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편 엑소더스(Exodus)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
“끄어어어…!”
도주하던 이형의 존재에게서 떨 어져 나온 시체들은 사방에 조각조 각으로 흩어졌다.
그럼에도.
주술로 자신의 생(生)을 교에 바 친 그것들은.
“으어어어…!”
으깨어지고, 부서지고, 박살이 나 고, 뒤틀린 상태에서도 꾸물거리고, 펄떡거리며, 비명을 질러 댔다.
하지만.
그 기괴한 광경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아아아-.
오오오오-.
등골 서늘한 귀곡성들이 들려오 고.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암천존자 의 그림자에서 새하얀 손들이 튀어 나와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조각들
을 잡아 끌어당겼다.
“끄아아아악’!”
“캬아아악!”
조각들은 비명을 질러 대고, 발 버둥을 치며, 손길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저항은 무의미했다.
마치 심연으로 끌려 들어가듯, 조각들이 바닥으로 끌려 들어가고 찾아온 잠시간의 침묵.
그리고. 콰지직.
콰드드득.
뼈와 살이 뒤틀리고, 찢어발겨지 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각들이 끌려들어 갔던 심연의 아가리마다 검게 죽은 피가 뿜어져 올라 비산했다.
최심충의 공동은.
이형의 존재에게서 떨어져 나왔 던 것들이 잡아먹히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것은.
암천존자의 권능이자.
제암진천경의 연회(宴會).
생지옥의 광경이 이러할까.
그 잔혹한 소리가 벽을 타고 넘 어와 연결 통로에까지 선명하게 울 려 퍼지고 있는 와중에서.
“그대는 이 최심층이 무엇을 위 한 공간인지 알고 있는가?”
금질이 입을 열어 꺼낸 질문은 생뚱맞기까지 했다.
“이 지하대수로와 황호의 건설 목적에 대해 민간에는 이렇게 알고 있지.”
그는 썩은 지방이 줄줄 새는 비 대한 팔을 들어 사방을 가리켰다.
“황하와 밀접한 낙양의 치수(治 水)를 담당하고, 동서대운하의 수위 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 적인 기능에 불과하다.
진짜 목적을 감추기 위한 눈속임 에 불과했다.
암천존자는, 연소현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무너져 가던 전대 왕조의 마 지막 발악이었지.”
성자필쇠 (盛者必衰)라.
시간 속에서.
역사 속에서.
모든 왕조는, 모든 질서는 부패 하고, 쇠락하는 시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그것은.
중원국의 전신이었던, 전대 왕조 에게도 필연적인 결과였다.
“정확하게 알고 있군…!”
그렇게 맞장구를 치고는 금질이 쿨럭하고, 검은 피를 한 움큼 토했 다.
군체(群體)에서 떨어져 나온 조 각은 서서히 고사(括死)해 가고 있
었다.
“수백 년 전. 이 땅에 있었던 전 대 왕조 최후의 왕은 미치광이 도 사에게 홀렸었다.”
그 와중에도.
금질의 입에서는 수백 년 전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왕조의 수도였던, 이 천 년고도 낙양에 거대한 호수를 만들 면. 지기(地氣)가 한데 모여 용맥 (龍脈)이 형성되고. 그렇게 하면 기 울어 가던 나라의 국운(國運)이 회 복될 것이라 믿게 된 것이지.”
귀화가 피어오르는 연소현의 눈 이 가늘어졌다.
“그리하여 수만의 노예들이 공사 에 동원되었다.”
금질은 누렇게 상한 눈알로 허공 을 웅시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곧 황제는 겨우 수만으 로는 역사상 유례없는 대공사를 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
어째서 일까.
금질의 말은 마치 직접 그 시대 를 살았던 사람의 중언 같은 분위 기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하루가 멀 다 하고 백성들이 노예로 전락하던 시대였으니.”
금질이 시커먼 피를 흘리면서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수만이 부족하면 수만을 더 끌 고 왔다. 그것도 부족하면, 또 수만 을 끌고 왔다.”
멀리서.
이형의 존재를 이루고 있다가 떨 어져 나간 것들이 잡아먹히며 죽어 가는 비명이.
수백 년 전.
이곳에 끌려와 지하를 파고 또 파야 했던 노예들의 비명처럼 들렸 다.
“그리고 그 와중에, 이 끔찍한 지하에서 교(敎)가 탄생했다.”
하얀 가면 아래에서, 연소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통받는 자들의 곁에, 버려진 자들의 곁에 교가 있다. 그렇기에 교의 탄생은 필연이자, 운명이었 다.”
지금 금질이 말하고 있는 것은 연소현조차도 모르고 있던 마교의
역사였으며.
과거, 마교가 어떻게 시작되었는 지에 대한 숨겨진 진실이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그저 금질의 일방적인 주장이었지만.
“교가 출현함에 따라, 우리 선조 들은 이 지하에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킬수 있었다.”
그 말에 연소현이 피식하고 웃었 다.
“그때도 원한에 미쳐 산 사람을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만들고, 세 상을 멸망시키겠다며 한마음 한뜻 으로 뭉쳐서 그 ‘존엄(尊嚴)’이라는
것을 지켰나?”
그르렁.
연소현의 말에 보조를 맞추듯, 제암진천경의 마기가 울음소리를 홀렸다.
“아니.”
그러나.
뜻밖에도.
“그렇지 않았다.”
금질은 연소현의 조롱에 담담하 게 반응했다.
“그대도 선녀교단과 약 선녀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있겠지?”
선녀교단과 연소현의 어머니, 약 소유의 이야기가 지금 나오는 이유 가 무엇인가.
연소현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금질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 었다.
“우리 선조들 또한 시작은 그들 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금질은 개의치 않고 자신의 할 말을 이어 나갔다.
“선녀교단에 약 선녀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 선조들에겐 성녀(聖 女)가 있었다.”
금질의 목소리가 아득해졌다.
“우리 선조들은 성녀님의 가르침 에 따랐다. 덜 가난한 자가 더 가 난한 자를 도왔다. 덜 아픈 자가 더 아픈 자를 도왔다.”
그 말은.
지독하게도 인간적이었다.
“당시의 왕조는 노예들을 가축 이하로 취급했지만, 우리 선조들은
교리 안에서 인간일 수 있었다.”
지금의 마교에 대한 이야기라고 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인 이야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 가 거짓인가.
연소현의 눈이 한층 더 가늘어졌 다.
“결국, 당시에.”
그 의심 가득한 눈빛을 받으면서 도.
이미 썩은 지 오래된 육체가 붕 괴하는 과정에서도 금질은 말을 멈 추지 않았다.
“총, 백만(百萬)에 이르는 사람들 이 동원되었다. 하지만 황호와 지 하대수로를 완성하는 일은 불가능 했다.”
그 부분은 연소현이 알고 있는 역사와 일치했다.
“뒤틀리고 썩어 무너져 가던 국 가에서, 노예를 동원해 이런 대규 모의 공사를 하다니. 처음부터 정 신이 나간 계획이었지.”
무리해서 공사를 진행하던, 전대 왕조는 그렇게 멸망했다.
무리한 공사로 인해, 전대 왕조 가 예정된 운명을 더욱 빨리 맞이
했던 것인지.
아니면, 미완성된 구덩이에 지기 와 정기가 조금이라도 고여, 그 끔 찍한 시대의 수명이 조금이라도 길 어졌던 것인지.
지금에 와서는 알 수 없었다.
“새로 들어선 왕조는 새로운 시 대를 약속하며, 수도를 낙양에서 지금의 황도(皇都)로 옮겼다.”
새 왕조는.
그러니까 현재의 중원국(中原國) 왕조는 그 끔찍했던 시대를 끝내겠 다는 포부를 밝히며 노예제도도 폐 지했다.
“우리는 이 지하에서 환호했다! 비록 수많은 이들이 이 지하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그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살아남은 이들은, 우리 선조들 은 그날을 축복하고 축하했다!”
비대한 몸으로 주저앉아 허공을 향해 손을 뻗는 금질의 몸이 부들
부들 떨렸다.
“충실한 신앙과 인간을 향한 선 한 믿음이, 드디어 결실을 보았다 고 생각했다!”
거기까지 들은 연소현은 가면 아 래에서 질끈 눈을 감았다.
그는 이미, 듣지 않아도 이야기 의 다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결말까지도.
“하지만!”
금질의 입에서 비틀린 웃음소리 가 터져 나왔다.
“우리 선조들이 이 지하를 벗어 나는 일은 없었다! 다시 햇빛을 보 게 되는 일은 없었다!”
전대 왕조는 멸망했지만.
새 왕조가 들어섰지만.
공사는 끝나지 않았다.
계속 진행되었다.
그리고 금질의 입에서는, 정확하 게 연소현이 짐작했던 가문의 이름 이 나왔다.
“낙양의 연씨가문!”
그것은.
과거, 낙양검가를 일컫는 명칭이 었다.
“해방은 없었다! 놈들은 우리 선 조들을 풀어 주지 않았다!”
가문이 저질렀던 과거의 만행에, 연소현이 이를 악물었다.
“대신. 놈들은 우리 선조들이 노 예가 아니라며, 후에 지급할 임금
을 약속한다는 계약서를 쥐여 주었 다!”
금질이 검은 피를 토하며, 울부 짖었다.
“결국, 햇빛을 보지 못하고 지하 에서 생을 끝낼 우리 선조들에겐 의미도 없는 한낱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계약서!”
그 누렇게 상한 눈알이 이글거리 는 마기로 새까맣게 물들었다.
“놈들은 새 나라의, 중원국의 개 국공신(開國功臣) 가문이었기에, 우 리 선조들의 항의는 무의미했고, 그 외침은 공허했다!”
제암진천경의 포식(捕食)이 끝난 것일까.
어느새, 통로에 들려오던 비명은 멎었다.
“우리 선조들이 저항을 멈추지 않자. 연씨가문은, 우리 교를 조직 적이고, 집단적으로 탄압했다!”
하지만 여전히.
연소현은 이 지하 공간 전체에 서, 비통(悲痛)과 절망으로 가득한 절규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의 교를 마교(魔敎)라 부르 며, 혼란의 시기에 백성들을 혹세 무민(惑世B民)하는 종교 집단으로
몰았다!”
그것은.
대에 대를.
또, 대에 대를 거쳐.
수백 년이라는,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이어진 원한의 굴레에 사로잡 힌 원혼들의 외침이었다.
연소현은 제암진천경이 들려주는 원혼들의 외침 속에서, 금질이 털 어놓는 역사가 진실임을 알 수 있 었다.
“우리 선조들 중엔 어떻게든 이
지옥을 탈출한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지하를 벗어나도 지옥은 이어졌 다.
“하지만 그들은 중원국 전역에 걸친 탄압에 고향에도 돌아가지 못 하고, 끊임없이 도망쳐야 했다!”
낙양의 밖으로.
화북(華北)올 넘어서.
익주(益州)를 지나.
세외 (世外)까지.
하지만, 그들의 지옥은 끝나지 않았다.
“중원국이 막 개국하여 혼란하기 만 하던, 그 시기…! 필연적으로 우 리의 교세가 날이 갈수록 커지자 결국. 우리 교를 노린 사냥이 시작 되었다!”
한 왕조가 몰락하고, 새 왕조가 들어서는, 대혼란의 시기에.
수많은 이들이 자기 자신을 지키 기 위해서, 무인이 되었고.
무림인이 되었다.
구대문파는 더없이 강해졌고.
그들의 비대해지는 힘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새 황실에는 공공의 적이 필요했다.
그것이 마교 사냥의 시작이었으 며.
그것이 무림맹의 시작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결정했다.”
금질은 원한으로 가득한 웃음을 흘렸다.
“그들이 마교를 그토록 원한다 면. 우리가 마교가 되기로.”
금질의 몸에서 남아 있던 마기가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그래서 우리는 방법을 찾고, 또 찾았다. 우리가 진정한 마교가 될 방법을…! 이 지옥 같은 세계의 끝
을 내고,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 는 수단을…!”
그리고 결국, 수십 년 전.
열세에 몰려 있던, 마교의 어느 누군가가 방법을 찾았던 것이리라.
어느 외우주의 ‘존재’와 접촉할 방법을.
“••♦수십 년 전.”
침묵을 지키던 연소현이 입을 열 었다.
“마교가 멸망했던 그날의 집단 자살은, 제례 의식(諸禮儀式)이었던 것인가?”
“그렇다!”
그것은.
십만대산의 초입까지 마교의 세 력을 밀어냈던, 무림맹의 선발대가 목격했다던 그 집단 자살.
수천에 이르는 교인들이 하루아 침에 시체로 발견되었던 그 사건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것은 위대한 계약의 날이었으 니. 우리, 모두가 제물이었으며, 동 시에 세례(洗禮)를 받은 날이었다!”
광기 (狂氣).
마기 (魔氣).
원한에 대한 집착과 권력이 만들 어 낸 토양에서 자라난 끝없는 증 오.
“그날을 기점으로, 우리 마교는 진정한 마교로 거듭났다!”
금질이 붕괴하는 자라고는 믿어 지지 않는 성량으로 연소현에게 외 쳤다.
“암천존자여, 우리의 대제사는 이미 시작되었다!”
시커먼 피를 뿜으면서도, 사지가 무너지면서도.
금질은 외쳤다.
“이제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중원국 전역에서 예언의 때를 기다 리던 모든 교인들이 응답하리라!”
연소현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이미 회귀 전의 기억으로.
낙양에서의 마교 발호는, 이후에 전 중원에 찾아올 혼돈과 혼란의 시기.
혼세〈混世)를 알리는 효시(뼈失) 에 불과함을 알고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내 손으로 직접…!”
금질이 이미 부서질 대로 부서 져, 형체를 잃어 가는 팔을 들어 허공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이 모든 역사의 시작이었던 그 중오스러운 낙양검가에, 우리 선조 들의 원한을 갚아 줄 수 없었다는 점이구나...!”
그 원한과 증오의 역사를 듣고 도.
“아쉬워하지 마라.”
암천존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 었다.
“너뿐만이, 아니라. 그 마교의 그 누구도. 낙양검가를 무너뜨릴 수도
없을 것이고, 나아가서 너희의 비 원을 이루지도 못할 것이니.”
“알고 있다! 그대가 지금처럼 막 아서겠지!”
그림자 속에서 하얀 손들이 튀어 나와 금질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연소현 을 향했다.
“기억하고 또 기억하라, 암천존 자여...!”
그는 제암진천경의 손들에 의해 끌려 들어가면서도 웃었다.
그리고 동시에 울었다.
“그대가 앞으로 무수히 죽이고 먹어 치울 우리 교인들이…!”
우드득, 와그작.
“그대들이 마인(魔人)이라 부르 는 우리가…!”
씹혀 사라져 가는 중에도 금질의 외침은 그치지 않았다.
“가장 약한 이들이었고, 가장 인 간을 믿었던 선한 자들이었으며, 가장 절실히 도움을 필요로 하던 자들이었다는 것을…!”
잠시 후.
지하를 울리던 그 끔찍한 소리들 이 전부 사라지고.
그 공간에는 제암진천경의 마기 를 줄줄 흘리는 암천존자만이 남았 다.
통로를 지나는 썩은 바람을 느끼 며, 그는 시선을 들어 천장올 바라 보았다.
가장 약한 자들이, 때론 가장 악 한 자들이 되곤 한다.
금질이 뭐라 떠들든, 마교가 무 슨 기원을 지녔든.
낙양검가의 대공자 연소현은.
암천존자는 멈추지 않는다.
주저하지도 않는다.
마(魔)를 먹어 치우는 마.
악(惡)을 멸하는 악.
그렇게 마가 되고 악이 되는 것 이, 스스로가 선택한 길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