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편 섬멸전(球滅戰)
죄악의 골짜기, 상류.
대공자 연소현의 진지(陣地).
관병, 장삼(長三)은 지쳐 있었다.
너무나 긴 밤이었다.
죄악계곡 토벌전에 이어, 제대로 된 휴식도 없이 이어진 이번 전투 는 그의 체력이 바닥을 치도록 만 들었고.
마교의 그 끔찍한 결계 안에서, 그의 정신력 또한 바닥을 드러냈다.
가혹한 밤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그 모든 피로도 잊고, 우뚝 서서.
계곡의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아아아아—!”
계곡에 고립된 암혹가 병력들의 함성이 사뭇 요란했다.
빽빽하게 하류에 들어찼던 그들 은 이 계곡을 살아서 빠져나가고자, 골목골목에서 최후의 항전을 준비
하고 있었고.
동녘에서 떠오르는 햇빛을 등지 고 등장한 검가의 전쟁부 무사들은 소름이 돋을 정도의 속도로 암혹가 의 병력들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렬에서 돌격을 받아 내기 위 해, 앞장선 암흑가 병력들이 내민 수많은 창날이 시퍼렇게 빛났다.
그리고 격돌.
....
관병 장삼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다래졌다.
그가 생각했던, 그런 거센 격돌 음 같은 것은 없었다.
“끄아아!”
“커억…!”
멀리서도 확연하게 눈에 띄는 검 광(劍光)이 사방에서 번뜩이고.
그저 가죽과 살이 찢어지고, 비 명만이 가득했다.
검가 전쟁부의 무사들은 마치, 두부(豆腐)를 가르는 젓가락처럼.
암혹가의 진영을 일직선으로 가 르며 뚫어 버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
지 하는 광경이었다.
“으아。}아-!”
관병 장삼의 눈에 암흑가의 간부 하나가 그 충격적인 첫 격돌에서 살아남은 것이 보였다.
무림인은 무림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운도 거기까지였다.
두 번째로 그를 스쳐 지나간 검 가의 무사가 그의 팔을 잘라 냈다.
세 번째로 그를 지나쳐 간 검가 의 무사가 그의 뱃가죽을 찢어발겼
다.
네 번째로 그를 넘어간 검가의 무사가 그의 목을 잘라 버렸다.
베어진 나무처럼 뒤로 넘어진 간 부의 몸은, 무수한 시신들과 뒤섞 여 보이지도 않았다.
대로에서 대로로.
골목에서 골목으로.
검가 전쟁부의 무사들이 도달하 는 곳마다 전열이 무너지고 박살 나고 있었다.
“우와아아아아!”
장삼은 자신도 모르게 창을 든
손을 치켜들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 었다.
자신들을 밤새 괴롭히던 이들이 산산조각이 나 버리는 광경을 보니, 환호성을 지르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좋아!”
“전부, 죽여 버려!”
그리고 그렇게 환호를 지르는 것 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부상 치료를 받던 자애원의 중장 무장단도.
마교의 결계에 의한 정신적인 충 격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던 이
들도.
하녀단과 황호사협, 그리고 아미 파의 무승들까지도.
사령부의 군사들과 책사들까지 도.
어느새 전부 몰려나와 그 광경을 보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보라!”
그 환호성을 뚫고, 소년의 낭랑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의 적들이 무너지고 있다!”
모두의 시선이 하나둘씩 그 소년 에게 향했다.
이 진영의 임시 사령이자, 검가 의 사공자인 연비였다.
“우리를 괴롭히던 밤이 끝나고 있다!”
그 소년 또한 분명, 마교의 결계 에 시달렸을 터인데도.
지휘부의 옥상에 선 사공자 연비 의 태도는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당 당했고, 그 목소리는 올곧았다.
“그대들은, 우리는…! 무너지는 적들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그 외침에 주변의 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소리쳐 호웅했다.
“아닙니다!”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사공자 연비는 그 열렬한 호응에 도, 아직 모자라다는 둣이 주먹을 들어 보이며 외쳤다.
“우리를 괴롭혔던 밤이, 그저 이 렇게 끝나는 것을. 우리는 지켜만 보고 있을 것인가?!”
그 목소리에.
그 물음에.
관병 장삼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 었다.
“아닙니다!”
떨어졌던 체력도, 바닥났던 정신 력도, 혼란스러웠던 그 모든 것도.
지금 이 순간에는 그들의 머릿속 에 없었다.
“아닙니다!”
사방에서 내지르는 이들의 괴성 에 가까운 목소리에는 분명, 관병 장삼의 목소리도 있었다.
하늘을 찌를 둣 높이 치켜들린 무기 중에는 분명, 관병 장삼이 들 어 올린 창도 있었다.
“우리의 적은 우리의 손으로 끝 낸다!”
사공자 연비의 목소리가 더욱 높 아졌다.
“우리의 전투는 우리 손으로 끝 낸다!”
모두의 시선이.
모두의 귀가.
사공자 연비에게 집중되었다.
“전원 돌격!”
무슨 체력이 어디에서부터 솟아 난 것인지, 알 수도 없었다.
이렇게까지 함성을 지를 힘이 어 디에 남아 있었는지도, 알 수가 없 었다.
“으오오오오오오!”
창을 들고 계곡을, 골목을 달려 내려가는 관병 장삼의 곁에는, 그 의 동료 관병들이 있었고.
“가자! 달리자!”
관병들의 가장 앞에는 지휘관인 박 포쾌가 있었다.
“놈들에게 우리 관병들의 힘을 보여 주자!”
그는 포격에 입었던 머리 부상 부위에 감은 붕대를 휘날리면서도, 선두에서 달렸고.
“힘이 빠져서 행렬에서 뒤처지는
놈들은,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라!"
정신을 잃고 후송되었었던 박 포 쾌의 빈자리를 훌륭히 채웠던 후배 포쾌가 후열에서 달리고 있었다.
“아까 그 파산경을 보고도 가만 히 있을 수는 없지.”
옥상에서 옥상으로 뛰어넘으며, 그런 관병들의 머리 위를 쏜살처럼 지나치는 이들이 있었다.
“아니, 무슨. 고생은 우리가 다 하고, 진짜 재미는 주군 혼자서 다 보시나?”
“제일 맛있는 부분을 전부 빼앗 길 수는 없지!”
염 장로의 직속 수하들인 전쟁자 문단이 었다.
그들은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으 며 앞서 달려가기 시작했고.
“우리도 먼저 갑니다!”
“천천히 따라오시죠!”
대공자의 무림인들.
황호사협과 아미파의 무승들.
그리고 낙양의 봄 소속의 젊은 협사들이 관병들을 지나쳐 나는 둣 이 달려 나갔다.
하지만.
그들 중에 가장 먼저 적들의 후
미(後尾)에 도달한 것은.
“주인님의 이름으로!”
장갑마차를 타고, 그 험한 내리 막을 전속력으로 내달렸던, 원각정 의 하녀단이었다.
“전부 죽여 버려라!”
하녀단의 단장 향의 목소리가 울 려 퍼짐과 동시에.
장갑마차들이 전속력 그대로, 적 들의 후미에 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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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부 무사들의 격돌과는 달리.
이번에야말로, 어마어마한 충돌
음이 계곡 전체를 뒤흔들었다.
콰직, 콰지직!
두꺼운 마갑(馬甲)을 장착한 전 투마들의 발굽이 사정없이 적들을 짓밟았다.
장갑마차의 육중한 몸체가 적들 을 휩쓸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수십 명을 으깨 버리고 도 돌격력이 조금도 죽지 않은 장 갑마차의 행렬은, 그대로 적진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달려라! 멈추지 마라!”
장갑마차의 안에서 남만의 와룡, 곽 노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적들을 일격에 갈라 버릴 각오 로 파고들어라!”
평소라면, 적들의 한가운데서 행 렬이 정체되어 돈좌(頓機)되는 것 을 우려했겠지만.
지금의 곽 노인은 그런 걱정 따 윈 하지도 않고, 돌진을 재촉했다.
왜냐하면.
“어딜 보는 것이더냐?!”
장갑마차 행렬이 만든 잔혹한 돌
진의 뒤를 이어서, 전쟁자문단의 무사들이 적들의 후미를 들이받았 고.
“전부 죽여!”
즉시 이어서, 대공자 산하의 무 림인들이 들이닥쳤으며.
“으오오오오오!”
똘똘 뭉친 관병들이 닥친 후에.
“약 선녀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 다!”
자애원 중장무장단의 무자비한 돌격이 그들을 휩쓸었다.
“끄아악!”
드높은 사기에 고지로부터의 돌 격.
거기다가 심지어 전방을 향한 돌 격이 아니라, 후미를 강타한 돌격 O
단숨에 적들의 진형을 완전히 무 너뜨렸다.
“도, 도망쳐!”
“후퇴다! 후퇴!”
암흑가의 간부들마저, 무기를 버 리고 내달렸다.
“X발, 도대체 어디로 후퇴합니 까?!”
간부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 르고 뛰었고.
그들을 뒤따라 달리는 이들도, 대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달리기부터 했다.
“사방이 적이라고…!”
앞에는 검가 전쟁부의 무사들.
뒤에는 대공자의 병력들.
그 사이에서 압착되다시피 하는 암흑가의 조직원들에게서는, 제대로 된 저항 따위가 있을 수도 없었다.
“발사!”
장갑마차의 연노에서 발사된 거
대한 철시들이 적들을 꿰매고.
허공에 번뜩이는 것은 아군의 무 기요, 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적들 의 목숨이라.
“어딜 도망가느냐?!”
관병 장삼이 내지른 창이 둥을 보이고 도망치던 적을 꿰어 버렸다.
“커헉…!”
적의 입에서 새어 나온 비명은 하잘것도 없어.
장삼이, 그리고 아군 모두가 내 지르는 거대한 함성 속에 묻혔다.
그 대혼란 속에서도, 어떻게든 방향을 잡고 도주하는 이들이 있었 다.
해적 용병, 선혈선단의 상륙대였 다.
“선장님! 이쪽입니다!”
그렇게 방향을 알린 부관에게 선 혈선단의 주인, 사해흉살이 외쳤다.
“뒤다! 아직도 놈들이 쫓아오고
있다!”
그 외침에 부관이 몸을 돌려, 뒤 를 향해 그대로 손에 든 장총을 내 갈겼다.
타앙-!
굉음과 함께, 단단한 벽면에 깨 져 나갔지만.
그들을 추적하던 이들은 이미, 날렵하게 엄폐물 너머로 모습을 감 춘 뒤였다.
“X발!”
그의 뒤를 이어 한 무리의 해적 용병들이 뒤를 향해 제압 사격을 가하는 사이에 나머지가 좁은 골목
을 내달렸다.
“이런, X발!”
달리던 사해흉살의 입에서 욕설 이 흘러나왔다.
‘기껏 낙양까지 와서, 제대로 된 전과는 올리지도 못하고, 쪽은 쪽 대로 다 팔았군…!’
사실, 자신들은 도리를 다했다.
함선에서의 화력 지원도 충분했 고.
계속해서 전황의 주도권을 빼앗 겼던 탓에 상륙대는 큰 활약을 할 수는 없었지만.
불만족스럽긴 해도 나름의 성과 도 거두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턱없이 부족 했다.
‘망할, 이공자 측 놈들…!’
과거, 그들이 사패천 측에 도움 을 요청하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조금만 거들어 주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갈 정도로 준비를 해 두었다고 했던가.
‘개풀 뜯어 먹는 소리…!’
준비는 대공자 측이 배 이상을 해 두었고.
그들이 꾸역꾸역 비축해 둔 전력 은, 예상을 아득히 추월하는 수준 이었다.
게다가 그 전력들의 수준 또한.
싸움에 싸움을 거듭해 온 강남 지역의 전력에 비해 모자라지도 않 았다.
‘X같은 낙양! X같은 낙양검가!’
사패천이 지배하는 강남 지역이 불타는 지옥이라고 한다면.
겉으로는 말랑말랑하고 평화롭게 보이기만 했던 낙양은, 사실 바닥 이 없는 나락이었다.
달리면서도 재주 좋게 총구에 장 전봉을 꽂아 장전을 서두르던 해적 용병 하나가, 날아든 암기에 목이 찢어졌다.
부여잡은 목으로부터 피를 울컥 거리며 쏟아 내는 수하의 모습에, 사해흉살이 표정을 악귀처럼 일그 러트렸다.
“쏴라…!”
다시 한번 사격이 퍼부어졌지만, 암기를 투사한 이들은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이런 X같은…!”
마음 같아서는 돌아서서 저 하루 살이 떼 같은 놈들의 목을 전부 쳐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뒤에서 부관이 외쳤다.
“조금만 더 가면-!”
자신들이 후퇴 지점으로 미리 마 련해 둔 소형 선착장이 나온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리라.
“케혹-!”
하지만 쇠사슬에 묶여 허공에서 뜬 부관은, 순식간에 목이 부러져
서 늘어져 대롱거렸다.
기가 막힐 정도로 예민하게 기척 에 반응한 사해흉살이 대처할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X같은, 수급수집가 놈!”
그의 해남식 장도(長刀)가 발도 와 동시에 쇠사슬을 때렸지만, 이 미 쇠사슬 끝에 매달린 낫이 부관 의 머리를 잘라 버린 후였다.
“큭-!”
“커헉!”
오히려 그의 발걸음이 지체되자, 날아든 암기에 수하들이 연이어 목 숨을 잃었다.
또다시 총기들이 불을 뿜었지만, 적들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X발, X발!”
좁아터지고 구불거리는 골목에서 는 총기의 이점을 살리는 것이 불 가능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차마고도의 수 급수집가 당백과 한바탕 일전을 벌 이며 귀중한 탈출 시간을 버릴 수 도 없었다.
“선착장은 근처다!”
수하들을 전부 버리고, 사해흉살 은 전력으로 신법을 펼쳤다.
벽을 넘은 그는 순식간에 수하들 에게서 멀어져 골목을 돌파했다.
“알아서 살아남아 다시 만나자!”
실로 해적다운 판단.
그나마 무의미한 포격을 포기하 고 자신의 선단이 저편으로 물러나 있던 것이 다행이었다.
그가 생존자들과 승선하는 즉시, 낙양을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그는 그렇게 기대했다.
하지만.
그 기대도 무색하게.
소형 선착장에 도착한 사해흉살 이 본 것은.
“X, X발….”
황하 저편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 는 선단의 모습이었다.
자신이 평생 이룬 업적과 마찬가 지인 선단이, 시커먼 연기를 피워 올리며 전부 불타고 있었다.
들고 있던 자신의 장도를 늘어뜨 리고, 그 광경을 멍한 눈으로 바라 보던 사해흉살의 귓가에.
“하, 진짜.”
누군가 노골적으로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공자, 그 양반은 어찌 사람을 이리도 가혹하게 굴려 대는지 모르 겠네.”
강물에서 불쑥 머리를 내민 이가 선착장의 바닥을 짚고 뭍으로 올라 왔다.
“ 네놈은…?!”
“진짜, 하. 내 더러워서, 문지기 를 그만두든가 해야지….”
그렇게 투덜거리며, 몸에 묻은 물을 대충 털던 중년인이 사해흥살 에게 살기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더러운 해적 새끼들은 다 죽여야지. 안 그러냐?”
볼품없이 홈뻑 젖은 주인과는 달 리.
다섯 자루의 검은 섬뜩한 울음소 리를 내며 아침 햇빛에 그 유려한 검신을 빛냈다.
사패천의 해적이, 어찌 그의 이 름을 모를 수가 있겠는가.
과거.
해적들을 무참하게 도살하고 또 도살했던, 그들의 가장 큰 악몽을 잊을 수 있겠는가.
“•••타, 탈명귀검?”
“그래, 나다. X발아.”
사해흉살이 그 악명에 어울리지 않게,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분명 죽 었거나 은퇴했다고 들었는데…?”
현실을 부정하며 뒤로 물러나는 사해흉살의 귓가에 차르릉거리는 쇠사슬 소리가 들려왔다.
“..!”
앞에는 탈명귀검.
뒤에는 당백.
올라올 뭍을 잘못 골라 기어 올
라온 해적에게는.
도망칠 길 따윈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