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83화 (283/350)

제8편 무색무취(無色無臭)

“적들이 후퇴한다!”

골목들을 철통처럼 방어하던 자 애원의 중장무장단이 썰물처럼 빠 져나가기 시작했다.

암흑가 조직, 오룡지파(五龍支派) 의 간부가 자신의 민머리를 시뻘겋 게 붉히며 목청을 돋우었다.

“전원, 당장 적들을 쫓-!”

“잠깐!”

그의 어깨를 잡아채는 손길이 있

었다.

“뭔가?!”

같은 오룡지파에 속한 간부였다.

“우리가 놈들을 몰아냈단 말이 다! 지금 쫓지 않으면-!”

외눈의 동료 간부가 지친 기색으 로 숨을 헐떡이면서도 소리를 쳤다.

“방금까지 계속되던, 적들의 유 격전을 벌써 잊었나?!”

그가 손을 들어 정면을 가리켰 다.

그들이 위치한 골목이 끝나는 곳 에는 구불거리던 모든 골목이 만나

는 중류의 광장(廣場)이 있었다.

“저 광장에는 대공자 측의 전진 기지가 있었다고 들었어.”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인가?”

민머리 간부는 짜중을 내면서도, 외눈을 한 동료 간부의 말에 참을 성을 발휘했다.

그의 동료 간부는 북부 전쟁의 참전자로, 눈 하나를 전쟁터에서 잃었던 이였다.

대신 그는, 겉핥기식으로나마 전 쟁의 전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의 옥 상 곳곳에 연노들이 배치되어 있다

고 생각해 보게.”

....

보랏빛 신호 폭죽들이 허공을 수 놓으며, 하얗게 질린 암혹가 간부 의 얼굴을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만약, 우리가 저 광장으로 들어 간다면…!”

“아까의 중장갑 보병들이 우리의 퇴로를 끊어 버릴 걸세.”

그렇게 되면.

그들 모두가 엄폐 수단 하나 없 는 광장에서 수십 수백 개의 화살 에 몸이 꿰이게 되리라.

“•••망할!”

오룡지파의 조직원들이 그렇게 골목에 정지하자, 뒤에서 기회를 보던 다른 암흑가의 조직원들이 우 르르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몸놀림이 범상찮은 것이, 그들 전부가 흑도 무인이 틀림없었다.

“다들 이제 지친 모양이군!”

노골적으로 조롱 가득한 목소리 에 오룡지파의 민머리 간부가 인상 을 썼다.

“마가육림 (馬家大林)

“앞서가며, 중장보병들의 힘을

때느라 고생들 했어!”

마가육림의 간부가 그들의 어깨 를 치고 지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니 뒤는 우리, 마가육림의 정예들에게 맡기게!”

낄낄거리며 지나간 그의 뒷모습 을

마가육림의 혹도 무인들의 뒷모 습을 오룡지파의 간부 두 명은 의 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하고는.

그저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기다려도.

그들이 예상했던 교차 사격의 화 살 비도 없었고.

퇴로를 차단하는 적 중장보병들 의 모습도 보이질 않았다.

“중앙 광장을 탈취한 공은 우리 마가육림의 것이다!”

대신.

의기양양한 마가육림 간부의 외 침과 함께, 마가육림 무인들의 환 호성만이 들려왔다.

“•••정말로, 적들이 전부 후퇴했 다고?”

전진을 막았던, 오룡지파의 외눈

간부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적들이 중류를 포기 했다고? 상류에서 방어를 하기로 했단 말인가?”

그의 하나 남은 눈에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아니, 아니야. 아직, 중류를 포 기하기는 이른-!”

“에잇, X발!”

성질 급한 민머리 간부가 수하들 에게 외쳤다.

“얘들아! 우리는 광장을 통과해, 그대로 적들의 투석기 진지를 향해 달린다!”

중류에 위치한 적의 투석기들은 여전히 계곡 전체에 광범위한 공격 을 감행 중이었고.

적들의 병력이 빠져나간 시점에 서, 투석기 진지들은 훌륭한 먹잇 감에 지나지 않았다.

“달려라! 달려!”

간부 둘은 내공까지 동원해서 달 리고, 조직원들은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그 뒤를 쫓아 달렸다.

“아니, X발…!”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석기 진지 근처 골목의 시작

지점은, 이미 먼저 도착한 타 조직 의 조직원들로 버글거리고 있었다.

“X발, 이 새끼들 X나 빠르네.”

이미, 그들이 점령을 끝낸 듯.

골목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투석 기들의 움직임은 멎어 있었다.

그런 것치고는, 환호성도 없고.

기이할 정도로 침묵이 흐르고 있 었지만.

머리에 산소가 부족할 정도로 달 렸던 민머리 간부는 그 기이함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야!”

그가 맨 후미에 있는 타 조직원 의 어깨를 쳤다.

“너희는, 어디 소속….”

거칠어진 호홉을 고르면서도 성 질을 부리던 간부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작아졌다.

“꺼억-, 꺼억-.”

그가 어깨를 쳤던 타 조직의 조 직원이 몸을 휘청거리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어…?”

돌아선 타 조직원의 얼굴을 바라 본 민머리 간부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어? 어?”

“•••왜 그러십니-?”

내공을 동원해 뛰던 간부를 쫓아 오느라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던 수하들의 시선이, 타 조직원의 얼 굴에 고정되었다.

“저, 저게 뭐야?!”

“모,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타 조직원의 얼굴은 알 수 없는 수포(水砲)에 가득 뒤덮여, 누군지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꺼억-, 꺼억-.”

타 조직원이 숨을 쉬기 괴롭다는 듯이 손톱으로 자신의 목을 긁었다.

허옇게 부풀어 올랐던 수포들이 주르륵하고 터지며, 누런 고름과 진물이 쏟아졌다.

“컥, 커억-!”

타 조직원은 얼마나 자신의 목을 거세게 긁었는지.

“수, 숨을 못, 못 쉬겠…!”

자신의 피와 살점으로 범벅이 된 양손을 들어 보이며 오룡지파의 조 직원들에게 비척비척 다가왔다.

“도, 도와주-!”

“X, X발‘?!”

오룡지파의 민머리 간부가 반사 적으로 그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그에게 걷어차인 타 조직원이 뒤 로 나뒹굴고.

“꺼억, 꺼억-.”

발작하듯 몸을 까뒤집고 뒤틀어 대다가.

“꺽, 꺽.”

결국.

숨이 멎었다.

“숨을 못 쉬겠다고? 뭐야?! X 발!”

그의 흔들리는 시선이 골목의 안 쪽을 향했고.

“대체, 뭐냐고?!”

골목에서 멍청하게 서 있는 것처 럼 보였던 타 조직원들이, 전부 선 채로 죽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멀리서 볼 때는.

투석기 위에 올라타 자신들의 전 과를 주변에 자랑하는 것처럼 보였 던 이들의 모습이, 이제는 전혀 다 르게 보였다.

그들은 전부.

높게 우뚝 선 투석기를 붙들고 필사적으로 타고 올랐던 것이다.

마치 물에 빠진 이들이, 숨을 쉬 기 위해서 위로, 또 위로 헤엄치듯 이.

“쟤, 쟤네, 전부 죽은 겁니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얼음 처럼 굳어 있는 민머리 간부에게 수하 하나가 슬며시 다가와 물었다.

“•••그래, X발.”

그가 자신의 민머리를 거칠게 긁 으며 답했다.

“뭔진 몰라도, 얘네 전부 뒈졌-.”

수하를 돌아본 간부의 눈이 찢어 지둣 커졌다.

골목의 어둠 속에서도 내공을 지 닌 그의 안력은, 수하의 얼굴이 시 뻴겋게 달아오른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너, 너…‘?”

그 피부에 작은 수포들이 스멀스 멀 올라오기 시작하는 모습이, 너 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왜 그러십니까…?”

멍청한 표정으로 묻던 수하가 갑 자기 콜록거리면서 기침을 했다.

“어? 이거 갑자기 목이 왜…?”

그러자.

주변 다른 수하들도 연신 콜록거 리며 기침을 해 대기 시작했다.

“어, 숨이…, 숨이 쉬기 힘들-.”

“켈록, 켈록-!”

이미 죽어 있던 타 조직원들의 시신을 살피던 외눈 간부가, 그 기 침 소리에 수하들을 돌아보고는 잇 소리를 냈다.

“이건...!”

무언가 눈치챈 것일까.

[당장 도망치게!]

그렇게 짧은 전음만을 남기고.

외눈 간부가 뒤를 돌아보지도 않 고,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혼자, 어딜 가는 건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도, 도와주….”

홀로 남은 민머리 간부의 옷깃을 수하가 잡았다.

“수, 숨이-, 꺼억-.”

꺼억거리는 특유의 소리.

바로 직전에, 타 조직의 조직원 에게서 들었던 그 소리를 벌써 잊 을 리가 없었다.

“X발!”

반사적으로 그 손길을 뿌리친 간 부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꺼억, 꺼억.”

수하들은 누구랄 것 없이, 꺼억 거리며 몸을 휘청이고 있었고.

누구랄 것 없이, 드러난 피부 전 체가 수포로 뒤덮여 있었다.

“X발, X발!”

그는 수하들에게서 뒷걸음질을 치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전력으 로 달렸다.

투석기 진지, 지하 대피 공간.

지하 대피 공간에 몸을 숨긴 일 번 포반의 인원들은 무사했다.

“•••위에서 열어 달라며, 문을 긁 어 대던 소리가 끝났습니다.”

사다리 위로 단단히 막힌 문을 감시하던 수하의 보고에, 포반장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수하는 불안한 둣 눈을 굴리며, 연신 밀폐된 문을 바라보면서 물었 다.

“•••적들이 다 죽은 겁니까?”

“적어도, 이 근처는 확실히 다 죽었겠지.”

각 포반들은, 적들을 가장 깊숙 한 곳까지 유인하기 위해서 마지막 의 마지막까지 시간을 끌었다.

그러고는 미리 마련된 각각의 지 하 대피소로 후퇴했었다.

“…이 문은 안전하겠지요?”

불안감에 휩싸여 질문을 그치지 않는 수하의 모습에, 포반장이 한 숨을 쉬며 손을 내저었다.

“이곳은 내가 지킬 터이니, 너는 들어가서 쉬어라.”

“예, 예. 감사합니다…!”

도끼를 쥔 포반장이 무거운 표정 으로 사다리 근처의 보급 상자 위 에 앉았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위, 단단히 밀폐된 문을 향했다.

필시, 위에는 지옥이 펼쳐져 있 으리라.

그들은 깊숙한 곳까지 적들을 끌 어들여, 대전과를 올리는 데 혁혁 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지하 대피 공간에는 환호 성이 나오기는커녕.

그저 불안과 공포가 뒤섞인 적막 만이 가득했다.

누군가 지하에 쌓인 먼지 때문에 기침이라도 하면, 모두가 발작이라 도 하듯 놀라기 일쑤였다.

포반장은 땀으로 흥건해, 자꾸 손에서 미끄러지는 도끼를 단단히 쥐며.

지상에 생지옥을 펼친 독의 이름 을 되뇌었다.

‘•••무면무명 (無®無命).’

“무면무명이라고?”

오룡지파의 외눈 간부와 함께 전 력으로 달리던 민머리 간부가 되물 었다.

[전음을 사용하게! 호흡을 아껴 야 하네!]

민머리 간부가 신법과 함께 구사 하기엔 모자란 전음 실력에, 몇 번 을 실패하다가 간신히 전음을 전달 하는 데 성공했다.

[대체 무면무명이 무엇이란 말인 가?]

[독(毒)일세. 사천당가의 대량 살 상 병기.]

그 말에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이, 민머리의 간부가 고개를 흔들 었다.

[아니, 대체 무슨 독이 아무 색도 없고 냄새도 없이-.]

[딱 한 번.]

외눈 동료의 전음이 그의 전음을 끊었다.

[북부 전쟁 때 북방 민족의 군영 에 사용된 것을 직접 본 적이 있었 네.]

동료 간부의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에 깃든 것은, 분명 선연한 공포 의 색이었다.

[온몸에는 수포가 가득 올라, 부

모도 그 얼굴을 못 알아보니 무면 (無面)이요. 뭍에 건져 올린 생선처 럼 반드시 질식해 죽으니, 무명(無 命) 이라.]

민머리 간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외눈의 간부가 치를 떨었다.

수하들의 얼굴에 부풀며 올라오 던 수포와 꺼억거리던 소리가, 그 날 전장에서 보았던 광경과 겹쳐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

[우, 우리는? 우리는 살 수 있는 가?]

그들이 달려 내려가는 길.

그 모든 골목과 길목마다 시체가 그득했다.

[•••숨을 너무 들이마시지만 말게. 내공이 몸에 흐르는 한, 버틸 수는 있을 걸세.]

그 말에 민머리 간부가 어처구니 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공이 몸에 흘러야 하는데, 호 홉을 줄이라고…?]

몸에 내력이 쉬지 않고 흐르려 면, 안정적인 호흡은 필수였다.

호홉을 줄이면서 내공을 순환시 키라는 말은, 물속에서 숨을 쉬라 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아는 대처법은 그게 전 부일세.]

“X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독을 살포 한 것일까.

민머리 간부는 달리면서, 공포에 젖은 눈으로 좌우 사방을 살폈지만.

무색무취의 독을 알아볼 방법 따 윈 그들에겐 없었다.

연신 흐르는 식은땀이 식으며, 몸이 간지러운 것일까.

아니면, 중독되어 수포가 올라오 는 것일까.

호흡을 아끼느라, 숨쉬기가 불편 한 것일까.

아니면, 중독 증상으로 호흡이 어려워지는 것일까.

사방 천지에 나자빠진,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암흑가 조직원들의 시체만 가득할 뿐.

“X발!”

계곡 위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자신의 숨통을 조여 오는 것 같았 다.

[저기! 중류의 광장일세!]

외눈의 간부가 가리킨 곳은, 그

들이 지나쳐 왔던 계곡 중류의 광 장이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먼저 광장으로 뛰어들었다.

[마가육림의 애들은…?!]

뒤따라 광장으로 들어온 민머리 간부가 말을 잊었다.

광장 곳곳에 시체들이 즐비했다.

방금까지 전장의 한복판이었던 그 아수라장에는 죽음을 닮은 적막 (寂휴)만이 가득했다.

적의 전진기지를 점령하고 좋아 하던 마가육림은 이미 전멸한 뒤였 다.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이 녀석 들은 마가육림의 정예들이었다고! 전부 무인들이란 말일세…!”

민머리 간부가 머리를 감싸 쥐 며, 육성으로 외쳤다.

“우리가 아직 살아 있는데, 마가 육림의 무인들이 한꺼번에 독에 당 했을 리가…?!”

시신의 흔적을 살피던 외눈의 간 부가 고개를 혼들었다.

[이들은 무면무명에 중독되었지

만, 독에 죽은 것이 아닐세.]

“뭐라고…?”

민머리 간부가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 다.

차르릉.

차르르르릉.

저편에서부터 들려오는 바닥을 긁는 쇠사슬 소리가 광장의 적막을 깨트렸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전부 암기에 죽었네.]

외눈 동료의 전음이 끝나기 무섭 게, 광장 곳곳에서 시커먼 옷을 입 은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쉬익-, 쉬익-.

그들의 얼굴을 알아볼 방법은 없 었는데.

그들 모두가 누구랄 것 없이, 얼 굴에 시커먼 피독면올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쉬익-, 쉬익-.

피독면 사이로 들려오는 그들의 숨소리가, 마치 동상처럼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이 섬뜩하기가 짝이 없 었다.

그리고.

차르릉.

차르르릉.

두 자루의 낫에 연결된 사슬들을 바닥에 길게 끌며, 마지막에 모습 을 드러낸 것은.

“차마고도의 수급 수집가…!”

그는 피독면을 쓰고 있었지만.

애초에 얼굴을 알아본 것이 아니 었다.

사천당가의 독(毒).

마가육림의 흑도 무인들을 전멸 시킨 암기(暗器).

그리고 두 자루의 사슬낫.

낙양의 흑도방파 소속의 간부마 저 알아볼 수밖에 없는, 그의 이름 은, 당백이며.

사신(死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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