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82화 (282/350)

제7편 다음 작전(作戰)

이공자 측의 전력 모두가 바득바 득 죄악계곡을 기어 올라가고 있었 다.

“가라! 머릿수로라도 밀어붙여!”

떨어지는 바위들을 뚫고.

“끄아악-!”

쏟아지는 화살 비를 지나.

“내 다리가, 내 다리가…?!”

연노의 철시 세례까지 견디면서.

그렇게 꾸역꾸역 위로 올라간 이 들을 기다리는 것은 곽 노인이 펼 친 유격전이었다.

마치, 밀림 깊은 곳에서 늪에라 도 빠진 것처럼.

밀려 올라가던 이들이 속절없이 빨려 들어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투석기를 제거하기 위해서, 흑도 무인들까지 투입했지만.

중류의 전황은 이전보다 오히려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들 생고생을 하는군.”

하지만 그 와중에는 ‘전진’과 ‘점

령’에 관심이 없는 부류도 있었다.

“살다 보니, 도심 한가운데서 유 격전을 다 보게 되는구먼.”

푸석푸석한 백발을 휘날리며, 킬 킬거리는 것은 선혈선단의 선장.

사해흉살이 었다.

다른 이들 앞에서는 피에 미친 광인(狂人)의 모습으로 명성이 자 자하지만.

겨우 그것뿐이었다면.

지옥 같은 남쪽 바다와 사패천이 라는 마굴(魔痛)에서 지금까지 살 아남지 못했으리라.

“선장님.”

그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반색 하며 휙 하고 돌아섰다.

“식별 끝났나?”

“예.”

부관이 살기 띤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어 한 지점을 가 리켰다.

“저쪽과 저쪽. 그리고 저 큰 건 물의 위쪽.”

벽을 넘은 고수인 사해흉살은 어 둠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부관이 짚어 준 지점을 확인했다.

“깃발을 들고 있는 놈들이군.”

“그렇습니다.”

그들은 교묘하게 숨어, 열심히 각양각색의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위로 현장의 상황을 전달하고, 명을 받아 현장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신호수들인 것 같습니다.”

“과연.”

사해흉살이 입을 길게 찢으며 미 소를 지었다.

“그것이 이 개 같은 지형에서 병 력들을 한 몸처럼 움직이는 비결이 었구먼.”

그러면서 내민 사해흉살의 손에 길고 묵직한 쇳덩이가 올려졌다.

장전이 완료된 수석장총(慘石長 銃)이었다.

견착, 조준, 그리고 발사가 거의 한 호홉에 이루어졌다.

타앙-!

귀청을 찢는 듯한 화기의 격발음 이 울려 퍼졌다.

“적중입니다!”

멀리.

매캐한 흑색 화약의 연기 너머 로, 깃발을 들고 있던 연소현 측

신호수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모습 이 보였다.

“좋아!”

사해흉살은 수하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빈총을 대충 뒤로 집어 던 졌다.

“홋차!”

그의 전용 장전수가 익숙하게, 아무렇게나 뒤로 던진 총을 받아 들었다.

사해흉살의 손에는 장전을 끝마 친 새 장총이 쥐어졌다.

“ 얘들아.”

사해흉살은 그 총을 위로 들어 보이며, 광소를 터트렸다.

“이제, 사냥 시작이다.”

선혈선단.

그들은 전진과 점령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전공〈戰功)과 보상에는 무척 관 심이 많았다.

“팔(八)번 신호수가 당했습니다!”

“일(一)번과 이(三)번 신호수도 침묵!”

“적의 저격입니다!”

남만의 와룡, 곽 노인이 혀를 찼 다.

“적 중에 눈치가 제법 빠른 놈이 있구먼.”

이렇게 되면, 지금처럼 정교하게 맞아 돌아가는 전술은 사용하기가 어려워진다.

“대충, 당장에는 어떻게든 현장

의 자체적인 판단으로 돌아가게 할 수는 있지만.”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겁니 다.”

폭죽이든 신호 화살이든, 뭐든.

신호를 줄 대체 수단은 많지만, 정교함과 세밀함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였다.

“어쩌시겠습니까?”

군사들의 물음에 곽 노인은 빠르 게 결단을 내렸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재미를 봤 다.”

보통의 군사였다면, 어떻게든 자 신의 공을 더 세우기 위해서 시간 을 끌어 보려 했을 터였지만.

그런 영광 따위엔 초연한 지 오 래인 곽 노인이었다.

“신호를 보내라.”

멀리, 그녀의 시선이 지금도 꾸 역꾸역 올라오는 암흑가의 인원들 에게 향했다.

이미, 계곡 곳곳에 피가 개울이 되어 흐를 정도로 적을 죽였지만.

아직도, 그것보다도 더 많은 적 군이 밀물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유격전은 일시적으로 중단한다. 이제 ‘다음 작전’으로 넘어갈 것이 야.”

그녀의 말에 군사들의 얼굴에 아 연한 표정이 어렸다.

“다음 작전이라면…?!”

곽 노인의 결단은 확고했다.

“전군에 신호를 보내라.”

곧, 죄악계곡의 하늘에 두 번의 보랏빛 폭죽이 터졌다.

낙양검가, 기관 본영.

기관장실.

기관장실의 대형 금고가 부서져 개방되어 있고, 그 안에서는 대공 자 연소현이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 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평소와는 다 르게 연소현이 서류를 읽어 나가는 속도가 느릿했다.

“대공자님.”

입구를 지키던 특임대원이 안으 로 들어와서, 고개를 깊이 숙여 고 하는 태도는 정중했다.

그들, 특임대원에게서는 더 이상 ‘무검자’를 향한 멸시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원로원에서 방문객이 와서, 대 공자님을 뵙길 청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특임대원의 시선에는, 대 공자 연소현을 향한 외경(뽀敬)마 저 깃들어 있었다.

“들라 하라.”

대형 금고 안에서, 연소현은 뒤 를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지만.

“예, 대공자님의 명을 받들겠습 니다.”

특임대원은 그런 연소현의 뒷모 습을 향해 깊이 손을 모아 예를 차 리고, 뒷걸음질로 밖으로 나갔다.

그것은 오늘, 이곳에서.

기관 정화 작전에 참여했던 이들 이라면.

당연하다 할 수 있는 태도의 변 화였다.

“이거. 섭섭하구려, 대공자.”

세월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한 목 소리.

“칩거를 끝낸 뒤에,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다가. 이렇게 손 이 필요할 때가 되어서야 찾는 것 이오?”

차르릉.

지팡이에 매달린 장식들이 내는 맑은 소리는, 분명 연소현의 기억 에 있는 소리였다.

“•••원로원주께서 직접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원로원주를 향해 돌아보는 연소 현의 시선은 사뭇 부드러웠다.

“홀홀. 당연하지.”

이전에 장로원주를 서늘한 기백 으로 쫓아냈던 그 원로원주와 같은 인물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노인의 태도는 호의적이었다.

“장차 이 가문을 이끌어 가야 할 분께서 원로원에 도움을 요청하셨 으니. 이 늙은이가 어찌 가만히 있 을 수 있겠소?”

연소현은 그저, 과거에 관련 직 종에 몸을 담았었던 원로 몇몇의 도움과 조언을 요청한 것이지만.

원로원주가 직접 나선 것이다.

“•••원로원주께서 직접 나서 주신 것은 너무도 감사한 일이지만.”

그런 노인을 미소와 함께 바라보 던, 연소현이 걱정에 낯빛을 굳혔 다.

“•••이렇게 직접 기관의 개편을 진두지휘하시면, 뒤에서 말이 많이 나올 겁니다.”

원로원주가 직접 팔을 걷어붙이 고 나서 준다면야, 기관의 개편이 기대 이상으로 빨리 끝날 수 있었 다.

하지만, 그것은 가법상 명백히 금하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연소현의 우려에도, 원로원주의 표정은 태평했다.

“뒤에서 말이 나오든, 앞에서 떠 들든, 짖는 개는 무섭지 않소.”

원로원주가 가볍게 웃었다.

“얼마든지 짖어 보라지.”

“•••원로원의 존립이 위태로울 수 도 있습니다. 원로원주.”

“원로원의 존립?”

원로원주는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딴 건 이제 상관없소이다, 대 공자.”

“•••원로원주.”

연소현의 표정이 순간 아연할 정 도로 원로원주의 발언은 과격했다.

“대공자. 지금의 원로원이 가진 핵심 기능이 무엇이오?”

그 질문 하나로, 연소현은 원로 원주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전부 깨 달았다.

“•••원로원은 최고운영회의에 걸 맞은 최고위원을 선정하는 것으로, 그동안 가주가 부재한 검가를 지탱 하고 있었지요.”

“그렇소.”

원로원주가 연소현의 말을 받았 다.

“하지만 가까운 미래에 최고운영 회의가 필요 없어질 터이니. 한낱 원로원의 존립에 매달릴 이유가 무 엇이 있겠소?”

연소현이 고개를 돌려, 자신의 표정을 숨겼다.

원로원주의 말은, 곧.

연소현이 검가의 소가주가 되고, 그가 새 가주가 될 것을, 믿어 의 심하지 않는다는 의미였으니까.

“•••나의 그 오랜 칩거를 원망하 지는 않는 것입니까?”

한참 뜸을 들이다가 새어 나오둣 나온 연소현의 말에, 원로원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천살성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 늙은이도 들은 바가 있어 알고 있 소, 대공자.”

그녀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보이진 않지만, 저 너머의 죄악 계곡에서는 지금도 어마어마한 피 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연소현이 칩거를 끝낸,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피가 흘렀고, 앞으로는 더 많은 피가 흐를 것이 다.

얼마나 더 많은 피가 흘러야 할 지.

감히,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운명(運命)이니, 뭐니. 이 나이 를 먹고도, 세상에는 모르는 것이 아직도 더 많으니.”

원로원주의 시선이 연소현의 뒷 모습에 닿았다.

“모르는 일은 함부로 논하지 않 겠소. 하지만.”

노인의 시선은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 늙은이는, 아니.”

노인이 말을 고쳤다.

“우리 원로원의 원로 전원은.”

노인은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 을 담아, 연소현에게 전했다.

“대공자가 칩거를 끝내고, 돌아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오.”

들여다보던, 서류의 글씨가 흐려 졌다.

서류를 쥔 연소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괜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이 끝없는 호의와 신뢰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자신은 어떻게 보답해야 하는 것 인가.

“흘흘.”

연소현과 마찬가지로 눈시울이 붉어졌던 원로원주가 슬쩍 눈가를 문지르며, 말을 돌렸다.

“그래. 그래서, 대공자의 조사는 성과가 있소? 의문은 좀 풀렸고?”

“•••어느 정도는.”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 이 들여다보고 있던 서류 뭉치를 내려놓았다.

기관장의 대형 금고에서 가장 깊 숙한 곳에 엄중히 보관되던 서류들 이었다.

“진전이 있었습니다.”

원로원주의 시선이 각종 기밀 도 장이 이리저리 찍힌 서류들의 표제 (標題)를 향했다.

〈가주 암습 사건 직전과 직후에 대한 현장 보고서〉

〈암습 현장에 있었던 요원들의 증언을 토대로 재성립한 당시 상황 과 풀리지 않는 의문점〉

〈당시 현장 요원들에 대한 심층 정신 감정 보고서〉

“…그거 잘되었소.”

딱, 거기까지만.

원로원주는 더 이상 거기에 대해 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것은 대공자가 직접 말을 꺼내 기 전에는, 원로원주조차 감히 거 론해선 안 될 정도로 민감한 문제

였다.

“사공자 쪽은?”

원로원주가 먼저 말을 돌렸다.

“대공자께서 이곳에 집중하는 모 습을 보아하니, 어련히 대비를 해 두셨겠지만. 걱정되지는 않으시오?”

“•••다들, 그 이야기는 떼놓지 않 고 하는군요.”

그렇게 말하며 연소현이 피식 웃 자, 원로원주가 어깨를 으쓱였다.

“사공자가 주변에서 천재니 어쩌 니 해도, 결국 아직은 아이가 아니 오?”

“전혀.”

그것은 말뿐이 아니었다.

“걱정 없습니다.”

“그래도-.”

원로원주의 말을 끊은 것은 창 밖, 저 멀리에서부터 들려온 소리 였다.

삐이이익-.

가느다란 보랏빛 불꽃이 연신 하 늘 높이 치솟더니, 이내 퍼엉 하고 터졌다.

“신호 폭죽인가?”

“그렇소.”

원로원주의 말에 연소현이 고개 를 끄덕였다.

“다음 작전으로 넘어갔군.”

그렇게 말하는 연소현의 표정에 는 걱정이나 우려라고는 조금도 없 었다.

연소현은 진심으로, 사공자와 그 가 맡은 죄악계곡에 대해선 조금도 걱정을 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오직, 연소현만이 기억하는 회귀 전의 역사에서.

사업 분야에서는 처절하게 실패 를 맛보았고, 다시는 재기하지 못 했던 사공자이지만.

‘검가의 멸망기(滅亡期)에 있었던 극한의 내전.’

연소현이 자신의 기억을 되짚었 다.

‘그 내전에서 모두를 공포에 떨 게 했던 것이 연비, 그 녀석과 그 녀석의 수하들이었지.’

연소현의 시선이 담담하게 연신 쏘아 올려지고 있는 신호 폭죽들을 바라보았다.

죄악의 골짜기.

“신호 확인.”

“최종 절차 진행 중.”

“풍향, 풍량 확인.”

“이상 무.”

“위치 확인.”

“이상 무.”

“아군 및 민간인 확인.”

“이상 무.”

그들의 말소리는 쐐액거리는 숨 소리에 섞여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지근거리에서도 말과 함께 수신호를 동반하고 있었 다.

“아아'. 이건 항상, 머리 모양이 다 망가져서 싫단 말이지.”

당예 린.

사공자의 최측근이자, 군사인 그 녀가 한숨을 쉬며 수하가 건네준 물건을 받아 들었다.

“최종 절차 확인, 완료되었습니

다.”

“그래. 알겠다.”

그 물건, 피독면(避毒面)을 뒤집 어쓰자 그녀의 말소리도 마찬가지 로 뭉개졌다.

하지만 그 자리의 모두는, 그녀 의 수신호를 명확하게 인지했다.

“작전 개시.”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원 을 그리고는 계곡의 아래쪽을 가리 켰다.

“하독(下毒)을 시작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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