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96화 (296/350)

제21편 만세 (M 世)

“그나저나, 정말 신기한 일이에 요.”

당귀호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무방비하기 짝이 없어, 딱 공격 을 당하기 좋은 자세였지만.

총무사태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완전히 무력화된 상

태였으니.

“참 오랜 시간 동안 우리 당가를 귀찮게 해 온, 그 백발성성 고독노 귀가….”

비록, 지금은 당귀호 자신이 사 천당가의 부가주이고.

백발성성 고독노귀는 총무사태에 불과했지만.

본디 그녀는, 그가 태어나기도 이전부터.

그 악명을 떨치던 인물이었다.

그 넓은 사천 땅에서도.

그 오랜 시간 동안, 고약한 계략

을 꾸미는 능력은 그녀를 따를 이 가 거의 없었고.

그러면서도, 정치적인 감각에서 는 황도의 고위 대신들을 방불케 했으며.

심지어, 무공 능력조차 벽을 넘 어선 이.

“그런데, 그런 고독노귀가 이렇 게 쉽게 잡히다니요.”

그가 광량녹피 장갑을 낀 손을 들어, 무릎 꿇은 총무사태의 주름 진 이마를 장난스럽게 툭툭 쳤다.

“그것도 두 번이나.”

전투.

전투라 할 만큼, 그 일전은 길지 않았다.

전투의 승패는 많은 경우가 그 준비에 달려 있었고.

천하에서 전투의 준비를 사천당 가만큼이나 깊고 철저하게 할 수 있는 가문은 찾아보기 힘들었으니.

“…주, 죽여라.”

팔이 잘리고, 눈알 하나가 녹아 내린 총무사태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원래라면, 당귀호의 정신을 풍요 롭고 풍족하게 해 줄 정도였지만.

“아쉽지만.’’

당귀호는 들뜨지 않았다.

“당신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제 소관이 아니랍니다.”

백발성성 고독노귀를 두 번이나 잡은 것은 자신이 아니라, 대공자 연소현이 었으니까.

부처님 손바닥이 이러할까.

대공자 연소현은, 거대한 그물망 을 펼쳐 그녀가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이겨 두었었고.

한번 그물에 걸렸던 그녀는, 도 망을 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의

함정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놈! 네놈은 나를 살려 둔 것 을 후회하게 될 것이야!”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로 짙은 원 한이 느껴지는 말이었지만, 당귀호 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의 그림자들도, 신경 쓰지 않 았다.

속에서부터 단전이 녹아내린 그 녀를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단장님. 비구니들의 적재가 끝 났습니다.”

금속으로 만든 감옥형 수레들에 는 비구니들이 줄줄이 엮여, 그 보

고 그대로 적재되어 있었다.

“죽은 자는?”

“없습니다.”

귀한 몸들이다.

그들은 적어도.

다선랑 암살 미수에 대한 증언을 하거나, 그 혐의를 조사받고, 공식 적으로 처형될 때까지는 숨이 붙어 있어야 했다.

“미리 지정된 경로를 따라 운송 하도록 하세요. 사천에서 이미 사 람이 오고 있을 터이니, 중간쯤에 서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 이쪽은…?”

그림자의 시선이 총무사태를 향 했다.

“이쪽은 신경 쓰지 말도록 하세 요.”

당귀호의 입가에 간드러진 미소 가 걸렸다.

“대공자께서 제게 부탁하셨으니, 제가 직접 대공자께 전달해 드릴 테니까요.”

그림자들이 총무사태를 포박하 고, 특수하게 고안된 입마개로 입 을 틀어막았다.

“그아아아아-!”

“저런,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마치 짐승처럼 몸부림치며 울부 짖는 총무사태를 향해, 당귀호가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설마, 대공자께서 그대를 잡아 먹기라도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암천존자의 정체에 대해 모르는 당귀호가 한 조롱성 농담이 었지만.

의외로 진실은.

농담에 더 가까울 때가 있었다.

구름 하나 없이 맑은 하늘이 청 명했건만.

죄악계곡의 근처의 시가지 모습 은 엉망이었다.

군데군데 올라오는 검은 연기.

박살이 난 점포들과, 난장판이 된 거리는, 이곳이 월궁(月宮)이라 불리는 낙양의 번화가가 맞는지 의 문이 들 정도였다.

급히 시체들부터 치웠지만, 여전 히 포석들에 남아 있는 검붉은 핏 자국들이.

지난밤에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 는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낙양의 암혹가가 총동원되다시피 했던, 그 여파.

약탈과 방화, 살인.

그 피해를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로 이 거리는 크게 타격을 받았다.

“저기 옵니다!”

틈틈이 밖을 내다보던 점원이 그

렇게 외치자, 함께 손수 난장판이 된 점포를 정리하던 점주가 빗자루 를 던졌다.

“당장 보러 가자!”

우르르.

점원들과 점주가 한 덩이가 되어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이미 점포의 문짝은 전부 박살 난 지 오래였기에, 굳이 문단속을 할 필요도 없었다.

“저기 보인다!”

“이쪽으로 오고 있에”

거리에는 이미, 거리의 주민들이

쏟아져 나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 다.

그들 대부분이 장사 밑천이 전부 박살 나고, 약탈당해, 곤혹스러워하 거나 슬퍼하는 이들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들의 얼굴에서 절 망의 흔적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 었다.

“길을 비켜라!”

행렬의 가장 선두에서.

당당하게 걷는 전투마를 탄 낙양 검가의 무사가 우렁차게 외쳤다.

“죄인들의 후송이다!”

순간, 몰려든 인파에 소란이 일 었다.

“밀지 마! 밀지 말라고!”

어떻게든 앞으로 나오려는 이들 과.

“아, 제길! 여기선 제대로 보이질 않잖아!”

무사들의 통제에 뒤로 물러나려 는 이들이 엉겼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

막상, 죄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행동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화려한 비단옷이 벗겨지고.

대신 낡은 백의를 입은 이들이 줄에 줄줄이 묶여, 맨발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들은 하룻밤 사이, 족히 열 배 는 늙어 보이는 얼굴을 깊이 숙이 고 있었지만.

“ 저자는…‘?”

“저자는 틀림없이, 송 장로가 아 닌가?”

인파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홀러나왔다.

낙양에서 너무나 유명한 낙양검 가의 장로들이었기에, 이곳에는 그 들을 알아보는 이들로 가득했다.

“저쪽에 하후 장로도 있군.”

그들은 지난밤 작전을 수행했던, 이공자 측 장로들이었다.

제삼부두에서 검가 전쟁부의 무 사들에게 잡힌 그들이, 본가로 이 송되는 중이었다.

개중에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것에 치욕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이를 악문 이도 있었고.

“이건 모함이야! 나는 그저 외부 업무를 위해, 시내에 나와 있던 것 뿐이란 말이다!”

여전히 되지도 않는 말을 뻔뻔하 게 외치는 이도 있었고.

외눈의 하후 장로처럼 담담한 표 정으로 걷는 이들도 있었다.

“저들이….”

“바로 암흑가를 움직여 이 난장 판을 만든 원흉들이란 말인가?”

그렇게 수군거리면서도.

모여든 이들 중엔, 감히 그들에

게 소리를 치는 이도 없었다.

그들이 이렇게 묶여, 맨발로 거 리를 걷는 중이라 해도, 검가의 장 로다.

그들과 인파를 이루고 있는 이들 사이에는, 까마득한 신분과 권력의 차이가 존재했다.

깊고 강력한 낙양의 암흑가는 번 화가의 점주들에게서 막대한 상납 금을 뜯어 가고.

그 상납금은 그들의 주인인 이공 자 측에게로 흘러 들어간다.

그렇기에 이공자 측 장로들은 천 외천(天外天)의 존재였다.

하지만.

“이 X같은 새끼들…!”

누군가가 욕설과 함께, 힘껏 던 진 작은 돌이 행렬에 날아들었다.

그 작은 돌은 형편없이 빗나가, 바닥에 떨어졌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검가의 장로라는 것들이…!”

다른 이가 던진 돌이 이번엔 장 로 하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러고도 너희가 천하제일가라 는 낙양검가의 장로라고 할 수 있 다는 말이냐?!”

돌을 던지는 이가 한 명에서 두 명이 되고, 두 명에서 세 명이 되 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 다.

“망할 놈들!”

세 명이 열 명이 되고, 열 명이 수십 명이 되는 것은 더더욱 쉬웠 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밤새 있었던 난리 통에, 바닥은 깨지고 박살 난 포석들로 가득했고.

한번 불이 붙은 군중들은 남녀노 소 누구랄 것 없이 장로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빠악!

돌이 날아와 머리에 부딪혀 피부 가 찢기고 피가 흘렀지만.

하후 장로는 눈을 감고 걸으며 그 돌들을 감내했다.

“컥…!”

하지만 모두가 하후 장로처럼 내 공이 있어 초인의 몸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빠악-!

“히익…!”

제법 힘이 들어간 돌이 어깨를

치자, 노령의 장로가 바람 빠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서 주 저앉았다.

“•••쳇.”

그러자 내키지 않는 표정의 무사 들이 나서서, 위험한 경로로 날아 드는 돌들은 일일이 쳐 내기 시작 했다.

아무리 죄인들이라 한들.

본가에서 판결을 받기 전에, 길 가에서 돌에 맞아 죽게 할 수는 없 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놈들을 감싸는 것이

냐?!”

일방적으로 당해야 했던 피해.

일방적으로 시달려야 했던 고통.

힘이 없었기에 침묵해야 했던 피 해자들의 분노가 점차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너희도 결국 한패거리인 것이 야?!”

“검가의 식구는 검가의 식구라는 건가?!”

“그렇다면, 조용히 보이지 않게 데려갈 것이지!”

“우리가 힘없는 민초(民草)들이 라 조롱하는 것이냐?!”

군중은 불이 붙기는 어려우나, 한번 불이 붙으면 걷잡을 수 없이 불길이 번져 가기 마련이었다.

“경계 태세!”

그 상황에, 전쟁부의 무사들이 잇소리를 내며 검 자루를 쥐었다.

“들어 주시오, 낙양의 백성들이 여.”

하지만 그들이 우려했던 충돌은 없었다.

“우리 낙양검가는 죄인들을 보호 하는 것도, 그대들을 조롱하는 것 도 아니오.”

나직했지만.

모두의 머릿속에 직접 울려 퍼지 는 듯한, 중후한 목소리에 군중의 행동이 일순 정지했다.

“죄인들은 본가의 신성한 법전과 법률에 따라, 엄중히 대가를 치르 게 해야 하오.”

행렬의 뒤에서부터 다가온 거대 한 중년 남성은 둥에 거검(巨劍)을 매고 있었다.

“검악파산!”

“검가의 염 장로님이신가…!”

이곳에 모인 군중들은, 지난밤

난리를 수습했던 승전장군을 못 알 아볼 수가 없었다.

염 장로는 자신을 알아보는 이들 에게 피가 말라붙은 손을 들어 보 이며 말을 이었다.

“조금 전에 들어서 알고 있겠지 만. 본가의 대공자님과 최고운영회 의는 책임을 통감하고, 어떤 배상 과 지원도 아낌없이 베풀 것을 약 속했소!”

대공자 연소현과 최고운영회의의 움직임은 민첩했다.

그들은 전투가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 사람을 보내고, 방을 붙

여, 책임을 인정하고, 보상을 약속 했다.

그것이, 여기 모인 이들의 얼굴 이 어두울지언정, 절망에 차 있지 는 않았던 이유였다.

“분명, 그대들 중에는 가까운 이 들을 잃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 상실이 한낱 금전적 보상으로 치유 가 되지 않는 것도 알고 있소.”

군중들이 하나둘씩 손에 든 돌을 떨어트리는 것을 보며, 염 장로가

정중히 손을 모아 보였다.

“내 그대들에게 이렇게 깊은 유 감을 표하오.”

일촉즉발이었던 방금의 상황이 거짓말처럼 여겨질 정도로.

염 장로의 대웅은 효과적이었다.

“부디, 본가 전체를 믿어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소. 모든 것이 한 번에 바뀔 일도 없겠지. 하지만.”

그가 모았던 손을 거두고 겸허한 태도와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의 본가에는, 그대들이 믿 을 수 있는 이가 분명 있을 것이 오.”

염 장로가 군중들과 시선을 마주 치며 물었다.

“그렇지 않소?”

그 질문에.

군중들의 표정에 잔잔한 변화가 있었다.

후열에서 누군가가 번쩍 손을 들 어 올렸다.

깨진 돌을 드는 대신, 굳게 쥔 주먹을 혼들며 누군가가 소리 높여 외쳤다.

“검가에는 대공자님께서 계신 다!”

그 외침에, 군중들이 깨달았다.

더 이상, 이 거리에는.

이 번화가에는.

암흑가를 통해 군림하던 이공자 측이 설 곳이 없어졌다는 것을 깨 달았다.

비록.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음지(陰地) 가 없을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앞으로는, 무소불위의 힘 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조직들은 없 을 것이다.

“대공자님, 만세!”

누가 먼저 외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만세!”

“만세!”

군중들이 외치는 만세 소리가 사 방으로 퍼져 나갔다.

어째서인지.

이공자 측 장로들의 머리는, 돌 들이 비처럼 쏟아질 때보다도.

더욱 깊이 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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