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79화 (279/350)

제4편 만일(萬一)의 경우

죄악계곡 정벌 성공 직후. 대공자 연소현 측 지휘부.

밖에서는 지금, 승전을 축하하는 분위기가 한창이었지만.

지휘부의 분위기는 달랐다.

“큰형님. 이런 햇빛도 들지 않는 지하에서, 이게 다 무슨 일입니 까…?”

그렇게 묻는 사공자 연비의 시선 은, 지하 공간을 바삐 단장하는 원 각정의 하녀들에게로 향해 있었다.

“보면 모르느냐?”

연소현은 하녀들에게 손짓으로 거대한 전술 지도의 위치를 지정해 주며, 사공자 연비에게 답했다.

“새 지휘실이다.”

“아니, 그것은 소제(小弟) 또한 단박에 알겠습니다만….”

사공자 연비가 말끝을 흐리며 자 신의 시선을 슬쩍 뒤쪽으로 향했다.

남만의 와룡 곽 노인, 전쟁자문 단의 노군사, 책사 당예린, 둥둥.

방금, 전투를 끝내고 지친 기색 이 역력한 수뇌부였다.

그들은 감히 대공자에게 직접 질 문을 던지지는 못하고, 애꿎은 사 공자에게 간절한 시선을 보내고 있 었다.

“큰형님. 방금 죄악계곡을 정벌 한 참입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사공자는 그 들을 대신해서 연소현에게 말했다.

“굳이 지금 당장. 이렇게 지하에 새 지휘실까지 준비하고, 단장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녀들에게 세세한 부분까지 손 수 지시를 하던 연소현은.

“새 지휘실의 단장?”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시선 을 사공자에게 던졌다.

“겨우 지휘실을 단장하는데, 너 희를 전부 불렀겠느냐?”

연소현이 군사와 책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너희는 당장, 다양한 상황을 가

정하여, 죄악계곡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들을 짜기 시작해라.”

처음엔 피곤한 표정으로 어슬렁 거리며, 전술 지도 근처로 모여들 었던 군사와 책사들이었지만.

“아니, 방어진지를 그렇게 구축 하면 측방(側方)이 노출되지 않 나‘?”

“이 측방을 비워 둔 이유는, 적 이 밀고 들어오면, 자연스러운 포 위 진형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초 적인 군략(軍略)의 웅용이지요.”

“기초적인 군략의 응용? 웃기고 있네. 머릿속과 현실은 다르다. 제

대로 된 실전을 치러보지도 않은 애송이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내가 나이는 적다고 해도, 거쳐 온 수라장은 적지 않아욧!”

“적어도 전투가 아니라, 제대로 된 전쟁을 치르고 나서 그런 소리 를 해라.”

금방 불이 붙어서, 시퍼렇게 날 을 세운 언쟁을 주고받으며, 전략 을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큰형님. 아무리 옛말에 유비 무환(有備無患)이라지만. 이렇게까 지 준비를 철저히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런 그들을 어이가 없는 눈으로 지켜보던 사공자 연비의 질문이었 다.

“큰형님께서는 마치, 이공자 측 이 대형 사고라도 칠 것을 확신하 시는 듯합니다.”

과거, 다선랑과 사천의 투자가들 그리고 아미파가 도착하기 전에 있 었던 회의 자리에서.

연소현의 회의에 참석했던 이들 은 이공자의 무력 사용에 대해 예 측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암살이나, 무력 도발 정도의 수준을 논했던 것이었

다.

“이공자 측이 전면전(全面戰)이 나 그에 준하는 일이라도 벌일 것 이라는 예측입니까?”

지나치게 극단적인 가정.

상식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분 명 연소현의 행동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미래를 읽어 내듯 이 예측한다 해도, 모든 경우를 알 수는 없다.”

멀찍이서 군사와 책사들의 논쟁 을 지켜보는 연소현의 시선은, 어 딘가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판도를 움직여 적의 수를 제한 하고. 그 안에서 능력이 닿는 한, 만(萬) 가지 경우를 대비해야만 한 다.”

그는 무엇을 보는가.

어디까지 바라보는가.

대붕이 내려다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

연소현은 마치 사공자 연비를 가 르침을 내리듯, 조곤조곤하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중에 일이 터졌을 때. 만 가지 준비 중, 단 열(十) 개만

써먹을 수 있게 된다 해도.”

연소현의 말투는 조곤조곤했지 만,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 열 가지 준비가. 패전(敗戰) 으로 끝날 일에서 승기를 가져올 것이다.”

“•••예, 큰형님.”

연소현의 대비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全) 병력에게 휴식 중에도 무장을 풀지 않도록 명을 전달해라. 언제든 전투를 시작할 수 있도록.”

“그러면 분명 불만이 터져 나올 겁니다.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

없는-.”

연소현은 사공자의 말을 듣지 못 한 것처럼, 명령을 이었다.

“그리고 석식(夕食) 이후에, 교대 로 전 병력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 시한다.”

“교육 말입니까…?”

“군사들과 책사들 그리고 전쟁자 문단의 무사들을 동원해라.”

어느새, 연소현의 말은 가르침이 아니라 명령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명령은 감히 사공자가 토를 달 수 없을 정도로 지엄했다.

“그들을 통해 오늘 있었던 전투 에 대한 사후 검토 전달과 지금 이 자리에서 연구되고 있는 방어 전략 을 전 병력에게 교육해라.”

“예, 큰형님.”

그 순간은 그렇게 대답은 했지 만.

이후, 황도에 대한 회의에서도.

“•••물리적인 공격을 감행할 가능 성은?”

강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되면, 이공자 측이 너무

큰 명분을 모두에게 주게 되지 않 습니까? 사방에서 물어뜯을 겁니 다.”

사공자가 팔짱을 꼈다.

“그렇다면, 역시 정치적 공세인 가….”

“아무래도 그쪽이겠지요. ”

결국, 그날의 사공자는 연소현의 안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완벽하게.

지금의 사공자는 이해했다.

“•••저쪽에 아직까지 우리가 남아 있었다면.”

연소현이 새로 마련했던 지하 지 휘실.

지금은 연합 사령부라 명명된 장 소에서, 작은 창으로 밖의 상황을 내다보던 사공자 측 문사(文士)들 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지금쯤 전부, 깔려 죽었겠지.”

쿠르르릉—.

저 멀리 하류에 위치한 합동 사 업 본부 건물이 굉음과 함께 무너 져 내리고 있었다.

“•••포격이라니.”

“이공자 놈들이 미친놈들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하지만.

그날, 연소현이 마련해 둔 새 지 휘실은 상류에 있었고, 심지어 지 하였기에.

그들은 포격에서 안전했다.

“하류와 중류에 배치되었던 병력

이 지시에 따라 후퇴 중입니다!”

“산개(散開)는?! 산개는 충분히 하고 있겠지?!”

“전 병력 산개 완료! 전쟁자문단 의 무사들이 현장에서 상황을 통제 중입니다!”

“도착한 병력은 상류에서 재집결 중!”

어지러이 오가는 보고와 지시의 해일 속에서, 사공자의 곁에 선 중 년 여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할 일이 태산같이 쌓여 있는데, 이 미친놈들이…!”

그 과격한 말투의 주인은 다름

아닌 홍독지주(紅毒期!味)였다.

연소현의 행정동을 책임지는 그 녀는 보고를 위해서 죄악계곡을 방 문했다가 그만, 발이 묶인 것이다.

“대공자께서 보고하러 오라고 하 셔서 이 오밤중에 눈곱도 못 떼고 달려왔더니! 정작 대공자님은 본가 에 가셨다고 하고…!”

긴장감이 없는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의 말투는 천연덕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말이다.”

생각에 잠겨 있던, 사공자가 그 런 그녀에게 말했다.

“이 상황에 그대라는 전력이 본 가 내에 있었다면, 큰 낭비가 되었 을 것이다.”

홍독지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죠.”

그녀는 연소현이 자신의 행정동 을 맡길 정도로 행정에 뛰어났지만.

행정은 그녀의 ‘전문 분야’가 아 니었다.

그런, 그녀를 이 시각에 죄악계 곡으로 호출한 연소현의 행동이 단 순히 실수나 우연일까.

“만약에 말이다.”

“만약에요?”

사공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만약에.”

그는 어지럽게 말들이 배치되고 있는 전략지도를 바라보며, 그녀에 게 말했다.

“우리가 방어 전략을 미리 짜 놓 고, 교육까지 하고. 병력들에게 언 제든 전투를 할 수 있도록 대기를 시켜 놓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굳이 그것을 말해서 무엇 하나 요? 전멸(全滅)이죠.”

홍독지주가 어깨를 으쓱이며, 그 들의 사업 본부가 위치했던 방향을 가리켰다.

“보나 마나, 지금쯤. 사령부 전체 가 저기 깔려 있을 터인데.”

사공자를 포함한, 경지가 높은 이들이나 운이 좋은 이들은 목숨을 건졌을지언정.

사령부의 기능은 마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말이다.”

사공자 연비의 말은 끝나지 않았 다.

“우리가 죄악계곡을 이렇게 빠르 게 정벌하지 않았다면, 어땠겠느 냐?”

“ 어휴.”

홍독지주는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랬으면, 지금쯤. 위아래, 양쪽 으로 들어오는 적들을 상대해야겠 지요.”

포격에서 안전한 상류에서 재집 결해서, 전열을 가다듬는 여유 따 위는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사공자의 말이 이어졌다.

“만약, 암천존자가 이전에 한번 죄악계곡을 청소해 두지 않았다면 어땠겠느냐?”

낙양검가 모두의 시선이, 내원의 책값 사건과 칩거해 있던 대공자의 움직임에 쏠린 사이.

암천존자는 죄악계곡을 정리했었 다.

“그렇다면….”

홍독지주가 골몰히 생각하더니, 신중하게 답했다.

“…아직도, 죄악계곡의 정벌전이

이어지고 있었지 않을까요?”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아니면, 아예 정벌할 시도조차 못 했거나.”

삼오통방, 혹강패, 백골파.

그들이 일전에 죄악계곡에서 정 벌한 암흑가의 조직들은, 암천존자 의 청소 이후 새로 자리를 잡은 이 들이었고.

심지어 세 파로 쪼개져 자신들끼 리 경쟁 중이었기에.

그만큼 방어가 취약했다.

“그것도 아니면, 아직도 정벌을

위해서 준비 중이었겠지요….”

그녀는 그렇게 말끝을 흐렸다.

사공자가 단지 아무런 이유도 없 이.

그저 이 상황에서 ‘만약’이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 었다.

“만약, 우리가.”

그녀의 표정이 점차 변하는 것을 보면서.

사공자는 가정을 이어 나갔다.

“우리의 내부에 들끓던 세작(細 作)들을 정리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심지어.

내원에서 책값 사건이 벌어지기 도 전의 이야기였다.

만약, 지난겨울.

오랜만에 만났던 연소현이 사공 자와의 만남에서.

그에게 자신이 다시 움직일 것이 라는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그래서 사공자가 연소현을 돕기 위해, 전면적으로 조직을 재정비하 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공자 측과 삼공자 측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그 세 작들을 그냥 두었겠지요.”

그것이 세력이나 기반이랄 만한 것이 변변찮았던 사공자 측의 암묵 적인 합의였으니까.

“그렇다면. 그래서-.”

“그래서 우리가 그 세작들을 그 냥 두었다면.”

이제, 사공자의 연속된 질문에서 감을 잡은 홍독지주가 사공자의 말 을 대신했다.

“이공자 측은 지금쯤 우리의 움 직임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고.”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상 황에, 그녀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 다.

“그런 상황에서, 이공자 측이 지 금처럼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했 다면. 우리는….”

거기까지 말하고, 한차례 입을 다물었던 그녀가 어렵사리 다시 입 을 열었다.

“우리는….”

하지만 그녀는 거기까지밖에 말 을 하지 못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대신해서, 사공자가 가정을 이었다.

“•••그랬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을 것이야.”

사공자의 전력은, 전투라는 측면 에서 막강했지만.

그 특성상, 방어전에는 맞지가 않았다.

게다가, 상상도 못 했던 적의 무 력 기습이라면.

“영원히 재기(再起)는 불가능했 겠지.”

사공자는 속으로.

마지막 가정을 했다.

만약.

연소현이 세상으로 다시 나올 결 심을 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이 모든 것은.

가정에 불과한 이야기였지만.

사공자의 머릿속에서는 그 가정 속 이야기의 결말이 그림처럼 선명 하게 그려졌다.

“큰형님!”

아마도, 자신은 원각정 밖에서 그렇게 울부짖었으리라.

“놈들은 제 모든 것을 파괴했습 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 무공 하나 를 모르는 이들을 죽였습니다! 도 살했습니다!”

비정한 원각정의 담벼락을 향해.

얼굴을 보이지 않고, 대답도 없 는 큰형님을 향해, 그 비통함을 쏟 아 냈으리라.

“큰형님! 소제를 위해서 얼굴이 라도 한 번만 비쳐 주십시오! 큰형 님!”

하지만.

사공자의 입가에 미소가 새겨졌 다.

그것들은 전부 가정일 뿐.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달랐다.

“육인회 소속으로 확인된 적 병 력 확인! 현장에서는 지연전술로

대웅 중!”

“장갑마차를 통해 급파된 아군 병력이 후퇴하는 아군 병력의 후위 를 보호하는 데 성공! 교전 중입니 다!”

이 죄악계곡에 똬리를 튼 것은, 사공자의 최정예 전투 전력뿐이 아 니다.

“병력의 질은 아군이 우위에 있 다! 철저하게 그 점을 활용하라고 전해라!”

중앙관청의 관병, 전쟁자문단, 아 미파에서 합류한 무숭들, 원각정의 하녀단, 현월각, 낙양의 봄에 소속

된 젊은 협사들, 자애원의 정예 병 력, 둥둥.

연소현이 그러모으고, 연합군으 로 한데 묶은 전력은.

그야말로 막강했으니.

적들의 기습에 대한 대응은, 놀 라울 정도로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관측소로부터 보고!”

그리고, 그때.

사공자가 기다리던 보고가 들어 왔다.

“적의 포격 위치 파악 완료! 적

은 제삼부두(第三埋頭) 근처에 있 는 함대입니다!”

“각 포반에 파악된 적의 위치를 기반으로 측량된 제원(諸元)을 전 달해라!”

사령부의 옥상에서 깃발을 든 신 호수들이 정신없이 손을 움직였다.

“전(全) 포반, 대함(對艦) 사격 준비 완료!”

그것은.

연소현이 죄악계곡의 정벌을 위 해 준비했던, 공성(攻城)용 투석기 들이.

이제는 수성(守城)을 위한 전쟁

병기가 되는 순간이었다.

“전 포반에게, 임시 사령을 맡은 사공자가 지시한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공자 연비가 외쳤다.

“발포(發砲)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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