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편 승전보(勝戰報)
중원국, 황도.
황궁 (皇宮).
해가 중천에 이른 지금은, 원래 라면.
조정(朝庭)의 고위 문무백관(文 武百官)이 모여, 정무를 보아야 할 시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넓은 공간에 앉아 있는 것은 황제, 단 한 명뿐.
근처에서는 환관이나 궁녀들 따 위가 조용히 숨을 죽이고 오갈 뿐.
문무백관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 었다.
“그렇지. 열병이 유행하고, 열병 에 몸져누운 대신들이 속출하니. 어찌 그들이 입궐할 수 있겠소?”
십육가문의 가주들이 말했던, 그 대로.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열병이 유 행한다는 거짓말을 핑계로, 누구 하나 입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 그 넓은 대전에 앉은 황제 의 표정에는, 어째서인지 한 점의 그림자도 없었다.
오히려.
은은하게 드리우는 햇살 속에서.
젊은 황제는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는 즐거운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 폐하.”
대전의 입구를 지키던 환관의 목 소리가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졌다.
“재상을 역임했었던 강상이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자 하옵니다.”
“당장 들어오라 하라!”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 체통 없는 태도에 곁을 지키 던 늙은 환관이 헛기침 따위로 은 근히 신호를 보냈지만.
“한시가 급한 일이다! 예(禮)는 생략하도록 해라!”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한 예를 생략하 라 외치는 것이 아닌가.
“예, 폐하. 그리하겠사옵니다.”
강상이 지금 가져올 소식은.
중원국의 황실.
어쩌면, 중원국 전체의 명운이 걸린 일이다.
“폐하!”
곧,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건장 한 체구의 노인, 강상이 황제의 앞
에 섰다.
“낙양은…!”
황제는 급한 마음에 말까지 더듬 었다.
“낙양은 어찌 되었는가?!”
강상의 걸음걸이는, 젊은 개선 장수처럼 힘찼고.
그의 표정은 밝았으며, 그 어깨 는 굳건한 성벽처럼 넓게 펴져 있 었으니.
굳이, 말하기 전에도.
빼어난 능력을 가진 황제는 그것 이 희소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
건만.
이 젊은 황제는 이 충성스러운 노인의 입에서 직접 듣기 전까지는 안심을 할 수 없었다.
“승전 (勝戰) 이옵니다!”
분명, 귀에 승전이라는 말이 들 리고, 머리로는 그 의미를 이해했 지만.
“승전?!”
황제는 다시 물었다.
“정녕, 그 사실이 확실한가?!”
강상은 만면 가득 미소를 지으 며, 품에서 작은 쪽지 하나를 꺼내
서 공손하게 황제에게 바쳤다.
“ 이것은..?”
쪽지를 받아 든 황제에게 무릎을
꿇은 강상이 고했다.
“그 쪽지는 낙양검가의 황도 사 업부를 통해서 저에게 전달된 것이 옵니다.”
그 쪽지에는 봉인이 뜯어진 흔적 이 있었다.
필시, 강상이 뜯은 봉인이리라.
“이 봉인은 낙양검가의 최고운영 회의의 봉인이 아니더냐?”
“그러하옵니다.”
강상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밖에는 최고운영회의의 봉인이. 안에는 대공자의 낙관(落敎)이 선 명하니. 어찌 거짓이나 조작이 있 을 수 있겠습니까.”
황제는 그 말을 들으며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펴 들었다.
쪽지에 적힌 것은, 단 한 단어로, 단출하기까지 했다.
[승전 (勝戰)]
어찌나 간결한지, 대공자의 화려
한 낙관이 본론인 것처럼 보일 지 경이었다.
하지만 젊은 황제는.
그 짧은 단어에서.
더욱더 큰 무게감을 느낄 수 있 었다.
“•••되었구나. 되었어.”
전신에서 힘이 쭉 빠지는 일을 경험한 황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가 정말로 승리했구나…!”
마음속에서는 그토록, 대공자 연 소현의 승리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지만.
한편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 었다.
칩거를 끝낸 지, 몇 개월 되지도 않은 대공자가 기어코.
지난 십여 년간 세력을 불려 온 이들을 꺾고, 첫 전쟁에서 승리를 한 것이다.
황실의 누구보다도 연소현에게 주목하고 있었던 젊은 황제였기에.
그가 마주했던 현실의 벽이 얼마 나 높았는지, 황실의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 믿을 수가 없는 업적에 두 번
이고, 세 번이고, 쪽지를 들여다보 았다.
몇 번이고 그 쪽지가 실제라는 것을 확인하듯이 만지작거리며, ‘승 전’이라는 단어를 되뇌었다.
“•••그저, 짐은 놀라고, 또 놀라울 뿐이구나.”
한참을 벅차 오는 가슴을 누르 며, 실감을 느끼던 황제의 입에서 새어 나온 말이었다.
“ 폐하.”
무릎을 꿇은 채로, 강상이 고했 다.
그의 목소리에 깃든 감격의 작은
떨림이 황제에게도 사무치게 전해 졌다.
“승전을 경하드리옵나이다.”
북부 전쟁이 가져다줄 환상에 미 쳐 돌아가던, 과거의 황궁의 이 자 리에서.
황제의 앞에서 관복을 그대로 벗 어 반납해 버리고.
그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패배’를 곱씹고, 또 곱씹 어야 했던 노인이었다.
그 오랜 관직 생활의 마지막을, 패전(敗戰)으로 끝냈던 그 재상에 게, 대공자 연소현의 승전이란.
그 모든 패배를 잊고, 새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와도 같았다.
“곧, 이 황도에도 대공자의 승전 보가 울려 퍼질 것이옵니다.”
최고운영회의의 봉인이 찍힌 쪽 지는, 어느 누구, 어느 무엇보다도 빠르게 강상과 황제에게 도착했다.
강상의 말처럼.
이제 곧, 낙양에서부터의 소식이 황도에 퍼져, 황도의 정계가 뜨겁 게 달아오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현 십육가문 가 주들의 지시와 강압으로. 열병 따 위의 거짓 핑계를 대며 자택에 처
박혀 있던 문무백관들이 앞다투어 입궐을 시작할 것입니다.”
황제와 황실의 권위를 되살릴 불 씨가 될.
장강 수로 확장 정비 사업을 막 고 강상의 재상직 재임명을 막기 위해, 십육가문의 그 막강한 권력 으로 멈춰 있던 황궁의 시간이.
비로소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
“이 대궐이 다시 문무백관들로 들끓게 될 것이옵니다.”
손을 활짝 펴서 텅 빈 공간을 가 리킨 강상이 머리를 들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지난 세월 동안. 백성을 돌보는 것보다 제 식구들만 챙겨 온자들.”
강상의 눈빛이 불을 뿜는 것 같 았다.
“그들은, 지난 세월 동안. 강한 자의 발밑에 빌붙고, 떨어지는 콩 고물로 배를 불렸던 자들.”
황궁의 보검 (W 劍)보다도 날이 시퍼렇게 선 그 눈빛.
“이제, 그들 모두를 상대하실 마 음의 준비가 되셨사옵니까?”
그랬다.
대공자의 첫 승전은, ‘첫 번째’ 승전이었다.
그가 그 승전으로, 개혁의 불씨 를 황제에게 넘겨주었다면.
그 모든 대소 신하들에게 맞서, 그 개혁의 불씨를 키워 나가야 하 는 것은 한 줌에 불과한 자신들이 었다.
“물론.”
황제는 강상의 그 시퍼런 눈빛을 조금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주 시했다.
“짐은 각오를 마쳤소.”
꿈에서도 그리던 기회가 찾아왔 다.
젊은 황제의 눈빛은 강상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거세게.
그리고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 다.
“대공자는 불가능에 도전해, 이 천금과도 같은 기회를 짐에게 건네 주었소.”
황제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한 음절, 한 음절을 또박또박 말했 다.
“그가 짐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짐 또한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
을 것이오.”
그 말에 강상은 기쁘게 웃었다.
밑의 신하들이, 백성들이, 대공자 가,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노력하 든.
그저 그것을 타고 태어난 자신의 복으로 여기며, 당연하게 받아들이 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황제는 아니었다.
“지금 당장.”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짐이 대공자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강상이 먼저 이 이야기를 꺼냈다 면.
대가를 위한 청탁처럼 보여, 상 당히 어색한 광경이 되었으리라.
그렇기에 늙고 충성스러운 노인 을 위해, 황제가 먼저 입을 연 것 이었다.
“•••다른 것보다, 일단은 먼저.”
강상은 그런 황제에게 감사한 마 음을 표하며 말을 이었다.
“현재, 낙양의 수호가문에 크고 작은 문제가 많다고 들었사옵니다.”
심지어.
그 부탁이 낙양의 군권(軍權)에 대한 것이라면, 더 민감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으니.
“낙양의 수호가문이라면. 낙양 전체 관군의 통제권을 말하는 것이 로구나.”
황제는 담담하고 가볍게 말했지 만, 강상의 입안은 바짝 말라 왔다.
“대공자가 그 수호가문의 임명권 을 바라더냐?”
그 말은 낙양의 군권을 달라는 말과 같았다.
“…바란다고 하기보다는. 좀 더 자격이 있는 이들에게 군의 통제권
을 부여하는 것이 좋다는 대공자의 생각이옵니다.”
어물쩍 말을 흐리는 강상의 모습 에 황제가 유쾌하게 웃었다.
“항상 직설적이기만 하던 그대가 외교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짐도 처음 보는구나.”
“•••송구하옵니다, 폐하.”
강상이 얼굴을 붉히며 난감한 표 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며 웃던 황제가 단 호하게 답했다.
“좋다.”
황제는 조금의 여지도 두지 않았 다.
“그의 뚯대로 할 수 있도록. 짐 의 옥새가 찍힌 교지를 내리도록 하겠다.”
이로써.
앞으로, 대규모의 적들이 낙양을 제집처럼 들어와 설치는 일은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강상이 넙죽 바닥에 엎드렸다.
“폐하! 성은이 망극하읍-!”
“그리고.”
황제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
다.
“지금, 낙양의 지사직이 비어 있 지 않던가?”
황제가 알고 있는 것처럼.
자리를 던지고 도망친 낙양지사 의 자리는 현재, 부(副)지사가 대리 로 수행 중이었다.
“그렇사옵니다만….”
설마 하는 표정의 강상에게, 황 제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 다.
“짐은 대공자가 천거하는 이를 지사로 임명토록 하겠다.”
황제가 가진 권력의 절반은 임명 권에서 나온다.
심지어, 월궁이라 불리는.
중원국 최대 도시 낙양의 지사직 이라면, 수많은 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자리.
황제는 그들을 통제할 권력을 일 부나마 대공자 연소현에게 위임하 겠다고 발언한 것이다.
“폐하…!”
그렇기에 늙은 환관은 놀란 표정 을 지올 수밖에 없었지만.
“알고 있다.”
황제가 먼저 손을 들어 늙은 환 관의 우려를 막았다.
“물론, 최종적인 임명은 짐이 직 접 할 것이야.”
지사는 대공자 연소현이 고른 인 물로 하되, 절차는 지켜, 황실의 위 엄이 누수되는 일은 막겠다는 의미 였다.
강상이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리, 절차는 따른다 해도.
황도의 아수라장 같은 정계(政 界)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이, 그 결
정을 사실상 연소현이 내렸음을 모 를 리가 없었다.
황제는.
그만큼,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권 력을 깎아서라도, 연소현에게 힘을 실어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대공자의 요 청을 짐에게 그리 조심스럽게 전달 할 필요 없네.”
젊은 황제는 강상의 어깨에서도 짐을 덜어 주었다.
“그대들과 짐은 같은 배를 탄 처 지이며, 함께 같은 꿈을 꾸는 동지 와도 같으니.”
젊은 황제는 대공자 연소현에 대 한 신뢰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동지끼리는 가감(加減) 없이 필 요한 이야기가 오고 갈 수 있어야 할 걸세.”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강상은 깊이 엎드렸다.
“명심하겠나이다…!”
황제가 반색했다.
“그런데, 그 전에.”
그의 얼굴에 살짝 장난기가 드러 났다.
“강상, 그대에게 선물이 있다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늙은 환관이 얼른 준비되었던 보자기를 꺼내어 강상에게 넘겨주었다.
“폐하, 이것은…?”
황제를 상징하는 황룡(黃龍)의 문양이 선명한 금 보자기에 강상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이오? 직접 확인하면 될 것을.”
어딘가 의기양양하기까지 한 황 제의 표정에, 강상이 의아한 표정 을 감추지 못하고 그 보자기를 풀 어, 펼쳤다.
“폐하..., 이것은?!”
그것은 재상의 관복이었다.
“그대가 짐 앞에서 벗어 놓고 갔 던, 그날의 그 관복이오.”
강상이 북부 전쟁에 반대하며, 벗어 던졌던 그 관복.
황제는 그 관복을 손수 거두어.
보관하며, 손질해 두었던 것이다.
이렇게.
강상에게 직접 다시 그 재상의 관복을 돌려줄 수 있는.
이날만을 기다리며.
철면(鐵面)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던 강상의 눈시울이.
고작, 한 벌의 관복에 의해 대번 에 붉어졌다.
“홈홈.”
그런 강상을 보며, 황제가 콧등 을 쓰윽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부족한 짐을 잘 부탁하 오.”
황제가 충성스러운 노신에게 당 부했다.
“강 재상(幸相).”
노신의 붉어졌던 눈에는 어느샌
가 촛농처럼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신(臣), 강상.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드옵니다!”
강상은 우렁찬 목소리로, 황제의 은혜에 답했다.
“만세(萬歲) 만세(萬歲) 만만세 (MM 歲)!”
이 넓은 공간에.
신하는 비록, 단 한 명뿐.
하지만, 황제의 마음은 천군(千 軍)과 만마(M馬)를 얻은 것처럼 든든하기만 했다.
그 시각, 낙양검가 정문.
“개방(開放)! 전 관문(關門), 개 방하라!”
고대의 토성을 재활용한 첫 관문 부터.
대를 거쳐 쌓은 낙양검가의 이중
성곽의 관문을 비롯해.
“관문 개방하랍신다!”
모든 크고 작은 관문이 일시에 개방되고 있었다.
“관문 개방!”
그것은, 낙양검가의 엄중한 보안 체계를 생각하면, 지극히 이례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낙양검가로 접근하고 있는 이를 위해서라면.
이제는 당연한 일이었다.
“대공자님께서 돌아오셨다!”
대공자 연소현.
귀환(歸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