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91화 (291/350)

제16편 전장의 여명(藥明)

황도와 낙양을 잇는 도로 위.

중원국의 행정적 최중심지인 황 도와 화북의 경제적 최중심지인 낙 양을 잇는 도로에는.

무슨 일인지.

마차들이 운행을 멈추고, 좌우로 비켜서 있었다.

평소라면, 입에 침이 마를 정도 로 불만을 토로했을 상단 행렬의

책임자들도.

평소라면,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 기 위해 시비를 걸었을 상류층들도.

평소라면, 대뜸 자신들의 무기부 터 만지작거렸을 무림인들도.

모두 침묵하고 있었다.

“이럇!”

동트기 전의 어둠만큼이나 무거 운 침묵이 내려앉은 도로 위를 기 마(호馬)들이 선행하여 달리고 있

었다.

“이럇!”

장갑을 두른 전투마(戰퐤馬)들을 재촉하는 이들은 딱 보기에도 범상 찮은 갑주를 두르고 있었기에.

상당한 볼거리였음에도.

비켜선 이들은 누구도 그들과 눈 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들의 등에 걸린 깃발이.

그 이유를 대신 말해 주고 있었 다.

‘낙양검가(浴陽劍家)

그렇게 기마무사들이 선행하여

지나가자.

곧이어 그 뒤로 낙양검가 특제 (特製)의 수십 대의 장갑마차 행렬 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앞뒤로 수십 대에 이르는 장갑마차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 마차들보다도 월등히 육중한 육두마차가 달리고 있었다.

카카카칵-!

시커먼 육두마차(7느頭馬車)의 강 철 바퀴가 포석에 마찰하며 요란한 불꽃을 튀겼다.

검가의 가주가 약 선녀를 위해 만든 철갑요새(鐵甲要寒)를, 흉내

내어 만든 기물(奇物).

이공자의 흑철성채(黑鐵城精)였다.

혹철성채, 실내.

까드득.

주인의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 러내듯.

화상으로 가득한 이공자의 손을 둘러싼 갑주가 금속음을 홀렸다.

차양(遞陽) 밖으로 어두운 풍경 을 바라보는 이공자 연자청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명백한 초조함이었다.

순순하게 협조를 해 주던 낙양검 가 정보부처의 연락이 끊어졌다.

그들을 통해 낙양의 상황을 속속 들이 전해 듣던 이공자와 그의 참 모진이었기에.

답답함은 더욱 컸다.

“•••그저 평범한 지연 상황일 수 도 있습니다. 정보부처에서는 생각 보다 자주 있는 일이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요.”

이공자의 참모진들이 이공자의 눈치를 살피며, 머리를 짜내고 있 었다.

“하지만. 아예, 정보부처의 누구 도 우리와 접촉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잖소?”

“•••그렇다면, 정보부처의 협력자 들이 선을 갈아탄 것이 아닐까요?”

참모진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한두 명도 아니고. 그들 전체가 한 번에 선을 갈아탔다고?”

“낙양에서 우리 측 상황이 안 좋 아졌다면, 그럴 가능성이 있-.”

까드득.

이공자의 손에서 나온 소름 끼치 는 소음에, 해선 안 될 말을 하던 참모가 황급히 입을 닫았다.

다시 마차에 불편한 침묵이 찾아 왔다.

낙양검가.

정보부처의 어느 안가(安家).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된 것인

가?’

유등 하나 없이 어두운 실내. 비어 버린 술병들이 굴러다니고. 밀폐된 실내에는 연초 연기가 가

득했다.

한 중년인이 책상에 앉아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모두가 나서면. 최고운영회의의 눈과 귀를 가릴 수 있고.’

그는 낙양검가의 정보부처 제이 국(第三局)의 국장이었다.

‘낙양 시내에서 벌어진 난리에, 그들의 의사 결정과 개입을 최대한 늦출 수 있다고 확신했건만…!’

신원을 외부로 드러낼 수 없는 최고운영회의에는, 그 이유로 인한 심각한 결함이 잠재되어 있었고.

기관이 계획에서 빠졌다고는 하

지만.

그들에게는 연씨 혈족들이 있고, 장로들이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 다고 판단했었다.

‘오만이었나…?’

그는 자신이, 자신들이 이때까지 해 왔던 일들을 떠올렸다.

처음엔 가장 별 볼 일 없는 작은 정보 하나를 누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최고운영회의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엔 좀 더 커다란 정

보를 누락시켰다.

최고운영회의의 감시를 피하고 싶은 이들은, 검가 내외에 수두룩 했고.

고의적인 정보 누락에 대한 대가 는, 커다란 금전적인 이득으로 다 가왔다.

‘•••자만했다.’

계속해서 별일이 없었기에.

이번에도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 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이 仁)국장님.”

밖에서 그의 측근이 문을 작게 두드리고 고했다.

“중앙감찰각에서 국장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국장은 대답하지 않았고, 그의 측근 또한 대답을 받을 상황이 아 니었기에 그대로 물러났다.

“••제길.”

이국장은 어둠 속에서 문을 노려 보았다.

그 문이 열리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지금 이 순간에 시간이 멈춰 버 리길 빌었다.

드르륵.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반대로.

문은 너무도 쉽게 열리고.

“이국장.”

복도를 밝히던 빛을 등지고.

백발백안(白髮白眼)의 저승사자 가 모습을 드러냈다.

“최고운영회의의 명이다.”

중앙감찰각주 독고야연이 서류를 들어 보이며, 표정 하나 없이 그에 게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그대의 권한은 이 시각부로 모 두 정지되었으며, 그대의 신병은 중앙감찰각이 구속한다.”

이국장은 말없이 술잔을 들었다.

하지만 술잔은 이미 비어 있었 고.

술병을 기울였지만, 술병 또한 비어 있었다.

쨍그랑.

그가 던진 술병이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지만.

중앙감찰각주 독고야연은 눈썹 한 번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내가 처음이 아닌가 보군?”

그의 눈이 독고야연을 향했다.

그녀의 옷과 얼굴에 튄 핏자국이 그 특유의 무표정과 부조화를 이루 며,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처음부터. 전부 대공자의 함 정이었나? 우리를 노리고?”

지금에서야 느낀 것이지만.

마치 낚시라도 하듯, 미끼를 던 져 수면 아래에 숨어 있던 이들을 잡아내는 수법은.

기록으로만 보았던 ‘그날’과 너무 유사했다.

“•••혈사(血史)

그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결국, 과거에 떠돌았던 소문처 럼. 그 대숙청은 대공자의 작품이 었군.”

“그럴지도 모르지.”

대공자를 언급하자, 독고야연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책상에 앉은 그를 내려다보며 말

하는 독고야연의 눈은 명백한 경멸 의 빛을 띠고 있었다.

“대공자님의 의도가 어떠하였든, 상관없이. 너희의 결말은 너희 스 스로가 택한 것이다.”

자신이 택한 결말.

멍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던 이국장이 고개를 떨구었다.

달리는 흑철성채의 내부.

“•••주군.”

눈치를 살피던 참모진들 사이에 서, 하나가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 다.

“•♦•낙양의 전황(戰況)이 궁금하 시다면, ‘그자’에게 물어보는 것은 어떠십니까?”

이공자 연자청을 대신해, 다른 참모가 물었다.

“•••그자라니?”

처음에 말을 꺼낸 참모가 꺼림칙 한 표정으로 뒤를 가리켰다.

“뒤의 장갑마차에 태운 그자 말 입니다. 그 강남사단의 책사, 한명 휘의 가죽을 뒤집어쓴….”

“아。}.”

금질.

그는 이름을 직접 꺼내지는 않았 지만, 모두는 누구를 말하는지 이 해했다.

“그자라면, 지금 낙양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겠습 니까?”

그 원리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떤 술수인지, 멀리서 시체 꼭 두각시를 조종하는 금질이라면.

틀림없이 낙양도 감시하고 있을 터.

“•••그렇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공자의 허가가 떨어졌다.

명을 받아 뒤의 장갑마차에 다가 갔던 기마무사가 돌아오더니, 이상 한 것을 본 표정으로 보고했다.

“그것이….”

잠시 망설이던 그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

“…직접 확인하셔야 할 것 같습 니다.”

이공자의 참모 하나가 답답하다 는 둣이 자신의 가슴을 쳤다.

“대체 뭔데, 그러나?!”

“•••그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 르겠다는 투로 기마무사가 답했다.

“•••손님이 사망한 것 같습니다.”

가슴을 쳤던 참모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둣이 말했다.

“그자는 원래 이미 썩은 내가 풀

풀 나는 시체였잖나?!”

“아니, 그게 그러니까

기마무사의 눈동자가 흔란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창 너머로 봤는데 조금도 움직 이질 않습니다. 불러도 대답도 없 습니다. 원래도 죽어 있었는데, 이 제는 완전히 죽은 것 같단 말씀입 니다.”

그 말에.

황금 가면의 아래서 이공자의 얼 굴이 꿈틀거렸다.

“행렬을 정지해라.”

끼이익-.

마차들의 제동장치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공자 연자청을 비롯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무사가 장갑마차 의 문을 열었다.

“큭…!”

산전수전을 다 겪은 무사가 반사 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왱왱거리는 파리 떼의 소리와 함 께, 끔찍한 악취가 열린 마차의 문 밖으로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차양을 걷어라.”

이공자 연자청의 명에, 무사가 인상을 쓰며, 차양을 걷었다.

“…씁

이공자의 참모진들이 고개를 돌 렸다.

슬쩍 드러난 것만으로도, 마차 내부의 꼴은 끔찍했다.

“비켜라.”

주저하는 이들 사이에서, 등불을 뺏어 든 이공자가 마차에 직접 다 가갔다.

마차 내부를 들여다보는 그의 얼 굴이 황금 가면 아래서 일그러졌다.

한명휘의 몸은 산산조각이 난 채, 처참하게 썩어 문드러져 있었 고 그 위에는 구더기들이 버글거리 고 있었다.

조종사가 놓쳐,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난 꼭두각시처럼.

그것은 마치.

억지로 한명휘의 시체를 붙들고 있던 실들이 전부 풀려 버린 것 같 은 광경이었다.

“이자가 조종하던 것이, 이 모양 이 되었다는 것은….”

암천존자를 막아 주겠다던 금질 이 이 모양이 되어 버린 것은 무엇 을 의미하는가.

코를 쥐고 인상을 쓴 참모진들이 어렵지 않게, 상황을 유추해 냈다.

“•••실패했군요.”

그렇다면.

현재, 낙양의 상황은 어떠하겠는 가.

으드득.

이공자의 입에서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시각, 낙양.

죄악계곡 근처, 어느 화려한 전

각의 최상층.

이공자의 어머니, 구양 태상부인 이 신경질적으로 물어뜯던 손톱이 결국 부러져버렸다.

손톱의 끝만 부러진 것이 아니 라, 뿌리 부분까지 다쳤는지.

곱게 분칠한 그녀의 손에, 가늘 게 피가 홀러내렸다.

“금질…!”

으드득, 하고.

자신의 아들과 마찬가지 꼴로 이

를 갈며,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 어났다.

“그놈은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것 이야?!”

죄악계곡 상류의 대공자 진영은 잠시 뭔가 혼란스러워 보이더니, 이내 평안함을 되찾았고.

그 이후로는.

작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 이 슬쩍 몇 번 흔들렸던 것이 전부 였다.

그랬다.

그게 끝이었다.

“금질, 그놈이 잘난 척은 전부 하더니…!”

찢어질 둣한 목소리에, 그녀의 수하들도, 육인회의 우두머리들도 움츠러들며 슬쩍 눈을 피했다.

“이렇게 된 이상, 더는 기다릴 수 없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이제는, 어느 순간에 최고운영회 의가 개입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시뻴건 살기가 튀 었다.

“하류에 대기 중인 전 병력에게 진군(進軍)하라 명해라!”

짜랑짜랑한 그녀의 말에 암흑가 의 두령들이 난색을 표했다.

“그, 그것은“?!”

“중류에 퍼진 독은 어찌합니까?”

“독?”

구양 태상부인이 날카로운 목소 리로 독 이야기를 꺼낸 이에게 쏘 아붙였다.

“멍청한 놈이 아직도 독 걱정인 게야?! 그 독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을 양이었다면. 지금쯤, 계곡의

하류를 덮치고 낙양 시내를 지옥으 로 만들었겠지!”

그녀의 말은 논리적으로 옳은 말 이었지만.

“그건 그렇습니다만….”

육인회의 우두머리들은 그리 납 득한 기색이 아니었다.

애초에 독 이야기는 핑계에 불과 했고.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지금 이라도 발을 빼고 싶은 마음이 들 었던 것이다.

“네놈들…!”

그것을 눈치챈 구양 태상부인의 눈이 가늘어지고, 그녀의 입에서 고성이 터져 나오기 직전.

“저, 저건…?!”

그녀의 무사들이 번을 서던, 전 각의 옥상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태상부인…! 동쪽! 동쪽입니다!”

옥상에서 들려오는 그 다급한 목 소리에, 암혹가의 우두머리 중 하 나가 급히 달려가 동쪽 창문을 열 어 젖혔다.

“..!”

구양 태상부인을 비롯하여.

좌중의 모두가 볼 수 있었다.

대로의 저편.

동녘에 떠오르는 태양을 배경으 로.

완전무장을 마친, 무사들의 군단 이 진군해 오는 광경을.

그들이 들고 있는 형형색색의 전 쟁 깃발들에 수놓아진 글씨들이, 떠오르는 태양 빛을 받아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창가에 떨어질 듯 머리를 내민 암혹가의 두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것을 읽었다.

“•••낙양검가(浴陽劍家), 전쟁부

(戰爭部).”

그의 떨리는 시선이 다음 깃발로 향했다.

“검악파산(劍括破山)…!”

검악파산 염곽추.

낙양검가의 수위무사이자, 전쟁 부 소속의 염 장로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나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끝났군.”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린 말이 새 벽의 바람에 허무하게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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