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편 벽(壁)을 넘은 자들
해남식 장도를 든 사해흉살의 귀 가 움찔거렸다.
쿠쿠쿵-.
저 멀리서 전각이 무너지는 소리 가 들려왔다.
또다시, 그 괴물 같은 검악파산 이 파산경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아련하게 들려오는 병장기가 부 딪치는 소리들과 비명들이, 떠오르
는 태양의, 날카로운 햇살과 뒤섞 여, 문득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만 들어 내고 있었다.
“•••그대와 함께 나의 선단을 불 태운 것은, 검가의 수귀(水鬼)들인 가?”
타오르는 자신의 선단을 배경으 로.
문득, 튀어나온 사해흉살의 물음 에 대답한 것은 탈명귀검이었다.
“그래.”
수귀, 물귀신.
그것은 낙양검가 전쟁부의 수상 (水上) 전투 전문 무사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렇군.”
매캐한 연기 내음이 이 작은 선 착장을 뒤덮고 있었고, 사해흥살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황하를 거슬러 올라을 때만 해 도. 검가의 수귀들을 진짜 물귀신 으로 만들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다 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남쪽 바다(南海)도, 아니고.
대양(大洋)도 아닌.
한낱 강에서 자신의 선단이 최후 를 맞이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 다.
“멍청한 해적 놈들 특유의, 거창 하기만 한 허황한 꿈이었던 거지.”
꼬박꼬박 대답은 해 주지만.
탈명귀검의 말투는 노골적이라, 아니꼬움을 감추지도 않았다.
대조적으로, 양손에 사슬낫을 든 당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저 삭막한 시선으로, 사해흉살을 주시할 뿐이었다.
“그래서, 탈명귀검. 그대는 죽거 나 은퇴했던 것이 아니었나?”
“아, X발.”
반복된 물음에 탈명귀검의 안 그 래도 사나운 얼굴에 짜증이 더해져 흉신악살처럼 구겨졌다.
“내가 방금도 아니라고 했-.”
그 순간.
불타는 선단에서 비롯된 재가 실 린 바람을 받으며, 사해홍살의 산 발한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스적-.
“..r
공간이 나누어지는 둣한 참격(朝
허공에 떠 있는 검들을 불러들일
시간도 없었다.
탈명귀검이 머리를 젖혀 피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불귀(不 歸)의 객이 되었으리라.
그리고 동시에.
타앙!
탄환이 정확하게 당백의 머리 바 로 옆 허공을 꿰뚫었다.
사해흉살이 뒤를 보지도 않고, 그저 기척만으로 소매 속에 숨겨져 있던 권총을 뽑아 뒤를 향해 쏘았 던 것이다.
만약, 그 자리에 있던 것이 암기 를 통한 기습에 능한 사천당가 출
신의 당백이 아니라 다른 평범한 무인이었다면.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머리에 탄환이 박혀 죽었으리라.
그것은.
아무리 구석에 몰리고, 또 몰렸 다지만.
사패천에서도 손에 꼽히는, 사해 흉살의 악명에 어울리는.
완벽에 가까운 기습이었다.
“X발, 이 새끼가. 사람이 말을 하고 있는데…!”
탈명귀검은 얼른 자신의 검들을
쌍수로 꼬나 쥐며 욕설을 내뱉었고.
당백 또한 경계심을 높인 듯 아 까보다 두 발자국 더 떨어져 있었 다.
하지만.
‘이런, X같은…!’
오히려, 기습을 가했던 사해흥살 쪽이 식은땀을 흘렸다.
‘기습이 걸린 와중에 반격까지 한다고?’
그의 목의 피부는 얕게 절개되어 가늘게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
고.
반대 손에 쥐고 발사했던 권총은 이미 두 동강이 나서 바닥에 떨어 졌다.
“쯧쯧.”
하지만 사해흉살의 입에서는 오 히려 상대들을 향해 혀를 차는 소 리가 홀러나왔다.
“그 이름 높은 고수들이 이것밖 에 안 되나?”
그의 눈가가 조롱하듯이 휘어졌 다.
“이젠 둘 다, 퇴물들이군.”
으드득.
그 이빨을 가는 소리가 탈명귀검 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인지, 아니 면 당백의 입에서 새어 나온 것인 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 여기서 오늘 퇴물의 검에 뒈져 봐라.”
하지만 확실한 것은, 분노한 두 고수의 살기가 폭발적으로 치솟았 다는 것이며.
그들의 공격이 즉각적으로 사해 흉살을 향해 짓쳐 들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탈명귀검 독문검법(獨門劍法).
수라오음극(修羅五陰極).
일혼참명 (一魂僧命).
오검광인(五劍狂人)이라는 탈명 귀검의 또 다른 이명(異名)이 전혀 부족하지도 않을 정도로 광폭한 검 이.
사해홍살의 몸을 산산조각으로 토막 칠 듯 몰아쳐 들어오고.
기혼참귀살(氣 昏朝鬼殺).
당백이 양손에 잡은 사슬낫들이 새벽녘 햇빛을 쪼개며, 사해흉살의 머리를 쪼개 버리러 들어왔다.
‘좋아!’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사해흉 살의 입에 떠오른 것은 한 줄기 미 소였다.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양손으로 자신의 장도를 부여잡은 그가 탈명귀검과 당백을 빨아들이듯 회전했다.
사해흉살, 구명절초(求命絶招).
와류세며流).
항거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바다의 와류를 닮은 움직임.
그 구명절초에.
....
탈명귀검의 맹렬한 검은 사해흥 살의 살코기를 탐했지만, 그저 피 맛만 보고 스쳐 지나가 버렸고.
....
당백의 사슬낫들은 사해흉살의 산발을 썩둑 하고 한 움큼 잘라 갔
을 뿐이었다.
‘지금…!’
구명절초 와류의 회전을 통해, 막강한 힘이 실린 사해흉살의 해남 식 장도가 번뜩였다.
사해흉살, 비전도식(秘傳刀式).
오의(與義), 단오(單燥).
해남파(海南派)의 비전 도법을 훔쳐 재해석한 그의 회심의 일격.
지극히 찰나의 순간에, 사해흥살 의 장도가 주변을 수십 조각으로
찢어발겼다.
....
완벽에 가까운 반격을 선보이고 도.
사해흉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회심의 일격에선, 아무런 손 맛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상대의 옷자락만 걸려 찢어진 것 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 아쉬 운 것도 아니었다.
그의 장도는 그저, 완벽히 허공 을 갈랐을 뿐.
‘X발…!’
탈명귀검과 당백은 애초에 그 간 격 안에 없었다.
그들은 깊숙이 뛰어들 것처럼, 짓쳐 들 것처럼 상체만 움직여 속 이고, 오히려 뒤로 빠졌던 것이다.
“혼자, 뭐 하냐?”
탈명귀검의 조롱 가득한 말이 사 해흉살의 귓가에 파고들 때.
탈명귀검이 손에서 놓고 온 그의 검이 사해흉살의 허벅지를 갈라놓 았고.
“흡…!”
나지막한 당백의 기합 소리와 함
께.
당백이 놓고 물러났던 사슬낫들 이 사해흉살의 어깻죽지를 찢어 놓 았다.
“크혹...!”
사해흉살이 상처 부위가 타오르 는 듯한 격통 속에서도 이를 악물 며, 다시 한번 장도를 번뜩였다.
사해흉살, 비전도식(秘傳刀式).
오의(與義), 갈조(福호).
팔이나, 장도가 순간적으로 길게
늘어난 것처럼.
이전의 공격보다도 훨씬 넓은 범 위에 참격이 몰아쳤지만.
“아까부터 혼자서 재롱떠네.”
탈명귀검의 다른 검이 살아 있는 것처럼 반대쪽 허벅지를 찌르고.
당백의 사슬낫들이 뱀 대가리처 럼 움직여 허리춤의 살을 한 움큼 씩 가져갔을 뿐.
그들의 몸은 오히려, 이전 순간 보다도 훨씬 더 사해흉살에게서 멀 어져 있었다.
“이, 이 망할 놈들이…!”
사해흉살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자신보다 열 살씩은 많은 저 두 고수들은, 도발을 당한 적도 없었 고.
애초에 들어올 생각도 없었던 것 이다.
도발당한 척, 뛰어드는 척을 해 서, 오히려 사해흉살의 큰 동작을 유도했을 뿐.
“야, 너 말이다.”
탈명귀검의 조롱 속에서 사해흉
살의 장도가 흥흉하게 울부짖고, 주변을 갈랐다.
그 장도가 지배하는 간격 안에서 는 누구도 꺾을 수 있다는 자신감 이 있었다.
“해남파에서 훔쳤던 무공은 더 없냐?”
하지만.
애초에 상대가 그 간격 안으로 들어오지를 않는다면, 무의미했다.
“크혹!”
장도를 쥐고 있던 왼손의 손가락 들을 사슬낫의 예기가 주르륵 훑어 버렸다.
“크아악!”
그 손가락들이 허공에 붕 떠서 피를 방울방울 홀리는 사이에도, 사해흉살의 공격이 몇 번이나 이어 졌지만.
“최종오의, 뭐 이런 건 없어?”
애초에.
상대들의 무기는 이기어검(以氣 取劍)과 사슬낫.
그들은 장도보다도 압도적으로 긴 거리의 우위에서 오는 이점을, 조금도 버릴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으아아아악!”
비명인지 기합인지 알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사해홍살이 탈명 귀검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탈명귀검의 다섯 자루 검을 차례로 튕겨 내야 했고.
“크악…!”
당백의 사슬낫들이 뒤를 보인 사 해흉살의 등판을 사정없이 회를 뜨 듯 해쳐 놓았다.
광인〈狂人)이라 불리는 검가의 가장 흉포한 검도, 혈풍차사(血風 差使)라 불리는 당가의 수급수집가
도.
그 날붙이만큼이나 차가운 머리 로, 무리할 수밖에 없는 적의 약점 을 야금야금 먹어 치울 뿐이었다.
“이, 이, 개 같은 놈들…!”
어느새 전신이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사해흉살이 주춤주춤 뒤로 물 러났다.
그의 몸에서 떨어지는 새빨간 선 혈이 투툭 투투둑 하고 바닥에 떨 어졌다.
“이따위로 싸우다니…! 네놈들에 겐 고수로서의 자존심도 없느냐?!”
선착장의 끝이 다가오고.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얼마 없었 다.
사해흉살의 뒤는 이제, 새벽녘 햇살이 부서지는 황하의 거친 물결 이었다.
“자존심?”
탈명귀검이 검들을 조종해, 허공 에서 사해흉살의 피를 털어 내며 그를 비웃었다.
“그러는 네놈은 무슨 고수로서 자존심이 있어서, 무장이 빈약한 상단들을 털고. 죄 없고 힘없는 백 성들이나 잡아다가 노예로 팔았 냐?”
그 말에, 순간 말문이 막힌 사해 흉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 다.
“그건 사업일 뿐. 헛소리하지 마 라, 탈명귀검! 적어도 검가의 무사 라면, 당당하게-.”
“ 어이.”
탈명귀검이 손에 든 검을 흔들었 다.
“뒤를 조심하는 게 좋을걸?”
그 말에, 사해흉살이 슬그머니 선착장의 끝 너머로 옮기려던 뒷걸
음질을 멈췄다.
그는 원래, 선착장의 끝까지 몰 린 김에 황하에 뛰어들어, 자신이 좀 더 자신 있는 수공(水功)을 활 용하여 겨뤄 볼 심산이었다.
어쩌면, 도망을 칠 기회를 잡을 수도 있고.
하지만.
사해흉살의 기감에, 황하 속에서 불쑥불쑥 머리를 내미는 이들의 기 척이 잡혔다.
“검가의 물귀신 놈들…!”
기어코.
도주를 시도하던 마지막 해적선 까지 불태워 버린 그들이, 이곳으 로 모여든 것이다.
아무 말도 없이.
짧은 검을 입에 물고, 물속에서 포위 진형을 갖춘 그들의 머릿수는 수십 이상이었고.
아무리 수공에 자신이 있는 고수 라 한들, 거기에 뛰어드는 것은 자 살행위였다.
“•••X발.”
하늘을 향해 욕지거리를 중얼거 린 사해흉살이 자신의 장도를 도집 에 납도했다.
그의 자세가 낮아지며, 강가의 거친 바람이 그를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손가락을 모두 잃은 왼손 대신, 팔을 이용해 도집을 고정하고.
오른손은 꽃잎에 손을 을리듯, 자루를 사뿐하게 틀어쥐었다.
“•••호오?”
삶을 향한 미련을 버린 자세에서
비롯되는 귀신같은 기백에 탈명귀 검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좋아. 이승에서의 마지막 일도 (—刀)라면 받아 줄 만한 가치가 있겠지.”
탈명귀검의 검집에 다섯 자루의 검이 돌아와 꽂혔다.
그는 한 발을 앞으로 단단히 내 디뎠고.
그중에 한 자루의 검을 잡고 좌 수역검(左手逆劍)의 발검 자세를 취했다.
“와라.”
기합도, 기척도, 없었다.
욕심도, 생각도, 없었다.
누군가 신호를 준 것도 아니지 만.
새벽 태양 아래, 두 사람의 무기 가 거의 동시에 발출(發出)되었다.
사해흉살, 비전도식(秘傳刀式).
오의(與義), 귀령編靈).
아름다웠다.
자신의 생애에 가장 완벽한 발도 였다.
하지만, 자신보다 늦게 뽑힌 탈 명귀검의 검이.
어째서인지 자신의 허리를 먼저 가르고 있었다.
검가비검, 섬영찰나(問影초IJ郡).
사왕포식 (邪王捕食).
그것은.
후발선제, 일격필살의 반격검.
대공자 연소현의 손에서 태어난, 검가 역사상 가장 난해한 검법의 정체를 깨닫기도 전에.
....
그림자 속에서 뛰쳐나오듯 유령 처럼 나타난 당백의 사슬낫에 목이 잘렸다.
툭.
사해흉살의 머리가 선착장의 나 무 바닥에 떨어지고.
털썩.
머리를 잃고, 허리까지 반쯤 끊 어진 몸이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
앉았다.
그 머리를 향해, 탈명귀검이 피 식하고 웃었다.
“내가 퇴물이라고? 이게 이번에 새로 터득한 검술이다, 이 자식아.”
아닌 척했지만.
실은 탈명귀검 역시, 속으로 담 아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선혈선단, 대파(大破).
사해흥살, 낙명(落命).
멀리 시가지로부터 아련하게 숭 전을 알리는 함성이 들려왔다.
죄악계곡 전투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