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편 교착 우위(勝着優位)
밤.
그리고 계곡.
선선한 계곡 바람은 낮게 깔려 계곡에서 아래로 불어 내려가고 있 었다.
죽음의 재를 실은 바람이었다.
“세상만사(世上萬事)가 제행무상 (諸行無常), 성자필쇠(盛者必衰)라. 생(生)과 사(死)는 표리일체(表袁一 體)하니….”
검은 피독면의 유리알 너머로 계 곡의 아래쪽을 바라보는 사공자의 군사.
당예린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 고 있었다.
“시생멸법(是生M法)이라. 그 순 환이 생멸(生滅)의 법칙이니.”
그녀의 눈 아래에서 지금, 무수 한 생명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시들고 있었다.
공기가 있으나, 숨을 쉬지 못하
고.
뻐금거리며 발버둥을 치다 익사 하고 있었다.
“생멸멸기(生滅滅己) 적멸위락 (寂滅爲樂)이라, 생멸이 끝나면 그 것이 곧 열반(混樂)의 경지이다.”
그것은 그녀 나름의.
조의 (甲意).
“극락왕생 (極樂往生)하거라.”
그녀가 품으로 염주를 거두자마 자, 보고가 시작되었다.
“효력 확인 절차 진행 중.”
어떻게든 독을 피하려, 위로, 옥 상으로 향한 이들이 옥상에서 온몸 을 비틀며 죽었다.
아래로, 지하로 들어간 이들은
낮게 깔린 독에 의해 달빛도 들지 않는 지하에서 죽었다.
“각 관측 요원으로부터 보고.”
“집계 중.”
요원들은 피독면 너머에서 지극 히 기계적으로 절차를 이어 나갔다.
“계곡 중류, 적 주력 병력 무력 화 목표 달성.”
“적 무림인 병력에 대한 추적 말 살 작전 진행 중.”
돌아선 당예린이 수신호와 함께 명했다.
“하독 중단.”
“하독 중단.”
복명복창한 사공자 측 요원들이 일사불란하게 궤짝에 달린 장치를 조작했다.
쉬이익 하고, 쉴 새 없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던 궤짝이 침묵했 다.
“조작 완료. 하독 중단 완료.”
그 보고가 들려오자마자, 당예린 이 피독면을 벗어 들었다.
“후우-.”
답답한 피독면을 벗어 든 그녀는 길게 숨을 들이쉬며 얼굴에 줄줄
흐른 땀을 닦았다.
“당 군사. 벌써, 피독면을 벗어도 되는 것인가?”
옆에 서 있던 노군사가 그녀를 따라 피독면을 벗으려 했다.
공기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 피독 면과 피독의상 내부는 끔찍하게 더 웠기 때문이었다.
“지금 벗으면, 안 됩니다.”
그런 노군사의 행동을 제지한 요 원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어 보 였다.
“아직, 공기 중에 독기(毒氣)가 가득합니다.”
피독면을 거쳐 나온 요원의 말은 발음이 뭉개져 들려,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없었지만.
자신의 목을 그어 보이는 간단한 행동은, 당가의 수신호를 모르는 노군사도 즉각 이해했다.
“•••아, 알겠네.”
노군사가 피독면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끄덕이자, 요원이 물러났다.
노군사는 피독면 아래, 제한된 시야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전투 행위가 중단된 계곡은
정적이 흐르고 있었고, 심지어 일 견하기에 평화롭기까지 했다.
“•••북부전쟁 당시, 당가의 실험 병기가 사용되었다는 소문은 들었 었는데, 위력이 이 정도였나?”
노군사는 혀를 내둘렀다.
“당시 전장에서 실전 실험을 통 해, 개량 보완된 완성판이에요.”
당예린이 자신의 머리를 정돈하 는 모습을 보며, 노군사가 마른침 을삼켰다.
“•••대공자께서 당가의 소가주와 직접 거래하셔서 받았다기에, 뭐가 그리 대단한 병기인가 했더니.”
“갑종(甲種) 특(特) 십육호 병 기.”
당예린이 조곤조곤한 말투로 말 했다.
“속칭, 무면무명은 당가에서도 외부로 유출하는 것을 엄금한 기밀 병기이니까요. 그래서 저도 실전에 서 직접 사용해 본 것은 처음이에 요.”
그녀가 가볍게 눈웃음을 지었다.
공기 중의 독에 반응해서인지, 그녀의 눈동자가 녹색으로 번들거 리고 있었다.
“당가는 시가지 실전 사용 자료
를 얻고, 대공자님은 중류를 무인 지대로 만드신 거죠.”
그녀가 짧게 덧붙였다.
“서로 이득을 보는 장사랄까?”
“•••그렇군.”
극락왕생을 기원하던 그녀의 모 습과 대량 살상을 통한 이득을 논 하는 그녀의 모습이 대비를 이루어.
지극히 이질적이었지만.
굳이, 노군사는 그 점을 입에 담 진 않았다.
한평생을 전쟁터에 종군하며, 어 딘가 망가진 인간 군상올 보는 일
엔 익숙한 그였으니.
“독성은 언제까지 지속되는가?”
노군사의 물음에 당예린이 대답 대신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시약을 개봉해 공기 중에 노출시킨 요원이 유리 용기를 흔들 고 있는 모습이 있었다.
“확인 완료.”
요원은 공기와 만난 시약의 색이 변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방의 독성은 이제 효력을 잃었습니다.”
그 말에 요원들이 누구랄 것 없 이, 피독면을 벗었다.
“고맙네.”
요원의 도움으로 피독면과 피독 의상을 벗으며, 노군사가 말했다.
“효과에 비해서 지속 시간은 짧 은 편이군.”
“그것이 병기로서 이 독이 가지 는 완성도이죠.”
당예린이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 다.
“지속 시간까지 길면, 이기기 위 한 병기가 아니라, 전부 죽는 결말
밖에 나오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분명. 당가에는 그런 결말을 위한 병기도 있겠지?”
당예린은 의미심장한 미소로 대 답을 대신했다.
“•••무섭구먼.”
노군사는 그 미소에 섬뜩함을 느 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시선을 계곡 아래로 향했 다.
평화롭기까지 한 계곡의 중류와 는 달리, 하류는 여전히 적들이 든
횃불들이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었 고.
또 바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감히 중류로 진입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교착(移着)이로군.”
당예린이 그의 곁에 서서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아군 우위의 교착 상태 죠.”
제삼부두.
이공자 측, 장로들은 큰 충격과 깊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구양 태상부인께서 육인회의 숨통을 좀 더 죄어 보시면?”
“불가하오.”
어렵사리 꺼낸 장로의 말에 동료
장로가 즉시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상황은, 이전과는 다르오.”
다른 장로가 그 말을 거들었다.
“어렵긴 하지만, 결국 뚫어 내면 큰 보상이 뒤따를 수 있었던 이전 상황과는 다르지.”
“지금, 중류로 다시 진입하라는 것은. 불에 섶을 지고 뛰어들라고 하는 것과 같소.”
만약, 육인회의 우두머리들이 명 을 내린다 하더라도.
그 자살과도 같은 명령을 따를 정도로 충심이 깊거나, 멍청한 이 가 암흑가에 있을 리가 없었다.
“망할…!”
장로 하나가 담뱃대를 탁상에 내 리쳤다.
“대체 어째서, 본가의 정보부처 마저 저 독에 대해 아는 바가 하나 도 제대로 없는 것인가?!”
“…독의 명칭은 무면무명.”
낙양검가 정보부처에서 나온 고 위층 인사가 연초 연기를 뿜으며 입을 열었다.
“과거, 북부전쟁 당시 세 차례의 실전 실험이 있었고. 이후, 완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형태가 월국의 군 사 내전 당시에 관측 보고된 바가
있소.”
“그래서, 그 독성이 얼마나 지속 된단 말인가? 범위는? 해독법은?”
다그치듯이 묻는 장로를 향해, 정보부처의 고위급 인사가 무뚝뚝 하게 답했다.
“처음에 말했듯. 모르오.”
수하에게서 근접 전음을 받은 그 가 살짝 덧붙였다.
“내공을 지닌 이들에게는 효과가 떨어진다고는 하는군.”
“이런, 제기랄!”
몇몇 장로들은 욕설을 내뱉고,
몇몇 장로는 정보부처의 고위 인사 를 향해 비아냥거리는 말을 던졌다.
“잠정적인 적대 세력의 병기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도 못하면서, 그동안 그 많은 정보 예산은 어디 다 썼는지.”
“정보부처 예산의 집행 내역은, 감사도 안 받지 않소? 누구 목구멍 으로 들어갔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정보부처의 고위 인사는 날이 선 말들이 뒤통수에 날아들어도 무표 정을 고수했다.
“애초에, 방계인 당문에서는 존
재 자체도 모르는 기밀 병기요. 당 가에서도 직계들만이 그 정보에 접 근할 권한이 있겠지.”
그의 말에 장로들이 당혹감을 표 했다.
“직계만이 정보에 접근 가능하다 고?”
“그렇소.”
“…정보를 접근하는 것이 직계만 이 가능하다면.”
장로 하나가 식은땀을 닦으며 물 었다.
“대체, 사천당가의 어느 정도 선 에서 개입해야, 낙양 한가운데서
그 기밀 병기를 사용 가능하단 말 이오?”
누구도 그 질문에 쉽게 답을 하 지 못했다.
“•••대공자가 사천당가의 최고위 층을 끌어들였단 말인가?”
대외 정치에 밝은 장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마도, 장강 수로 확장 정비 사업과 관련해서 이루어진 부수적 인 거래였겠지.”
“사천당가라니?!”
담뱃대를 쥔 장로가 그 말에 분 노를 토했다.
“어찌 이 낙양에 그 더러운 족속 들을 끌어들일 수가 있단 말인가?! 명예도 모르는 그 망할 대공자 놈 이…!”
그런, 자신들은 사패천을 끌어들 이지 않았던가.
낯이 그리 두껍지 않은 장로들은 그저 눈빛만 교환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함대의 포격은 어떻소?”
방금의 대화에서 실마리를 얻은 듯, 장로 하나가 물었다.
“적들이 독을 사용함에 따라, 우 리도 발이 묶였지만. 중류에 위치 한 적들의 투석기들도 멈췄지 않 소?”
“그렇군…!”
“투석기가 없으면, 부두 근처까 지 다가와서 상류를 직접 타격할 수 있지 않소?”
“분명 그렇게 들었었지…!”
그 말에 밝아졌던 장로들의 표정 을 보며, 선혈선단의 장교가 피식 하고 웃더니 입을 열었다.
“포격은 어디까지나 지원에 지나 지 않습니다. 당장 포격을 한다 치
고, 어느 누가 적들의 마지막 수비 를 무너뜨리고 상류를 점령할 겁니 까?”
말문이 막힌 장로들을 향해, 선 혈선단의 장교가 못을 박았다.
“대포도, 탄환도, 화약도. 무한하 지는 않습니다. 일이 확실해지기 전까지 함포 사격이 재개될 일은 없을 겁니다.”
“•••젠장!”
와장창, 하고 담뱃대를 들고 있 던 장로가 탁상을 엎었다.
하지만 누구도 굳이 그를 책하지
않았다.
“…현 상황은 단순한 교착 상태 가 아니라, 적들이 우위에 있는 교 착 상태라오.”
마지막에 입을 연 것은, 그때까 지 침묵을 지키던 하후 장로였다.
그의 말에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 하던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후 장로의 말이 옳소.”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라, 저들 의 편이지.”
이대로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간 다면.
“•••최고운영회의의 의사 결정을 방해하는 이들도 한계가 있소.”
“그렇게 되면 결국엔, 최고운영 회의가 개입하게 될 것이오.”
그렇기에 현 상황이 교착을 이루 면서도, 연소현 측의 우위라는 의 미였다.
“•••구양 태상부인께 이렇게 전언 을 보내도록.”
하후 장로가 깍지를 끼고 눈을 감았다.
“대응책, 전무(全無).”
하후 장로의 쪽지를 받아 든 구 양 태상부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 다.
육인회의 우두머리들은 그저 구 석에 서서 혹여라도 그녀와 시선이 마주칠까, 는올 피하는 중이었다.
차라리.
평소처럼 소리를 치고, 그 더러 운 성질을 부리는 편이 나으면 나 았지.
지금의 구양 태상부인의 모습은 터지기 직전의 화약고와 마찬가지 였다.
“…자네라면, 방법이 있겠지?”
난데없는 그녀의 말에, 육인회의 우두머리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 았다.
하지만, 애초에 그녀의 질문은, 그들에게 던진 것이 아니었다.
“물론이지요.”
‘그것’은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대답했다.
“저라면. 저희라면 얼마든지 방 법이 있습니다.”
그 장소에 있던 모든 이들의 몸 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괜찮겠습니까?”
그늘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그것 의 얼굴은 이미 형편없이 썩어 있 었고.
움직일 때마다 구더기들이 후두 둑 떨어졌다.
“우욱-!”
“읍…!”
육인회의 우두머리들이 코를 후 벼 파고 뇌에 직접 꽂히는 것 같은 악취에 코를 감싸 쥐며 물러났다.
하지만 특별히 크게 놀란 이는 없었다.
지금 모습을 드러낸 ‘그것’ 또한 육인회의 일원이었으니.
“분명 원래 약속은, 암천존자가 나타나면 제가 그를 막는 것이었을 텐데요?”
“•••상관없다.”
두 사람의 목소리를 겹쳐 내는 그것을 보며, 구양 태상부인은 혐 오감을 감추지 않았다.
“네놈과 그 저주받을 족속들이 평소처럼 그 끔찍한 짓거리들을 펼 치기 시작하면, 그놈도 알아서 나 타날 테지.”
그녀가 그것의 이름을 입에 담았 다.
“금질.”
금질이라고 불린 이가 조종하는 꼭두각시 시체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주받을 족속이라니.”
시체는 웃는 표정을 만들어 보이 려 하는 듯했지만.
오히려, 덕지덕지 기운 얼굴 피 부가 일그러지며 추악하게만 보였 다.
“저희의 교리(敎理)는 그 어떤 지상의 거짓 종교보다도 신성하고, 저희의 구성원들은 그 어떤 신앙인 보다도 순수합니다.”
시체가 삐걱거리며, 구양 태상부 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참에 태상부인께서도. 저희의 교리문답 집회에 한 번쯤, 참여해 보심이 어떠십니까?”
분노한 구양 태상부인이 내공을 담아 발을 굴렀다.
“헛소리 말고 꺼져라, 금질! 네놈 은 약속이나 확실히 지켜야 할 것 이야!”
바닥의 대리석이 쩌억 갈라지고, 그 충격에 금질의 꼭두각시 시체가 나자빠졌다.
“저런 저런.”
시체는 나자빠진 채로, 킬킬거리 며 웃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태상부인.”
마치 무언가가 떠나가듯.
바닥에 쓰러진 시체의 움직임이 멎어 가며, 목소리 또한 멀어졌다.
“저희는 계약을 누구보다도 중요 하게 생각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