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90화 (290/350)

제15편 책임(責任)

“주인님…‘?!”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연소현의 시녀장 정아였다.

반쯤 무너진 최심충부 통로에서 그의 모습을 발견한 그녀는 들고 있던 횃불마저 바닥에 던져 버리고 는 달려왔다.

“주인님!”

얼마나 연소현의 걱정을 한 것인 지.

눈가에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달 려오는 그녀의 모습에.

통로의 벽면에 기대앉아 있던 연 소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호들갑 떨 것 없다.”

그 대답으로, 그가 의식을 유지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의식을 잃고 제암진천경의 마기 에 완전히 침식당해 가는 상황.

즉, ‘흑색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녀장 정아의 낯빛은 전 혀 밝아지지 않았다.

“주인님. 그 가면은…!”

연소현의 얼굴에는 여전히 하얀 가면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었 다.

가면이 붙어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엔 떨어지지 않더구 나. 하지만 괜찮다.”

“그런…?!”

가면이 들러붙은 얼굴 주변의 피 부가 일그러지고, 시커먼 혈관이 나뭇가지 모양으로 퍼져 있었다.

서둘러 연소현을 부축해 일으키 려 했던 그녀였지만, 그에게 손을

내뻗자.

“••크!”

뻗은 손의 손가락 끝부터 타들어 가는 듯한 격통이 치달았다.

연소현이 억누르고는 있지만, 한 계를 넘어 새어 나오고 있는 제암 진천경의 마기 때문이었다.

“괜찮다고 하지 않았느냐?”

연소현이 괜히 태평한 말투로 그 녀를 타박하며, 벽면을 짚고 스스 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말과는 반대로.

“•••주인님.”

그의 악다문 입에서는 가는 핏줄 기가 홀러내리고 있었다.

....

열이라는 열은 모두 빼앗겨, 혈 관까지도 얼어붙어 버리면서.

그와 동시에 타들어 가는 듯한 작열통이 그의 전신을 내달리고 있 었다.

제암진천경의 마기와 마교의 마 기가 접촉한 반응은 그의 예상 이 상으로 격렬했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연소현은 결국, 스스로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새롭게 알게 된 마교 탄생의 역 사.

낙양검가의 피를 이은 자로서의 무거운 책임감.

그 무거운 책임감이, 지금.

오히려 그의 몸을 일으키고 있었 다.

“네게 좋은 소식이 있다.”

“•••예?”

그렇게.

몸을 일으킨 연소현이 정아를 보 며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 가문의 원수이던, 금질은 이 제 죽었다.”

정아가 고개를 거칠게 가로젓자, 그녀의 머리카락이 허공에 휘날렸 다.

“그런 자 따위는 지금, 아무래도 상관없사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금질이든 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신의 주인은 이런 상황에서까 지 한낱 시녀에 불과한 자신에게 신경을 써 주고 있단 말인가.

“주인님은 당장, 원각정으로 돌

아가서 기운을 다스리셔야 하옵니 다!”

연소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된다.”

“주인님…!”

정아의 외침은 간절했지만.

연소현은 단호했고.

“이제, 일이 끝나 가고 있다. 마 무리 단계다. 이런 중대한 시기에 는 변수가 있기 마련.”

그의 의지는 명확했다.

“이런 현 상황 속에서 일이 마무 리될 때까지. 내가 일선에서 물러

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정아가 입을 열어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다 른 이들의 외침에 끊어졌다.

“지도자님…!”

그들은 정아의 뒤를 황급히 따라 왔던 선녀교단의 신녀(神女)와 무 녀들이 었다.

그들 중에는 암천존자의 가면을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짓는 이도 있었고.

연소현의 상태에 대해서 우려를 느끼기도 했지만.

감히, 먼저 그에 대해 언급하는 이는 없었다.

“다들 고생 많았다.”

선녀교단의 신녀가 고개를 저었 다.

“아닙니다.”

그녀는 눈이 멀었지만.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연소 현에게 다가왔다.

“능력이 모자란 저희는 그저 지 도자님을 거들기만 했을 뿐. 겨우 그것으로 무슨 고생이라 치하받겠 습니까?”

“아니다.”

연소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 신녀의 말을 부정했다.

“그대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선녀교단의 신녀와 무녀들은 그 동안 지하대수로를 꾸준히 수색해 왔고.

결국, 늦지 않게 최심부로 향하 는 길을 찾는 임무에 성공했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연소현이 정확한 시점에 정확한

지점으로 금질을 찾아 타격하는 것 은 불가능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수색의 과정에서.

자진해 수색에 가담했던 선녀교 단 무녀들의 희생이 얼마나 컸던가.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지저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마기에 미쳐 버리 거나, 그 후유중으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실종된 이들도 많았다.

“이곳이 바로…?”

신녀가 말을 돌렸다.

약 선녀를 모시는 신녀답게.

그녀는 자신들의 희생을 추켜세 우거나, 치장하거나, 내세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것이 그들, 선녀교단의 무녀들 이 지닌 고결함이었다.

“•••그래. 이 통로가 끝나는 곳이, 바로 이 지하대수로의 최심부다.”

연소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통로의 저편.

통로를 따라 수색해 내려가는 무 녀들이 든 횃불들이 일렁이며, 군 데군데 무너진 벽면을 비추고 있었 다.

그 통로들을 가득 뒤덮고 있던, 시체들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텅 빈 통로였다.

“신녀.”

연소현이 신녀에게 물었다.

“그대의 눈에는 무언가가 보이 나?”

눈이 먼 신녀는 고개를 들어 통 로의 저편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 다.

“•••혼돈과 혼란. 공포와 증오. 원 한과 비통함으로 가득합니다.”

그것은 금질과 그를 둘러싸고 있 던 시체들의 군집체가 품고 있었던 감정일까.

아니면, 수백 년 전.

이 깊은 지하에서 갇힌 채, 가혹 한 노역에 시달리던 이들의 영혼에 까지 새겨졌던 고통이 남긴 편린일 까.

“지도자님!”

그때, 선두에서 수색을 하던 무 녀가 외쳤다.

통로의 끝이자 최심부의 입구에 그들이 도착한 것이다.

암천존자와 이형의 존재가 격돌 했던 최심층.

호리병 모양으로 생긴 공간.

그 거대한 공간은 전투의 도중에 여기저기 무너졌고.

반쯤 토사로 매몰되었으며, 지금 도 토사가 홀러내리는 중이었지만.

경사진 통로의 끝에서 그 공간의 ‘벽면’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려 운 일이 아니었다.

“이건…!”

“이게 무슨…?!”

아연한 표정의 무녀들이, 통로의 끝에서 횃불을 들고 최심충의 벽면 을 비추고 있었다.

연소현과 정아 그리고 신녀가 다 가오자, 그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 로 길을 비켜섰다.

“•••전부 인골(人骨)인 것 같습니 다.”

그녀의 말대로.

그 넓은 공간의 벽면이, 전부.

덕지덕지 처발랐던 회반죽과 무 수한 인골로 이루어져 있었다.

넓적다리로 보이는 뼈.

가느다란 팔뼈.

갈비뼈.

뼈.

뼈.

뼈.

그것은, 적어도 수백 명.

어쩌면 천여 명에 달하는 이들의

뼈로 빚어진 벽면이.

무녀들이 든 횃불들의 일렁이는 빛에 하얗게, 그 존재감을 드러내 고 있었다.

이전에는 마교의 마기에 뒤덮여, 시커멓게만 보이던 벽면이었지만.

이제 마기가 사라지자, 이렇게 참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이 유골들은….”

금질로부터 마교의 역사를 들었 던, 연소현은 그 유골들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전대 왕조와 과거의 검가에 의해, 이곳에 붙들린 채 노역을 했 던 이들의 유골이다.”

가혹한 노역 속에 무수히 죽어 나간 이들의 유골을 새로 투입된 이들이 가져와 쌓고.

또 그렇게 벽을 쌓던 이들이 죽 으면.

다음 투입된 이들이 와서 그들의 유골로 벽을 쌓는다.

누가 따로 설명을 해 준 것도 아 니었지만.

그의 눈에는 수백 년 전에 그 벽 면이 쌓여 나갔던 과정이 선하게

보이는 둣했다.

“•••고대(古代)의 주술 의식 중에 비슷한 기록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신녀가 입을 열었다.

“인간의 뼈를 궤(軸)에 맞춰 쌓 아 적합한 의식을 치르면, 형(形)이 없는 것도 담을 수 있는 ‘그룻’이 된다고 전해집니다.”

그녀는 멀어 버린 두 눈으로 무 엇을 보고 있는지.

“하지만, 이런 규모라니….”

전신이 식은땀으로 훙건했다.

“그러고 보니, 그릇이라면…!”

정아가 문뜩 떠오른 듯.

아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설화(說話) 에 따르면, 전대 왕조가 국운(國運) 을 되살리기 위해, 어느 도사의 말 에 따라 인공 호수인 황호를 팠다 고 들었사옵니다.”

“그래. 그 설화는 큰 틀에서는 옳은 이야기다. 하지만 좀 더 정확 히 하자면….”

연소현은 손을 들어 천장을 가리 켰고.

모두의 시선이 그 손을 따라 위

를 향했다.

“그들은 황호를 팠고.”

그의 손이 위에서부터 구불구불 아래로 이어졌다.

“낙양의 밑에서 시작되는 대수로 를 이곳까지 이어서, 호수 밑에 이 공간을 만들었다.”

“이곳이 황호의 지하란 말씀입니 까?!”

무녀들과 정아가 놀란 표정을 지 었다.

자신들은 지금 거대한 인공 호수 의 지하에 위치하고 있다는 말이었 다.

“그래. 이곳은….”

연소현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횃불들이 채, 전부 비추지도 못할 정도로 거대한 공간.

호리병 모양의 최심층을 바라보 며 말을 이었다.

“지기를 모아 인공적으로 용맥을 만들기 위한 그릇이다.”

연소현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마교가 탄생했던 곳이기 도 하다.”

놀란 이들에게, 연소현은 금질에 게서 들었던 역사를 전해 주었다.

그 통한(痛恨)의 역사가 이어질 수록, 좌중의 눈은 찢어질 듯이 커 져만 갔다.

“•••그렇게 된 것이다.”

연소현이 이야기해 준 충격적인 비사가 끝났다.

모두는 다시금.

깊고 넓은 최심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무녀들의 눈에는.

연소현의 눈에도.

기묘한 힘을 지닌 신녀에게도.

용안을 가진 정아에게도.

누구의 눈에도, 용맥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것은.

텅 비어 있는 공간과.

무수히 죽어 갔던 이들의 유골.

이것은 그저, 광기(狂氣)의 유산 일 뿐.

이 미쳐 버린 광경 속에서.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던 가운데, 연소현이 가장 먼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이 마무리 지어지면, 나 는 이 공간을 공개할 것이다.”

“나와 검가가 전적으로 모든 책 임을 질 것이야. 필요하다면 황제 폐하께도 요청해야지.”

그는 시선을 벽면에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이곳의 유골들을 전부 수습한 뒤, 정식으로 제사를 지낸 후. 이 공간을 메워 버려야 할 것이야.”

수백 년 전에 죽은 이들.

거기다가 노예에 불과했던 이들.

이제는 그 유족조차 찾기 불가능 할 것이다.

전적으로 책임을 진다 해도.

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뿐이었 다.

“하지만, 주인님.”

정아가 당혹한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본가 외부에서는 이를 어떻게 든 이용하려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본가 내부에서는 치

부(恥部)를 공개한 주인님을 원망 하는 이들이 나올 수도 있사옵니 다.”

드물게 나온 정아의 우려였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신녀도 고개를 끄덕여, 정아의 말에 동조했다.

“마교가 준동하는 이 시기에, 그 비사가 공개된다는 것은 어떤 영향 이 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좀 더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심 이—.”

“상관없다.”

연소현은 즉각 그 말들을 끊으며 답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의 말에는 암천존자의 마기가 섞여 있을 때보다도.

“이것은 이해득실(利害得失) 따 윈 상관없는 일이야.”

더욱 무거운 무게가 실려 있었 다.

“책임을 지고 반성하는 일에는, 적절한 시기가 따로 없다.”

그는 언제, 어느 순간보다도 진 중하게, 한 자 한 자 또박또박하게

못을 박듯이 말했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그것은 선언이며, 각오였다.

“역사를 묻지도, 잊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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