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차도(差度)
낙양검가.
특등급 폐관(閉關)수련장.
호위각주(護衛閣主).
태상가주의 누나이자, 연소현의 고모.
그리고 이공녀 연서린의 스숭이 기도 한 그녀의 눈가에 깊은 그늘 이 드리워 있었다.
대공자 연소현이 명실상부한 낙 양검가의 대공자로 당당히 귀환했 다.
그 낙양검가의 술렁임은, 고립된 것과 마찬가지인 이곳 폐관수련장 까지도 전해지고 있었다.
“•••혈족들에게서 소식은?”
그녀의 수하들, 호위각의 책임자 들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 호위각의 요원들이 호위를 담당하던 혈족분들 중에. 많은 분 이 지난 밤사이에….”
호위각의 책임자들은 적절한 표 현을 찾지 못했다.
그를 대신해서, 호위각주가 말을 이었다.
“끌려갔나?”
그녀의 말에, 호위각의 책임자들 이 식은땀을 흘렸다.
“호위대상의 안전을 지키고자, 강제 연행을 어떻게든 막아 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상대가 최고운영회의 의 명령장을 들이대어 버리니, 저 희로서는...!”
주요 연씨 혈족들의 안전을 지키 는 것은, 호위각의 임무.
책임자들이 식은땀을 홀리는 것 은 그 때문이었다.
“너희를 문책하려는 것이 아니 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자들은, 썩어 빠져도 너무 썩 어 빠졌어.”
아무리, 너무 맑은 물에는 고기 가 살 수 없다고 해도.
그들은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은 이들.
자신의 동생인 태상가주가 멀쩡 할 때도 알게 모르게 말썽을 피우
던 그들은, 돌아올 수 없는 선까지 넘어 버렸다.
“그딴 놈들을. 같은 연씨 혈족이 라고, 도와줄 가치는 없다.”
게다가.
그런 자들은 연서린을 가주로 만 들려는 자신의 목적에도 딱히 도움 이 되지 않는 자들이었다.
“나의 계파의 핵심 인원들은 멀 쩡하겠지…?”
호위각의 책임자들이 급히 고개 를 끄덕였다.
“예, 예. 그렇습니다, 각주님.”
“그분들은 현재. 자택에서 대기 하시며, 본가의 상황을 예의 주시 하시는 중입니다.”
예의 주시는 무슨.
눈치를 살피는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쉰 그 녀가 손을 내저었다.
“…그럼, 됐다. 물러가라.”
벽을 넘은 고수인 호위각주의 압 력에 시달리던 호위각의 책임자들 이 황급히 물러났다.
텅 비어 버린 방에서, 호위각주
는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과거.
자신의 남동생인 태상가주가, 가 주가 되고자 하는 자신의 꿈을 막 더니.
이제는, 그의 큰아들이 튀어나와 연서린을 가주로 만들려는 목표를 또 막아서고 있었다.
“…안 된다. 이번엔, 절대 안 된 다.”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녀의 날카 로운 기감에.
한 사람이 폐관수련장의 문을 나 서는 것이 느껴졌다.
!”
그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호위각 주의 입에서 즉각, 고성이 터져 나 왔다.
“연서린!”
평소였다면, 스승의 목소리에 찔 끔하는 시늉이라도 했을 터인데.
“•••스승님.”
어째서인지.
연서린은 그저,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하라는 수련은 하지 않고. 또 어딜 나가려는 것이더냐?!”
우르릉.
호위각주의 기세에, 폐관수련장 좌우(左右)의 절벽이 흔들리고, 작 은 자갈 따위가 굴러떨어졌다.
평소라면 연서린은 이쯤에서, 포 기하고 다시 들어갔을 것이고.
호위각주도 호되게 수련을 시키 는 선에서 끝냈을 것이다.
“스승님.”
하지만.
오늘의 연서린은 달랐다.
“이제, 저도 자유롭게 갈 길을 가겠습니다.”
“••자유?”
호위각주의 눈가가 경련을 일으 키듯 떨려 왔다.
“네 ‘책임’을 잊은 것이냐? 내가 다시 한번 너에게 그 책임을 상기 시켜 주어야 하겠느냐?”
호위각주가 말을 하지 않아도.
이미 수백 번, 수천 번을 세뇌당 하듯 들었던 자신의 책임에 대한 이야기를, 연서린이 잊을 리가 없 었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던 그날. 이미 음독 상태이셨던 아버지는 저 를 보호하기 위해 감싸다가, 암수
에 피격당하셨지요.”
그것은.
태상가주가 아직도 일어나지 못 하게 된 원인이 된, 그날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래. 잘 기억하고 있구나.”
호위각주는 그녀를 달래듯이 누 그러진 말투로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가, 너를 품에 안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도 기억하고 있 겠지?”
“황보세가와의 약혼으로 집안을 떠날, 언니를 대신해서. 가족을 보 호하고 집안을 이끌라 하셨던 그
말 말입니까?"
“그래. 바로 그 말이다.”
호위각주가 손을 들어, 연서린이 차고 있는 태상가주의 검을 가리켰 다.
“그 검을 네게 넘겨주며, 네 아 버지가 네게 남긴 말이지 않았느 냐.”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연서린을 여태껏 얽매고 있던 속 박이자, 목줄이었다.
호위각주는 지금까지 해 왔던 것 처럼, 연서린을 구슬리듯 말을 이 었다.
“네 아버지 정도의 무사라면, 너 를 감싸려 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제 한 몸은 건사할 수 있었겠지.”
연서린이 죄책감에 입술을 깨무 는 것을 보며, 호위각주가 스산한 미소를 숨겼다.
“어제도. 오늘도. 요즘 본가는 난 리도 아니더구나. 무수한 이들이 피를 홀리고, 무수한 이들이 헛되 이 목숨을 잃고 있지.”
호위각주가 혼란스럽기 짝이 없 는 낙양검가의 상황을 주지시키며 물었다.
“만약, 그날. 네 아버지가 쓰러지 지 않았다면, 어땠을 것 같으냐?”
그랬다면.
지금 낙양검가는….
모든 것이 달랐으리라.
“나도. 이런 방식으로 네게 주워 진 그 무거운 책임을 일깨우는 것 은 피하고 싶단다. 하지만 너는 이 낙양검가의 가주가 되어야-.”
“스승님.”
연서린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아니, 고모님.”
자신을 스승이 아니라 고모라 부 르는 연서린의 눈빛과 마주한 호위 각주가, 오히려 움찔했다.
어째서인지.
연서린의 반응이 평소와는 너무 나 달랐다.
“그렇게, 아버지가 미웠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야?! 너는-!”
당황을 감추며 성을 내려는 호위 각주를 보며 연서린이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 시절. 제대로 상황을 기억하
지 못하던 저에게. 대체 왜 그런 거짓말들을 주입해 오신 겁니까?”
표정이 무너지기 시작한 스승을 바라보는 연서린의 눈빛은 슬프기 까지 했다.
“거짓말이라니, 그 무슨-?!”
“이 서류들은, 사본들로. 소현이 가 새벽에 저에게 비밀리에 보내 준 것입니다.”
연서린이 품에서 서류들을 꺼내 드는 모습에 호위각주가 인상을 찌 푸렸다.
“그놈이, 대체 무슨-?”
“직접 확인하시지요.”
연서린이 던진 서류들을 허공섭 물(虛空攝物)로 받아 든 호위각주 의 시선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 기 시작했다.
〈가주 암습 사건 직전과 직후에 대한 현장 보고서〉
〈암습 현장에 있었던 요원들의 중언을 토대로 재성립한 당시 상황 과 풀리지 않는 의문점〉
〈당시 현장 요원들에 대한 심층 정신 감정 보고서〉
그것은 다름 아닌.
지난밤, 연소현이 기관장의 개인 금고에서 찾아낸 서류들이었다.
“이, 이건…?!”
연서린이 씁쓸하게 말했다.
“보시다시피, 당시 현장에 대한 기록입니다. 어젯밤 실종된 기관장 이 비밀리에 보관해 오던 것들이지 요.”
호위각주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 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모든 상황 이 모호하기 짝이 없더군요. 무엇
하나 제대로 기억을 하고 있는 이 도. 제대로 그때의 상황을 파악하 고 있는 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료에는.
당시 근무자들이 여섯 발이 달린 짐승을 보았느니, 오십 장의 날개 가 달린 기괴한 형상이 허공을 가 로지르는 것을 보았느니 하는 말까 지 적혀 있었다.
“어린 제가 아버지의 검을 들고 근처에서 발견된 것은 맞지만, 어 디에도 아버지가 저를 감싸다가 피 격되셨다는 보고는 없습니다. 그리 고 결정적으로.”
연서린의 말이 이어졌다.
“그 자리에 고모님은 계시지도 않았더군요.”
오랜 시간 동안 연서린을 세뇌하 던 이야기가 무너져 내렸다.
“서, 서린아. 그건-.”
무어라 변명을 하려 했지만.
“아니다, 아니야…!”
호위각주가 걸었던 목줄은 부서 졌다.
“너무나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 지만….”
연서린이 서글프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고모님께서 직접. 모든 것을 말해 주시는 일은 없겠지요.”
그녀가 그 맨바닥에서 무릎을 꿇 어 절했다.
“그동안 키워 주시고, 가르쳐 주 셔서 감사합니다.”
스승이었던 자에게 올리는 마지 막 예였다.
“저는 이만. 하산(T山)하겠습니 다.”
떠나는 제자를 향해, 호위각주가 손을 뻗어 보았지만.
연서린은 날개라도 되찾은 것처
럼 훌훌 떠나 버릴 뿐.
“서린아…!”
지금은.
허공섭물을 가능케 하는 내공도.
절벽을 울리는 경지도.
무엇 하나 전부 소용이 없었다.
낙양검가의 본가로 복귀한, 대공
자 연소현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자신의 거처인 원각정도 아니고.
최고운영회의도 아니었고.
장로원도 아니었다.
내원 본관 뒤편.
태상가주의 거처.
약왕(藥王).
연소현의 어머니인 약선녀(藥仙
女) 약소유의 스승인 그가 긴장에 손을 떨었다.
평소였다면, 괜히 농을 던졌을 연소현조차도.
그저, 진지한 태도로 그 모습을 잠잠하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톡.
반쯤 썩어 가는 거무죽죽한 약간 의 살덩이에, 혈액이 떨어지자.
살덩이에서 검은 연기가 확 하고 피어오르며, 마치 살아 있는 것처 럼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흠칫 얼굴을 피했던 약왕이 연소현에게 물었다.
“•••이게, 누구 살덩이라고?”
“금질. 마교(魔敎) 인물의 것이 오.”
그 금질의 살덩이에 떨어뜨린 혈 액의 주인은, 다름 아닌 연소현의 아버지.
태상가주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추측대로. 아버지의 중독(中
毒)과 의식불명은, 마교와 관련이 있는 증상이었소.”
그 추측은, 기관장이 숨겨 두었 던 당시의 기록을 보고 확신에 가 까워졌었다.
엇갈리는 진술.
혼란 그 자체의 상황.
그것은, 그가 익히 보아 왔던 마 기로 인한 현실 왜곡과 너무도 유 사했다.
“그랬군, 그랬어.”
일반적인 병도 아니었고.
일반적인 독도 아니었다.
애초에.
의원의 영역도.
선도(仙道) 수행자로서의 약왕의 영역도 아니었던 것이다.
약왕이 탄식했다.
“그랬으니, 그동안 만(萬) 가지 약재와 만 가지 치료법이 다 소용 이 없었던 것이었어…!”
그 오랜 시간 동안.
중원 최고의 명의라 할 수 있는 약왕과 연소현이 태상가주를 치료 할 수 없던 그 이유가.
드디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표본은 얼마나 더 남았나?”
흥분한 기색의 약왕에게 연소현 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하오.”
그러고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 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마교 놈들은 앞으로 더 욱 기승을 부릴 것이니. 표본을 다 양하게 구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 오.”
그 시작이 어찌 되었든.
지금의 마교는, 악이며.
그들은 악인이었고, 그들의 행동
은 악행이었다.
연소현은 지금의 그들을 좌시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약왕은 잠시, 손자와 마찬가지인 연소현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 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지금까지 지켜본바.
연소현은 그가 걱정을 할 필요 따윈 조금도 없는 인물이었으니.
구질구질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을 필요도 없었다.
“이것으로 실마리가 잡혔으니.”
약왕은 의원의 눈으로, 돌아왔다.
“연구는 내게 맡겨 다오. 내가 반드시 치료법을 찾아내도록 하겠 다.”
중원 전체에 약왕보다 연소현이 더 신뢰할 수 있는 의원이 어디 있 겠는가.
연소현은 약왕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겠소.”
평소와 달리, 솔직하기 짝이 없 는 연소현의 태도에.
“험험.”
약왕은 괜히 쑥스러워 시선을 돌 리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는 방해하지 않도록 해 주마.”
“아마도.”
뒤에서 들려오는 연소현의 목소 리에 문고리를 잡았던 약왕의 몸이 멈췄다.
“이건, 추측일 뿐이지만. 그 당시 에 이 수법에 당한 것은 아버지가 처음이 아닐 것이오.”
“•••설마.”
약왕은 어렵지 않게, 연소현의 추측이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았다.
“선대 황제 폐하께서도, 같은 수 법으로 피습당해 숭하하셨다는 말 이냐?’’
“말했듯. 추측일 뿐이오. 앞으로 더 깊게 조사해 봐야 하지. 하지 만….”
연소현은 둥을 보인 채, 담담하 게 말을 이었다.
“중원국 전체를 무너뜨리는 작업 을 시작하기 위해서, 가장 효율적 인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황제와 검가의 가주를
노리는 일이었겠지.”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약왕이 문을 닫고 나가자.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연소현과 태상가주, 둘뿐이었다.
“…아버지."
연소현이 손올 뻗어 아버지의 손 을 잡았다.
피골(皮骨)이 상접한 태상가주의 몸은 제암진천경의 마기에도 반응 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는, 마교의 마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 태상가주의 의식을 앗아 간 것은 마기였을지언정.
지금의 의식불명은 그 왜곡된 현 실의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다.
“어떻게든. 다시 자리에서 일어 서실 수 있도록, 치료법을 찾을 겁 니다.”
아버지의 손은 앙상하기만 하여.
그 어린 시절 기억 속 든든하고 따뜻하던 커다란 손의 형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저, 평생 검을 쥐었기에 생겼 던 굳은살만이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
“그리고, 아버지께서 깨어나셨을 때.”
그 뼈대가 훤히 드러난 손에, 뜨 거운 물이 뚝뚝 떨어졌다.
“반드시, 저를 자랑스럽게 여기 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제암진천경 시즌 1 종료 안내〉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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