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76화 (276/350)

제1편 영겁(永幼)

기관 본영, 앞마당.

연소현 측.

임시 현장 본부.

“감시하던 비밀 통로에서부터 탈 출을 시도하던 이들을 사로잡았습 니다…!”

“사 번 별동대로부터 교전 결과 보고가…!”

임시 현장 본부는 정신없이 돌아 가고 있었다.

타락하지 않은 기관무사들은 사 방으로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 고.

주변은 그들의 목소리와 그들의 중갑이 자아낸 소음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바쁘게 돌아가는 풍경과 는 정반대로, 한쪽 구석에서 벽에 느긋하게 기대앉은 중년인이 있었 다.

이 바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도 주변인들이 그에게 눈치를 주지

않는 것은.

그가 누군지, 모두가 너무도 똑 똑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탈명귀검 (奪命鬼劍).

“흐암.”

늘어지는 듯한 자세도 모자라 하 품까지도 하는 그의 모습에.

결국, 기관의 지휘무사 명이 다 가와 입을 열었다.

“•••탈명귀검 선배님께서는 임시 긴 하지만 특임대의 지휘관이 아닙 니까?”

“잘하더군.”

영문을 알 수 없는 탈명귀검의 딴소리에 명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 다.

“ 예‘?”

“아까부터 자네가 하는 것을 지 켜보고 있었는데, 잘하고 있더군. 현장직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 도던데?”

기관의 지휘무사 명.

연소현에게 기관의 타락을 알린 장본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습니까? 평소라면 영광으 로 여겼겠지만.”

지휘무사 명은 자신의 가면을 벗 어 들었다.

삼십 대로 보이는 젊은이의 얼굴 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은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제 형제들이, 저의 조직이 저지른 일을.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수습하 려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그는 씁쓸한 어조로 말을 이었 다.

“•••다행히 적들의 기습에서 대피 했던 이들도 합류하고 있고, 투항 자들도 늘고 있어서 어떻게든 수습 은 되고 있습니다만.”

탈명귀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 였다.

“그렇군.”

그 무거운 중갑을 입고 입에서는 단내를 흘리면서도 사방으로 뛰어 다니는 기관무사들의 마음이 이해 되었다.

“훌륭한 책임감이야.”

그런 탈명귀검을 향해, 지휘무사 명이 재차 물었다.

“그러는 탈명귀검 선배님께선-.”

“그놈의 ‘님’ 자 좀 빼라니까.”

“탈명귀검 선배는 이러고 계셔도

되는 겁니까?”

탈명귀검이 귀찮다는 듯이 고개 를 내저었다.

“전부, 각 조의 조장들이 알아서 잘하고 있잖아. 뭔가 문제라도 생 겼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탈명귀검 선배가 지휘관-.”

“그저 다들 책임자 자리는 질색 이라, 내가 완장을 찬 것뿐이야.”

탈명귀검이 툴툴거리듯 말했다.

“나도 귀찮은 직책은 딱 질색이 라고.”

그 말에 지휘무사 명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탈명귀검은 아예 귀찮다는 듯이 둥을 돌려 길게 누웠다.

“특임대에는 온갖 직책을 맡아 보고, 온갖 난장판을 뚫어 본 놈들 이 쌓일 정도로 득실거린다. 괜히 완장 찼다고 내가 설치면, 오히려 현장에 방해만 된다.”

귀찮다는 태도와는 달리, 탈명귀 검의 말은 설명이라도 해 주듯 조 곤조곤했다.

“적재적소(適材適所). 책임자는

책임자답게. 나는 제자리만 잘 지 키다가, 요청이 들어오면 재빨리 요청만 들어주면 돼.”

“아…!”

지휘무사 명은 자신도 모르게 감 탄했다.

탈명귀검의 행동이 단박에 납득 되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지휘무사님, 보고입니다!”

그때 기관무사 하나가 급히 뛰어 들어왔다.

“본영 안쪽에서 들려오던 소음이 그쳤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지휘무사 명의 눈썹이 꿈틀거렸 다.

“•••알겠다. 감시를 계속하도록.”

무사가 다시 뛰쳐나간 이후, 명 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외부 감시조가 소음을 더 이상 듣지 못한다는 것은….”

지휘무사 명의 무거운 어조와는 다르게, 탈명귀검의 가벼운 목소리 가 그 말을 받았다.

“청각으로 감시 가능한 지역에서 의 전투는 전부 끝났다는 말이지.”

탈명귀검이 다시 한차례 하품을

하고 말을 이었다.

“이제, 완전히 안쪽으로 들어간 모양이군.”

“안쪽이라면, 남은 것은 본영의 상황실....”

지휘무사 명이 떨리는 시선을 들 어 기관 본영의 본관 건물을 바라 보았다.

마치 요새와도 같은 형상으로 지 어진 기관 본영은 평소엔 든든하게 만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 풍경이 역으로 너무도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지원을 보내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지원?”

피식, 하고 웃는 탈명귀검에게 지휘무사 명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

“대공자님께서 직접 돌입하셨다 고 말씀해 주셨지 않습니까?”

명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 다.

“그분의 무위에 대한 소문은 저 도 들어 보았고, 심지어 그 ‘검존’ 께서도 함께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검존 이라 해도, 이제는 나이가 너무 많 았고.

아무리 대단한 무위를 가졌다는 대공자라 해도, 아직 나이가 너무 어렸다.

“저뿐만 아니라, 기관의 무사 모 두가 걱정을-.”

“푸홉…!”

거기까지 듣던 탈명귀검이 참지 못하고 웃음보를 터트렸다.

“푸하하하하핫!”

“선배…?”

탈명귀검의 대폭소에.

지휘무사 명뿐만 아니라, 사방에 서 의아한 시선이 쏟아졌지만.

“푸히히히히…!”

탈명귀검은 너무 웃다가, 아예 뒤로 넘어가 바닥에 떨어져서도 웃 음을 멈추질 못하고 있었다.

기관 본영 본관, 상황실.

끈적끈적한 침묵이 공간을 지배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상황실에 남아 있는 이 들은 모두, 기관의 핵심 인원이라 할 만한 지위를 지닌 이들이었지만.

전원이 합(合)이라도 맞춘 것처 럼,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가 없 었다.

초조한 눈빛들이 시선을 마주칠

용기도 없어, 허공을 헤매고.

입을 열었다가 닫는 이들로 인 해, 침묵은 더욱더 무거워져 갔다.

“제기랄!”

쾅!

그 분위기를 참다못해, 부기관장 이 탁자에 주먹을 내리치며 외쳤다.

“대체, 보고는 언제 들어오는 것 이냔 말이다?!”

그는 시뻴게진 얼굴로 불을 토하 듯 소리쳤다.

“전투 소음이 끊어진 지가 언젠 데…! 막은 건가? 적들이 물러난

것이야?!”

그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쳤 다.

“적은 많아 봐야, 겨우 두 명이 라고 하지 않았나?! 왜 방어선을 확인하러 간 척후조에게선 아직도 소식이 없-!”

“지금-!”

척후조와의 연락을 담당하던 기 관의 무사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척후조로부터 보고 전음이 들어 오고 있습니다!”

전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 었다.

그 시선들에는 일말의 희망이 가 늘게 매달려 있었다.

보고받는 전음이 길어지며, 시시 각각 거무죽죽해지는 기관무사의 얼굴에.

부기관장의 인내심이 끊어졌다.

“뭐라고 하는지, 말을 좀-!”

“방어선 정찰 결과….”

전음을 받던 기관무사의 입술이 떨리며, 겨우 목소리를 자아냈다.

“거동 불가능할 정도의 중상자 다수와 사망자만을 발견….”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새 어 나왔다.

“전 충의 방어선 붕괴를 확인. 사실상 방어선을 지키던 무사들은 전부 궤멸.”

보고를 전하던 기관의 무사가 자 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적으로 보이는 두 명을 확인.”

기관의 무사가 자신의 얼굴을 감 싸 쥐었다.

“•••척후조는 그 보고를 마지막으 로, 전음이 끊겼습니다.”

하나둘씩.

상황실의 인원들이 고개를 떨궜 다.

“아, 아니. 말도 안 되는….”

부기관장이 얼빠진 얼굴로 고개 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 다.”

그는 지금의 상황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 두 명에게, 모든 방어선이 뚫리다니!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어!”

그 많은 기관의 무사들.

벽을 넘은 사령무사들.

“•••그들이 전부, 단 두 사람에게 궤멸당했다고?”

의식이 없이 시체처럼 누워만 있 는 태상가주라도 돌아왔단 말인가?

그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내저어, 이해할 수 없는 현 실을 부정했다.

“거, 거짓말이야! 거짓 보고다! 그, 그러니까 다시 척후조를 조직 해라! 다시 한번 확인을-!”

그의 횡설수설한 말을 끊은 것은

이를 악문 기관장의 목소리였다.

“•••왔다!”

왔다니?

부기관장이 멍청한 얼굴로 기관 장을 돌아본 순간.

콰앙-!

벽력탄이라도 터진 둣한 굉음과 함께, 상황실의 두꺼운 철문이 박 살 났다.

“……r

콰직-!

찢어져 사방으로 튕기는 철문 조 각들에, 출입구에서 가까이 서 있

던 이들은 비명도 남기지 못했다.

“쿨럭, 쿨럭…!”

폐쇄된 공간에서의 폭발에 가까 운 현상 이후, 상황실을 가득 채운 먼지에 시야가 사라졌다.

“끄아아...!”

“누, 누가 도, 도움을…!”

내공이 없거나 적은 이들이 사방 에서 기침을 하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상황실에 가득 찼지만.

찌잉-.

폭발 이후, 고막이 찢어지는 고 통과 함께, 찾아온 이명에.

그 기침 소리들과 비명들을 제대 로 들을 수 있는 이들도 거의 없었 다.

철퍽-, 철퍽-.

산산조각 났던 철문 조각에 몸이 찢긴 이들의 시신 조각이 천장과 벽면에 붙었다가 바닥으로 떨어지 고.

저벅-, 저벅-.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먼지로 가려진 시야, 저 너머에 서 저벅거리며 다가오는 두 사람의 발걸음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기관장의 경고로, 간신히 내력을 끌어 올리는 일에 성공했던 부기관 장은 핑핑 도는 머리를 쥐고 자리 에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놀라운 위력입니다.”

“굉뢰통천포(蟲雷通天砲)라고 하 는 무공일세.”

그의 귓가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씨 가문의 전대 가주가 쓰던 것을 가져와, 이제 완전히 개량을 끝냈다네.”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혹 시….”

“평소처럼 사람을 통해, 그대의 무공학관에도 비급을 전해 주겠네.”

“감사합니다.”

굉뢰통천포?

양씨 가문의 전대 가주?

저들은 대체 무슨 대화를 하는 것인가.

아직도 몸을 휘청이며,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부기관장 앞에.

자욱한 먼지를 뚫고,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소년, 한 명은 노인.

하지만 소년의 뒤에서 그를 보필 하는 듯한 노인의 모습은.

조손(祖孫) 관계가 아니라, 명백 한 상하 관계로 보였다.

“이자는?”

“부기관장입니다.”

소년, 대공자 연소현의 피가 가 득 튄 얼굴이 부기관장의 시야에서 슬쩍 흔들린 순간.

퍼 억.

마치, 복부(腹部)가 그대로 터져

나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충 격파가 터지고.

“케엑…!”

부기관장이 위액을 토하며 새우 처럼 등허리를 구부리는 순간.

콰앙.

기척도, 준비 동작도 없이 이어 진 두 번째 권(쏘)에 부기관장의 턱뼈가 산산이 바스러졌다.

털썩.

단, 두 번의 권격에 부기관장은 눈을 까뒤집은 채 의식을 잃고 나 자빠졌다.

“굉뢰통천포는 매우 유연한 무공 으로, 이렇게 암경의 형태로도 사 용 가능한 것이 특징이지.”

“호오.”

검존은 그렇게 감탄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소현이 부기관장을 두들겨 패 며, 자욱하던 먼지는 상당수 걷혔 고.

무력화된 이들은 여전히 바닥에 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제 볼일은 이제 끝난 둣하군 요.”

주위를 둘러보는 검존은 기관장 과도 시선이 마주쳤지만.

그는 마치 기관장은 보이지 않는 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그럼.”

노인의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고, 한계를 넘어 지친 기색 이 가득했지만.

그 발걸음만은 가벼웠다.

“저는 이만 자리를 비켜 드리겠 습니다. 대공자님.”

노인의 발걸음 소리가 점차 멀어 지자, 기관장은 마른침을 삼키고

앉은 자세를 억지로 바로잡았다.

“•••이게 전부, 대공자 당신 책임 이오.”

당당하게 말을 하려 했지만, 어 째서 나오는 목소리는 이리도 잠겼 는지.

“당신이 이 검가를 망친 것이오! 만일, 당신이 그때 칩거만 하지 않 았어도-!”

“할 말은 그것뿐인가?”

그에게로 저벅저벅 다가오는 연 소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 다.

“나는 그대에게 들어야 할 것이

많은데 말이지.”

그때.

“쿨럭…!”

갑작스러운 기관장의 각혈(略血).

시커멓게 죽은 피를 토하는 그의 모습에 연소현의 눈썹이 꿈틀거렸 다.

“•••음독(飮毒) 했나?”

기관장은 입에서 검은 피를 쏟으 면서도, 부릅뜬 눈으로 연소현을 쏘아보았다.

“나는 뉘우치지도, 용서를 빌지 도 않는다…!”

“그런가?”

음독의 영향인가.

걷잡을 수 없는 한기에 몸이 으 슬으슬 떨려 오고.

주변이 너무 어두웠다.

“내게서 뭘 원해서 직접 여기까 지 왔는지는 몰라도…!”

기관장답게.

정확히는 몰라도, 연소현이 직접 수고를 들인 이유가 있다는 정도는 눈치를 채고 있었다.

“이제 당신은 절대 아무것도 들 을 수 없을 것이야…!”

“그렇게 생각하나?”

침침해져 오는 눈에 비친 대공자 의 미소가.

그 미소를 그리는 입이 지나치게 길게 찢어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를렸다.”

어째서인지 대공자의 목소리가 금속이 끓는 듯한 것처럼 들렸고.

“죽음은 도피처가 되지 못하리 니.”

쩌억, 하고 벌린 대공자의 입가 에는 마치 상어의 그것처럼 날카로 운 이빨이 떼!택했다.

“네놈에게는 앞으로 진실올 고백 하고 죄를 빌, 영겁(永幼)의 시간이 주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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