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편 색적(索敵)
기관 본영, 본관.
“•••이게.”
지휘무사 명의 명령에 따라, 내부 에 진입한 기관무사들의 입에서 자 신들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단, 두 사람이 한 일이란 말 인가.”
복도든, 어디든.
복잡하게 얽혀 있는 기관의 본관 내부, 시선이 미치는 그 모든 곳에 적들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아무리 검존께서 나서셨다지 만, 이건.”
“아니.”
몸을 숙여 시신을 살피던 기관무 사가 고개를 저었다.
“시신에 남은 흔적을 보게.”
그 말을 들은 이들은 어렵지 않 게,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검으로 인해 절명한 이가 절 반.”
“그렇다면, 나머지 절반은….”
“그렇지.”
처음에 흔적을 발견한 이가 시신 을 가리켰다.
그 두꺼운 기관의 흉갑을 뒤틀듯 이 박살 내 버리고.
그 가슴팍에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틀림없는 일권(一奉)의 혼적 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검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사망한 이들이 대략 절반 이 되어 보였다.
“절반은 대공자님께서 손을 쓰신
것이야.”
충격이 좌중을 휩쓸었다.
“그런…‘?!”
“대공자께서 벽을 넘으셨단 말인 가?”
대외적으로.
낙양검가 역사상 가장 빠르게 벽 을 넘었다고 알려진 것은, 이공녀.
천의무봉, 연서린이다.
“•••이공녀님이 벽을 넘은 것은 이십 대에 접어드신 이후의 일이 아니었나?”
“대공자께서는 올해 겨우 십칠
세란 말일세…!”
“ 게다가….”
처음 흔적을 살폈던 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검시(檢屍) 전문 훈련을 받았던 그는, 현장에서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것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이 흔적들은, 단순히 대공자 께서 벽을 넘었다는 것만으로도, 설명이 되질 않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들여다보고 있는 시신은.
입은 갑옷이나 빈 검집 따위를 볼
때, 틀림없는 기관의 사령무사였다.
“•••도대체.”
대공자가 벽을 넘었다고 하더라 도, 이미 벽에 올라 완숙의 경지에 올랐을 사령무사를 때려죽이다니?
“대공자님은-.”
그가 말을 이어 나가려 했을 때, 그들 전원에게 전음이 날아들었다.
[지휘무사 명이다.]
그것은 임시로 현장 지휘권을 부 여받은 명이었다.
[본관에 투입된 형제들은 임무에 서두르기 바란다.]
전음을 들은 기관의 무사들은 군 말 하나 없이 즉시 임무를 시작했 다.
“대외(對外)든, 대내(對內)든 상 관없어! 정보에 관련된 모든 공간 은 완전히 봉(封)해라!”
그들은 가져온 종이와 풀을 꺼 내, 기관의 정보가 보관되고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모든 장소를 봉인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누구든 어떤 방법으로든, 기관이 보관 중인 정보에 접근하려면.
종이를 훼손할 수밖에 없게 만드
는 작업이었다.
[•••앞서도 말했듯. 이는 우리 기 관이 수습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할 수 있게 하는 ‘배려’다.]
배려, 라는 단어가 나온 이후.
다음 전음까지, 아주 잠시의 간 극이 있었다.
[•••전원,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도 록. 이상.]
기관 본영.
본관 최상층, 기관장실.
“대공자님.”
지친 기색이 역력한 와중에서도, 검존의 눈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 었다.
“명령은 전부 전했습니다.”
가부좌를 틀고, 내기를 다스리는 연소현의 얼굴 또한 핏기 하나 없 이 창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고맙군.”
“아닙니다.”
낙양검가 최정예 중 하나인 기관 의 본관을 단 두 사람이 쓸어버린 참이었다.
타락한 이들이 기관 총인원의 절 반 정도에 불과한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기관에는 민감한 정보가 너무 많으니까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발로 꿋 꿋이 서 있던 노인은.
연소현이 손을 들어 의자를 가리 키고 나서야, 그 자리에 앉아서 말 을 이었다.
“최초 돌입은. 애초에 저와 대공 자님. 두 사람밖에 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최고운영회의를 가장 가까운 곳 에서 보필하는 기관에는.
외부로 빠져나갔을 때, 평지풍파 (平地風波)를 일으킬 정보들이 산 재해 있었다.
난리 통을 틈타, 무슨 일이 생길 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 었다.
“봉인은 원로원의 원로들이 직접 나와 파기하고, 정보를 모두 회수할 때까지 엄중히 지켜질 것입니다.”
“•••명은 눈치챈 것 같던가?”
“수습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 한 것이라고는 해 두었지만….”
연소현의 물음에 검존이 쓴웃음 을 지었다.
“명이라는 그 청년. 영리하고 일 을 잘하는 친구더군요.”
돌려서 한 답변이지만, 연소현에 게 그 의미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그런가.”
연소현의 대답에 담긴 감정은 복 잡했다.
그 심정을 익히 알고 있는, 검존
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잃은 신뢰를 되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요.”
기관은 신뢰를 잃었다.
정보를 포함한 핵심적인 부분에 대한 수습은, 그리고 앞으로 있을 기관의 대대적인 재개편은.
그들 스스로에게 온전히 맡길 수 가 없었다.
지금, 상황을 수습하고 있는 이 들은 타락에 저항한 이들이지만.
그들 중에도, 속으로는 다른 생 각을 품고 있는 이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수하들을 믿어야 하지만, 완 전히 믿을 수는 없는 것이. 일인자 (—人者)의 숙명입니다.”
그 사실을 검존, 최고운영회의의 의장과 연소현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과거.
태상가주, 연소현의 아버지가 가 장 가까이하던 이들0].
연소현이 물려받아야 했을 지위 를 찬탈하여 만들어진 것이, 지금 의 최고운영회의였으니까.
“…그리고 그 고충은 명, 그 친 구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습
니다.”
“그건 다행이군.”
“그러고 보니….”
연소현의 대답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낀 검존이, 대화를 전환했 다.
“돌아오는 길에 확인해 보니, 상 황실에 핵심 인사 몇몇이 보이질 않더군요.”
기관장과 부기관장 이외에도.
연소현의 기습 공격으로 인해서, 기절하거나 중상을 입은 이들의 모 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자들은 지금 어디에-?”
“놈들은 지금.”
연소현의 눈가에 귀화가 한 줄기 스쳐 지나갔다.
“심문받는 중이다.”
본래의 목소리에 겹쳐 들려오는 금속이 끓는 기이한 소음.
“…그랬군요.”
불가해의 존재.
암천존자의 일면이 드러난 것은 아주 잠시에 불과했지만.
그 기이함과 기괴함은 도저히 익 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 없는 성질
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심문을 위 해 비밀리에 딴 곳에 수감된 것으 로 처리해 두겠습니다.”
의장은 그 이상 캐묻는 짓 따위 는 하지 않았다.
“이제, 소식이 오길 기다리는-.”
인기척.
의장은 입을 다물었고, 연소현은 문을 바라보았다.
“소식이 왔군.”
연소현의 허락을 받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집사부장이었다.
기관을 대신해서, 임시로 최고운 영회의의 눈과 귀가 되어 주고 있 는 그가 직접 찾아온 것이다.
“주군을 뵙습니다.”
호칭은 대공자님이 아닌, 주군.
하지만 검존은 아무런 내색도 하 지 않았고, 집사부장 또한 검존을 신경 쓰지 않았다.
“보고하라.”
“작전은 성공입니다.”
집사부장이 결론부터 보고하고는 입가에 가늘게 미소를 띠었다.
“최고운영회의의 눈과 귀를 가려
야 했던 기관이 빠지자, 본가 내의 상층부에서 일대 혼란이 시작되었 습니다.”
검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자님의 노림수가 통했군.’’
“예.”
집사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보 고를 이어 나갔다.
“기관이 빠졌지만, 이 일에 관여 된 이들은 어떻게든 최고운영회의 의 개입을 막아야 하니까요.”
기관이 빠지자, 이 일에 개입된 이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지금 최고운영회의가 개입하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된다.
적어도 대공자의 세력을 무력화 하고, 개혁 세력의 기반을 날려 버 려야 하는 것이다.
“그들을 색적(索敵)하는 작업은? 확실하게 되어 가고 있나?”
검존의 물음에는 다급함마저 들 어 있었다.
“물론입니다.”
그것이 작전명, 색적.
연소현이 집사부장에게 맡긴 임 무의 핵심이었으니.
“낙양 중앙 행정부의 최상위 관 료부터 연씨 혈족들에, 장로들, 그 리고 각 단체의 수장들까지.”
일시적이긴 하지만 최고운영회의 의 권력을 등에 업은 집사부장은.
안이고 밖이고 할 것 없이 낙양 검가의 모든 것을 낱낱이 들여다보 고 있었다.
“심지어, 과거 검가전장에서 있 었던 대규모 횡령과 관계없던 이들 까지도. 이제 수면 위로 나오기 시 작했습니다.”
낙양검가, 정보부처.
“연락을 돌려! 협조를 부탁하란 말이다!”
국장급 책임자로 보이는 누군가 가 수하들에게 고함을 치고 있었다.
“어떻게든 최고운영회의가 움직 이는 것을 막아야 한다! 위로 올라 가는 모든 정보를 차단해!”
처음 이공자 측은.
그들에게 단지, 침묵해 줄 것만 을 요구했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기관이 무력화된 시점에서, 그들 은 더 이상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 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반드시, 빌어먹을 이공자 측이 대공자를 쓸어버릴 때까진 버텨야 한단 말이다!”
“•••이 仁)국장님!”
그의 측근 하나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상황이 급한 것은 알지만. 이렇
게 급히 움직이시면, 우리가 노출 될 수 있습니다.”
한 명이 용기를 내자, 다른 * 도 이어서 직언(直言)을 했다.
“이미, 황도에서 이공자에게 정 보를 공유한 것만으로도 추후에 문 제가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전면적인 개입은-.”
“닥쳐!”
이국장이 육두문자를 입에 담았 다.
“그딴 건, 나도 알고 있단 말이 다!”
평소엔 침착하기로 소문이 난 이
국장이지만, 지금은 침착할 수 없 었다.
“여기서 그걸 나보다 잘 아는 사 람이 있나?! 대안이 있냔 말이다!”
그의 측근들이 입을 다물었다.
누구 하나 뾰족한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이젠, 어쩔 수가 없어.”
이국장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공자 측이 일을 너무 거하게 벌였단 말이다.”
그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이 를 갈았다.
“이젠, 모 아니면 도. 사느냐, 죽 느냐. 그 둘 중의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풍경은.
최고운영회의의 개입을 막으려는 시도는, 낙양검가와 낙양을 구별하 지 않고.
현재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이국장의 개입을 증명할
수 있는 명령서네.]
이국장의 측근 중 하나가 집사부 의 인원과 은밀히 접선 중이었다.
[훌륭하군. 당장 보고하겠소.]
집사부의 인원이 손을 내밀자, 이국장의 측근이 명령서를 뒤로 빼 다.
[다시 한번, 확언해 주게.]
그의 얼굴에는 초조함, 그리고 상관을 배신한다는 죄책감.
살아남아이: 한다는 집념이 있었 다.
[이 명령서를 넘기면, 나는 확실
히 살아날 수 있는 것이겠지?]
집사부 인원의 입가에 히죽하고 미소가 걸렸다.
[물론이오.]
낙양 곳곳에서 자신의 생존을 담 보로 실책을 저지른 상관을 팔아넘 기는 이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잘하고 있군.”
“과찬이십니다.”
연소현의 짧은 치하에, 집사부장 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저는 그저 주군의 명에 따라, 도구가 되어 집행만을 할 뿐.”
이공자 측이 무력 동원이라는 극 단적인 방법을 쓸 것이라는 예측도.
그 과정에서 많은 권력자들에게 침묵의 공조를 받을 것도.
기습적으로 기관을 정리해 버림 에 따라서, 그들이 직접 움직여 모 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게 한 것도.
“모든 것은 주군의 깊은 안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그럼, 이제 변수는….”
검존이 창을 열고, 멀리 낙양 방 향을 내다보았다.
“내부의 적들을 충분히 색적해 낼 때까지, 저들이 버틸 수만 있으 면 좋겠군요.”
검존의 시선이 닿는 곳은, 저 멀 리 죄악계곡이 위치한 곳이었다.
워낙에 까마득한 거리라, 검존의 안력으로도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 지만.
보지 않아도, 결사적으로 버티는 연소현의 병력과.
듣지 않아도, 죽어 가는 이들의 비명과 병장기가 교차하는 소음이 들려오는 둣했다.
“대공자님의 병력이 밀리기 시작 하면, 즉각 개입을 시작해야겠지요.”
색적 작전.
검가 내외에 숨어 있는 진짜 적 들을 구별해 내는 작전이 얼마나 크게 성공할지는, 죄악계곡이 얼마 나 버티느냐에 달려 있었다.
“아군 병력이 대공자님 없이, 얼 마나 더 버틸 수 있겠습니까?”
한 줄기 남은 내공을 순환시켜, 어떻게든 제암진천경의 마기를 억 누르던 연소현이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겠냐고?”
자신이 직접 개입할 수 없는 상 황에서도, 연소현의 미소는 여유롭 기만 했다.
“언제쯤 승리할 수 있는지를 물 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