떠돌이 행상이 마른침을 삼키자, 그의 목울대가 출렁였다.

‘딱 모양이나, 크기나….’

딱 사람의 머리들이 담겨 있을 정도이지 않은가?

그 정도의 추리는 떠돌이 상인이 아니라, 주변의 누구라도 하고 있 었다.

하지만 주변의 누구도.

감히 그 주머니에 든 것이 사람 의 머리가 맞는지, 검객에게 직접 물어볼 정도로 간이 큰 이는 없었 다.

그저.

앞의 얼마 남지 않은 줄이 빨리 줄어들어, 관병들이 검객을 발견하 길 바랄 뿐.

“거기!”

그랬기에, 그 수상쩍기 짝이 없 는 주머니들을 찬 검객을 발견한

관병이 날카롭게 외쳤을 때.

떠돌이 상인을 포함한 모두가, 얼른 몸을 피할 수 있었다.

“무기를 버리고, 신원을 증명하 라!”

그렇게, 순식간에 원형으로 텅 비어 버린 공간에서.

관병들이 일제히 달려와 당장에 라도 공격할 듯이 시퍼런 창날을 들이밀었지만.

태연한 기색의 검객은 대답 대 신.

그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관병 들의 젊은 조장에게 던졌다.

“..?!”

암기인가? 아니면 독?

젊은 조장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 이 그 물체를 보자마자 몸을 바닥 에 굴러 피했다.

내공이 없는 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반사 신경과 빠른 판단이었다.

“•••호오?”

검객의 시선이 삿갓 밑에서 흥미 롭다는 듯이 반짝였다.

하지만, 진짜 놀란 쪽은 오히려 젊은 조장이었다.

“..?!”

자신은 분명히, 검객이 던진 무 언가를 피해 몸을 던졌는데.

툭.

어찌 된 노릇인지.

그 물체가 정확히 그의 가슴팍에 떨어졌던 것이었다.

“이건, 대체…?”

소문이나 이야기 속에서나 듣던 허공섭물(虛空攝物)의 수법이라도 되는 것인가?

뭐라 말을 이어 나가려던 그는, 검객의 손짓에 자신의 가슴팍에 떨 어진 물체를 들었다.

“호패?”

그것은 귀한 옥(玉)으로 만들어 진 호패(號牌)였다.

호패에 매인 긴 금줄이 반짝거리 고, 은(銀)으로 세공된 장식들이 오 후의 햇살에 번쩍거렸다.

젊은 관병 조장은 그 호패에 선 명하게 새겨진 이름을, 자신도 모 르게 소리 내어 읽었다.

“•••연서린 (溫端째)?”

그 이름과 한 자루의 검.

이 자리의 모두가 그녀의 별호를 알고 있었다.

“천의무봉(天衣無維)…!”

연서린은 피가 묻은 가죽 주머니 들을 바닥에 던지고는 말했다.

“이것은 낙양 근처에 현상금이 걸린 악인들의 머리다.”

검객의 정체가 이름 높은 낙양검 가의 이공녀라는 것이 밝혀지자, 성문의 수문장(守門將)까지도 뛰어 나왔지만.

“이공녀께서, 요즘. 하남성 주변 을 다니시며. 악명이 자자한 흑도 의 무뢰배들을 사냥하고 다니신다 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연서린은 선약이 있다는 이유로, 얼른 성내 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녀의 걸음은, 금방 붐비는 인

파에 의해서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원래, 낙양 거리가 행인이 많 은 것은 알지만.”

그녀가 삿갓 밑으로 자신의 뺌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얼굴에 난 작은 상처가 아물 때 가 되니 가려워 왔던 탓이었다.

“이렇게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룰 정도였던가?”

자신이 모르던 사이에, 가을로 예정되어 있던 용봉지회가 앞당겨 져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 였다.

“게다가 대부분은 여행객 행색이

로군.”

그녀가 행인들의 행색을 살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몇 주 전이었다면.

오가는 이들의 행색이 여행객인 지, 상행인지, 구별도 하지 못했을 그녀였지만.

강호 초출(初出)에서 벗어나, 나 름대로 경험을 쌓은 티가 났다.

“실제로 낙양을 방문하는 이들이 대폭 늘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순례객 (巡禮客)들이지요.”

그녀의 질문에 답한 것은.

수문장의 명령으로 검가 이공녀 의 편의를 위해서 안내역으로 따라 붙은 관병 조장이었다.

“순례객이라고?”

“선녀교단의 성지(聖地) 덕분이 지요. 중원국 각지에서 끊임없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아.”

연서린은 곧 깨달았다.

“죄악계곡 말이로군.”

죄악의 골짜기, 혹은 죄악계곡은 지금 그녀가 향하고 있는 목적지이 기도 했다.

“내가 부재한 사이, 황제 폐하께 서 죄악의 골짜기를 성지로 선포하 셨다는 소문은 들었네.”

잘못된 길로 이끌던 스숭.

호위각주와의 관계를 끊고, 바로 그길로 낙양을 떠났었던 그녀였기 에.

성지 선포 소식은 그저 소문으로 만 들었을 뿐이었다.

“•••지금은, ‘성지 계곡’이라 부릅 니다. 더 이상 그 이름은 쓰지 않 습니다.”

“그렇군.”

관병 조장이 습관처럼 자신의 손 목에 걸린 선녀교단의 염주를 만지 작거리는 모습이, 연서린의 눈에 들어왔다.

원래.

길을 떠나기 전의 그녀는.

선녀 신앙을 낯설게 느꼈었다.

약선녀.

자신의 큰어머니인 약소유를 생 전에 실제로 보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무수한 순례객의 인 파가 중명하듯이.

그녀가 강호로 나가 직접 본 민

초들의 삶에는 선녀 신앙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머리를 비우기 위해.

그동안 자신의 삶을 속박했던 족 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작정 떠 났던 길이었지만.

그마저도.

동생인 연소현의 남모를 도움이 없었다면, 낙양을 떠나기도 전에 그녀의 안전을 걱정한 검가의 사람 들에게 붙들렸을 테지만.

그럼에도, 얻은 것은 많았다.

“…자네도 선녀 신앙을 가졌나?”

그녀의 질문에 젊은 관병 조장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짧고 간결한 대답.

낙양검가의 이공녀이자 천의무봉 연서린을 옆에 두고도 침착한 그의 모습은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 참전자였나?”

북부 전쟁에 참여했다기엔 너무 어렸지만, 그의 침착함은 실전 속 에서 사선을 넘어온 이의 그것이었 기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가 어린 나이에 조장이 된 것 또한.

전장에서 실력을 입증했다면 가 능한 일이었다.

“아닙니다.”

그녀의 질문에 젊은 조장이 쓴웃 음을 지었다.

그 씁쓸한 웃음조차도 그의 나이 에 맞지 않아 보였다.

“•••얼마 전에, 그 비슷한 경험을. 유달리 깊게 했을 뿐입니다. 신앙 도 그때 얻었지요.”

의뭉스러운 대답이지만, 그녀는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녀는 굳이 호기심에, 다른 이 가 대답하기 꺼리는 일을 캐묻는 성격이 아니었다.

대신, 그들은 인파에 섞여 천천 히, 하지만 부지런하게.

부쩍 따가워진 햇볕 아래서 발걸 음을 옮겼다.

“도착했습니다.”

이윽고, 젊은 관병 조장의 발걸 음이 멈췄다.

계곡의 초입에 위치한, 대공자

연소현과 사공자 연비의 합동 사업 본부였다.

“안내해 줘서, 고맙네. 이곳이 초 행이라....”

“아닙니다.”

젊은 관병 조장은 여전히 특유의 침착한 태도로 인사를 올렸다.

“그럼,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그런 그를 향해, 마지막으로 연 서린이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답했다.

“•••장삼(張三) 입니다.”

장삼.

그는 몇 주 전에 있었던 죄악계 곡의 전투에 참가했던 치안별관 소 속의 관병이었다.

마교의 술법으로 인한 결계 속에 서,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무수한 전투를 겪었던 인물.

장삼은 그날 결계에 휘말렸던 인 물 중에서도, 유독 지독하게 시달 렸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그 결과로 그는 그 나이대의 평

범한 관병이 결코 가질 수 없는 전 투 경험을 쌓았고, 얼마 전 승진까 지 하게 되었다.

“장삼이 라....”

연서린은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 고는 인파 사이로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공도 없는 이가, 어떻게 저렇 게도 자연스럽게 인파를 거슬러 움 직이는지.

그 신기한 광경이 무공광(武功 狂)인 그녀에게 적잖은 호기심을 이끌어 냈지만.

그녀는 사라진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연소현과 연비의 합동 사업 본부로 시선을 돌렸다.

건물의 외벽 곳곳에 그대로 남은 상혼이 아직도 선명해서.

몇 주 전, 그날의 처절했던 싸움 을 짐작하게 했다.

‘부끄럽구나….’

아무리 자기에게 깊은 사정이 있 었다고는 하지만.

목줄에 묶인 채, 자유가 구속된 채로, 매일매일을 쳇바퀴 돌듯 살 아왔던 그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들이 이곳에서, 그 갖은 고 생을 하는 동안.

자신이 이곳에 들른 것이 이것으 로 처음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선뜻.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설 수가 없 었다.

안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동생들을 볼 면목이 있는가.

‘동생들이, 나를 원망하지는 않을 까..?’

그것은, 낙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니.

그 이전, 비바람을 맞으며 현상 금이 걸린 혹도 무림인들을 사냥할 때부터 했던 고민이며.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이었 다.

“•••이곳에 무슨, 볼일이 있으십 니까?”

멍하니 서서, 삿갓을 눌러쓴 채.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던 그 녀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아무리, 경황이 없다지만.

누군가 말을 건넬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 도로 정신을 놓다니.

“아, 아니. 나는….”

그런데, 그 목소리가 이상하게 낯이 익은 것은 어째서일까.

당황해하며 돌아서는 그녀에게 보인 것은, 몇 주 보지 못한 사이 에 더욱 훤칠해진 동생.

연소현의 모습이었다.

“……!”

“돌아왔으면, 재깍재깍 들어와야 지. 어째서 초대받지 못한 사람처

럼 눈치를 보고 계시오?”

특유의 퉁명스러운 말투.

그는 언제나처럼.

그녀가 고민했던 것들을 전부 알 고 있다는 둣이 말했다.

“어서 들어오시오.”

그러고는 돌아서서 무뚝뚝한 어 조로 말했다.

그것은 단지, 그 자신의 쑥스러 움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연서린 의 눈물을 보지 못한 척해 주기 위 함이었다.

“…잘 돌아오셨소.”

그 말 한마디에는.

그녀가 걱정했던 모든 것이 무의 미해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