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78화 (278/350)

제3편 천연 요새(天然要寒)

죄악의 골짜기 중류.

박 포쾌.

중앙관청 치안별관 관병들의 지 휘를 맡은 그가 후배 포쾌에게 물 었다.

“야간 근무 편성은 끝냈나?”

“옙, 깔끔하게 끝냈습니다.”

한 바퀴 순찰을 돌고 관병 측 임

시 지휘부로 돌아온 후배 포쾌가 자리에 털썩 앉으며 말을 이었다.

“선배. 한 바퀴 돌아보니, 실감이 나더라고요.”

“뭐가?”

박 포쾌는 연초를 두 개 꺼내 물 고 유등으로 불을 붙인 후, 후배에 게 하나를 건네주었다.

지휘부는 야간 등화관제(燈火管 制) 중이었기에, 유등은 최소한만이 비치되어 있었다.

“어이쿠, 감사.”라고 하며 연초를 문 후배 포쾌가 연기를 즐기며 답 했다.

“우리가 정말 정벌된 죄악계곡에 주둔 중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 대답에 박 포쾌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신기한 일이지.”

죄악계곡의 악명은 단시간에 만 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짧게나마 어느 위정자들이 정리 를 시도한 역사는 있었지만, 결과 적으로 죄악계곡을 ‘정상화’하는 것 은 항상 실패해 왔다.

“선배, 소문은 들으셨습니까?”

“이곳이 선녀교단의 성지가 될

수도 있다는 소문 말이냐?”

“예, 그 소문 말입니다.”

덕분에 함께 주둔 증인 자애원의 중장무장단(重裝武裝團)은 지금 축 제 분위기가 따로 없었다.

이 지옥 같은 빈민가에 거주하는 주민들조차도, 덩달아 희망에 부푼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번엔, 진짜 가능할지도 모르 겠다. 죄악계곡을 진정으로 새로 태어나게 한다는 것이.”

“그러게요.”

후배 포쾌도 동의했다.

“그 검가의 대공자가 하는 일을 보고 있으면, 뭔가 낙양이 정말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더라 니까요.”

선배 포쾌는 좁은 창을 통해 계 곡을 내려다보았다.

전대 왕조 양식으로 건립된 석조 건물들은, 그 위로 빈민들의 증축 이 더해져, 숲과 같은 풍경을 만들 어 내고 있었다.

오늘처럼 달빛도 없는 밤이면.

그 혼란스럽고 무질서해 보이며, 심지어 공포가 느껴지던 풍경이, 어째서인지.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강인한 의지처럼 느껴졌다.

“•••희망, 이라는 건가.”

후배 포쾌가 감상에 젖은 그의 옆에 앉아 혼자 떠들고 있었다.

“•••계곡이 남향에다가 황하가 내 려다보이는 것까지. 아주 명당이라 니까요. 제대로 개발만 되면-.”

그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선배 포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났기 때문이었다.

“전령… 인가?”

후배 포쾌도 따라서 일어나 좁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사공자 측의 무인입니다!”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는지, 옥상 초소에서 번을 서던 관병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령 깃발을 등에 멘 이는 가파 른 골목을 헉헉거리면서도 잘도 뛰 어 올라오고 있었다.

“본인은 연합 사령부에서 왔소!”

연합 사령부는 소속이 서로 다른 이들을 묶어, 그 명령권을 일원화 한 대공자 측 지휘부였다.

“긴급 명령이오! 관병 측 지휘관 은 계시오?!”

이 시간에 긴급 명령이라고?

서로 의아한 시선을 교환한 뒤 박 포쾌가 밖으로 외쳤다.

“내가 관병의 지휘를 맡은 박 모 요! 대체 무슨 일이오?!”

전령은 급하긴 급했는지.

그의 신원을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고, 일단 외치기 시작했다.

“현월각으로부터, 황하 방향 부 두 쪽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어 확인 중이라는 정보가 들어왔소!”

“황하, 부두라고?”

계곡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 평화

롭기 짝이 없었고, 오늘따라 이웃 끼리 다투는 소리 하나 없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황하는 어 둠에 잠겨 있었고, 부두 쪽은 제대 로 보이질 않았다.

“정확히 어느 부두를 말하는 건 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오!”

전령이 두 손을 내저었다.

“연합 사령부에서는 전군에 현 시각부로 일급 경계 태세를 발령하 고, 각 지휘부는 전투준비를 하라 고 명했소!”

일급 경계 태세.

전투준비.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박 포쾌는 후배 포쾌에게 지시했다.

“당장, 전 병력에게 지시 하달 해!”

“옙”

후배 포쾌는 벗어 들었던 투구를 그대로 뒤집어쓰며, 지휘부 건물을 뛰쳐나갔다.

“..?!”

그러던 그 순간.

씨이잉-, 하고 무언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먼저였는지.

콰앙, 하고 천지가 뒤집히는 충 격이 먼저였는지.

멀리서 들려온 폭음이 먼저였는 지.

좁은 창틈으로, 황하 방향에서 뭔가가 번쩍인 것이 먼저였는지.

순간, 정신을 잃어버린 박 포쾌 는 구별할 수 없었다.

“…배! 선배!”

아스라이 후배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 좀 떠 보란 말입니다!”

녀석.

사내놈■이 우는 건가.

하면서, 혀를 차려던 박 포쾌가 눈을 번쩍 떴다.

“크윽…!”

정신을 차리자, 눈앞이 번쩍였다.

전신에서 격통이 치닫고 있음을 깨달았다.

갈비뼈가 부러졌기 때문인지, 아 니면 사방에 자욱한 먼지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는 건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대, 대체, 이게 무슨 상황-?!”

자욱한 먼지 사이로, 그가 방금 까지 있던 임시 지휘부 건물이 반 파된 것이 보였다.

“선배!”

정신을 잃었던 것은 순간이었던 것 같았다.

“끄아악-!”

“내 다리, 내 다리!”

주변은 관병들의 비명과 신음으 로 가득했다.

“대웅에 대한 지시를…!”

방금까지 깨끗했던 후배의 얼굴 은 흙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대응, 그렇지. 대웅….”

그 순간.

그렇게 되뇌며 어떻게든 몸을 일 으키려는 박 포쾌를 잡아 누르는 손길이 있었다.

“전원 엎드려! 엄폐하라!”

그를 누른 이는 깊은 내공이 담

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곧, 이파(三派)가 온다!”

이파라고?

콰르르릉-!

분노한 제석천(帝釋天)이 지상에 천둥과 번개를 던지기라도 하는 것 인가.

귀청을 찢는 듯한 굉음.

강인한 손길에 의해서 눌러지고 있음에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리는 지면에 사지가 제멋대로 튀 었다.

“으아아, 아아아!”

“어머니…! 어머니…!”

하늘에서는 비산했던 흙더미와 자갈들이 비처럼 쏟아지고, 관병들 은 혼란에 빠진 채 귀를 막고 비명 을 질러 댔다.

“정신 차려라! 이 멍청이들아!”

그 와중에서도, 박 포쾌를 누르 고 있는 이의 목소리가 너무도 선 명하게 들려왔다.

“이 동네는 사방이 석조 건물이 다! 제대로 엄폐만 하면 포탄에 직 격(直擊)당하지 않는 이상 괜찮단 말이다!”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이들이

어떻게든 석조 건물 뒤로 포복해 기어 들어갔다.

“직격? 엄폐?”

박 포쾌도 상황을 파악했다.

“지금 계곡이 포격을 당하고 있 는 겁니까?”

포탄 세례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용케 박 포쾌의 말을 알아들은 이 가 대답을 해 주었다.

“그래! 함포 사격이오! 포탄 낙 하 방향을 보아서는 대충 황하 부 두 쪽인 것 같소!”

이 상황에서 포탄의 낙하 방향까 지 확인했단 말인가.

새삼스럽게, 자신을 누르고- 보 호하고 있는 이에게 시선이 갔다.

허름한 옷에 여기저기 끼워 맞춘 것 같은 갑주.

하지만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 범 상찮은 검(劍).

“전쟁자문단의 무사…?”

“그렇소!”

박 포쾌의 말에 전쟁자문단의 무 사가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 다.

“이제 정신이 좀 드는 모양이 군!”

“이, 이럴 때가 아니지.”

전쟁자문단 무사의 말대로, 정신 을 차린 박 포쾌가 다시 몸을 일으 키려 했다.

“포격이라면, 산개 명령을 내려 야-!’’

“가만히 있으시오!”

그렇게 일어나려는 그의 몸을 전 쟁자문단의 무사가 다시 한번 내리 눌렀고, 그 순간 지근거리에 포탄 이 떨어졌다.

“산개 명령은 이미 내려 두었소! 걱정하지 말고, 그대는 그대로 누 워 있으시오!”

무사는 박 포쾌의 몸을 붙들고 엎드려 있는 후배 포쾌의 어깨를 잡으며 외쳤다.

“이곳의 지휘는 내가 맡을 터이 니, 이 지휘관을 당장 후방으로 옮 기시오!”

“후, 후방이 어딥니까?!”

얼빠진 물음에도 무사는 친절하 게 답을 해 주었다.

“당연히 계곡 상류가 후방이지! 정신 안 차리나?!”

“예, 예! 알겠습니다!”

후배 포쾌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친 듯이 박 포쾌의 갑주를 잡아 끌기 시작했다.

“그, 그만…! 내가 걸을 수 있-!”

“선배! 선배는 지금 머리가 터져 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습니다! 가 만히 좀 있으세요!”

내력을 모두 끌어내 그를 골목 사이로 잡아끌며, 외치는 후배 포 쾌의 목소리에 박 포쾌는 저항을 포기했다.

‘머리가 터졌다고?’

그러고 보니, 한쪽 시야가 붉게 물들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고.

머리에서 흘러내린 뜨뜻미지근한

액체가 자신의 얼굴을 지나 몸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두개골이 깨진 건가?’

“이쪽에 부상자다!”

“끌어! 머리 조심하고!”

근처의 몇몇이 달려들어 박 포쾌 를 붙잡아 함께 끌기 시작했다.

“모두 들어라!”

그런 박 포쾌의 귓가에 전쟁자문 단 무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포격이 끝나면, 일제히 후 방으로 후퇴하여 재결집한다! 결집 지점은...!”

전쟁자문단의 무사는 전 중원에 서 크고 작은 전투에 달통했다더니.

포격에 대해서도 능수능란한 대 처와 지시를 하고 있었다.

콰콰쾅!

목이 받쳐지고, 어깨가 붙들린 채 끌려가는 박 포쾌의 시야에 계 곡의 모습이 들어왔다.

콰콰쾅!

콰릉!

어둠 속에서 날아오는 포탄은 제 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포탄이 작렬할 때마다 지축이 혼 들리고.

곳곳에서 건물이 와르르 무너지 고.

불이 난 듯,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도 있었다.

낙양 한가운데서 포격이라니.

“미, 미친놈들一.”

박 포쾌는 정신을 잃었다.

황하 어느 부두 근처.

기습적으로 시작된 포격은 순조 롭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지켜보는 이공자 측의 얼굴은 그 리 밝지 못했다.

“지금 제대로 쏘고 있는 것이 맞 소?”

장로 하나가 해적 용병, 선혈선 단의 장교에게 물었다.

“별로, 큰 성과는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묘하게 날카로운 질문에 선혈선 단의 장교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쪽 동네의 기반이 전부 석조 건물인 것을, 우리가 어떻게 합니 까?”

장교는 육포 조각을 질겅질겅 씹 으며, 창밖으로 죄악계곡을 바라보 았다.

“석조 건물들에, 산개 명령도 즉 각 떨어졌는지, 다들 산개도 해 버 렸고.”

그의 날카로운 눈이 전황을 훑었 다.

“포격이 비는 시각에 맞추어 후 퇴까지 하는 것을 보니, 상류에서 재집결 중이려나.”

그는 흥미롭다는 듯이 콧소리를 냈다.

“저쪽에도 제대로 된 전쟁 전문 가들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 태연한 말투에 그를 상대하던 장로가 벌컥 화를 냈다.

“태평하기가 짝이 없군! 이러면 낙양 한가운데서 포격이라는 무리 수를 둔 이유가 없지 않나?!”

낙양검가나 낙양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의 살벌한 기운에

벌벌 떨었겠지만.

“적들의 사업 본부를 비롯해서, 미리 파악해 두었던 군사 및 사업 요충지들은 대부분 벌써 박살 냈지 않습니까?”

사패천의 해적 용병에게는 일말 의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상륙한 본대가 이제 슬슬 계곡 입구에 접근 중일 테니, 아쉬우시 면 가서 그 늙은 손이라도 좀 보태 시든가?”

“뭣이, 어쩌고 어째?!”

해적 용병 장교의 멱살을 틀어쥐 려는 장로의 움직임을 막은 것은,

하후 장로의 나직한 목소리였다.

“굳이 우리가 아니어도, 보탤 손 은 많지.”

그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창밖 으로 향했다.

“저건..?”

해적 용병 장교의 멱살을 잡으려 던 장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청난 수로군.”

창가에 다가온 장로들이 질린 듯 한 표정을 지었다.

“뭐 해?! 포격음 따위에 쫄았냐, 이 새끼들아?!”

각양각색의 통일되지 않은 복장.

손에 든 무기도 제각각.

수십의 인원이 골목을 빠져나오 자, 대로에는 이미 수백의 인원이 이동 중이었다.

“당장, 움직여!”

“딴 놈들에게 공을 전부 빼앗길 참이냐?!”

목청을 돋우어 외치는 이들의 목 소리가 묻힐 정도로 무수한 인원이 낙양 거리를 통과하고 있었다.

“X발, 어떤 새끼들이 불을 지른 거야?!”

“미친놈들! 적당히 털기만 하라 니까‘?!”

약탈에 방화, 살인.

그들이 지나가는 길에 있는 모든 상점들이 털렸고.

심지어 곳곳에서 상점을 지키는 경비들과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 다.

어느 대형 상점.

“관병은?! 어째서 관병들이 보이 지도 않는 것인가?!”

거대한 장식장을 방책(防W) 삼 아서 입구를 막고 있는 이들이 있 었다.

“X발!”

결사적으로 상점의 문을 막고 있 는 경비 무림인이 동료에게 외쳤다.

“암흑가 놈들인 거 같은데. 대체 어느 조직 놈들이야?!”

밖을 내다보고 돌아와서, 그와 함께 방책에 몸무게를 실어 막는 동료가 외쳤다.

“단지회(斷指會), 멸갑문(滅辨 門), 오룡지파(五龍支派), 낙양 산 해방('浴陽山海 M), 마가육림(馬家 7느林)•••!”

낙양 암혹가 조직의 이름을 줄줄 읊는 동료에게 경비 무림인이 악을 썼다.

“그놈들 중에 어디냐고?!”

동료가 마찬가지로 악을 썼다.

“전부란 말이다! 전부!”

경비 무림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전부라고…?”

그의 동료가 내력도 모자라, 전 신의 무게까지 실어 방책을 밀며 외쳤다.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것만 해도 그 정도란 말이다! 사실상 낙양 암 흑가의 전부가 쏟아져-!”

와장창!

반대편에서 얼마나 많은 암흑가 조직원들이 방책을 밀었는지, 무림 인 두 명이 그대로 방책에 깔려 목 숨을 잃었다.

“자, 전부 털어라!”

마치 지진을 피하는 쥐 떼처럼.

암혹가 조직원들이 우르르 상점 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조직원들의 일탈 행 동이 전체의 움직임에는 조금도 영 향이 없을 정도로.

그들의 수는 많았다.

낙양의 암흑가를 지배하는 조직 들의 정점.

육인회(7느人會).

그들이 내린 총동원령에, 낙양 전체의 암흑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죄악계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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