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75화 (275/350)

제25편 진전(進展)

낙양검가 원로원.

노인들의 마을.

이공자의 어머니, 낙양검가의 구양 태상부인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원로원에 방문하는 만큼, 고르고 고른 수준급 호위들을 데려왔건만.

“크, 크흠.”

그녀의 호위들은 평범한 경비대원 차림을 한 특임대원들과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질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진정 그녀를 분노하게 하는 것은, 달리 있었다.

“원로원주께서는 부인의 요청을 거절하셨소. 돌아가시오.”

축객령.

허름한 농부 차림을 한 노인이 그렇게 대충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녀를 부르는 명칭도, 하오체도, 귀찮다는 태도도.

무엇 하나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태도였지만.

아무리, 구양 태상부인이라 한들 그 노인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본가의 원로시여. 이 요청은 단순히 나, 구양 태상부인의 개인적인 용무가 아닙니다.”

허름한 차림새에 볕에 시커멓게 탄 볼품없는 노인이 대낙양검가의 원로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원로원이 본가 내부의 일에 직접 관여를 하다니, 이는 본가의 지엄한 가법을 무시하는 처사란 말입니다.”

“또, 가법 이야기요?”

원로가 지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법에 의하면 본가의 위기 상황에 원로원의 개입을 허가하고 있다고 내가 말해 주었지 않소?”

“아니요, 아닙니다.”

구양 태상부인은, 평소 주변을 벌벌 떨게 했던 특유의 위엄을 떨치며 목소리를 돋우었다.

“그것은 본가의 위기 상황이라는 애매한 조문(條文)을 입맛대로 해석한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녀는 강한 어조로 밀어붙였다.

“어찌, 본가 전체의 모범이 되어야 할 원로원이. 그토록 교묘하게 법조문을 편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까?”

사실, 지금 원로원의 행위가.

편의주의적 해석이라는 점에서는 원로원이 아니라 누구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 점을 물고 늘어졌다.

“기관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있다는 것만으로, 그것을 본가의 위기상황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됐소.”

가차 없이 몰아붙이는 것처럼 보였던 구양 태상부인의 말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내뱉은 원로의 말에 끊기고 말았다.

“우리, 원로원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오.”

“이익...!"

위엄 따위는 통하지도 않았다.

논리도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이 망할 늙은이가…!’

구양 태상부인은 즉시, 접근 방식을 바꾸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본가의 장로들도 들끓고 있어요.”

장로원은 낙양검가의 주축 중 하나.

그들의 움직임은 원로원도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리라.

“장로원에서도 지금 이 건에 대해서 긴급회의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당장 이 일이 더 심각해지기전에-.”

“하지만 말만 준비할 뿐이지. 긴급회의가 실제로 지금 개회하지는 않고 있잖소?”

“아, 아닙니다. 당장이라도-.”

원로는 순간 더듬거리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피식하고 웃었다.

“긴급회의가 열리면, 당장 '저거'에 대한 논의부터 해야 할 텐데?”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산 너머 낙양 시내 방향을 가리켰다.

쿵-.

쿠쿠쿠쿠쿵.

멀지만, 분명 산 너머에서도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는 포격음.

노인은 그 은은하게 들려오는 포격음을 배경으로 말했다.

“애초에, 긴급회의가 열리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고 있는 것은. 그대들, 이공자 측이 아니었소?”

그 말에 구양 태상부인은 입을 다물수밖에 없었다.

"......."

긴급회의가 열리면, 장로들은 어떤 식으로든 죄악계곡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달에 대해 논의를 할 수밖에 없었으니.

긴급회의가 열릴 일은 없었다.

“아무리 그대들과 삼공자 측 그리고 연씨 혈족들까지도 장로원에 압력을 넣고있다고 하지만, 장로라는 놈들이, 쯧쯧.”

원로는 못 볼 꼴을 본다는 눈으로 혀를 찼다.

“낙양 한가운데서 해적 놈들이 포격을 하고 있는데 침묵을 지키면서 시간을 끌어?”

작은 마을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은 원로가, 지금 낙양검가의 정계가 돌아가는 꼴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칩거를 끝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대공자가 그토록 무서웠던 것인가? 아니면.”

노인의 목소리가 나지막해졌다.

“대공자가 불러올 개혁의 바람이 두려운 것인가.”

“…그건!”

구양 태상부인이 뭐라, 항변을 하려 했지만.

“됐소. 이만 돌아가시오.”

여지도 주지 않고, 몸을 돌려 마을 안쪽으로 돌아가는 원로에게 구양 태상부인이 악을 쓰듯 외쳤다.

“이 일을, 원로들은 절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녀의 외침을 차단하기라도 하듯이, 마을의 정문이 굳게 닫혔다.

“그러든가.”

그렇게 구양 태상부인을 가볍게 대한 그였지만, 마을의 회관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그리 가볍지만은 않았다.

“왜 그리 얼굴이 어두운 것이야?”

그런 그에게 짓궂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주인 노릇을 못해 정신이 나간 어린 계집아이에게 한 방 먹기라도 했나?”

원로는 자신에게 그렇게 농을 던진 이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촌장(村長)….”

이 마을의 촌장이자, 대낙양검가 원로원의 원로원주이기도 한 노파(老婆)가 그곳에 있었다.

그는 그런 노파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번 우리의 무력적 개입은, 구렁이 담 넘듯. 그렇게 은근슬쩍 넘어가기는 힘들 것 같소.”

그의 목소리에는 한숨이 섞여 있었다.

“다들 추후에라도 우리의 행사에 대해 단단히 책임을 물을 생각으로 벼르고 있는 모양인 듯하오.”

“전부, 권력에 눈이 먼 자들이야. 언제는 그런 자들이 다른 이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노파가 가볍게 웃어넘겼다.

“촌장, 이건 그렇게 웃고 말 일이 아니지 않소. 원로원의 존립(存立)에까지 영향이 갈지도 모른단말이오…!”

과장은 조금 섞였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원로원을 걱정하는 마음은 그만큼 컸다.

“그러려면, 그러라지.”

“촌장…!”

원로원주가 자신의 지팡이를 바닥에 찍었다.

“당장의 눈앞만 보지 말고 멀리보게.”

“무엇을 말이오…?”

차르릉 하고 노파의 지팡이에 매달린 장식들이 흔들리며, 청명한 소리를 냈다.

“우리의 집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낙양 시내에서는 웬 해적놈들이 난리를 치고있고, 집 안에서는 가솔의 탈을 쓴 도적놈들이 집안의 장자를 잡아먹으려 난리를 치고있지.”

눈먼 노파는 현 상황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렇지. 그래서 가법에 억지 해석까지 우리가 동원해 가며 나선것이 아니오? 가문의 이런 끔찍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상황을 해결하다니.”

원로의 말에 노파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근 십 년간. 그것이 가능했던 순간이 있긴 있었나?”

"......!"

그녀의 말에 원로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노파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렸다.

“그래, 처음이지. 처음이야.”

그녀는 보이지 않는 눈을들어 멀리 밖을 바라보았다.

“본가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돈을 벌어들이고 있고, 덩치도 힘도 커졌지만. 그만큼 더 크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지.”

전전 대 가주 때 현역이었던 노파가 노인에게 물었다.

“지난 십 년 동안,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가?”

마찬가지로 전전 대 가주를 섬겼 던 원로가 고개를 저었다.

“…없었지요.”

“그렇지. 본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은, 그동안 어떻게든 본가가 무너져 내리는 것만을 막고 있었지.”

점점 높아만 지는 낙양검가라는 누각이 넘어지는 것을 맨손으로 막고 있던 나날들.

“하지만, 오늘은…!”

이제,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한 원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원로가 확신이 생긴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오늘은 그 오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 첫 번째 기회니까!”

“그렇지."

원로원주가 유쾌하게 웃었다.

“유일하게 믿을 수 있고, 가장 뛰어난 후계자가 돌아왔어. 그리고 우리는 손을 쓰지도 못하던 문제에 그가 검을 빼들었지.”

그녀의 멀어 버린 눈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지만.

마치, 그녀는 머지않은 미래에 새로 태어날 낙양검가의 모습을 선명하게 바라보고 있는것만 같았다.

“책임? 원로원의 존립? 그런건 아무것도 아니라네. 만일 필요하다면, 이 늙은이의 목이라도 내어주지.”

그녀는 한없이 가벼워진 마음으로 웃고 있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너무도 마음이 가볍다네.”

“그렇구려.”

어느새 원로의 표정도 그녀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노파가 농처럼 물었다.

“지금, 이 순간 이 늙은이가 가장 부러워하는 것이 누군지 아는가?”

“하…!”

원로가 피식 웃으며 그 농에 답했다.

“이해할 것 같소. 이제, 나 또한. 검존, 그 녀석이 부러워지고 있으니.”

* * *

기관 본영.

'검이 가볍구나…!’

최고운영회의의 의장이 아니라, 검존의 이름으로 자리에 선 그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검이 가볍게 느껴진 것이 얼마 만이던가?’

사령무사가 쏟아 내는 검가의 비전 검법은 가공할 정도였지만.

검존의 검은, 자기 자신도 신기할 정도로 쉬이 상대의 검법을 와해해 버리고 있었다.

'몸이 가볍구나!’

그 많은 기관의 무사들을 상대하고, 이어서 사령무사라는 고수들과 전투하는 중이었음에도.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만같구나.'

검존의 몸은, 자기 자신도 기이할 정도로 가뿐하게 상대의 검로(劍路)를 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이 이상한 상황의 이유를 깨닫고 있었다.

'이것은 틀림없이, 마음이 가볍기 때문이로구나…!’

검존의 발끝이 기관무사의 시신을 딛고, 춤추듯 움직였으며.

검존의 검끝이 사령무사의 검을쥐지 않은 팔을 길게 찢었다.

“크헉…!”

연소현의 소림오권(少林五拳)에 머리통을 얻어맞은 사령무사의 몸이 순간 흔들렸고.

[검존.]

연소현의 짧은 부름에 검존의 검이 응답했다.

검가비전, 비영검(飛影劍).

검존의 마음처럼 가벼운 검이 공기의 벽을 가르며, 그림자도 남기지 않았다.

“컥?!”

연소현이 상대하던 사령무사는 그 일격에 팔을 잃었지만.

“흡!”

검존이 상대하던 사령무사는 검존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검존은 그 검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대공자님]

그리고 그 믿음처럼.

“큭…!”

그 사령무사의 일검은 검존에게 닿지도 않았다.

자신이 상대하던 사령무사를 검존에게 맡긴 연소현이 그대로 뛰쳐들어와 그의 검을 튕겨 냈던 것이다.

“좋은 권법(拳法)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꺼낸 감탄사에 연소현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대야말로 훌륭한 검술이오.”

연소현은 이어지는 상대의 연격을 유려한 보법으로 봉쇄하며 말을이었다.

“펄펄 날아다니는 것을 보니, 힘들다는 것이 엄살이었던 것 같구려.”

“듣고 보니, 그랬던 것도 같구려.”

그 말에 검존이 껄껄 웃었다.

“…이익!”

한가로이 잡담까지 주고받는 그들의 모습에, 사령무사가 잇소리를 냈다.

“우릴 얕보는 것이냐?!”

어찌, 아무리 검존과 연소현이라 한들.

벽을 넘은 고수인 사령무사 셋을 두고 얕볼수가 있겠는가.

그들을 얕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너무도 가벼운 것이 그 이유였다.

그것은 믿을 수 있는 아군인 연소현의 듬직함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저, 더 이상 괴롭지 않게 된 것뿐이다.”

검존의 대답에 사령무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개소리를…?!”

검존은 사령무사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만약, 대공자께서 칩거를 끝내지 않으셨다면….'

그래서 대공자가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면 어땠을까.

자신의 손으로, 검가가 어렵게키운 무사가 스러지는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것은 너무도 두려웠으리라.'

검가가 무너지지 않게 어떻게든 붙들고서서, 동시에 잃은 전력을 다시 복구하기까지 해야 한다는 것은.

'그것은 너무도 무거운 일이었으리라.'

안 그래도 무거운 자신의 업이 자꾸만 더해져 가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나는 그동안 그 많은 업에 짓눌린 채, 발버둥을 치고 있었구나…!’

새삼스러운 깨달음.

하지만.

그것은 연소현이 없었다면, 결코 벗어나지 못했을 그의 멍에이기도했다.

'이제는 그저, 무너져 가는 것만을 결사적으로 붙들고 막고만 있던 시절은 끝났다!’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 대공자님과 함께.'

검존과 그의 눈빛을 받은 연소현이 동시에 움직였다.

상대를 향해 짓쳐 들어가는 검존의 검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고.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

'검가를 다시 태어나게 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검존이라는 노인은.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틀림없이.

검가는

전진(前進)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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