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95화 (295/350)

제20편 성수불루(盛水不보)

낙양 외곽, 교외(苑外) 지역.

훤히 밝아 온 아침 햇살이 눈에 부시건만.

그 햇살을 피하기라도 하듯이, 큰길 대신 굳이 숲속 짐승길을 걷 는 한 무리의 인물들이 있었다.

“이봐, 길이 점점 험해지지 않 나?”

여인이 앞서 걷던 이의 어깨를

잡아챘다.

“이 길이 확실하겠지?”

짐꾼들이나 입을 허름한 옷을 입 고 있었지만, 그녀가 가진 무림인 특유의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운 눈 빛은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무림인의 기세를 받으면서 도, 길을 선도하던 중년 남성은 태 연히 넉살 좋게 웃어 보였다.

“이런 대혼란 상황에서, 우리 상 단만큼이나 믿을 수 있는 전문가 집단은 없으니. 안심해도 좋소.”

“만약, 일이 를어지면-.”

“아이고. 일이 틀어지다니.”

중년 남성이 들을 가치도 없다는 둣이 손사래를 쳤다.

“그럴 일은 결코 없소.”

그가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자신 의 가슴팍을 두드려 보였다.

“우리, ‘활로(活路) 상단’은 이 거대 도시 낙양 최초의 탈출 전문 상단이며, 중원국에서도 손꼽히는 탈출 전문가들의 집단이오!”

“그건….”

과장이 있을지언정,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활로 상단은.

삼공자 측이 탐랑(貪浪)까지 동 원해 가며 잡으려던 협사들을 탈출 시켰고.

검가의 삼사공녀를 노렸던 상인 들을 암살한 용병단 및 암살단들 따위를 안전하게 빠져나가게 해 주 기도 했으며,

그 외에도, 단기간에 여러 빛나 는 업적들을 쌓은.

근래 들어, 이 업계에서 가장 유 망한 집단이 아니던가.

“후후.”

그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아미파의 귀한 분들은 무던히 안전한 경로로 낙양 권역을 탈출하 여 사천까지 돌아갈 수 있을 터이 니, 걱정일랑 하지 마시오.”

그들.

한 무리 무림인들의 정체는 바 로, 아미파였다.

그들은 활로 상단의 도움으로, 낙양을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너무 낙관하는 것 아닌가?”

아미파의 비구니가 다시 한번 경 고했다.

“지금 우리는 낙양검가의 추격대 가 언제든지 뒤에 붙을 수 있는 상 황이라고, 아까도 말했-.”

“허허. 내 그런 걱정일랑 접어 두라고 했었지 않소이까?”

그가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아미파 여러분들은 낙양검가의 추격대를 볼 일이 결코 없을 것이 오!”

아미파의 비구니가 그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에 말문이 막혔다.

“이럴 시간에 더 부지런히 걷는

것이 중요하오!”

활로 상단의 중년 남성이 손뼉을 쳐서 주위를 환기하며 외쳤다.

“자 자, 다들 잠시 숨은 돌리셨 겠지? 오늘 내로 낙양 권역을 빠져 나가고 싶으면 발을 옮깁시다!”

그 말에 내공이 없는 아미파의 일부 인원들이 한숨을 쉬며, 자리 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 터벅 터벅 걷기 시작했다.

마치, 패잔병 같은 그들의 모습 에 비구니의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굳이 입을 열어 그들을 타박하지

는 않았다.

‘사실, 우리가 패잔병이 아니라 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그들의 방향을 역으로 지나 쳐, 무리의 후미로 향한 비구니가 그들의 우두머리에게 말했다.

“총무사태님.”

마찬가지로 허름한 복장으로 묵 묵히 걸음을 옮기던 노인이 죽립을 들어 보였다.

부처를 모시는 비구니라고는 믿 어지지 않을 정도로 살기가 등등한 얼굴.

아미파의 백발성성(白髮星星) 고

독노귀(蟲毒老鬼).

“무슨 일이더냐?”

비구니가 그 소름 돋는 눈빛에 어렵사리 질문을 던졌다.

“…과연, 우리가 이대로 낙양을 떠나는 것이 옳은 결정일까요?”

그들.

아미파의 고위층들은 이공자 측 에 의해, 풀려났다.

그것은 대공자 연소현과의 일전 에서, 총무사태의 도움을 바란 의 도였다.

원한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그녀의 악독한 심성을 알기에 했던 행동.

하지만.

총무사태는, 이공자 측의 의도와 완전히 다른 결정을 내렸다.

오히려.

그 대혼란의 틈을 타서, 낙양을 빠져나기로 한 것이다.

“네 주제에 감히. 나의 결정을 의심하는 것이더냐?”

살기만으로 사람을 찢어 죽일 둣 한 기세.

허름한 옷을 입어야 하니, 입고.

짐승길을 걸어야 하니, 걷고 있 었지만.

지금, 이 순간.

이 행렬에서 가장 분노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이 노인이었다.

“그,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비구니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낙양을 빠져나가는 것은 훌륭한 결정이셨습니다. 하지만 검가의 대 공자에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 도, 다선랑.”

부득.

다선랑의 이름이 나오자, 주변

비구니들에게서 이빨 갈리는 소리 와 함께 살기가 흘러나왔다.

“적어도, 배은망덕(背恩忘德)한 그것들에게는 배반의 대가를 치르 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변의 다른 비구니들도 말은 하 지 않았지만, 그녀의 의견에 동조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이미 장문사태에게 버림 패로 낙인찍혔습니다.”

다선랑 암살 계획이 들통나고, 아미파는 이미 대공자를 통해 항복 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중경의 모든

토지를 토해 냈으며, 장문사태는 총무사태인 그녀에게 모든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이대로, 우리가 사천으로 돌아 가 봐야, 제 발로 형장으로 가는 것밖에-.”

“어리석구나, 어리석어. 어찌 너 는 아직도 그리도 시야가 좁은 것 이야?”

“사천으로 돌아가는 것에, 다른 깊은 의미가 있다는 말씀입니 까…?”

[우리는 형장으로 가는 것이 아 니야.]

총무사태의 입가에 흉측한 미소 가 걸렸다.

[우리는, 우리를 이렇게 버린 아 미파를 접수하기 위해서 돌아가는 것이야.]

그 전음을 함께 들은 주변 비구 니들의 눈이 찢어질 둣이 커졌다.

“그, 그런…?!”

목소리를 높였던 비구니가, 선두 에 선 활로 상단의 중년 남성을 의 식하여 전음으로 바꿨다.

[고작, 현재 전력만으로 아미파를

접수하다니. 그것이 과연 가능하겠 습니까?]

그녀의 시선이 주변을 향했다.

[비록 이쪽에 고위직들이 적지 않게 있긴 하지만. 그래도….]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파 하나를 뒤집는 일이 쉬울 리가 없지 않은가.

[하나를 가르쳐 주면, 둘을 알아 도 모자랄 판국에, 하나만 알려 주 니 그것만 아는구나.]

그런 이들을 보며, 총무사태가 나직하게 혀를 차며 질문을 던졌다.

[지금, 우리 아미파의 내부 상황 이 어떠하겠느냐?]

....

그 말은 비구니들의 뒤통수를 얼 얼하게 만들었다.

[그래.]

총무사태는 끌끌하며 웃음을 홀 렸다.

[장문사태는 문파를 살린답시고, 우리 아미파가 쥐고 있던 모든 것 을 던져 버렸지.]

그 행동은 아미파의 생존은 보장 받을지언정.

내부에서 엄청난 불만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결정이었다.

[지금 현재. 우리 아미파는 낙양 검가 못지않게 대혼란을 겪고 있을 것이야. 우리는 그 혼란과 불만을 이용할 것이고.]

[그, 그렇군요. 하지만….]

급히 계산을 마친 비구니가 우려 를 표했다.

[거사(擧事)가 성공을 한다고 해 도. 사천당가와 대리단가를 적으로 돌리고, 사천 땅에서 우리 아미파 가 홀로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예…?]

총무사태는 숨겨 놓았던 한 수를 꺼내 들었다.

[사패천이 나의 후원을 맡아 주 기로 했다.]

[사, 사패천이 말입니까?!]

사패천이 후원을 맡아 준다면, 필시 백만 대군의 지원을 얻은 것 처럼 든든하리라.

하지만 여기서, 갑자기 왜, 사패 천이 튀어나온단 말인가?

[이번 일이 대공자의 숭리로 끝 날 것은 거의 확실하지. 그렇게 되

면, 사패천은 꼼짝없이 장강 하류 의 사업에서 황제와 대공자에게 끌 려다닐 수밖에 없다.]

거기까지 말하자, 비구니도 사패 천의 노림수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류가 안 된다면, 상류! 장강의 상류 지역인 사천에서 사업을 망쳐 버리면, 하류의 사업도 물 건너가 게 되는 것이군요!]

그것이.

사패천의 후원을 든든하게 받을 총무사태의 신(新) 아미파가 부여 받은 역할이었다.

[그, 그런데. 총무사태님.]

연신 감탄하던 비구니가 문뜩 생 각이 난 듯 물었다.

[•••대체 사패천에서 그런 제의를 언제 받으신 것입니까?]

[우리를 풀어 주었던 장로를 기 억하느냐?]

비구니가 기억을 되짚었다.

[아…! 그 이공자 측 강남 계파 의…!]

이공자 측.

강남 계파의 손 장로.

[그가 사패천이 검가 속에 숨겨 놓은 대리자였던 겁니까?!]

[그렇다.]

손 장로는, 다른 이들이 모르게.

이 원한 가득한 총무사태에게 거 래 제안을 했던 것이었다.

[하, 하지만. 그 장로가 우리를 풀어 준 것은, 대공자와의 승패가 갈리기도 한참 전이 아니었습니 까?]

그렇게 질문을 던졌던, 비구니는 자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스로 그 이유를 깨달았다.

[...사패천이 만일을 위해 미리 제안을 했던 것이었군요.]

이공자 측이 승리할 것 같으면, 총무사태는 마음껏 원한과 증오를 풀면 되고.

이공자 측이 패할 것 같으면, 사 천으로 돌아가 후일을 도모한다.

[그러하다.]

총무사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이 중원국을 지배하는 거대한 문파들이 일을 처리하는 방 식이지.]

비구니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 을느꼈다.

준비에 준비를 거듭하고.

대비에 대비를 거듭하고.

남아도는 힘과 영향력으로 일어 나지도 않은 무수한 경우에 대웅하 는 것.

그 압도적인 저력을 엿본 느낌이 었다.

[지금 나는. 우리는, 여기서 한발 물러서지만. 원한을 잊지 않을 것 이야.]

오한이 느껴질 정도의 살기가 담 긴 전음.

[우리에게 이런 치욕을 안겨 준 대공자와 다선랑을 잊지 않을 것이 야.]

사천당가와 대리단가를 거스르는 일은, 아무리 사패천을 등에 업어 도 엄청난 희생과 대가가 따르겠지 만.

그녀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몰락해 가던 아미파를 맨손으로 여기까지 키웠던 것이, 자신이 아 니던가.

[그리고, 언젠가. 이 낙양에 돌아 와 그것들을 전부-.]

우뚝.

총무사태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총무사태님?”

“•••길잡이 놈의 기척이 사라졌 다.”

그 말에 즉시, 비구니가 선두를 향해 외쳤다.

“무슨 일이야?! 길잡이는 어디로 갔느냐?!”

“ 예?”

선두의 비구니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길잡이라면, 방금. 앞의 지형을 살펴보겠다고 먼저 숲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습

“전원, 경계 태세를-!”

총무사태에게서 벼락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지만.

이미, 늦었다.

기척도 없이, 비구니들이 그 자 리에서 우수수 무너졌다.

쓰러지는 이들의 몸에는 바늘과 같은 모양의 암기들이 박혀 있었다.

“큭?!”

마지막 짧은 순간이지만.

총무사태의 경고 덕분에, 무공을 익힌 이들은 그 암기들을 막아 낼 수 있었다.

“누구냐?!”

그렇게 외치면서도.

비구니는 그 답변을 이미 예측하 고 있었다.

기척도 없이 날아든 암기(暗器).

벽을 넘어선 총무사태만이 눈치 를 챈 기습 실력.

그저 암기가 스친 것만으로,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리게 만들 정도 로 강력한 제압 독.

“오랜만이군요, 고독노귀.”

능글거리는 중년인의 목소리.

감히, 경지에 이른 아미파의 총 무사태를 고독노귀라는 멸칭(惡稱)

으로 부를 수 있는 이가 천하에 몇 이나 있겠는가.

“아직도 여기까지밖에 도망을 치 지 못했다니, 실망이에요.”

어둠 속에서도 녹색 광택이 선명 하게 흐르는 장갑을 확인한 총무사 태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광량녹피 (B廣完塵皮)…!”

그 장갑의 이름을 들은 비구니 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중년 인의 정체를 깨닫고 그 이름을 외 쳤다.

“당귀호(唐鬼W!”

사천당가의 부가주.

그림자단의 단장.

“예, 접니다.”

그가 입가를 가리고, 쿡쿡하고 웃어 보이는 것을 보며, 총무사태 가 이를 갈았다.

“•••놈! 활로 상단이니, 뭐니. 처 음부터, 우리를 노린 함정이었나?”

당귀호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저런.”

그것은 위에서부터 내려다보며 노골적으로 그녀를 비웃는 미소였 다.

“활로 상단。] ‘본래 역할’을 해냈

기에 그대들을 잡았지만. 그렇다고 활로 상단 전체가 그대들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서 준비되었다고 하 는 것은….”

그의 입가가 비틀렸다.

“좀, 자신들을 너무 과대평가하 는 것이 아닐까요?”

그의 말처럼.

활로 상단은 지금 이 순간에도 혁혁한 공을 올리고 있었다.

벼슬아치, 낙양검가의 관계자, 할 것 없이.

대공자의 승리가 점차 확실시되 면서, 그를 피해 낙양을 빠져나가

고자 하는 수많은 이들.

그들이 제 발로, 활로 상단에 의 뢰를 요청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지금의 아미파처럼.

“이놈, 당귀호…!”

“ 어이쿠.”

그 쩌렁쩌렁한 노성에 당귀호가 짐짓, 움츠러드는 시늉올 해 보였 다.

“원망하려면, 제가 아니라. 활로 상단의 주인이신 대공자님을 원망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당귀호는 고개

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것참. 그 대공자님은 대체, 어디 까지 내다보시는 건지. 요즘엔, 하 루가 멀다 하고 놀라는 일밖에 없 는 것 같다니까요.”

연소현이 다선랑을 움직여 사들 인 활로 상단을 통해, 낙양의 봄 협사들을 빼돌렸을 때는.

그저, 준비성이 대단하다고 느꼈 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활로 상단이 그저 구명 수단이 아니라.

원래, 성공적으로 빠져나갔어야

했을 적들을 집어삼키는 그물이 되 자, 그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무검자 놈…!”

총무사태의 치렁치렁한 백발이 허공으로 치솟으며 귀기를 방불케 하는 살기를 풍겼다.

“언젠가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당귀호는 그 원한 가득한 외침을 들으면서 딱 한 마디만 했을 뿐.

“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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