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97화 (297/350)

제22편 기다리고 있었다

“만세!”

집마다 창문을 열고, 문을 열고, 밖을 향해 꽃잎을 뿌렸다.

아이들은 몰려다니며 들꽃을 꺾 어 허공에 뿌렸다.

동네 서원의 가난한 서생(書生) 들이 높은 탑에 올라 종이를 찢어 서 뿌리자, 아래에서는 한바탕 크 게 환호성이 울리고.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종이 상인

들은 기꺼이 염가에 종이를 내놓았 다.

“대공자님 만세!”

낙양의 백성들은 어디서부터 만 세가 시작되었는지는 몰랐다.

그들은 대공자의 얼굴도 몰랐다.

자애원과도 관련이 없고.

선녀신앙도 없는 이들.

대공자가 자신들의 삶과 직접적 인 관련이 없었기에.

굳이 나서서 대공자 만세를 외칠 이유가 없는 이들도 많았다.

“만세!”

하지만, 지난밤 포격음 속에서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던 이들에게는.

그 공포가 끝났다는.

그리고 평소와 같은 일상으로 돌 아왔다는 신호가 필요했고.

축하가 필요했다.

“만세!”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이 옥상에서 뿌려 대는 종 잇조각과 꽃잎들을 맞으며.

맨 처음 대공자 만세를 외쳤었던

젊은 점원이 감격한 표정으로 사방 을 둘러보고 있었다.

빈민가 출신.

자애원의 도움을 받아 성인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그였다.

자신이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전부 얼굴도 모르는 그 대공자 덕이었다.

그는 어느새 자신의 눈가가 붉어 지고 뺨이 축축한 것을 느꼈다.

“만세!”

“만세!”

그는 벅차오르는 가슴에.

거리의 그 누구보다도 큰 목소리 로 외쳤다.

“•••대공자님 만세!”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낙양검가의 대공자가 칩거를 끝 내고 돌아왔다는 소식은, 저 위의 사람들에겐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 했지만.

빈민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류층 도 아닌 일반 백성들에게는, 먼 이 야기 였다.

그저 홍미와 재미 위주의 이야깃 거리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만세!”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온 낙양이.

대공자 연소현의 귀환을 실감하 고 있었다.

“비켜! 시X!”

“뭐가 좋다고 만세를 부르고 있 어?!”

덩치가 큰 남자들이 만세를 외치 는 이들을 밀어젖히자.

그 사이로 발걸음을 서두르던 늙 은이 하나가 타박을 줬다.

“너무 눈에 띄는 짓은 하지 말라 니까 ••!”

그러면서도, 늙은이는 인파 속에 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쉴 새 없이 뒤를 살피며 흘긋거 리기를 멈추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이공자 측을 뒷배로 두고, 암흑가를 주름잡던 육인회의 우두 머리 중 일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움직여야 한단 말이다…!”

“예, 어르신.”

그 말에 덩치들이 고개를 끄덕이 고는, 묵묵히 몸으로 인파를 밀어 길을 열었다.

인파를 피해 목적했던 골목에 도 착하자, 늙은이와 일행들이 한숨을 돌렸다.

“추격자는 없나?”

늙은이의 호위이자, 최측근인 혹 도 무림인이 고개를 저었다.

“특별히, 기감에 걸리는 이는 없 습니다.”

하북에서 인간 사냥으로 명성을 상당히 쌓았던 흑도 무림인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근처 인물들의 면면(面 面)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지만, 여 기까지 따라온 이는 없었습니다.”

“그래…?”

잠시, 희색을 띠었던 늙은이가 한 번 더 확인했다.

“•••혹시라도 은신해서 따라오고 있을 가능성은?”

“ 없습니다.”

흑도 무림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상대가 귀신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제 눈을 피할 수는 없습니 다.”

“•••좋아.”

지금도 미친 듯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이 인파 속에서, 누군가를 몰래 추적하는 것은 지독하게도 어 려운 일이었다.

대공자를 부르며, 만세를 외치는 이들을 맨손으로 하나하나 전부 찢 어발겨 버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에는, 그들 이 오히려 도움이 되고 있었다.

“서두르자.”

늙은이와 수하들은 복잡한 뒷골 목을 걸었다.

오늘따라 좁고 더러운 뒷골목의 풍경이 유난히 거슬려, 늙은이는 인상을 썼다.

“다른 놈들은…?”

육인회의 다른 우두머리들에 대

한 물음이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신용할 만한 정보는 없지만.”

그와 함께 살아남은 유일한 간부 가 답했다.

“아무래도, 탈출에 성공한 것은 우리뿐인 것 같습니다.”

“•••그래.”

이래서 만사(M事)에 철저한 준 비가 중요하다.

낙양검가 전쟁부의 무사들이 모 습을 드러냈던 그때.

늙은이는 즉시, 미리 준비해 둔

근처 지하 공간으로 대피해 몸을 숨겼었다.

그리고, 죽은 쥐새끼처럼 숨도 쉬지 않고 버티다가.

온 낙양 거리에서 이 만세 난리 가 시작되자, 그를 틈타 도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막다른 골목.

덩치 좋은 수하들이 난잡하게 쌓 여 있던 물건들을 치우자, 숨겨져 있던 철제문이 드러났다.

인간 사냥꾼 출신 흑도 무림인이 먼저 문을 철저하게 살폈다.

“열렸던 흔적은 없습니다.”

이곳은.

만약에 만약을 대비해 평소에 숨 겨 두었던, 늙은이의 안전 가옥이 자, 대피소였다.

“확인해라.”

철두철미한 성격답게, 늙은이는 수하들을 먼저 안으로 들여보낸 뒤 에.

“이상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변의 확인까지 마 치고서야, 안전 가옥 안으로 들어 갔다.

썩은 곰팡내가 뇌리를 찌르듯이 풍겨 왔지만, 늙은이는 오히려 그 냄새가 반가웠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확인을 마친 이후에, 누구도 문을 연 적이 없다 는 뜻이었으니까.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 겠습니까?”

여기까지는 목숨을 걸고 오느라, 다른 곳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 지만.

이렇게, 안전 가옥에 도착하자.

다들 허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 다.

조직원들은 대부분이 죽었거나, 끌려갔다.

뒤를 봐주던 이공자 측이 나자빠 졌으니, 낙양에서 그들의 기반도 전부 박살 난 것과 같았다.

육인회란 이름도, 이제 낙양에 서 잊혀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 였다.

“어떻게 하기는.”

늙은이가 미소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소라니.

모두의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늙은이가 구석에 다가가 널브러져 있던 사슬을 당겼다.

구르릉—.

그러자 작은 진동과 함께, 숨겨 져 있던 금고가 드러났다.

“그건…?!”

늙은이가 금고를 열자, 안에 수 북하게 쌓여 있던 금은보화와 전표 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맡고 있었던, 대선상회의 비밀 자금이다.”

....

그것은 구양 태상부인의 은닉 재

산 중 일부였다.

원래라면, 늙은이는 금고지기의 역할에 충실하기만 해야지 감히, 손도 대지 못할 돈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이라면 가능했다.

“이 정도 액수라면, 어디 다른 도시에서 새로 조직을 만드는 것도 일은 아니지.”

눈으로 금고 안에 든 재산의 가 치를 따져 보던 간부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합니 다! 아니, 차= 넘칩니다!”

“어머, 그러게요. 엄청난 액수군

요.”

그러게요, 라고 대답한 것은 여 인의 간드러진 목소리였다.

“……?!”

모두가 당황했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일행 중엔, 애초에 여자가 없었으니까.

“지겨워서 죽는 줄 알았는데, 꾹 참고 여기까지 따라온 보람이 있었 네요.”

미행당했다.

상황을 파악한 늙은이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당황보다는 분노였 다.

“귀신이 아니라면, 아무도 따라 붙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

늙은이는 인간 사냥꾼 출신 혹도 무림인을 다그쳤지만.

그가 입에서 대답 대신 홀린 것 은, 부글거리는 피거품이었다.

“크륵, 켁, 켁

우드득.

알 수 없는 소름 돋는 소리와 함 께, 그의 눈알이 허옇게 뒤집히더 니.

그 자리에서 절명해, 실 끊어진 인형처럼 주저앉아 쓰러져 버렸다.

“..?!”

그렇게 혹도 무림인이 쓰러지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여인의 모습이 유등 빛에 드러났다.

더없이 비싸 보이는 궁장 차림과 화려하기 짝이 없는 색조 화장은, 어째서 그녀가 거기 있다는 것을 몰랐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어머, 설마…!”

그녀가 의외라는 둣한 표정을 짓

더니, 어이가 없다는 둣이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로 자신들이 대공자님의 손 아귀에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했었나요?”

노골적으로 도발적인 말투였지 만.

그 자리의 누구도 그녀의 말투 따위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달칵, 달칵.

모두의 시선이 그녀의 새하얀 손 이 굴리고 있는 굵은 뼈마디들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 허리뼈?”

그녀가 요염하게, 그리고 화사하 게 미소 지었다.

“그래요. 척추빼랍니다. 예쁘죠?”

그녀는 사라쌍수(沙羅雙樹).

서림청.

대공자의 암살자였다.

한참, 현월각주 세아를 도왔던 그녀가 여기서 모습을 다시 드러낸 것이다.

“으, 으아아아…?!”

비명을 내지르며 가장 먼저 도망 치는 것은 간부였다.

하지만 반지하의 입구를 통과한 그를 반겨 준 것은 아침의 햇살이 아니었다.

콰직-!

좁은 골목 틈새에서 기형적으로 긴 손이 튀어나와 그의 머리통을 잡아 바닥에 꽂아 버렸다.

두개골이 잘게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그 홍흉한 손의 사이로 으깨 진 내용물이 홀러나왔다.

“벌레들은 그 작은 머리로, 자신 이 보는 작은 시야가 세상의 전체 이며, 자신의 판단이 전부 옳다고 생각하지.”

스윽, 하고.

절대 사람이 다닐 수 없을 정도 로 좁은 건물들의 틈새에서 거미 같은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게, 벌레들이 어디든 잘 번식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가느다란 몸통에, 기형적으로 긴 팔다리를 소유한 괴인('I至人)이었다.

“본좌(本座)처럼. 해충 구제(驅 除)를 전문적으로 하는 인물이 세 상에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지.”

사천당가가 배출한 최악의 암살 자이자, 사공자 연비의 최측근 증 하나.

기기 괴괴 (奇奇怪怪).

사천의 침묵자(沈默者)였다.

“만세!”

“대공자님 만세!”

뒷골목의 뒷골목에서 들려오는 아련한 비명들은, 거리의 환호성에 묻혀 허무하게 사라졌다.

낙양, 어느 구석.

현월각의 안전 가옥.

“서림청과 기기괴괴로부터, 사냥 이 끝났다는 보고입니다.”

창가에 걸린 가리개 사이로, 희 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 며 현월각주 세아가 보고를 하고 있었다.

“사천당가 측에서도 소식이 들어 왔습니다. 부가주 당귀호가 직접 아미파의 총무사태를 이송 중이라 고 합니다.”

어둠 속에서 상석(上席)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있던 이로부터, 질 문이 돌아왔다.

“•••본가의 상황은?”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끈적한 마기(魔氣)로 인한 오한에도 현월 각주 세아의 대답은 즉각적이었 다.

“이공자 측 장로들은 압송되었 고, 구양 태상부인은 자택에 연금 중입니다. 이공자는 검가에서 파견 한 무사들을 따라서, 본가로 돌아 오는 중이랍니다.”

그녀가 들여다보던 서류를 내리

고, 억지로나마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더할 나위 없이, 딱 주군께서 원하신 그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주군, 대공자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상황을 주시하고, 보고 하도록.”

눈치가 빠른 세아가 아니라, 누 가 듣더라도 그 목소리에는 연소현 이 겪고 있는 고통이 느껴졌다.

“주군. 그러니, 이제는 운기조식 이라도 하시고, 쉬시는 것이….”

연소현은 폭주 직전의 마기와 사 투를 벌이면서도, 지금까지도 모든 일을 면밀하게 살피고 있었다.

광기가 느껴질 정도로 섬세하게 마무리 단계를 조율하고 있었다.

“아니.”

힘겨운 기색과 전혀 어울리지 않 을 정도의 단호한 목소리로 연소현 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더 이상, 벗겨지지도 않는 하얀 가면이 허공에서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쉬는 것은, 모든 일이 마무리가 지어진 이후에 해도, 충분하다.”

“하지만-.”

“걱정해 줘서 고맙다.”

부드러운 주군의 말에, 더 이상 말을 꺼낼 수 없었던 세아는 고개 를 깊이 숙여 보이고, 방을 나섰다.

“만세-!”

방을 나서서 복도를 걷는 그녀에 게 멀리서 만세 소리가 들려왔다.

저들은 알까.

이 숭리의 주역인 대공자 연소현 이, 자신의 주군이.

지금 상상하기도 힘든 고통을 버 티고 있는 것을.

입술을 깨문 그녀가 발걸음을 옮 겼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 가리개 사 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있었건만.

지금 실내는 칠흑 같은 어둠 속 이었다.

연소현이 세아를 위해서 억누르 던 마기가 터져 나와, 현실을 왜곡 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련하구나, 연자여.]

모든 정신적인 방어를 뚫고, 머 릿속을 헤집으면서 들려오는 목소 리.

제암진천경에 무릎 꿇고 복속된 연자들의 목소리였다.

[하찮은 필멸자에 불과한 네가 언제까지 이 폭주를 억누를 수 있

을 것 같으냐?]

하지만.

식은땀을 비처럼 쏟으면서도.

가부좌를 튼 몸을 가늘게 경련하 면서도.

하얀 가면 아래, 연소현의 입가 에 걸린 것은 분명, 미소였다.

그리고 그 미소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폭주를 억누르다가 한계 에 도달한 이의 표정이 아니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상대를 끌 어들이는 것에 성공한 사냥꾼의 표 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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