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98화 (298/350)

제23편 마음을 다스리는 법(法)

낙양검가, 원각정.

평소와는 달리.

오전부터 부지런하게 오가는 하 녀들이 없는 원각정은, 마치 속세 에서 벗어난 장소처럼 평화롭기만 했다.

하지만.

장소가 평화롭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까지 평온해지는 것은 아닌지

라.

비전투원으로 분류되어, 낙양에 서 가장 안전한 원각정에서 대기해 야 했던 다선랑은.

대공자의 숭전보가 들려오고 나 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 다.

“다행이구나, 다행이야.”

다선랑의 전(前) 대표이자, 사천 제일미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 상 관난화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대공자님’이시니만큼, 절대 로 패배하지는 않으시리라고 확신 은 했지만….”

현재 이곳에 있는 다선랑은, 상 관난화를 포함해서 세 명.

나머지 두 명은 대공자의 명에 따라, 하남성을 벗어난 낙양의 봄 인원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그렇게, 두 명을 연고도 없는 곳 으로 출장 보내면서도.

불안하지도 않았을 정도로 대공 자 연소현을 신용하는 그녀였지만.

“이번엔 무력 충돌이었으니….”

내공이 있는 그녀를 제외하고, 나머지 두 다선랑은, 이미.

여명과 함께 들려온 대공자의 숭

전보에 긴장이 풀려 기절하둣 잠든 뒤였다.

그들을 타박할 생각은 들지 않았 다.

‘지칠 수밖에 없었겠지.’

자신들은 아미파에 가족들을 인 질로 잡혀 압박감 속에 하루하루를 보냈고.

낙양에 도착한 첫날부터, 암살단 의 습격을 당했으며.

대공자 연소현과 손을 잡은 그날 부터는, 낙양검가의 상상을 초월한 규모의 후계자 다툼에 끼어들게 되 었으니.

연소현이 기억하는 역사에서.

후에, 중원국 십대상단에 이름을 올리게 될 다선랑이라 해도.

벅차기 짝이 없었다.

‘어찌, 최근 낙양에서 지낸 시간 동안에. 지난 인생을 전부 합친 것 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일을 겪은 것 같구나.’

그렇게, 상념에 깊게 잠겨 있었 기에.

“아미타불.”

“누구, 계시오?”

봉쇄되어, 외부인이라고는 접근

도 할 수 없는 원각정에서.

난데없이 구수한 노인들의 목소 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까무러칠 듯 놀랐던 것이다.

다행히.

이 귀신처럼 출몰하곤 한다는, 소림사 출신의 두 노승에 대해서는 시녀들에게 들어 두었던 적이 있었

다.

“이것이, 동자승들을 위한 말린 육포이고. 이것은 쌀입니다.”

두 노승은 연신 불호를 외우며, 감사를 표했다.

“이것 참, 매번 감사하외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런데.

상관난화로부터 육포와 쌀을 넘 겨받던 스님이 그녀의 손을 보고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예? 왜 그러시죠?”

범상찮은 스님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두었기에, 그 무례함에도 상 관난화가 발끈하는 일은 없었지만.

노승의 눈은 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어, 상관난화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보살(善確) 께서는….”

노승은 무심하게 툭 하고 묵직한 말을 꺼냈다.

“횡액(橫厄)을 맞을 상(相)을 가 지고 계시구려.”

“예?!”

“박하고 박한 인생이 될 상이로 다.”

다른 노승도 그녀의 얼굴을 들여 다보며 말을 덧붙였다.

“어릴 때는 복을 타고 태어나, 부유한 집안에서 걱정 없이 자랐을 것이고, 또 뛰어난 상재를 가졌으 나, 인생이 험난하여 고생과 고생 을 거듭하니. 그 파도를 넘어서야 빛을 보겠구나.”

성도지사를 아버지로 두고, 대리 단가의 혈족을 어머니로 둔 상관난 화.

원래, 역사에서.

다선랑은 낙양에 오는 길에 아미 파의 꾀에 빠져, 인원을 암살당하 고.

그길로 아미파의 마수에 붙들려, 그들의 배만 불려 주다가, 후에 이 르러서야 대성하게 되는 이들.

노숭의 눈은 어찌 보면, 기이할 정도로 정확하다 할 수 있었다.

“스님들. 제가 횡액을 당한다구 요?”

“아니오.”

노승이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었

다.

“정확히는 횡액을 당했어야 할 상이지.”

다른 노승이 말을 이었다.

“보살의 운명(運命)은 이미 비틀 렸소.”

노승이 손을 들어 원각정의 전각 들을 가리켰다.

“이 집의 시주(施主) 같은 ‘거대 한 별’의 근처에서는 그렇게 타고 난 운명이 뒤틀려 부서지곤 하지.”

절대로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선문답 같은 말에, 상관난화가 혼 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뒤틀려 부서졌다고요? 그게 좋 은 의미인가요? 아니면, 나쁜 의미 인가요?”

“좋은 의미도. 나쁜 의미도 아니 오.”

노승들은 홀홀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저, 그러한 것에 불과할 뿐.”

“타고난 운명이 백지(白紙)로 돌 아갔으니, 그 결과는 보살이 얼마 나 열심히 살아가느냐에 달렸다는 말이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원래라면.

나쁜 일을 당했어야 할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인 대공자 연소현을 만나, 결과가 바뀌게 된 것이란 말 일까.

그리고 앞으로의 인생은, 이제 온전히 자신에게 달렸다는 뜻 같았 다.

상관난화는 어쨌든, 그 말들이 자신에게 나쁜 이야기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스님들.”

“부디, 마음 상하지 마시고, 그저 이 땡중들의 덕담(德談)이라고 생

각해 주시오.”

“아미타불.”

노승들이 미소 지으며 합장하고 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름다운 원각정의 마당에 서서.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 는 상관난화를 따스한 눈으로 바라 본 그들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대공자 연소현의 거 처로 향했다.

“•••다른 이들의 운명을 비틀어 부수어 버릴지언정, 자신은 더욱더

무겁고 깊은 고행의 길로 들어가게 되는구나.”

원각정에서 멀어지는 노승들의 눈에는 안쓰러움과 연민이 묻어 나 왔다.

“부디, 우리가 건넸던 작은 선물 이 도움이 되기를….”

그 작은 선물이란.

그들이 마지막에 방문했을 때, 연소현에게 넘겨주었던 낡은 서책 을 일컫는 것이었다.

그 시각.

연소현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던 공간은, 넓다고 해 봐야 일반적인 방 한 칸 넓이밖에 되지 않았지만.

끈적한 어둠 속에 휩싸인 그 공 간은 어째서인지, 무한하게 느껴졌 다.

[놈…!]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수천 마리의 짐 승이 동시에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감히, 우리를 기만하려 드느냐?!]

그것은 제암진천경에 굴복한 연 자들의 목소리였다.

[지금껏 네놈의 일거수일투족(一 擧手一投足)올 하나도 놓침이 없이 우리가 지켜봐 왔거늘.]

[네놈이 이번 마기의 폭주에 대 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은, 이미 꿰 뚫고 있다!]

무한하게 깊은 제암진천경의 어

둠 속에서.

연소현은 마치, 홀로 광활한 우 주 공간에서.

끝도 없이 떨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런가? 내가 대응할 방법이 없 다고, 확신하나?”

가면 아래, 그의 입가에 걸린 것 O

분명 미소였다.

그것은 평소처럼.

오만하기까지 할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미소.

현재.

마교의 마기를 먹어 치운 제암진 천경의 마기가 전에 없이 날뛰고 있었다.

하지만.

연소현은 이번 일을 마지막까지 확실하게 조율하기 위해서, 운기조 식으로 마기를 다스릴 틈이 없었다.

그 결과가 지금의 폭주였다.

그러나.

안으로 겉으로 마기가 폭주하며,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 태도가 얼마나 오연(微然)하 기가 짝이 없었던지.

승리를 확신하던 제암진천경의 굴복한 연자들마저도 순간적으로 잠시 움찔했을 정도였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끌 의도였 다면, 시도는 좋았다.]

[하지만.]

[이제, 그 여유도 끝이다.]

다시 한번 완전하게, 연소현의 상태 점검을 마친 그들은 확신을 가졌다.

[저번처럼, 마기를 감당할 그릇을

바꾸어 대웅할 생각이라면, 포기해 라.]

[이제 그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과연, 천고(千古)의 마물(魔物).

이미, 대웅책을 강구해 온 모양 이었다.

같은 수에 여러 번 당하지 않는 다는 것인가.

“그런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온몸의 혈관이 마기에 물들어 시 커멓게 불거져 나오는 상황에서도.

연소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멈추 질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놈-!]

제암진천경에 굴복한 연자들이 무어라 외치려던, 그 순간.

모든 소리가 사라지더니.

연소현에게서 빛이 터져 나왔다.

[이건…?!]

[불법(佛法)의 성광(聖光)•••?!]

연소현에게서 뿜어져 나온 빛이 사방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제암진천경의 마기가 드리우던 무한한 넓이와 깊이를 가진 어둠이 걷히자, 방 안의 풍경이 훤히 드러 나고 있었다.

여명보다도 눈부신 빛.

제암진천경에 굴복한 연자들은 그것을 불법의 성광이라 일컬었다.

[말도 안 된다!]

[이 정도의 성광을 발할 불문(佛 門)의 심법(心法)을 몰래 익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암진천경은, 자신했던 것처럼.

연소현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개량해 가는 심법들을 면밀 히 파훼하고, 그가 무슨 일을 꾸미 는지 낱낱이 파헤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속임수를 쓴 것이 냐?!]

“모를 수밖에.”

환한 성광을 내뿜으며, 연소현은 한결 편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이건, ‘내’가 익힌 심법이 아니 니까.”

연소현 의식 세계.

가장 깊숙한 곳.

제암진천경조차 아직 찾지 못한 그곳에는, 거대한 천인단애(千例斷 W)가 있었다.

수백만, 수천만.

어쩌면 수억의 해골로 만들어진 절벽 아래서 빛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불법의 성광.

그것을 발하는 이는.

다름 아닌, 두 번째 연소현.

양의심공으로 복제되어, 대신 마 기를 감당하던 그릇.

연소현의 또 다른 자아였다.

“이게 바로. 불가의 고대 비전, 역근세수경 (易筋洗隨經) 이다.”

그는 허공에서 벼락을 맞은 듯이 꿈틀거리는 제암진천경의 마기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맛이 어떠냐?”

역근세수경은, 달마대사가 남겼 다는 전설 속의 심법.

원각정을 드나들던 소림사의 고 승(高僧)들이 연소현에게 주었던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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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뒤흔드는 거대한 괴성과 함께, 제암진천경의 마기가 물러나 고.

심상 세계 깊숙한 곳까지 침투했 던 침식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었 다.

“하하하핫!”

사슬에 묶인 두 번째 연소현이 그 모습을 보며, 통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연소현이 역근세수경을 받았던 것은, 한참 전.

다선랑이 도착하기도 전의 일이 었다.

하지만, 연소현은 그것을 즉시 익힐 수는 없었다.

그가 익히기 시작하면.

그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제암진천경이 얼마든지 대응법을

찾아낼 것이다.

그렇기에 연소현은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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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근세수경을 익힐 시도조차 하 지 않았지만, 모든 내용을 기억하 는 연소현이.

원래 있던, 첫 번째 연소현을 대 체하여, 그릇이 되어 속박된 그때 부터.

제암진천경조차 도달하지 못한, 연소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연공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완전한 역근세수경으로, 제암진 천경에게 완벽하게 불의의 일격을 성공시킨 것이다.

“하하하하하핫!”

가부좌를 틀고 있던 연소현이 눈

을 뜨자, 그곳에는 정갈한 방의 풍 경이 펼쳐져 있었다.

멀리, 시가지의 소음이 아련하게 들려오는 가운데.

가림막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은 온화하게 실내를 비추고 있어, 평 온하기만 했다.

그의 얼굴을 뒤덮고 있던 가면은 어느새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이곳에서 있었던 일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후우우우….”

마지막으로 길게 호흡을 고른 연 소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림막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만세-!”

“대공자님 만세-r

여전히, 거리 이곳저곳에서 만세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는 가운데.

기분 좋은 바람이 연소현의 땀투 성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제암진천경은 물러났고, 침식은 중단되었으며, 폭주는 끝났다.

당분간, 마기의 통제권은 연소현

에게 있었다.

비록, 역근세수경의 힘이 효과적 인 것은 한동안뿐일 테지만.

그때는.

또 그때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잠시, 눈을 감고.

그 땀을 식히며 느껴지는 시원함 을 즐기던 연소현이 밖을 향해 외 쳤다.

“시녀장, 거기 있느냐?”

문밖에서 초조함을 달래며, 대기 하던 시녀장 정아가 즉시 문을 열

고 들어왔다.

“예, 주인님. 소녀, 여기 있사옵 니다…!”

주인의 안색을 보고 환한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연소현이 말했다.

“자, 다음 일정을 시작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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