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편 구원(救援)을 향한 약속
“후우-.”
낙양 지하대수로.
심충(深層)의 어딘가.
“후우-.”
그 빛 한 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공간에서.
그보다 더 짙은 칠혹으로 물든
무명옷이, 대수로를 따라 통과하는 썩은 악취로 가득한 바람에 휘날렸 다.
“후우-.”
연소현, 암천존자는 거칠어지려 는 호홉을 천천히 다스리며,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을 내디디고 있 었다.
“후우-.”
아래로.
또 아래로 향하는 기다란 통로는 끝이 보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지 만, 암천존자의 발걸음을 멈출 수 는 없었다.
“그어어어-.”
통로의 벽에서 뻗어 나온 손들이 암천존자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벽에서 손이라.
하지만 이곳에서는 특별히 이상 한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의 주변은 이미, 인간이 만든 하수 시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이형(異形)의 무언가가 되어 있었 다.
암천존자가 걷고 있는 통로는 뒤 엉킨 채 썩어 들어가고 있는 시신
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니.
그 긴 통로는, 시체로 빚어진 내 장 기관이나 마찬가지였다.
덥석, 덥석.
경사를 따라 흐르던 오수에서 올 라온 시체들의 손이 암천존자의 발 을 붙잡았다.
그리고 썩은 고름이 줄줄 흐르는 손들이 그의 몸을 타고 오르는 듯 했다.
“후우-.”
하지만.
그럼에도, 그 무엇도 암천존자의
발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후우-.”
그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천천히.
하지만 확고하게 발걸음을 내디 뎠고.
“끄어어어-!”
오히려 그의 옷자락과 몸을 붙잡 았던 시체들이 주르륵, 딸려 나왔 다.
“후우-.”
시체가 시체를 붙잡고.
암천존자의 몸을 붙들었던 시체 를 또 다른 시체들이 붙잡았지만.
그렇게 시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없이 길게 늘어지는 가운데 서도.
암천존자는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힘드시지요?”
그런 그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암천존자를 붙들고 끌려가는 시 체들 중에, 그나마 형상이나마 유 지한 시체가 말했다.
“힘드시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코 위로는 뭉개진 시신이 길게
늘어진 혀와 하악(下韻)을 움직여 암천존자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교의 결계(結界)를 단숨에 부순 것은 저도 과연, 놀랄 수밖에 없었 지만.”
그것이 이제는 낄낄 웃기까지 했 다.
“그만큼 힘이 소진되지 않을 수 가 없었겠지요.”
“시끄럽다, 금질.”
암천존자의 손이 번뜩이고.
콰직, 하는.
가죽과 살점이 뒤틀려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낄낄거리던 시신이 터져 버렸다.
하지만.
“그러고 보니.”
이내, 새로 매달린 다른 시체가 주둥아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몸이 무겁지는 않으십니까?”
암천존자는 대답 대신, 다음 한 발을 옮겼다.
“후우-.”
그 묵직한 한 걸음에, 또다시 매 달던 시체들이 주르륵하고 딸려 올 라왔다.
“그야, 무거울 수밖에요.”
암천존자의 손이 다시 번뜩였고.
퍼 억-.
주둥아리를 놀리던 금질의 시체 꼭두각시가 박살 났지만.
이번엔, 머리만 남은 아이의 시 체와 그 머리를 안고 있는 어미의 시체가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이 시체들은 전부. 미혹과 환몽 의 결과물이 아닌.”
“실체가 존재하는 진짜 시체들이 니까요.”
그 시체들의 무게감과.
그 썩은 살점 그리고 시체에서 흐르는 진물의 촉감을 생생히 느끼 고 있던 암천존자는 답을 하지 않 았다.
“후우-.”
한 걸음.
또 한 걸음.
이제는 암천존자가 걸음을 디딜 때마다 통로가 출렁였다.
통로는 시체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시체들이 줄줄이 암천존자에게 매달리니.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통로
전체가 출렁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었다.
“그럼, 다음 질문입니다.”
그렇게 암천존자는 아무런 답변 도 하지 않았지만.
금질은 개의치 않고, 신이라도 난 둣 떠들어 댔다.
“이 수많은 시체가 전부 어디서 난 것일까요?”
멈칫.
그 질문에 잠시 멈추는 듯했던, 암천존자의 발걸음이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깊은 지하 수도에서 말입니 다. 도대체 이 많은 시체가 과연, 어떻게, 어디서 난 것일까요?”
암천존자가 답을 알면서도, 대답 을 하지 않을 것을 뗀히 알고 있는 금질이었다.
그는 아기와 어미의 시체를 움직 여 혼자서 자문자답을 했다.
“지하민 (地下民)!”
“그렇습니다! 이들은 낙양의 지 하민들입니다.”
그 말에.
암천존자의 날카로운 이가 으드
득 소리를 내며 불꽃을 튀겼다.
“낙양의 빈민들은 그 가혹한 노 동 조건에서도 일을 쉴 수가 없지 요.”
“하지만 결국 몸이 상해, 일을 쉬게 되면, 끼니를 때울 수가 없게 되고.”
“그렇게 노동을 할 수가 없을 정 도로 몸이 상해 버린 이들은 어떻 게 될까요?”
책임감 있는 가족이나.
정이 깊은 이웃이 있다면, 어떻 게든 그 가족이나 이웃에 의지하여 빈민가에서 풀칠이라도 하고 명을
이어 갈 것이다.
하지만.
문제를 뒤로 잠시 미뤄 두는 일 에 불과했다.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먹여야 할 입이 늘어난 만큼, 부양자(扶養者)에게 부담이 늘어나 지요.”
“그런 부양자들은 더욱 가혹한 노동에 시달려야 하고, 곧 자신들 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더욱 가혹한 노동 속에서 부상을 당하고, 마찬가지로 동네에 입만
늘리게 되거나.
아니면….
“이들은 산 채로 유기당한 이 들.”
금질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가족과 이웃에 의해, 지하대수 로에 던져져 폐기(廢棄)당한 이들 입니다.”
그것은 목숨을 잃은 이에게도 마 찬가지의 이야기였다.
겨울에 몸을 녹일 땔감조차 돈이 라, 서로 부둥켜안고 온기를 유지 해야 하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어찌 죽은 이의 시 신에 불을 지필 양의 땔감을 구할 수 있겠는가.
차마, 가족이나 이웃의 시신에 입을 댈 수는 없는 이들은 시신을 하수도로 떠나보내며.
극락왕생을 기원할 뿐이었다.
곳곳의 자애원에서는 전염병의 창궐을 예방하고, 고인에 대한 최 소한의 예의를 위해서 무료로 화장 터를 운용하고 있지만.
죽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너무나 많았다.
“이들은 그렇게, 죽어 가며 이 지하대수로에서 떠돌다가 본교를 찾아 귀의(歸依)한 이들입니다!”
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그우어어어-!”
“으우어어어-!”
시체들이 울부짖으며, 더욱 단단 히 암천존자의 몸을 휘감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암천존자가 먼저 입을 열자, 금질이 조종하는 모자(母子) 의 시체가 귀를 기울이는 시늉을 했다.
“그래서, 그렇게 죽어 가던 이들 에게.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이들 에게 접근해서.”
시체들이 지르는 비명 속에서.
금속이 끓는 듯한 암천존자의 목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구원에 대한 거짓된 약속올 한 것인가?”
질문을 던지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이들을.’’
이제는 너무 많은 시체가 매달 려, 마치 통로 전체를 뜯어내는 상 황이 되었음에도.
“세상에서 가장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현혹한 것인가?”
그러면서도.
암천존자는 전진하고 있었다.
“현혹? 거짓?”
통로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거짓된 약속이라니요?”
금질의 시체 꼭두각시들이 정색 했다.
“우리 교인(敎人)들의 각오를 우 습게 알지 마시오, 암천존자.”
금질의 시체 꼭두각시들이 남은 손톱으로 암천존자의 몸을 할퀴고,
남은 이로 암천존자의 몸을 물어뜯 었다.
“우리 교인들은, 스스로.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한 초석이 되길 선 택했소.”
“우리는 스스로 제물이 되길 택 했다오.”
암천존자의 귓가에 목소리 비슷 한 것이라도 낼 수 있는 시체들이 내는 소리가 가득 찼다.
“불교나 도교, 지상의 그 어떤 종교 따위처럼. 흔해 빠진 내세와 구원에 대한 약속은 한 적도.”
“받은 적도 없소.”
그것은 금질의 목소리이자.
마교에 스스로 몸을 바쳐 제물로 써 귀의한 이들의 목소리였다.
“나는 진실을 알고 있소!”
“우리는 진리를 알고 있소!”
교인들이, 혹은 교인의 시체들이 고함을 쳤다.
“내세(來世) 따위는 없다는 것 을…!”
“인과율(因果律) 따윈 없다는 것 을…!”
암천존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람의 가죽을 쓰고, 마귀보다
악독한 자들!”
“그자들은 죽어서도 하늘에 의해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소!”
일찍이 탈속(脫俗)하여 둥선(登 仙)한 신선들.
제암진천경을 만든 선인(仙人)들 이 찾았다던, 그 우주의 진실이.
그 진리의 편린(片廳)이.
마교의 입에서도 나오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그들의 시신이 엮어 낸 통로가.
원한과 분노에 가득 찬 이들이 울부짖는 소리로 통로를 가득 채우 고.
그들의 시체가 거칠게 몸부림을 치며 통로 전체를 살아 있는 것처 럼 뒤흔들었다.
“세상을 전부 파멸시켜 태초의 모습으로 정화하는 것!”
“나를, 우리를 이렇게 죽게 만든 자들에게…!”
“이 세상에 복수하는 것이다!”
시체들로 빚어진 통로의 끝에 서
서.
연소현은 그들의 교의(敎義)를 이해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마교(魔敎)와 제암진천경(制暗震 天經).
마인(魔人)과 암천존자(暗天尊 者)는, 마치 서로가 거울의 양면(兩 面)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후우—.”
그럼에도.
그 끔찍한 한(恨)과 바닥없는 고 통을 이해했음에도.
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마지막 한 걸음에 힘이 실렸다.
으지직-.
암천존자가 양손을 뻗어 잡고 있 던 통로의 끝을 이루고 있던 시체 들이 비명을 지르며 박살 났다.
으지지직-.
제암진천경의 마기(魔氣)가 자아 낸 밑도 끝도 없는 거력에.
그 손에 짓이겨진 시체 아래에 서, 본래 벽면을 이루고 있던 벽돌 들까지도 박살이 나며.
암천존자는 통로를 벗어났다.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후우-.”
그의 몸이 한층 더 시커멓게 입 을 벌리고 있는, 최하층(最下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곧.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암천존자가 바닥에 착지했다.
그것은 거대한 공간이었다.
마교의 마기에 의해 가려져, 이 제까지 누구도 관측하지 못했던 최 심층이 었다.
“끄아아아-!”
“으우어어어어!”
그를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시 체들이 그의 뒤로 후두둑 떨어졌다.
콰직!
먼저 바닥에 떨어진 시체들이 형 편없이 박살 나고.
콰직, 콰지직!
그 위로 또 시체들이 손발을 휘 저으며 떨어져 내렸다.
시체들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 다.
통로를 이루던 시체들은 전부 암
천존자에게 매달려 있었고.
암천존자에 의해 그 시체들 전부 가 통로에서 벗겨져 버린 것이었다.
“후우-, 후우-.”
“암천존자여.”
호흡을 다스리는 그를 부르는 소 리는 정면이었다.
암천존자의 눈으로도 흐릿하게 보일 정도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형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대나 우리나, 똑같소.”
그 안개 같은 시커먼 마기 속에 서 수백 개의 다리가 움직이고.
수백 개의 손이 움직이고 있었 다.
집채만 한 크기의 형상이 수백 개의 눈으로 암천존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와 우리는 현실에 절망한 이들.”
저것을 금질이라 불러야 하는가.
수백 구의 시체가 뭉쳐 만들어진 거대한 이형의 존재가 수십 개의 목소리로 동시에 말했다.
“그대와 우리는 이 세계의 가혹 한 진실을 극복하기 위해. 외우주 (外字®)의 존재들에게서 힘을 빌
린 자들.”
이형의 존재가 수십 개의 썩어 가는 손을 동시에 내밀었다.
“지금 여기서, 그대와 우리가 굳 이 피를 홀리며 싸워야 할 이유는 없소.”
“헛소리.”
암천존자, 연소현의 대답은 즉각 적이었으며, 그 대답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나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서 싸운다.”
거친 호흡 속에서도 연소현은 등 을 꼿꼿이 폈다.
“나는 지금 살아 있는 자들의 운 명올 바꾸기 위해서 싸우고, 앞으 로 살아갈 자들의 삶을 지키기 위 해서 싸운다.”
거친 숨결을 내뱉던 연소현이 날 카로운 이빨을 보이며 미소 지었다.
“자신의 운명도 바꾸지 못하고, 세상도 바꾸지 못하고. 그저 원한 과 중오에 눈이 멀어, 세상의 멸망 따위나 바라는 유치한 사상으로 감 히 나와 같다 말하는가?”
순간, 말문이 막힌 이형의 존재 에게 연소현이 일갈했다.
“그 꼴이 같잖구나. 되다 만 미
물(微物) 따위가.”
“•••감히!”
우르릉!
“신성 모독이다!”
“교리에 대한 모욕이다!”
이형의 존재가 자신의 거체를 거 칠게 움직이자, 지하대수로 전체가 울렸다.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할 만큼 힘이 빠진 주제에, 감히 교(敎)의 호의를 거절하는가?!”
“내가 힘이 빠져…?”
한낱 인간이 느끼는 오한 따위는
잊은 지 오래인지라.
이형의 존재는 자신이 느낀 감각 을 이해하는 데, 순간적으로 어려 움을 겪었다.
“우습구나.”
하얀 가면에서 시퍼런 귀화가 두 줄기 피어오르더니.
이내, 까마득한 천장에 닿을 둣 이 치솟았다.
연소현, 아니.
암천존자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 면서, 이형의 존재가 내뿜던 마기 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나는 힘이 부쳐 호흡을 고르던 것이 아니다.”
마(魔)를 먹는 마(魔).
마를 멸하기 위한 천고의 마물.
제암진천경.
“네놈이 내 앞에 직접 모습을 드 러낼 때까지.”
연소현이 간신히 유지하던 양의 심공의 운용을 놓아주자.
그 가장 순수한 마기가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통제하고 있던 것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